3. 범주화: 유사성과 연관성 찾기

연상을 통해 재료의 가능성을 두루 살핀 이후에 해야 할 작업은 ‘정리‘다. 정리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쓰면서도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한 적은 드물 것이다. 정리란 정확히 뭘까? - P71

 예를 들어 책꽂이 정리만 해도 저자 이름 가나다순, 책 제목 가나다순, 책 크기순, 구입 연도순, 책등 색깔순, 만족도 별점순 등 선택할 수 있는 분류 기준이 많다. 이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개별 책의 배치 순서를 정할수 있다. 에디터가 하는 일도 비슷하다. - P71

손 안에 든 재료를 특정 기준을 세워 정리하고, 그로부터도출할 수 있는 의미나 시사점을 찾아내기 위해 습관처럼 질문한다.

"이걸 뭐랑 묶지?"
"묶어서 어떤 이름을 붙이지?" - P72

(전략), 마케팅에는 얼마나 도움이 되나 등등 다양한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질문을 마구 펼친 다음분류해서 상위개념화한다. "이걸 뭐랑 뭐지?", "묶어서 어떤 이름을 붙이지?" 이것이 목차 혹은 개요가 되는 셈이다. - P74

범주화는 우리 뇌가 정보와 세상을 인지하는 핵심 프로세스다. 이에 대해 촘촘하게 설명한 『사고의 본질』이라는 책을 매우 즐겁게 읽었는데, 책의 공동 저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와 에마뉘엘 상데는 유사성을 인식하고 라벨을 붙여 머릿속 서랍에 정리하는 범주화가 지성의 연료이자 불길, 원천이자 결과물이라고설명한다.  - P75

범주는 여러 현상을 통해 그것을 머릿속에 구축한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 가령 대상과 행동 그리고 상황의 보이지 않는 측면을 ‘보이게‘
만든다. 범주화는 명확한 관점을 제시하고, 숨겨진 항목이나 속성을 감지하게 하고, 미래의 사건을 예측하게 하며, 행동의 결과를 예견하게 하여 자신이 속한 상황을 이해한다는 느낌을 준다. - P75

다른 놀이도 해보자. 이번에도 역시 괄호를 채우면 된다.

ㅇ 내가 만약 과자라면 나는 ()일 것이다.
ㅇ 내가 만약 자동차라면 나는 () 브랜드일 것이다.
ㅇ 내가 만약 동물이라면 나는 ()일 것이다.


이 질문은 기업 브랜드 컨설팅을 할 때 실제로 종종 사용하는 문장이다. ‘우리 브랜드가 과자 브랜드라면 무엇에 가장 가까울까?‘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자사 브랜드의 본질을 규정하는 자기만의 설명이 먼저 나와야 한다. - P77

편집은 무질서한 재료를 분류하고 조합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에디터는 정보 사이의 거리와 관계를 다각도에서 파악한뒤 순서를 부여해 매력적인 스토리 혹은 메시지로 빚어내는 일을 한다. - P78

IBM의 프로덕트 디자이너 베티 퀸 Betty Quinn이 인스타그램에서 진행하는 사이드 프로젝트 ‘Art History Fashion‘ 사례를 보자.
디자인과 미술사학을 전공한 그는 2017년부터 미술 작품과 패션 사진을 매칭하는 게시물을 올린다.  - P78

 시각 문화사의 창고에 쌓여 있던 재료들이 베티 퀸만의편집을 거친 뒤 동시대 문화계의 의미망 안에서 새로운 지위를얻었다. 유사성을 알아차리고 연결하는 편집의 가치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 P79

반면 숨어 있던 구조적 유사성을 파악하고 새롭게 재해석한 창작 앞에선 보통 이런 감탄사가 터진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을까?" 감탄의 이유가 발상의 독창성에 있다. 예를 들어 기원전 1세기경 로마에서 건축가로 활동한 비트루비우스는 특별한 음향장비 없이 소리가 멀리까지 잘 전달되는 원형 극장을 설계했다.  - P81

 유추는 ‘같은 종류의 것 또는 비슷한 것에 기초하여 다른 사물을 미루어 추측하는 일‘이다. 이것은 문학가나 과학자들에게만 필요한 사고력이 아니다.
A의 구조를 빌려서 그와 유사하다고 여겨지는 B에 적용하는 능력은 기존의 정보를 새롭게 조합하는 모든 이에게 유의미하다.
친숙함에서 새로움으로 도약하는 강력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 P82

서울시립미술관 《그리드 아일랜드》 전에서 만난 백정기 작가의 <자연사박물관>은 먼저 어마어마한 물성으로 인상 깊게 다가온 작품이다. 물이 담긴 수백 개의 유리병과 유리잔이 선반에차곡차곡 놓여 있는데, 각 선반은 유대류, 소목류 등 하나의 생물 분류 체계를 상징한다.  - P82

이 작품에서 배울 수 있는 에디터적 사고력은 무엇일까? 백정기 작가는 동물(생명체)과 유리병이라는 멀리 떨어진 두 대상사이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구조를 찾았다. 바로 물을 몸에 지니고 산다는 점이었다. - P84

작가가 부여한 메시지/의미

1. 물 자체는 형태가 없고, 컨테이너 형태에 따라 일시적인모양으로 살아간다.
2. 인간, 동물, 미물도 결국 하나의 물을 공유한다. 고로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 P84

현대미술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 이런 식의 사유는 얼핏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A에서 발견한 내용을 B에 적용시킴으로써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인식을 만들어내는 작업은 우리 모두가 매일 밥 먹듯 한다. - P84

블로그 포스팅에 단골로 등장하는 카피부터 우아한 미술관전시 작품, 수억 원의 투자금이 걸린 비즈니스 모델 발굴에 이르기까지, 유사성을 지렛대 삼아 도약하는 아이디어는 어디에나 있다. 제임스 웹 영은 『아이디어 생산법』에서 이렇게 썼다. "오래된요소들을 가지고 새로운 조합을 만드는 능력은 관계를 알아보는 능력에 크게 의존한다." - P87

11. 질문: 좋은 질문 만드는 법

나는 인터뷰라는 독특한 형식의 대화를 사랑한다. 사랑이라는 거대한 단어를 주저 없이 붙일 만큼. 만약 인터뷰가 에디터의 주된 업무가 아니었다면 이 일을 20년이나 하지 못했을 것이다. - P195

학위가 있거나 명성이 높은 사람만이 현인인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언제나 배울 점이 있다. 나를 당황스럽게 하거나 인터뷰가 잘못 흘러간다는 느낌을 주는 인터뷰이조차 다른 주파수를 이용해 내게 지혜를 전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 믿음은 ‘about a father‘ 프로젝트를 하면서 단단해졌다. - P196

이런 취재는 예술가나 명사 인터뷰보다 열 배 정도 긴장된다. 인터뷰이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처음 만난 취재원이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고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순식간에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마음을 열고 자기 이야기를 해줄지, 어떤 맥락으로 대화가 흘러갈지, 그렇게 나눈 대화가원고로 남길 만큼 유의미할지, 아무것도 담보되지 않은 상황으로 뛰어드는 취재인 것이다. - P196

소맷단이 닳은 작업복을 입고, 담배 한 갑 정도를 연달아 피운것 같은 걸걸한 목소리의 60대 어르신이 말했다. ‘쉽고 편리한게 늘 좋은 건 아니야‘ 간결하지만 깊고 아름다운 지혜. 길거리에서 오래 서성이며 차곡차곡 쌓아간 인터뷰가 100명을 향해갈 무렵, 이제는 누구를 만나도 고유한 이야기를 발견하고 언어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고,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배울 점이 있다는 믿음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 P198

직업적으로 질문을 달고 사니 역으로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좋은 질문 만드는 법을 알려주세요." - P198

그때마다 이오덕 선생이글쓰기, 이 좋은 공부에 쓴 아래의 문장을 떠올린다.

글감은 단순한 객관 사물로서 글의 재료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물과 경험 가운데 특별히 글 쓰는 이의 마음에 들어온 그 무엇이다. 쓰는 이의 마음에 특별히 들어왔다는 것은 쓰는 이의 삶 속에서 그 무엇이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말한다.

인터뷰는 일차적으로 인터뷰이의 생각을 옮기는 글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설명하면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벌어진 상호작용을 인터뷰어 관점으로 기록한 글이다.  - P199

초심을 기억하라.
→ 초심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왜요?

시간은 금이다.
→시간은 금이라고 생각하세요? 왜요?

상대방이 전제하고 있는 믿음을 가시화해서 되묻는 것이다. - P200

 이렇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전제부터 질문하면서 검사대에 올린다. 이런 검증 과정 끝에 원래의 전제가 강화될 수도 있다. ‘요모조모 생각해봐도 역시 꿈은 찾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 P201

셋째, 사안을 바라보는 위치와 상황적 맥락을 바꾸는 질문을 즐겨 한다. (중략). 왜냐하면 우리는 개인이지만 동시에 관계의산물이기도 하니까. 상대의 오늘을 만드는 데에 영향을 미친 수많은 사회적 가닥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려고 한다. - P201

넷째, ‘무엇을 했나요?‘보다는 ‘어떻게 했나요?‘를 궁금해하고, ‘어떻게 했나요?‘보다는 ‘왜 했나요?‘를 궁금해한다. 인터뷰는 묻는 자말하는 자, 단둘의 대화다. 인터뷰이의 경험과 생애는 그 누구의 것과도 같지 않다. 하지만 인터뷰 결과를 담은 콘텐츠는 세상으로 나아가 다양한 사람들에게 두루 읽히면서 공감을 얻어야 한다. - P202

반면 ‘왜 했나요?‘라고 물으면 인터뷰이는 감정과 동기를 회고하게 된다. 사회적 조건과 경험은 천차만별일 수 있지만, 인간으로서 느끼는 감정과 동기는 부유하든 가난하든 나이가 많든 적든 별반 다르지 않다. - P202

마지막 다섯째, ‘내가 그였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상상하고 묻는다. 그다음 ‘내가 독자라면 무엇이 궁금할까?‘ 상상하고 묻는다. 취재원과 독자 모두에게로 건너가보는 상상을 하면서 중간에서 둘을 어떻게든 이어주려고 안간힘을 쓴다.  - P203

어쩌면 처음엔 에디터로서 직업적으로 좋은 결과물을 내기위해 훈련한 감정이입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질문이라는 형식으로 타인에게 악수를 청하고, 에고라는 단단한 감옥에서 빠져나오는 경험이 쌓일수록 뾰족하게 긴장하고 살던 인간 최혜진이 천천히 유연해지고 편안해졌다.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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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에잇은 침대에 털썩 누워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못 해먹겠어. 나는 재생 탱크에서 나와서 제대로 쉬지도 못했어. 내몸은 아직 씹는 음식을 한 입도 못 먹은 거 알지?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기 전까지 온종일 음식 생각만 한다고. 이제 남은 배급이 대체 얼마야? 한 사람당 720킬로칼로리쯤 되려나? 이렇게는 못 살아. 절대 못 살아." - P244

에잇은 끙 소리로 답을 대신했다.
"들어 봐. 나는 앞으로 서른여섯 시간 동안 540킬로칼로리로 버텨야 하고 오늘 베르토가 소란을 피우는 통에 저녁 식사를 끝내지도 못했어. 네가 죽을 만큼 힘든 건 알지만 나한테도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니야."
에잇은 한숨을 쉬며 털썩 등을 대고 눕더니 천장에 대고 중얼거렸다. - P245

[Mickey8]: 응, 오늘 밤에 비행 있는 줄 알았는데?
[BlackHornet]: 그랬는데 이젠 아니야. 무슨 이유인지 앞으로 며칠동안 내 근무 시간까지 베르토가 맡게 됐어. 새 공지가 있을 때까지 난자유야 만날까?
[Mickey8]: 당연하지! - P246

"아니, 세븐, 꿈도 꾸지 마. 나한테 이게 필요해서 그래. 정말 필요하다고. 네가 잘 때 목을 조르겠다고 한 건 농담이지만, 이문제를 놓고 싸우려고 들면 진짜 널 죽일지도 몰라."
별것 아닌 말에 가슴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분노가 과하다는 사실을 나도 알았다. - P246

에잇은 족히 5초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입을 달싹거리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잠깐만. 뭐야? 내 말을 섹스가 하고 싶단 뜻으로 알아들었어?"
그 말에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음...... 아니야?"
에잇은 끙 소리를 내고는 일어나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 P247

굶주림에 관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첫 개척지 이름이 에덴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략). 하지만 에덴의 상륙거점 개척지가 실제로 두 번의 시도 만에 건설되었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많다. - P248

그들은 식물이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될 때까지 12년을 버텼다. 통신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읽은 기록 중에서 가장 사실과 가까웠던 추측은 방사능으로 인한 손상이 여러 세대에걸쳐 누적되면서 유기체가 더 이상 번식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돌연변이가 많아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 P249

하지만 어느 쪽이든 매우 치명적일 수있다. 칭시는 천천히 죽어 갔다. 고맙게도 그들은 전혀 희망이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음 개척지 건설 임무에서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모든 과정을 문서로 정리해 두었다. - P249

. 마지막까지 남은 승무원 열두 명이 우주선 엔진을 끄고 속옷만 입은채로 메인 에어 로크 밖으로 몸을 던졌을 때, 에덴까지의 여정은 아직도 4년이나 남아 있었다.
칭시는 아직도 우주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며 진공 상태인 우주를 광속의 약 0.6배 정도로 떠다니고 있을 것이다. 개척민이 될 예정이었던 최후까지 남은 열두명의 시신도 같이 있겠지.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중략). - P250

더 나은 선택지가 없어서 결국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저녁을 먹기에 늦은 시간이라 사람이 많을 것 같지 않았지만, 문으로 들어서니 생각한 것보다 더 한산했다. 뒤쪽 테이블에는 네 명이 감자를 담은 쟁반 두 개를 놓고 앉아 있고, 반대편 구석에는 얼굴만 아는 정도인 생명공학부 남자가 페이스트 스무디로 보이는 음식을 앞에 높고 태블릿에 시선을 고정한 채 혼자 앉아 있었다.  - P251

그 생각을 하다 에잇이 떠올랐다. 침대에 누워 소화액에 간까지 녹아내릴 것 같다며 툴툴거리고 있겠지, 즐거운 시간을 기대하며 내 방으로 올라갔을 나샤에게 나인 척하며 먹을 것을 사달라고 조르고 있겠지.
먹을 것.
먹을 것을 사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
그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 P252

어쩌면 10초도 안 걸릴 수도 있다.
괜찮다. 시간 여유가 있다. 뛸 필요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갈림길에서 방향을 꺾었다. 그러고 나서 벽에 등을기대고 숨을 깊이 들이쉰 뒤 천천히 내뱉었다. 만약 뇌가 제때 돌아가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나샤와 에잇이 카페테리아로 들어와 내가 태블릿을 보고 있는 모습을 봤다면 어땠을까? - P253

생각을 안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제 어디로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방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에잇이 배를 채우자마자 두 사람이 다시 방으로 올라간다고 가정하는 게 안전할 테니. - P253

하지만 나샤가 돌아왔을 때 자기 방에 내가 먼저 도착해 있으면 어리둥절해할 것이고, 대체 내가 자기 방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도 궁금해할 게 뻔했다.
역시 불가능했다.
돔에 공용 공간이 하나 더 있기는 했다. 다행히 거의 항상텅텅 비어 있을 공간이었다. - P254

체력 단련실은 상륙거점 개척지마다 보편적으로 있는 시설은 아니다. 이곳의 체력 단련실은 도덕성과 윤리성을 단련하는데 체력 단련이 중요한 구성 요소라는 예로니모 마샬의 오랜 믿음 덕분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체력 단련실은 돔에서 유일하게 낮이나 밤이나 항상비어 있어서, 예로니모 마샬의 생각이 어떻든 배고픈 이들이제일 하기 싫어하는 활동이 운동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 줄뿐이었다. - P254

 카페테리아로 가는 사람들이나 농업부 교대 시간에 맞춰 출근하는 사람들과 최대한 덜 마주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대여섯 명과 마주쳤고 다들 나를 의심의눈초리로 보는 것만 같았다. 이런 게 피해망상일까? 그럴 수도있다. - P255

방은 체력 단련실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내 방보다 고작 두세 배 정도 넓은 방에 한 줄로 놓인 러닝머신 몇 대, 턱걸이용 철봉 하나, 아령 대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텅 비어 있지 않았다.
러닝머신에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 - P255

우리는 서로를 빤히 보았다. 그녀는 러닝머신을 멈추고 바닥으로 내려와 가슴팍 앞으로 팔짱을 꼈다.
"여기서 뭐 해?" 내가 간신히 한 마디를 뱉었다.
그녀는 눈을 굴리며 말했다. "지금 네가 그 질문을 하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해?"
나는 눈을 감고 맥박이 거의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심호흡했다.  - P256

운동을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는지 땀을 별로 흘리지않았다.
"아, 장난치지 말고. 너 여기서 뭐해? 지금 식량 부족 상태인 건 알지?" 내가 물었다.
"응, 알아" 캣이 말했다.
"그런데?"
캣이 한숨을 쉬었다.  - P257

캣의 표정이 누그러져서 나는 손을 내렸다.
"그래, 이해해 몰랐겠지만 니플하임에서 몽고주름이 있는 여자는 매기 링과 나뿐이야. 네 기분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것 같아." 그녀가 슬쩍 웃더니 제안했다. "이렇게 하자. 네가 나를 신기한 대상 취급 하지 않으면 나도 너를 신기한 대상 취급하지 않을게."
나는 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좋아."
우리는 악수했다. 그녀의 미소가 잠깐 환하게 빛났다가 그녀가 손을 놓는 순간 사라졌다. - P258

그녀는 목이 멘 채 웃음을 터뜨리더니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어느새 웃음은 흐느낌으로 변했다.
"이제 혼자 방을 쓰게 되어서 좋아할 거라 생각했니?"
나는 캣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다가 내가 앉은 러닝머신 쪽으로 다가와 내 옆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았다.  - P259

"이런 말을 한 걸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알다시피 나는 이제 방을 혼자 써."
나는 고개를 돌리고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채 그녀를 보았다. "이제 나를 신기한 대상으로 생각하기로 한 거야?"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거든. 빈 침대 하나를 노숙자에게 빌려주려는 것뿐이야. 하지만 너랑 나샤가 그렇게 개방적인 관계라니 좀 놀랐어. 어제는 전혀 그런 사이로 보이지 않았거든." - P260

16장

. 캣의 침대와 그녀의 전 룸메이트의 침대를나란히 붙여 두었지만, 결국 우리 둘 다 캣의 침대에서 잠이들었다. 캣에게는 습관이겠지만 나는 어쩐지 세상을 떠난 지얼마 안 된 사람의 침대를 마음대로 사용하는 게 무례하다는생각이 들었다.  - P261

"거의 9시야 갈 데 있어?"
좋은 질문이었다. 근무자 명단을 보려고 눈을 깜빡였다. 수경재배 팀으로 가서 반쯤 죽은 줄기들을 살피고 토마토 한두개를 수확할 예정이었다. 일정대로라면 한 시간 전에 도착해야했다. 하지만 결근 알람이 오지 않은 것을 보니 에잇이 이미 내려가서 잎을 솎아내고 산성도를 확인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 P262

"오늘 쉬는 날이야. 너는?" 내가 말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지난 이틀 동안 임무 수행 중에두 번이나 죽을 뻔했어. 보통 이럴 때 경비대에서는 임무를 반나절만 줘. 12시까지는 출근할 필요 없어."
나는 아직 부어 있는 왼쪽 손목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몸을 뒤척여 그녀의 팔 밑에서 빠져나와 일어나 앉았다. - P263

"모르겠어. 쉬는 날을 가져 본 지가 오래돼서 내가 말했다.
또 다른 내가 농업부에서 스포이트로 아기 토마토에 양분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아는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길 바라며돔을 어슬렁거리려고 했지만, 사실 그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캣은 바지를 입고 침대에 다시 앉아 부츠를 신었다. - P263

 나는 착륙 이후로는 더더욱 혼자서 일해 왔다. 내가 영혼 없는 괴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끊임없이 사형 선고를 받는 나와는 왠지 어울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만은 모른 척해 줘서 고마울 따름이었다. - P264

미드가르드의 많은 것들이 그리웠지만 뜨거운 물로 하는 샤워야말로 목록 첫머리에 있었다. 짜증스럽게도 돔 밖에는물이 넘쳐났다. 하지만 돔 안쪽 시스템은 드라카와 완전히 같아서, 여전히 항성 사이 우주 공간에 있을 때처럼 물을 보관하고 있었다.  - P265

 나는 카운터로 가서 오큘러를 스캐너에 가져다 댔다.
삑 소리가 나고 오늘 치 배급량이 내 시야 왼쪽에 표시되었다.
배급이 600킬로칼로리 남았다고 표시되었다. 에잇이 아침을거하게 먹은 모양이었다.
화를 내고 싶었지만 비난할 수 없었다. - P265

 페이스트는 돌아서기도 전에입속에서 사라졌다. 오늘 내 몫은 300킬로칼로리니, 이제 잠들기 전까지 페이스트를 반 컵 정도 더 먹을 수 있다.
"그걸 대체 어떻게 먹는지 모르겠어." 카운터 끝에 있는 배식구에서 음식이 미끄러져 나오는 동안 캣이 말했다.
나는 그녀를 흘긋 보고 한마디 쏘아붙이려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고개를 저었다.
"농업부에 있는 친구들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 P266

그녀는 두 입째 먹으며 대답했다. "뭐, 아문센이 크리퍼 문제로 꽤 화가 나 있어. 교대를 열두 시간 간격으로 하라는데 엄청 힘들 것 같아. 게다가 임무 중에 항상 선형 가속기를 소지하고 있어야 한다는데, 역시 반길 일은 아니지. 낯선 무기이기도 하고, 너무 무거워서 근무 끝날 때쯤 되면 어깨가 빠질 것처럼 아파지니까 좋은 점이 있다면 지난 이틀 동안 일어난 일때문에 돔에서만 머무르게 됐어. 밖을 돌아다니면서 동상 걸릴 일은 없어졌지." - P267

"어쨌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너는 어때? 오늘 뭐 할지 생각해 봤어?" 그녀가 말했다.
"아, 말했잖아. 그냥 쉬는 거지 뭐. 사이클러 페이스트나 빨면서 다음번에는 마샬이 뭐라고 날 협박할지 기다리고 있어. 천국에서의 하루를 즐기는 수밖에."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지막한 웃음도 아니었다. 빙판에 넘어지는 누군가를 보고 터뜨릴 만한 폭소에 가까웠다. - P268

"아니, 다 아니야. 나는 범죄자가 아니야. 만약 그랬다면 미드가르드의 첫 번째 개척지 임무에 내가 낄 수 있었을 거라생각해?"
"익스펜더블로서? 응, 어쩌면 훈련받는 동안 누군가를 징발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그래, 나도 들은 적 있어. 네 말대로라면 네 판단력에 대해 고민을 좀 해 봐야 하는 거 아니냐? 어제 강도 살인을 저지른 성범죄자와 밤을 보낸 거잖아." - P269

그웬의 사무실로 가게 된 이유를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도있었다.
말할 수 있지만 말하지 않기로 했다. 나 좋자고 하는 거짓말도 때로는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알겠어? 내가 이상주의자인가 보지, 유니언 시민으로서 내 몫을 하고 싶었는지도." - P270

캣이 말했다. "내 말은, 이런 곳에서 살고 있으면 죽일 수 없는 몸이 확실히 장점이 많겠다고."
"죽일 수 없는 몸이 아니야. 나는 계속 죽어. 익스펜더블이되는 건 그런 거라고."
"그래도 넌 여기 이렇게 있을 수 있잖아. 하지만 질리언은?"
그 질문에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이 얼굴을 찡그리며 모자란 영양소를 보충하기 위해 담아 온 사이클러 페이스트를한입에 털어 넣는 동안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 P271

"저기, 오늘 밤 근무 일정이 어떻게 돼?"
나는 망설였지만 거짓말할 이유가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일이 없을 텐데, 왜?"
캣은 다시 앞으로 몸을 숙였다가 테이블을 밀며 일어나 쟁반을 집어 들었다. "그래? 오늘 쉬는 날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밤에도 쉬어?" - P272

캣이 사라진 다음 나는 태블릿을 꺼내 개척지 탐사에 참여한 익스펜더블에 대한 기록을 검색했다. 개척지에서 항상 익스펜더블을 활용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된 지는 불과 2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다.  - P272

하지만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나는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당연히 종교적인 반발이 있었다. 끊임없이 죽는 조건으로 감방에 수용된 사람을 풀어 주는 것도 윤리적인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 P273

자료를 다 읽고 나니 거의 12시가 다 되어 있었고 카페테리아는 다시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배는 이미 꺼진 지 오래되어 요동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접시에 음식을 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욱 배가 고파졌다.  - P273

사람을 고민하게 만드는 ‘만일이었다.
만일 내가 오늘 치 배급을 몽땅 써 버릴 경우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무엇일까? 어차피 에잇은 사령부에 가서 불만을 이야기할 수 없는데.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 P274

아직 150킬로칼로리를 사용할 수 있지만 지금 당장 질척한페이스트를 한 잔 더 삼키려니 도저히 내키지 않았다. 그냥 방으로 돌아가 낮잠이나 자며 에너지를 아끼기로 했다. - P274

"근무 중 아니야? 어디 가?"
(중략)
남자는 얼굴을 찌푸렸다. "3분 안에 와 오늘 오후에 토마토에 새로운 파지를 테스트한다고 위험할 수도 있어서 파지를바를 때 네가 있어야 해."
"그럴게. 얼른 갈게." - P275

에잇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즐거운 기색은 전혀 없었다. "곧그렇게 될 것 같은데, 친구, 오늘 아침에 내 몫의 3분의 2를 먹어 치웠는데 지금 내 팔도 뜯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배가 고파." 그러고는 침대로 쓰러졌다. "옆으로 좀 비키지?"
그는 부츠를 벗고 한숨을 쉬며 자리에 누웠다. - P276

에잇은 내가 배에 올려놓은 왼손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손목에 붕대를 꽉 감아 두었지만, 엄지손가락이 시작되는 자리에 아직 보라색 멍이 삐져나와 있었다.
에잇이 감았던 붕대는 책상 의자 등받이에 아무렇게나 걸쳐있었다.
"아, 맞다. 그랬지. 미안"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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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독서가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은 2만 3천여 권입니다. 방송이나 강연 등에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그 책들을다 읽었는가‘입니다. 당연히 다 읽지 못했습니다. - P19

저는 책을 많이 산 사람 중 하나인 동시에 책에 관한 한 많이 실패한 사람일 것입니다. 워낙 많이 샀기 때문에 그만큼실패했던 경우도 많으니까요. 재미있을 것 같아서 산 책이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 P19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듯이 절대적인 독서의 비법은 따로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책을조금 더 많이 관심 있게 살펴보고 골라온 사람으로서, 조금더 많이 읽어본 사람으로서 저만의 방법이 있습니다. - P20

그런데

책을 읽으세요?


‘있어 보이고 싶다는 것은 자신에게 있지 않다‘라는 걸 전제하고 있습니다.
‘있는 것‘이 아니라 ‘있지 않은 것‘을 보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허영이죠. 요즘 식으로 말하면 허세일까요.
저는 지금이 허영조차도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 P21

저 역시 필요할 때마다 구글링을 통해서 제가 알고 있는 것이 틀리지는 않았는지 확인해보기도 하고 필요한 내용을 수집하기도 합니다. 인터넷으로 정보를 얻는 것이 용이하고 빠르다는 점은 이제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런데 빠른 검색 결과로 나온 정보는 잘게 잘라진 것이고 그것을 감싸고 있는 문맥이나 전체적인 체계까지 파악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 P22

인터넷으로 접하는 정보 중 조작되거나 잘못된 것을 일일이 다 거르기는 아주 어렵지요.
게다가 책을 읽는 것이 정보 습득에 오히려 더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 P22

. 말하자면 미처 꿰지 못한 서 말의 구슬들인 거죠. 흔히 인터넷을 ‘정보의 바다‘라고 하는데, 그렇기때문에 내가 원하는 결과를 바로 얻는 것이 오히려 어려울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깊이 있는 내용이 체계적으로담겨 있는 책을 읽는 것이 역설적으로 정보를 얻는 더 빠른방법일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 P23

또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자주 있어보이니까‘라고 농담처럼 답하기도 합니다. (중략)
‘있어 보이고 싶다는 것은 자신에게 ‘있지 않다‘라는 걸전제하고 있습니다. ‘있는 것‘이 아니라 ‘있지 않은 것‘을 보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허영이죠. - P2

오늘날 많은 문화 향유자들의 특징은 허영심이 없다는 게아닐까 생각하고는 합니다. 각자 본인의 취향에 강한 확신을갖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외 다른 것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배타적이기까지 합니다.  - P24


완독해야
하나요?

"책은 꼭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단 책을 손에 잡으면 끝까지 읽어야 한다고, 즉 완독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더군요.
책을 읽기로 마음먹기까지도 힘이 들었는데, 그 책을 다 읽지 않으면 안 된다고 스스로 다잡고 있다면, 얼마나 벅차겠어요. - P39

 독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재미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재미있어야 책을 읽을 수 있어요. ‘목적 독서‘는 한계가분명합니다. 사람은 사실 그렇게 의지가 강하지 않아서 목적만을 위해 행동할 수 없어요. - P39

막상 『위대한 개츠비』를 조금 읽어보니 재미가 없을 수도있죠. 192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시대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으면 약간 지루할 수도 있습니다. 예민하고 정밀한 묘사 방식에 숨이 좀 막힐 수도 있고요. 그러면 또 다른 책에 눈을 돌리고 집어 들어도 됩니다.  - P40

대부분의 비소설, 논픽션 분야의 책들은 챕터별로 독립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차례를 보고 흥미가 생기는 부분부터 읽으셔도 돼요. 만약 앞부분이 어렵다면, 중간부터 읽으셔도 됩니다. - P41

‘아님 말고‘라는 태도를 가지고 있으면 정말 인생이 행복할 수 있어요. 내가 이것을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면, ‘아님 말고‘라는 태도만 갖게 되면 다른 사람앞에서 당당해질 수도 있을 겁니다. 사실 삶에서는 절박한 상황 때문에 ‘아님 말고‘를 외치기 어려울 때도 많습니다. - P41

 아무리 좋은 책이라고 99명이 권해도 한 명인 내가 거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건 내가 책에서 흥미를 느껴야 한다는 거죠.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은 없습니다. 반드시 끝까지 다 읽어야 하는 책은 없습니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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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후기

단행본 간행에 부쳐

본서는 ‘명탐정‘ 노리즈키 린타로가 등장하는 시리즈의 네번째작품입니다. 처음 제 소설을 접한 분이라면, 그리고 이 소설이 마음에 들었다면 시리즈를 거슬러 올라가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또한 이후로 기술할 내용은 기존 독자를 염두에 두었기에 혹시그렇지 않은 독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린다면 미리 용서를 구합니다. - P371

자, 이번 작품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신구 내외를 불문하고수많은 선행 작품에 많은 빚을 졌습니다. 탐색을 즐기는 독자의재미를 빼앗지 않기 위해 여기서 인용의 출처를 소상히 밝히지는 않겠지만, 이번에는 특히나 스타일의 혼용 경향이 현저합니다. - P372

이 인용들은 모두 제 마음을 흔든 작품들과 그 작가에 대한 오마주이자 러브레터입니다.
부디 독자들에게 이런 마음이 전해지기를그런데 다른 관점에서 봤을 때, 제 소설이 정말 매번 그렇게 다른가요? - P372

좀처럼 책을 내지 않는 제게 다양한 위로의 말씀을 건네주신 인내심 강한 독자 여러분. 정말로 오래 기다리게 해드렸습니다. 그럼 다음 모험에서 또 만나뵙겠습니다.

1991년 3월 - P373

문고판 간행에 부쳐

이 장편을 쓴 건 스물여섯 살 때로, 1990년부터 이듬해 초에 걸친 시기였다. 세월이란 참으로 빨라서 벌써 오 년 전의 일이다.
작업 마무리에 돌입했을 즈음 걸프전이 발발했던 기억이 난다. - P373

당초에는 논노벨 시리즈"로 3의비극까지 쓴 뒤 『1의 비극부터 순서대로 문고판으로 내려고했는데, 편집부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원고를 주지 않자 결국 더는 미루지 못하게 됐다는 게 실상에 가깝다.
그러고보니 최근 3의 비극은 언제 나오느냐는 질문을 자주받는데,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 P374

WHAT WILL BE, WILL BE? - P374

『요리코를 위해』의 구성이 니컬러스 블레이크를 밑바탕에 깐것처럼 이 작품의 설정, 특히 인물의 배치와 스토리 전개는 포스트 황금기의 본격미스터리 걸작을 인용, 재해석함으로써 이런 형태로 만들어졌다. 다만 여기서 참조한 작품을 거명하면 거의 스포일러가 돼버리기에 아직 읽지 않은 독자를 위해 숨겨두기로 한다 - P375

여담이지만 나는 최근 리처드 보커의 『상원의원』을 읽었을때 역시 이 작가를 떠올렸다. 주인공의 상황과 스토리의 반전 방식이 대단히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 P375

글이 늘어지지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짚어두고 싶다. 이 소설이 유괴 사건에 휘말린 아버지의 일인칭으로 기술된 결정적인 이유는 단적으로 말해서 탐정 노리즈키 린타로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건 당연히도『요리코를 위해』 때문이다. (중략) 하여 ‘또 하나의 니시무라 유지의 수기‘가 소설의 전체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중략) 그리고 이 작품에 이어지는 『또다시 붉은 악몽』이란 소설의 골자는 한없이 산란하는 이야기 속에서 다시 한번 탐정의 시점을 되찾고자 하는 작가의 고된 편력의 여행에 다름 아니다.

1996년 6월
노리즈키 린타로 - P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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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누군가 誰か

내년 봄 컬렉션에는 거짓말처럼 아름다운 저 흰색을 살려보면 어떨까. 그녀는 그런 생각을 더듬다가 문득 거짓말이라는단어를 입 밖에 내어 중얼거렸다.
"거짓말... 그래, 전화한 그 남자는 거짓말을 한 거야."
실내가 따뜻해서 창유리에는 흐릿하게 김이 서렸다.  - P110

 내가 그날 밤 우연히 미오리 레이코의 맨션 근처에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맨션 뒤쪽에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서 비상계단을 급하게 뛰어 내려오는 나를 봤다고 말했다. 마치 내가 레이코를 살해했다고 생각하는 듯한 말투였다. - P110

오늘 아침 전화한 남자는 거짓말을 했다. 사체를 발견한 충격으로 내가 얼굴이 창백해지고 벌벌 떨었는지는 모르지만, 비상계단을 급하게 뛰어 내려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발소리를 안내려고 평소보다 천천히 내려왔다. 한 단 한 단 천천히.. 애초에나는 키가 작아서 항상 굽이 10센티미터나 되는 하이힐을 신는다. 그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 P111

메마르고 개성 없는 남자의 목소리에 어떻게 대답했는지,
또렷이 기억난다.
"내가 지금 일 때문에 도쿄를 떠나야 해요. 모레 돌아온 뒤에, 그래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모레 밤 11시에 이 번호로 다시전화하세요. 어떤 얘기든 받아줄 테니까. 그때까지 그날 밤 나를 봤다는 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세요." - P111

 오래전에 내가 ‘악마와 천사, 어느 쪽에 입을 맞춰도 어울린다‘라고 극찬했던 그녀의 입술은 이제 어떤 말도 하지 못한다. 게다가 내가 그날 밤 레이코의 집에서 문제의 사진과 필름을 훔쳐 온 것은 영원히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질 일이 없다. - P112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현재 하는 디자인 일을 반절넘게 맡고 있는 야마가미 아키라가 오늘 패션쇼의 매상을 들고온 것이다. 작년부터 지방에서 하는 쇼는 모두 야마가미에게 넘겼는데 최근 들어 젊은 디자이너들의 활약은 눈부신 데가 있었다. 실은 한 세대 전까지는 디자이너라고 하면 오트 쿠튀르로 유명인사나 재벌가 사모님들에게 특권층이라는 허영심을 채워주는 의상을 만들어주는 존재였다. - P113

그녀도 언제까지나 이십 년 경력과 견직물의 프라이드에만 기댈 수는 없었다. (중략) 심지어 가구며 주방 용품과 침구에 자신의 이름을 찍어 판매망을 넓히기에 혈안이었다. 냉장고며 이불에까지 ‘기미코 마가키‘라는 이름을 넣는 것은 자부심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후략) - P113

이곳 삿포로까지 일부러 찾아온 효과가 있었는지 쇼 행사장은 젊은 여성들로 가득 차고, 프레타포르테라고 해도 보통 기성복보다 몇 배는 비싼 옷들이 쇼가 끝나고 삼십 분 만에 완판되었다. 게다가 목표했던 물량의 두 배 가까운 추가 주문도 들어왔다. - P114

그녀는 곧바로 수표를 손끝으로 헤아리며 액수를 계산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손가락은 어느새 세월의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그렇다, 오 년 전에는 그 여자애도 단지 이런 수표 한 장에 지나지 않았다... - P115

아주 매력적인 표정을 가졌지만, 그게 단지 두 종류뿐이라는 것이다. 화려함의 어딘가에 그늘진 뜨거움을함께 짜 넣은 듯한 신비한 시선, 얼음이 불타오르는 기적마저 믿게 할 듯한 시선뿐이었다.
"그래, 모델이야. 모델로서는 완벽한 표정이지."
그녀는 수화기에 대고 저도 모르게 그렇게 부르짖었다.
실제로 만나보니 예상보다 키가 작았지만 아름다움은 사진보다 훨씬 더해서 얼굴의 화려함이 자그마한 몸매를 커버해주었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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