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연구자로 학문을 파지 않은 이유가 있네. 뻔한 이론에 주석까지 달아야 돼. 주석을 많이 안 달면 논문 통과가 안 되거든 학문세계에서는 달린 주석이 줄줄이 새까맣게 돼야 논문 대접을 받아. - P42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셨군요." "못 참아. 지루해서. 책도 마찬가지네. 내 책이라고 다르지 않아. 모든 책을 다 의무적으로 서문부터 결론까지 읽을 필요는 없네." - P43
목장에서 소가 풀 뜯는 걸 봐도 여기저기 드문드문 뜯어. 풀난순서대로 가지런히 뜯어먹지 않는다고. 그런데 책을 무조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다? 그 책이 법전인가? 원자 주기율 외울일 있나? 재미없으면 던져버려. 반대로 재미있는 책은 닳도록 읽고 또 읽어. - P43
사람들도 친구 사귈 때, 이 사람 저 사람 두루 사귀잖아. 오랜 친구라고 그 사람의 풀스토리를 다 알겠나? 공유한 시절만 아는거지. 평생 함께 산 아내도 모르는데(웃음). 한 권의 책을 다 읽어도모르는 거야. - P43
"그럼 뭐지요? 논문의 정체성은?" "발견이지. 이미 있는 것을 찾아낸 것. discover cover를 벗기는거야. 재미난 것은 아메리카 대륙 찾아낼 때까지 ‘발견‘이라는 말조차 없었다는 거네. 디스커버는 포르투갈어에서 왔어. (후략) - P44
(전략) 개성, originality가 인정받은 것도 19세기 이후 낭만주의가 생기면서부터였네. 그전까지만 해도 오리지널리티는 나쁜 뜻이었어. 보편적인 것을 위반했거든." - P44
인터뷰가 뭔가? inter. 사이에서 보는 거야. 우리말로 대담이라고도 번역하는데, 대담은 대립이라는 뜻이야. 대결하는 거지. 그런네 말 그대로 서로 과시하고 떠보고 찌르면 거기서 무슨 진실한 말이 나오겠나. 위장술밖에 더 나오겠어? - P44
"나는 곧 죽을 거라네. 그것도 오래 지나지 않아. 그러니 지금 할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쏟아놓을 참이야. 하지만 내 말은 듣는 귀가필요하네. 왜냐하면 나는 은유와 비유로 말할 참이거든." - P45
라스트 혹은 엔드리스
선생이 일평생 맺은 인연들이 많아, 이즈음에 누군가는 이어령의 삶 쪽에, 누군가는 이어령의 죽음 쪽에 발을 딛고 더 나은 영광을 찾으려 했다. 사람들은 벌써 그에 대한 추도문을 쓰기 시작했다. - P48
"내 기분을 말하자면, 나는 시끌벅적한 것은 싫어하지만 모든 일을 아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네. 내 육체가 사라져도 내 말과 생각이 남아 있다면 나는 그만큼 더 오래 사는 셈이지 않겠나." - P49
그러니 나의 이야기를 자네의 문맥 속으로 집어넣게 그러면 헤어져도 함께 있는 것이라네. 그러기 위해 지금부터 자네가 나를 잘몰아주게나. 나만 허허벌판에서 떠들 순 없는 노릇이야. - P50
"이보게. 사람들이 죽을 때는 진실을 얘기할 것 같지? 아니라네. 유언은 다 거짓말이야." 급격한 커브에 놀라 마음이 출렁거렸다. - P51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새록새록 보게 돼. 거짓 유언이 진실로 열매를 맺는 과정을. - P51
그렇다네. 진짜 전하고 싶은 유언은 듣는 사람을 위해서, 듣는사람을 믿지 않기 때문에 거짓말로 한다네. - P51
"아버지라면 성실과 지혜를 유산으로 물려주기 위해 초강수를 둘 수 있죠. 그런데 스승의 유언이라면 다르지 않겠습니까?" "이건 어떤가. 스승이 죽기 전에 가르치던 제자 세 명에게 유언을남겨. ‘나에게 낙타가 몇 마리 있는데 너희들에게 물려주마. 첫째 제자, 너는 수제자이니 1/2을 가져라. 둘째는 열심히 했으니까 1/3을 가져라. 막내는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으니 1/9 을 가져라.‘ 그런데 스승이 떠나고 보니 낙타가 열일곱 마리야. (후략) - P52
"한 마리 허수를 넣어야 계산이 되는군요." "그렇지. 그게 수학의 신비고 유언의 신비라네. 그냥 가르쳐주면 안 풀어. 못 풀어. 나눌 수 없는 열일곱 마리를 준 후, 나머지 한 마리의 퍼즐은 남은 자들이 더해서 풀게 한 거지. 쉽게는 못 풀어 생각을 해야 풀 수 있다네. 스승은 수학이란 무엇인가를 유언을 통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 했어. 수학은 체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개념의 세계라네." - P53
배신할 것을 전제로 진실을 이야기해주는 거야. 라스트 인터뷰는 유언의 기법을 최대한으로 발휘해야 되기 때문에 이러운 인터뷰가 되겠지. 하지만 너무 걱정은 말게나. - P53
"묻는 자로서 저는 어떤 질문을 경계해야 합니까?" - P54
다짜고짜 그러더군. ‘선생님, 문학이란 무엇입니까?" "큰 질문이로군요!" - P54
나는 이런 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 빅 퀘스천bigquestion이지. 문인에게 다짜고짜 ‘문학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사람은 문학을 못 하네. 그런 추상적인 큰 질문은 무모해. - P54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질문이 너무 커. 책 한 권으로도 담을 수없는 큰 것을 내게 물어본다네. 평생 공부하고 써야 할 것을, 나한테 물어본다구. - P55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랬지. 인간은 세 가지 부류가있다네. 개미처럼 땅만 보고 달리는 부류. 거미처럼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사는 부류. - P55
마지막이 꿀벌이네. 개미는 있는 것 먹고, 거미는 얻어걸린 것 먹지만, 꿀벌은 화분으로 꽃가루를 옮기고 스스로의 힘으로 꿀을 만들어. 개미와 거미는 있는 걸 gathering 하지만, 벌은 화분을 transfer하는 거야. 그게 창조야. - P56
"큰 질문을 경계하라 하셨으니, 작은 질문을 드리지요. 지금 몸 상태는 어떠신지요?" "그것도 유언의 형식으로 얘기할 수밖에 없어. 내가 암에 걸리기 전에도 나는 바울이 한 말을 제일 좋아했네. ‘나는 매일 죽고 매일 태어난다." - P56
난 여섯 살 때부터 죽음을 느꼈어. 밤에 잘 때 어머니 코에 손을 대보곤 했지. 숨을 쉬나 안 쉬나. 수십년 동안 내가 반복적으로 했던 얘기가 그거네. - P57
존재의 정상이잖아. 뭐든지 절정은 슬픈 거야. 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에도 그런 구절이 있어. 분수는 하늘로 올라가 꿈틀거리다, 정상에서 쏟아져 내린다…… 상승이자 하락인 그 꼭짓점. 그 절정이 정오였어. 정오가 그런 거야. 시인 이상의 「날개」에도 정오의 사이렌이 울려. - P57
"어린 이어령은 그때 무엇을 본 걸까요?" "대낮의 빛, 그걸 느끼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룩 흘렀어. 어린아이들에게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네. 가장 순결한 영혼이어린아이야, 프로이트도 어린아이 놀이에서 그 유명한 ‘포르트-다(있다 없다 놀이)‘를 발견했잖아. (후략) - P58
"‘엄마 있네‘의 확신이 없으면 인생에 바람구멍이 뚫려버리죠. 가장 가까운 타자가 시야에서 사라져도 영영 떠난 게 아니라는 믿음. 그 믿음이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지, 저는 압니다." - P58
의사에게 암 선고를 받은 후 나는 입으로 되뇌어보았네. cancer. cancer. 캔서는 라틴말로 ‘게crab‘란 뜻이야. - P59
수전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암이라는 질병 그 자체보다암에 대한 인간들의 의식이 문제라고 썼지. - P60
그때 내가 수술하지 않겠다고 했지. 물론 방사능 치료도 주치의도 내 생각과 같았어. 놀라운 의사였어. 전이가 됐다는 말은 앞으로 또 전이된다는 얘기거든. 그러니까 나는 거기서 끝내고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한 거라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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