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결함이 드러나면 언제나 사람들은 부모를 비난해왔다. 18세기에 나온 ‘상상주의(imaginationism)‘ 이론은 어머니의 마음속에 감춰진 음란한 욕망 때문에 아이가 기형으로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20세기에는 어머니가 고압적이고 아버지가 수동적일 때 동성애 성향이 생겨나고, 조현병(정신분열증)은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부모의 무의식적 소망 때문에 발생한다고 했다. - P8

범죄가 부모 탓이라고 생각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심한 학대와 방치를 겪었을 때 취약한 사람이 비정상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 취약한 아이들이 부모의 돌봄을 잘 받지 못했을 때에 약물 남용에 빠지거나 폭력 조직에 들어가거나 가정 폭력, 절도 등을 저지를 수 있다. 어릴 때 잔인한 취급을 받은 아이들은 애착장애를 흔히 보인다. - P9

둘째로, 범죄가 부모 탓이라고 믿고 싶은 더욱 강력한 이유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 집에서는 아이에게 그런 나쁜 짓을 하지않으니 이런 재앙을 겪을 위험이 없다고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10

수클리볼드가 말하기를 자신은 콜럼바인 이전에는 교외에 사는 평범한 엄마였다고 한다. 그때는 몰랐던 사실이지만, 수 클리볼드는 비극적 사건 이후에 극단적 절망 속에서 지혜를 끌어낼 힘을 찾을 수 있었다. - P10

처음에는 클리볼드 부부가 자기 자식과 연관 지어지기를 거부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부모가 자식이 저지른 행동을 깊이 속죄하면서도 자식에 대해 변함없는 사랑을 유지하는 일이, 자식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임을 나도 알 것 같다.  - P11

다른 어떤 범죄보다도 큰 충격을 주는 범죄가 두 가지 있다. 아이들이 희생자인 범죄와 아이들이 가해자인 범죄다. 첫 번째 경우에우리는 순진한 아이들이 희생자라는 사실을 슬퍼한다. 두 번째 경우에는 아이들이 순진무구하다고 착각했던 것을 슬퍼한다.  - P12

살인자를 속속들이 알기란 불가능하다. 우리 사회는 원인이 무엇인지 누구를 원망하면 좋을지 찾으려고 한다. 희생자 가족들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감춰진 해답‘을 내놓으라고 줄기차게 요구했다. 하지만 에릭과 딜런의 부모들은 자식들의 계획을 몰랐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만약 알았다면 당연히 막으려고 하지 않았겠는가. - P13

 장폴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악은 현상이 아니다." 또 "악의 원인을 안다고 물리칠 수 없다"고 했다.
덴버 인근 지역에서는 사르트르를 많이 읽지 않는 모양이다.
에릭 해리스는 살해 성향 반사회적인격장애였던 것으로 보이고,
딜런 클리볼드는 자살 성향 우울증 환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 P13

수 클리볼드는 아들의 죽음이 사실 자살이었다는 점에 몰두한다.
자살을 깊이 연구한 칼 메닝거는 "죽이고 싶은 욕구, 죽임을 당하고싶은 욕구, 죽고 싶은 욕구" 세 가지가 합해져야 자살이 일어난다고 했다. - P14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대부분의범죄가 정신병과 무관하고 대부분의 정신질환자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콜럼바인 사건을 정신질환의 결과물로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사람들은 범죄를 저지르면 문제를겪기 때문에, 혹은 도덕적 기준에 어긋나기 때문에 범죄 충동을 억누른다.  - P15

이 책이 훌륭한 점은 딜런의 행동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 클리볼드는 이 일을 집단 괴롭힘이나 학교, 아들의 건강 상태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쉽게 설명할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수 클리볼드의 최종적인 결심이 드러난다. 클리볼드는 ‘악‘과 ‘병‘ 사이의 확정할 수 없는 경계를 명료하게 밝히려고 애쓰지 않는다. - P16

처음 만났을 때, 수가 1999년 4월 20일 콜럼바인고등학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았던 그 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리틀턴의 모든 엄마들이 아이가 안전하기를 기도하고 있을 때 나는 우리 아이가 남을 더 해치기 전에 죽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했어요." - P17

부모는 어린 아이들이 들고 오는 사소한 문제들을 해결해주며 기쁨을 느낀다. 그러다가 아이에게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는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하면 안타까운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누구나 겪는 이런 실망감이 이 책에는 엄청나게 확대된 규모로 담겨 있다. - P19

 수 클리볼드는 희생자가 된 것에 대해 결코 불평하지 않지만 수의 글을 읽다 보면 욥을떠올리게 된다. 욥은 "우리가 하느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반문하며,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라고 탄식한다. - P20

1

충격

1999년 4월 20일 오후 12시 5분.
나는 덴버 시내에 있는 내 사무실에서 장애 대학생 장학금 관련회의에 참석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책상 위 전화기에 메시지가 와 있다는 빨간 불빛이 깜박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혹시라도 회의가 취소되었다는 메시지일지 몰라 확인해보았다.
그런데 남편 톰의 긴장한 듯 거칠고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수전, 긴급상황이야! 빨리 전화해!"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목소리 톤으로 보아 우리 아이들한테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 P30

톰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딜런의 절친인 네이트가 몇 분 전에 집에서 일하던 톰에게 전화를 걸어 "덜런 집에 있어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애들이 당연히 학교에 있을 시간에 이런 전화가 온 것도 놀랄 일이었는데, 네이트가 전화한 이유를 들으니 최악의 악몽이 실현되는 듯했다. 딜런이 다니는 콜럼바인고등학교에서총을 든 남자들이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고 있다는 것이었다. - P31

톰은 떨리는 목소리로, 네이트 전화를 끊고 나서 딜런의 트렌치코트를 찾느라 온 집안을 다 뒤졌다고 말했다. 말이 안 되지만 코트를 찾을 수만 있으면 딜런이 무사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코트를 찾지 못했고 톰은 제정신을 잃고 있었다.
"지금 집으로 갈게." 내가 말했다. 공포로 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끊는단 말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 P32

내 차에 올라타자 머리가 빙빙 돌았다. 라디오를 켤 엄두는 나지않았다. 사고를 안 내고 차를 몰기만 해도 다행이었다. 우리 집까지40킬로미터 남짓 달리는 동안 머릿속에는 이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딜런이 다치면 어쩌지.‘
아까 들은 파편적 정보를 계속 머릿속에서 굴렸다. 그럴 때마다 두려움으로 가슴이 조였다. 코트가 다른 데 있을 수도 있지. - P32

운전하면서 나는 소리를 내서 혼잣말을 하며 주체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분석적인 성격이라 스스로를 이런 말로 달래려고 했다. 아직 충분한 정보가 없어. 콜럼바인고등학교는 학생이 2000명이 넘는 엄청 큰 학교야.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네이트가 딜런을 못 찾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딜런이 다쳤거나 죽었다는 건 아니니까. 톰이 공황상태라고 해서 나까지 그렇게 되지는 말아야 해. - P33

한 가지는 확실했다. 딜런이 총을 갖고 있을 리는 없었다. 톰과 나는 총기에 대해 확고하게 반대하는 입장이고 콜로라도 주에서 총기를 숨겨 지니고 다니기 쉽게 법을 개정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다른주로 이사 가려는 생각까지 했다. - P34

그날 아침, 4월 20일 아침, 동이 트기 전에 내 시계 알람이 울렸다. 나는 출근 준비를 하면서 시계를 봤다. 딜런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싫어하는 걸 알기 때문에 아침 6시 15분 볼링 수업을 듣겠다고했을 때 톰도 나도 말렸었다. 하지만 딜런이 고집했다. 재미있을 거라고. 볼링도 좋아하고 친구들하고 같이 신청한다고. - P36

그런데 4월 20일 아침에는 내가 아직 옷 입고 준비하는 중에 덜런이 쿵쿵거리며 계단을 내려와 안방 앞을 지나 현관으로 가는 소리가 들렸다. 깨우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일찍 일어나서 준비를 마친게 뜻밖이었다. 후다닥 내려오는 품새가 빨리 나가려고 서두르는 것같았다. 조금 더 자도 늦지 않을 시간이었는데도. - P36

얼마 전에도 딜런이 힘든 상태라는 느낌을 받은 일이 있었다. 이틀 전인 일요일에 톰이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요즘 딜런 목소리 좀 이상하지 않아? 평소보다 좀 날카롭고 새된 것 같아." 톰은 엄지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으로 자기 성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딜런은 긴장하면 목소리가 높아져. 요새 뭔가 신경 쓰는 게 있나 봐." - P37

톰은 자리에 누운 채로 나를 안심시켜주었다. "오늘 딜런이 집에 오면 바로 이야기할게." 톰은 집에서 일하기 때문에 딜런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보통 둘이 함께 신문 스포츠면을 보고 간식을 먹곤 했다.
나는 마음을 놓고 평상시처럼 출근 준비를 했다. 내가 퇴근하고 왔을 때에는 톰이 딜런한테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본 후이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 P38

변호사가 건 전화였다. 그전까지 나는 딜런이 위험한 상황일지 모른다는 것, 다쳤거나 아니면뭔가 아주 어리석은 일을 해서 곤란한 지경에 처했을지도 모른다는가능성 때문에 떨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톰은 딜런이 변호사가 필요한 일을 저질렀을 가능성까지 고려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 P38

. 딜런은 착한아이고, 십대 남자아이들은 아주 훌륭한 아이라도 엄청나게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르곤 하지 않느냐고 했다. 하지만 전적이 있기 때문에 사소한 말썽 한 번만 부려도-예를 들어 학교 난간에 면도 크림을 발라놓는다거나-중죄로 취급되어 실형을 살 수 있다는 경고를 들었다. 그래서 톰은 딜런이 말썽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는 암시를 듣자마자 유명 변호사에게 연락을 취해놓은 것이었다. - P39

서로 상충하는 정보들이 있어 아직 모든 게 확실하지는 않지만, 콜럼바인고등학교에서 총격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지방검사실에서 게리 로조에게 총기 소지자 가운데 한 명이 딜런으로 보인다고했다. 그래서 경찰이 우리 집으로 출동했다는 것이다.
전화를 끊은 뒤에 우리는 충격과 공포로 멍한 상태로 마주 보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게 사실일 리가 없었다. 그런데 사실이었다. - P40

그렇지만 우리가들은 말을 도무지 머리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톰이 학교 안으로 들어가야겠다고 말했다.
내가 소리쳤다. "안 돼! 미쳤어? 그러다 죽으면!"
톰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나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게 뭐?"
우리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동안 우리 주위를 빙빙 돌던 정신없는 혼란이 순간 딱 멈추었다. - P40

지금까지 살면서 좋은 일이 있을 때나 나쁜 일이 있을 때나 내가 가장 먼저 연락하는사람이 언니였다. 언제나 언니가 나를 챙기고 보살펴주었다.
언니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나마 붙들고 있던 평정마저도 무너져내려 울음이 터져나왔다. "학교에 끔찍한 일이 있어 딜런이 누구를다치게 했는지 딜런이 다쳤는지 모르겠어. 딜런이 거기 있대" 언니가 무슨 말을 해도 내 울음을 그치게 할 수는 없었다. - P41

경찰이 왔다. (중략). 그런데 화창한 날씨가 내 뺨을 후려갈기는 것 같았다. "뭘 찾는 거죠? 뭘 원하는 거죠?" 나는 계속 물었다. "우리가 도울 일이라도 있나요?" 마침내 경관 한 사람이 폭발물이 있는지 우리 집과 세입자 집을 수색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폭발물에 대한 이야기는 그때 처음 들었다. 경찰도 그 이상은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 P42

초현실적인 상황이었다. 나는 매우 또렷하게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우리는 몇 시간 동안 겁에 질린 짐승처럼 집 앞을 서성였다. 바이런이 그때는 담배를 피울 때라, 뭐라고 항의하지도 못하고 줄담배만 줄창 피우는 모습이 보였다. - P43

나는 주디를 보고 놀랐다. 딜런과 브룩스가 초등학교 1, 2학년 때 친하다가 고등학교에 오면서 다시 만났는데, 둘이 아주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다. 애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주디를 만난 일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 P44

우리 ‘햇살, 착한 아이, 늘 내가 좋은 엄마라고 느끼게 만들어주던 아이. 딜런이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다치게했다는 게 사실이라면, 대체 딜런의 삶 어디에서 그게 나온 걸까?
마침내 담당형사가 우리를 한 명씩 따로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톰과 나는 기꺼이 협조하고 싶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라도 하려고 했다. - P45

나는 딜런에게 옛날에 가지고 놀던 BB탄 총을 찾아보자고 했다.
딜런은 "엄마!" 하는 듯한 표정으로 웃으며 눈을 흘렸다. "전혀 다른거거든요." 딜런이 말했다. 나는 확고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왜 이필요한지 모르겠다. 아빠나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잖아. 곧 열여덟 살이 될 테니 정말 갖고 싶으면 네가 직접 구하렴. 하지만 내가 총을 사주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 P46

형사는 이런 것도 물었다. 딜런이 폭발물에 관심을 보였나? 나는 폭죽 이야기를 하는 줄 알고 이렇게 대답했다. 딜런이 좋아해요. 여름방학에 폭죽 판매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급료 대신 폭죽을 받은 적도 있다.(콜로라도에서는 폭죽 판매가 합법이다.) 그래서 집에 폭죽이 많은데, 딜런이 안전하게 차고 고무통 안에 보관해놓았다. - P47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최악의 상황일 수도 있으니 마음단단히 잡고 들으세요. 집에 경찰이 와 있어요. 경찰은 딜런이 관련되어 있을 수 있다고 해요." 이모가 말이 안 된다고 반박하시길래 방금 한 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몇 시간 전에만 해도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이 벌써 비참한 새로운 현실로 굳어지고 있었다. 안과 검진대에 앉았을 때 의사가 렌즈 도수를 높여갈수록 흐릿하던 형체가 점차 글자나 숫자로 바뀌는 것처럼, 엄청난 공포가 조금씩 내 초점 범위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P50

나중에 딜런 친구들도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당시에 비슷한 방식으로 설명해보려 했었다고 나에게 말했다. 누구도 딜런이 자발적으로 그랬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딜런이 실제로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는지, 마음속의 분노와 소외감, 절망의 깊이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이후 몇 달이 흐르기 전에는 아무도 몰랐다. - P51

리틀턴의 모든 엄마들이 그랬겠지만 나도 아들이 안전하길 빌고있었다. 그런데 뉴스에서 스물다섯 명이 죽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나는 다른 기도를 했다. 딜런이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하거나 죽이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면, 멈춰야 했다. 엄마로서 가장 힘든 기도였지만, 그래도 그 순간 내가 바랄 수 있는 최대의 자비는 내 아들의안전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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