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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의 힘이 한순간에 빠져나갔다. 무릎에 팔을 대고 이마를 묻었다. 눈을 깊게 감자 예원이 떨어지던 순간이 선연히 감은 눈 안에서 재생되었다. - P99

아파트에서 이불을 털다가 떨어지는 일은 가끔 있는 일이라며 이송되어 오는 동안 구급대원이 말했다. 검사 결과, 팔의 찢긴 부위는 꿰매야 할 정도로 상처가 깊었지만 걱정했던 골절은 없었다.  - P99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
선준은 머릿속에 밀려 들어오는 생각을 멈추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불안증과 충동조절장애를 앓고 있는 예원이라 하더라도 그런 짓을 벌였을까. - P100

거기까지 생각한 선준의 움직임이 느닷없이 멈추었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P100

‘로운이!‘
선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로운이 혼자 집에 남아 있을터였다. 아니, 그것조차 확신할 수 없어서 불길했다. - P101

"로운아?"
거실에 불을 켰다. 로운은 거실에 없었다.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고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선우의 방은 닫힌 채였다. - P102

온 방 안은 아이가 접어놓은 종이 개구리로 가득했다. 로운은 그 한가운데에 가만히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찾아온 빛에 눈이 부실 텐데도 움찔거리거나 잔뜩 구긴 얼굴을 들지도않았다.  - P103

그의 발에 종이 개구리가 밀렸다. 그제야 아이는 움직이는 종이 개구리를 따라 시선을 들었다. 그러고는 어느덧 자신의 가까이에 온 선준의 발이 무슨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 P103

그러고도 돌아오지않는 예원을 기다리며 꼼짝 않고 있었던 것이다. 요양원에서 엄마가 오길 기다리던 때처럼 선준은 로운의 앞에 주저앉았다. 그의 무릎에 노란색 개구리가 깔렸다. 로운의 눈이 그쪽으로 향했다.  - P104

선준은 떨리는 두 손으로 로운의 뺨을 감쌌다. 데려온 것도 예원이었고, 아이를 이대로 보낼 수 없다고 했던 것도 예원이었지만, 자신 역시 그것에 동조했다.  - P104

내 아이가 중요해 다른 아이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던 거야.
선준은 로운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로운이 큰 눈을 깜박거리며 그를 보았다. - P104

"이젠 제가 필요 없어요?"
돌연 가슴이 뻐근해졌다.
"그런 거 아니야, 로운아."
선준이 로운의 손을 잡았다. 로운의 손은 놀랄 정도로 차가웠다. - P105

"로운아, 아저씨가 미안해 널 이렇게 혼자 두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아줌마." - P105

"아줌마한테 갈래! 아줌마 아줌마!"
로운이 벌떡 일어서려 했다. 반사적으로 선준은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 힘이 강했는지 몰라도 로운의 작은 발이 미끄러지면서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아니면 스스로 넘어진 걸지도 모른다.
왜 그랬는지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순식간이었다. - P106

그때였다. 아주 찰나의 순간 로운의 몸이 움직임을 멈췄다. 동시에 로운이 손목을 입으로 가져갔다. 작은 입이 어두운 공간을 드러내며 벌어졌다. 자해였다.
"안돼!" - P106

이렇게 되기까지 아이가 겪은 외로움은 그가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외로움을 두사람이 이용하려 했다.
"미안하다 미안해."
"아줌마한테 갈래."
무슨 말을 해도 로운은 같은 말을 반복할 터였다. - P107

일단은 예원의 병원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지금쯤이면 처치가 끝났을 것이다. 아이를 예원과 만나게 해준 다음 내일 아침 일찍 요양원으로 가자. 그렇게 생각하며 선준은 아이를 안고 일어나려 했다. 그것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도.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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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보는 책.


플로르 마르티네스는 어린 시절 멕시코 중북부 산루이포토시주에서 전기도, 물도 들어오지 않는 작은 벽돌집에서 조부모와 함께살았다. 집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있었지만 그들은 가난했다. - P271

그때까지 할머니가 자기 어머니인 줄로만 알았던 플로르는 깜짝 놀랐다. "아니, 아니야." 할머니가 설명하기를, 플로르의 임마는 출산 후 곧바로 다른 소도시에 있는 부잣집에 입주 가정부로 들어가는 바람에 자기가 낳은 아이를 잠깐도 돌보지 못했다고 했다. - P272

험한 삶이었지만 플로르는 낙담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행운이 찾아올 거라고 믿었다. 이러한 낙천적인 성격은 삶의 다음 단계에서 검증되었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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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드라이브 마이 카 : PET 풀슬립 아웃박스 한정판 (2disc) - 스페셜북(36p)+엽서세트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니시지마 히데토시 외 출연 / 아이브엔터테인먼트 / 2022년 11월
평점 :
품절


이걸 예전에 작성했었나, 마지막 연극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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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나는 소크라테스 생각을 많이해. 소크라테스가 말했지.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고 육체가 망가지면 영혼은 감옥에서 벗어난다고. 그런데 나는 그와는 반대로 파고들었어.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말처럼, 내 몸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에 머리카락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았어.  - P62

내가 내 삶은 다 기프트라고 했었지? 내가 산 물건도 따져보면 다 글을 써서 산 거야. 내 물건 중에서 글과 관계없는게 하나도 없어. 글 쓰는 걸 기프트로 받았고, 글을 통해 또 세상으로부터 수많은 선물을 나는 받았네.  - P62

실토하지 않을 수 없군. 글이 안 써지는 거야. 내가 암에 걸리고마지막이 되고, 그러면 ‘메멘토 모리‘를 감각화하는 기가 막힌 글이나올 것이다. ∙∙∙∙∙ 절실한 얘기가 나올 것이다……… 그런데 안 돼.
당황스럽더군. 그래서 기도했지. - P63

왜 용기가 필요한 줄 아나? 인간은 차마 맨정신으로는 자기의 몸뚱이와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는 거야. - P63

내 모든 지식, 모든 생각을 가루로 만들어버리더군. 다 지워버렸어. 암세포는 내 몸의 지우개였어. 내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모든것의 지우개였어. 지우개로 지워놓으면 내가 뭘 쓰나? 공백이야. - P63

그래서 한밤중에 녹음을 해봤어. 아침에 깨어 녹음된 내 목소리를 들어보면 웃기지도않는 얘기야. 고통 속에서 절실하게 얘기했는데, 대낮에 해 뜨고 보면 형편없는 거야. 유행가도 있잖나. 밤에 쓴 편지는 부치지 말라고. - P64

게다가 지금처럼 이어령 선생님에게 작은 지혜라도 얻어가려고 시간을 내달라는 사람들이 줄을 서는데, 매주 화요일 나는 그분을 찾아뵙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니! - P66

지우개로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지. 작고 아름다운 것들, 요즘엔 그런 것들로 공백을 채워나가고 있어. 세 줄로 된 글. 3행시라고나 할까. 가령 사람이 발톱을 깎는 모습을 상상해보게. - P67

요즘엔 아프니까 밤낮 몸무게를 재거든. 시간에도 무게가 있어.
매일 가벼워지거든. 옛날에는 무거워지는 걸 걱정했는데, 지금은 매일 가벼워지는 게 걱정이야. 디지털 저울은 액정에 숫자 나오면끝이지만, 옛날 체중계는 동그랗게 얼굴이 달려 있었어. - P68

만년필 볼펜 같은 거 처음 쓸 때 시험 삼아 아무 글자나 써보잖아. 그때 뭐라고 쓸 것 같나. 시인이고 소설가고 거창한 말 쓸거같지? 삶의 무게, 시간의 절정・・・・・・ 이런 것?
아니야. 볼펜 안 나올 때 써보라고 해봐. 대한민국, 출생 주소, 이런거 써, 사람, 도로, 신발・・・・・・ 이런 일상어 쓴다고. 절대로 심각한 내용 쓰지 않네. 한 방울도 그래. - P69

과거엔 부고가 우편 전보로 날아왔어. 5일 동안 장례를 치렀으니까. 돌아보면 인간이 죽음과 함께 살았던 때가 생명의 시대였네. 길거리에서 거적에 덮인 시체를 보고, 방에서 할아버지가 죽고 장례 치르는 것을 어린 손자가 보았지. - P70

"한때 뉴욕 거리에 시체 안치소가 들어서고 시신을 실은 냉동력이 즐비했습니다. 서늘한 광경이었어요."
"비로소 지구의 인간들이 생명이 뭐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거야 오늘 있던 사람이 내일 없어질 수도 있구나. 요즘은 젊은 사람들, 아니 어린아이들도 생명을 하찮게 말할 때가 많아. 야단 한번쳐도 ‘누가 낳아달랬어? 공연히 낳아서 고생만 시키잖아‘ 쏘아붙이기 일쑤지." - P71

자기 호주머니 속에 덮여 있던 유리그릇 같던 죽음을 발견한 거야. 주머니에 유리그릇 넣고 다녀봐. 깨질 것 같아서 불안하지? 그게 죽음이라네. - P72

"한국인은 함께 먹는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하죠."
"얼마나 강했으면, 수학 시간에 선생님이 ‘사과 다섯 개중 두 개를 먹으면 몇 개가 남지?‘ 했더니 학생이 ‘두 개요!‘ 하더래. 이 녀석아, 다섯 개에서 두개 먹으면 세 개가 남지 왜 두 개냐?‘ 했더니 답변이 걸작이야. ‘에이, 아니에요. 우리 엄마가 먹는 게 남는 거랬어요.‘ 내 입으로 들어가는 게 남는 거라는 거야. 배던 시절의 슬픈 유머지.
(후략) - P73

"한솥밥을 먹는다는 말에는 엄청난 결속력이 있거든. 서양도 마찬가지야. 회사를 컴퍼니company라고 하는데, com 이 함께고 pany가 빵이야. 회사라는 말도 결국 한솥밥을 먹는 공동체라는 뜻이지." - P74

"나는 말일세. 오히려 스마트폰 보며 혼밥하는 장면보다 스마트폰이 양복 주머니에서 툭 불거져 나온 모습에서 직장인들의 ‘고독의 덩어리‘를 봐. 남자들 호주머니를 보게. 스마트폰을 넣어서 축처져 있지. 축 처진 양복 호주머니를 볼때마다, 나는 남자들이 참애잔해, 그 울퉁불퉁한 고독, 숨겨도 숨길 수 없는 고독 때문에 여자들은 핸드백 들고 다녀서 모르지." - P74

선생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짐작했겠지만 나는 이런 작은 이야기들을 좋아한다네." - P75

몇년전 나는 운을 읽는 변호사라는 책을 쓴 일본의 변호사 니시나카 쓰토무 선생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50년간 1만 명의 의뢰인의 삶을 분석한 이 ‘운의 현자‘는 ‘운을 하늘의 사랑과 귀여움을 받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 P78

"궁금합니다. 선생님은 당신이 생각하기에 운 좋은 인생을 사셨나요?"
"내 인생이 운이 좋다 나쁘다. 그런 평가를 해본 적은 없네." - P79

"그렇다면 운을 시험하는 제비뽑기 같은 건 어떤가요?"
"지금까지 팔십 평생 살면서, 심지 뽑아서 하는 일은 한 번도 된 일이 없어. 여럿 중에 무작위로 뽑는 것에 징크스가 있거든. 어릴때는 고무 신발이 귀해서 나무 게다를 신고 다녔어. 시골 학교에서 한 번씩 신발 배급을 하면 개수가 모자라 제비뽑기를 했거든. 그때마다 번번이 헛것을 뽑았지. 그래서 그 부분에서는 단념을 했지. - P79

 그런데 전화가 귀하니까 정부에서 일반 전화를 뽑기를 해서 준 거야. 지붕 하나에 벽으로 두 집을분리하는 ‘나가야 연립주택에 살았는데, 그런 집이라도, 전화 한 대 놓으니 세상 다 가진 것 같았어 - P80

지금은 은수저, 금수저로 서로를 가르지만, 6·25 직후는 다 피난민이었고 평등하게 가난했던 시절이었어. 집 가진 사람도 폭격 맞아 하루아침에 거리에 나앉았고, 고아들이 지천이었네. 운 좋은 놈이 어딨어? 다 불행했지. - P80

"배급 시절의 풍경이죠. 한정된 자원을 나눠갖던 시절의 ‘웃픈‘ 이야기입니다." - P81

있지. 뽑기로 정하면 공평한 것 같아도 재수 없는 사람은 항상 소외되는 거야.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해도 밤낮 지는 사람이 있어.
주사위를 굴려도 매번 재수 없게 건너뛰는 사람이 있다고. 확률상으로만 보면 그럴 리가 없는데도 그래. 카지노에 가도 잃는 사람은꼭 잃어. 속임수가 없더라도 따는 사람이 있고 잃는 사람이 있지. - P81

"운은 하늘의 사랑과 귀여움을 받는 것이라고 했나? 그 생각이 궁극적으로는 운명론이라네."
"운명론이라고요? 결국 인간의 행운과 불운은 예정된 프로그램대로 흘러간다는 그 운명론이요?"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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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연구자로 학문을 파지 않은 이유가 있네. 뻔한 이론에 주석까지 달아야 돼. 주석을 많이 안 달면 논문 통과가 안 되거든 학문세계에서는 달린 주석이 줄줄이 새까맣게 돼야 논문 대접을 받아. - P42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셨군요."
"못 참아. 지루해서. 책도 마찬가지네. 내 책이라고 다르지 않아.
모든 책을 다 의무적으로 서문부터 결론까지 읽을 필요는 없네." - P43

목장에서 소가 풀 뜯는 걸 봐도 여기저기 드문드문 뜯어. 풀난순서대로 가지런히 뜯어먹지 않는다고. 그런데 책을 무조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다?
그 책이 법전인가? 원자 주기율 외울일 있나? 재미없으면 던져버려. 반대로 재미있는 책은 닳도록 읽고 또 읽어. - P43

사람들도 친구 사귈 때, 이 사람 저 사람 두루 사귀잖아. 오랜 친구라고 그 사람의 풀스토리를 다 알겠나? 공유한 시절만 아는거지. 평생 함께 산 아내도 모르는데(웃음). 한 권의 책을 다 읽어도모르는 거야. - P43

"그럼 뭐지요? 논문의 정체성은?"
"발견이지. 이미 있는 것을 찾아낸 것. discover cover를 벗기는거야. 재미난 것은 아메리카 대륙 찾아낼 때까지 ‘발견‘이라는 말조차 없었다는 거네. 디스커버는 포르투갈어에서 왔어. (후략) - P44

(전략) 개성, originality가 인정받은 것도 19세기 이후 낭만주의가 생기면서부터였네. 그전까지만 해도 오리지널리티는 나쁜 뜻이었어. 보편적인 것을 위반했거든." - P44

인터뷰가 뭔가? inter. 사이에서 보는 거야. 우리말로 대담이라고도 번역하는데, 대담은 대립이라는 뜻이야. 대결하는 거지. 그런네 말 그대로 서로 과시하고 떠보고 찌르면 거기서 무슨 진실한 말이 나오겠나. 위장술밖에 더 나오겠어? - P44

"나는 곧 죽을 거라네. 그것도 오래 지나지 않아. 그러니 지금 할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쏟아놓을 참이야. 하지만 내 말은 듣는 귀가필요하네. 왜냐하면 나는 은유와 비유로 말할 참이거든." - P45

라스트 혹은 엔드리스

선생이 일평생 맺은 인연들이 많아, 이즈음에 누군가는 이어령의 삶 쪽에, 누군가는 이어령의 죽음 쪽에 발을 딛고 더 나은 영광을 찾으려 했다. 사람들은 벌써 그에 대한 추도문을 쓰기 시작했다. - P48

"내 기분을 말하자면, 나는 시끌벅적한 것은 싫어하지만 모든 일을 아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네. 내 육체가 사라져도 내 말과 생각이 남아 있다면 나는 그만큼 더 오래 사는 셈이지 않겠나." - P49

그러니 나의 이야기를 자네의 문맥 속으로 집어넣게 그러면 헤어져도 함께 있는 것이라네. 그러기 위해 지금부터 자네가 나를 잘몰아주게나. 나만 허허벌판에서 떠들 순 없는 노릇이야. - P50

"이보게. 사람들이 죽을 때는 진실을 얘기할 것 같지? 아니라네. 유언은 다 거짓말이야."
급격한 커브에 놀라 마음이 출렁거렸다. - P51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새록새록 보게 돼. 거짓 유언이 진실로 열매를 맺는 과정을. - P51

그렇다네. 진짜 전하고 싶은 유언은 듣는 사람을 위해서, 듣는사람을 믿지 않기 때문에 거짓말로 한다네. - P51

"아버지라면 성실과 지혜를 유산으로 물려주기 위해 초강수를 둘 수 있죠. 그런데 스승의 유언이라면 다르지 않겠습니까?"
"이건 어떤가. 스승이 죽기 전에 가르치던 제자 세 명에게 유언을남겨.
‘나에게 낙타가 몇 마리 있는데 너희들에게 물려주마.
첫째 제자, 너는 수제자이니 1/2을 가져라.
둘째는 열심히 했으니까 1/3을 가져라.
막내는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으니 1/9 을 가져라.‘
그런데 스승이 떠나고 보니 낙타가 열일곱 마리야. (후략) - P52

"한 마리 허수를 넣어야 계산이 되는군요."
"그렇지. 그게 수학의 신비고 유언의 신비라네. 그냥 가르쳐주면 안 풀어. 못 풀어. 나눌 수 없는 열일곱 마리를 준 후, 나머지 한 마리의 퍼즐은 남은 자들이 더해서 풀게 한 거지. 쉽게는 못 풀어 생각을 해야 풀 수 있다네. 스승은 수학이란 무엇인가를 유언을 통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 했어. 수학은 체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개념의 세계라네." - P53

배신할 것을 전제로 진실을 이야기해주는 거야. 라스트 인터뷰는 유언의 기법을 최대한으로 발휘해야 되기 때문에 이러운 인터뷰가 되겠지. 하지만 너무 걱정은 말게나. - P53

"묻는 자로서 저는 어떤 질문을 경계해야 합니까?" - P54

다짜고짜 그러더군.
‘선생님, 문학이란 무엇입니까?"
"큰 질문이로군요!" - P54

나는 이런 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 빅 퀘스천bigquestion이지. 문인에게 다짜고짜 ‘문학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사람은 문학을 못 하네. 그런 추상적인 큰 질문은 무모해.  - P54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질문이 너무 커. 책 한 권으로도 담을 수없는 큰 것을 내게 물어본다네. 평생 공부하고 써야 할 것을, 나한테 물어본다구. - P55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랬지. 인간은 세 가지 부류가있다네. 개미처럼 땅만 보고 달리는 부류. 거미처럼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사는 부류. - P55

마지막이 꿀벌이네. 개미는 있는 것 먹고, 거미는 얻어걸린 것 먹지만, 꿀벌은 화분으로 꽃가루를 옮기고 스스로의 힘으로 꿀을 만들어. 개미와 거미는 있는 걸 gathering 하지만, 벌은 화분을 transfer하는 거야. 그게 창조야. - P56

"큰 질문을 경계하라 하셨으니, 작은 질문을 드리지요. 지금 몸 상태는 어떠신지요?"
"그것도 유언의 형식으로 얘기할 수밖에 없어. 내가 암에 걸리기 전에도 나는 바울이 한 말을 제일 좋아했네. ‘나는 매일 죽고 매일 태어난다." - P56

 난 여섯 살 때부터 죽음을 느꼈어. 밤에 잘 때 어머니 코에 손을 대보곤 했지. 숨을 쉬나 안 쉬나. 수십년 동안 내가 반복적으로 했던 얘기가 그거네. - P57

존재의 정상이잖아. 뭐든지 절정은 슬픈 거야. 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에도 그런 구절이 있어. 분수는 하늘로 올라가 꿈틀거리다, 정상에서 쏟아져 내린다…… 상승이자 하락인 그 꼭짓점. 그 절정이 정오였어. 정오가 그런 거야. 시인 이상의 「날개」에도 정오의 사이렌이 울려. - P57

"어린 이어령은 그때 무엇을 본 걸까요?"
"대낮의 빛, 그걸 느끼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룩 흘렀어. 어린아이들에게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네. 가장 순결한 영혼이어린아이야, 프로이트도 어린아이 놀이에서 그 유명한 ‘포르트-다(있다 없다 놀이)‘를 발견했잖아. (후략) - P58

"‘엄마 있네‘의 확신이 없으면 인생에 바람구멍이 뚫려버리죠. 가장 가까운 타자가 시야에서 사라져도 영영 떠난 게 아니라는 믿음.
그 믿음이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지, 저는 압니다." - P58

의사에게 암 선고를 받은 후 나는 입으로 되뇌어보았네. cancer.
cancer. 캔서는 라틴말로 ‘게crab‘란 뜻이야. - P59

수전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암이라는 질병 그 자체보다암에 대한 인간들의 의식이 문제라고 썼지. - P60

그때 내가 수술하지 않겠다고 했지. 물론 방사능 치료도 주치의도 내 생각과 같았어. 놀라운 의사였어. 전이가 됐다는 말은 앞으로 또 전이된다는 얘기거든. 그러니까 나는 거기서 끝내고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한 거라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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