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요제프 기벤라트는 중개와 도매를 업으로 하는 상인으로 마을에서 특별히 대단하거나 능력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처럼 억세고 다부진 체격이었고, 비록 거래에서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진 못했지만 돈에 대한 진심 어린 갈망을숨기지 않았다. 작지만 텃밭이 딸린 집에 살았고, 마을 묘지에가족묘가 있었다. 다소 깨인 사고방식으로 형식적인 종교 생활을 했으나 신과 정부 당국에는 적당히 존경을 나타냈고, 품위있는 시민의 도리인 엄격한 예절을 맹목적으로 따랐다. - P9
마을 상인협회 회원으로 금요일마다 ‘독수리‘ 술집에서 열리는 볼링 게임에 참여했고, 그 밖에 빵 굽는 날은 물론 스튜와 소시지 수프를 먹는 날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일할 때는 싸구려 담배를 피웠지만, 식사 후와 일요일에는 좀 더 고급 담배를 즐겼다. - P9
신문을 보는 게 독서의 전부였으며 문화생활은 일 년에 한번 상인협회에서 후원하는 아마추어 연극과 가끔 오는 서커스를 관람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주변의 어느 이웃과 이름과 집을 바꾼다 해도 기벤라트의 삶은 딱히 달라질 게 없었다. - P10
. 슈바르츠발트(독일 남서부의한 지역. 숲이 울창하여 ‘검은 숲‘이라는 뜻의 이름이 붙었다-옮긴이)의 작은 마을에서 이제껏 한스와 같은 영재는 없었다. 비좁은 마을의 울타리 밖으로 눈을 돌리고 세상에 영향을 끼칠만한 인물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 P10
한스의 어머니는 수년 전에 죽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생전에 항상 아프고 걱정에 싸여 있었다는 점 말고는 별다른 특징을 기억하지 못했다. 한스의 아버지는 고려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까 마을이 생기고 팔구백 년간 수완 좋은 사람은 많았지만신동이나 천재는 한 명도 없었던 이 오래된 동네에 하늘에서 정말 단한번 비밀스러운 불꽃이 떨어진 것이었다. - P11
관료나 교사 중 젊고 똑똑한 이들만이 신문 기사를 통해 ‘현대적 인간(《수레바퀴 아래서》가 발표된18세기는 구습을 타파하고자 하는 계몽주의 시대로, 신이 아닌 개인을 현대의 주체로 보았다-옮긴이)‘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고 있을뿐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자라투스트라가 뭐라고 말했는지 알지 못해도 교양 있는 사람인 척 살아갈 수 있었다. - P11
안락하고 부유한 삶을 누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십 년 전에는 기능공이었다가 그 후 공장주가 된 이들이었다. 그들은 관료를 만나면모자를 벗고 인사하면서 잘 보이려고 했으나, 자기들끼리 있을때는 푼돈 받고 사는 작자들이라느니, 글이나 받아쓰는 종놈들이라느니 하며 빈정거렸다. - P11
한스 기벤라트의 천재성은 누구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학교 교사들과 교장, 이웃 사람들과 마을 목사, 동급생들은 물론이고 누구든 이 소년이 총명한 두뇌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고 인정했다. 그러니 한스의 미래는 이미 확고히 정해진 것이었다. - P12
한스는 날마다 오후 4시에 학교수업을 마치고 나면 교장에게 그리스어를 배웠고, 6시에는 마을 목사의 특별한 배려로 라틴어와 종교 과목의 보충수업을 받았다. 일주일에 두 번은 저녁 식사 후 한 시간 동안 수학 교사의 지도를 받았다. - P13
어른들은 한스가 과도한 학업으로 부담을 느끼고 감성을 잃을까봐 날마다학교에 가기 전 한 시간 동안은 성서 강독 수업을 듣게 했다. 이수업은 브렌츠 교리문답(요하네스 브렌츠는 16세기의 종교개혁가로, 그의 교리문답서는 기독교 신앙의 교육서로써 널리 알려졌다. 옮긴이)을 공부하고 신앙심을 자극하는 질문과 답변을 암송하게 함으로써 젊은이들의 영혼에 신선한 기독교적 생기를 불어넣으려는 것이었다. - P13
하루 동안 쌓인 작문과 암기, 복습, 예습과제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의 편안한 석유등 아래에서 할수 있었다. 담임교사는 이렇게 고요한 가정의 평화와 격려 속에서 이루어지는 학습이야말로 성적을 올릴 수 있는 효과적인방법이라고 말했다. 이런 시간은 화요일과 토요일에는 보통 10시까지, 다른 요일에는 11시, 12시까지 계속되었고 간혹 더 늦게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 P14
한스는 생각날 때마다 고개를 들었고 이즈음부터는 산책길에서도 공부를 했다. 밤을 새운 듯 눈가에 푸른색 그림자를 드리운 채 소리 없이 걸어 다니는 것이었다. "기벤트가 합격할 수 있을까요? 합격하겠지요?" - P14
지난 일주일간 한스의 지적 충만함은 극에 달했다. 부드럽고어여쁜 소년의 얼굴에 움푹 들어간 눈은 탁한 빛을 내며 불안하게 번뜩였고, 아름다운 이마에 난 섬세한 주름은 그의 정신을 대변하는 듯했다. - P15
"오늘 밤은." 무서운 폭군 같은 교장은 말을 마치면서 평소와 다르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공부하지 말고 자거라. 약속할 수 있지? 내일 맑은 정신으로 슈투트가르트에 갈 수 있게말이다. 한 시간 정도 산책을 하고 일찍 자도록 해. 젊은 사람은잠을 충분히 자야 하거든." 잔소리를 쏟아낼 줄 알았는데 이런 격려를 받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한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교정을 나왔다. - P15
몇 주 동안, 아니 한 달 내내 날마다이곳을 네 번씩 지나쳤지만 그동안 한스는 다리 옆의 작은 고딕풍 예배당이나 강과 수문, 제방, 물레방아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물가의 풀과 버들가지도 마찬가지였다. 가죽 공장이며이런저런 공장이 접해 있는 강물은 호수처럼 깊은 초록빛으로잔잔히 흘렀고, 휘어진 버들가지 끝이 물에 잠겨 있었다. 한스는 문득 여기서 얼마나 자주 시간을 보냈던가 떠올려 보았다. 반나절, 아니 하루 종일 수영을 하고 물놀이를 하고 낚시를 하지 않았던가. - P16
한스는 멍하니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없었다. 순간 억센 손이 어깨를 붙들어서 한스는 화들짝 놀랐다. 다정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한스? 같이 산책하지 않을래?" 구둣방 주인 플라이크였다. 지금은 거의 가지 않지만 어릴적에는 종종 구둣방을 찾아가 플라이크와 함께 저녁 시간을 보냈었다. - P17
한스가 교사들의 자랑거리가 되면서 다소 우쭐한 모습을 보이자 플라이크는 겸손해지라고 자주 충고했다. 좋은 의도로 다가온 인도자에게서 소년의 영혼은 점점 멀어져 갔다. 한스는 반항심이 절정에 달해 자존심을 건드리는 모든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나이였던 것이다. - P18
크로넨 거리에서 두 사람은 마을 목사를 만났다. 플라이크는침착하지만 냉담한 태도로 인사하고는 이만 가봐야 한다며 급히 사라져버렸다. 목사가 새로운 교리를 따르며 부활을 믿지않는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P18
"그래, 잘하도록 해라. 다들 너에게 기대가 크다는 걸 알고 있겠지? 난 네가 라틴어에서 특히 좋은 점수를 받았으면 좋겠구나." "만약 제가 떨어지면요?" 한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떨어지다니?" 목사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런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떨어질 리가 없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 P19
. 나무로 된 작은 물레바퀴가 휘어지고 부서진 채 수돗가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한스는 이것들을 직접 깎고 만들며 즐거워했던시절을 떠올렸다. 벌써 이 년이 지났다. 그 시절은 아주 오래전일이 되어버렸다. 한스는 물레바퀴를 집어 들어 앞뒤로 꺾어완전히 부러뜨린 후 울타리 밖으로 던져버렸다. 이 하찮은 것들이여 잘 가거라! 이미 지나간 이야기고 끝난 일이었다. - P20
순간 소년은 바닥에 엎드려 엉엉 울고싶었다. 하지만 우는 대신 헛간에서 작은 도끼를 꺼내 와 야윈팔로 허공을 휘두르며 토끼집을 마구 쪼개기 시작했다. 나뭇조각이 사방으로 튀고 못이 녹슨 소리를 내며 휘어졌다. - P20
"아니, 아니, 얘야! 무슨 짓이냐?" 아버지가 창문에서 소리쳤다. "너 지금 거기서 뭐 하는 거냐?" "장작 패는 거예요." 한스는 한마디만 하고 도끼를 던져버리고는 마당을 가로질러 나와 강둑길을 따라 상류로 뛰어갔다. - P21
카프베르크 언덕에서 토끼 먹이를 구하고강가의 가죽 공장 뒷마당에서 낚시하던 시절, 걱정도 두통도 없었던 그 시절과 피곤하고 서글퍼진 채 한스는 저녁을 먹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다음 날 시험 장소인 슈투트가르트에 갈 생각에 잔뜩 흥분해서 한스에게 책은 다 챙겼는지, 검은색 양복은 준비해놓았는지, 가는 길에 문법 공부를 하지 않겠는지, 기분은 괜찮은지 등을 열 번도 넘게 물었다. - P21
"잘자라, 한스 푹 자도록 해! 아침 6시에 깨우마. ‘사전‘ 챙기는거 잊지 않았지?" "예, ‘사진‘ 잘 챙겼어요. 안녕히 주무세요(무식한 아버지가 중성명사인 ‘사전‘을 남성명사로 착각해 ‘das Lexikon‘가 아니라 ‘den Lexikon‘이라고 말했지만, 착한 한스는 아버지의 문법을 고치지 않고대답해주었다-옮긴이)!" - P22
자신이 주인인 방, 작지만 누구의 방해도 없는 자신만의 방은 한스가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받은 유일한 축복이었다. 여기서 긴 저녁 시간을 피곤과 졸음과 두통과 싸워가며 카이사르, 크세노폰, 문법, 사전, 수학 문제와 씨름했다. - P22
한스는 옷을 입은 채 잠들었다. 어머니 같은 조용한 잠의 손길이 닿자 소년의 요란한 심장 소리가가라앉고 아름다운 이마의 가느다란 주름이 사라졌다. 유례없는 일이었다. 이른 시간인데도 교장이 친히 기차역까지 마중 나온 것이다. 검은색 프록코트를 입은 아버지 기벤라트는 흥분과 기쁨과 자부심으로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 P23
교장이 손을 흔들었고, 한스의 아버지는 담배를 꺼내 피웠다. 골짜기를 지나자 마을과강이 사라져갔다.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는 두 사람에게 무척고된 시간이었다.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하자 아버지 기벤트는 곧 생기를 되찾아 유쾌하고 붙임성 있는 사교가로 변신했다. 작은 마을 출신이 주의 수도에서 며칠을 보내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를 황홀하게 했다. 아버지와 달리 한스는 더 조용하고 불안해졌다. - P23
두 사람은 숙모 집에 묵었다. 낯선 공간과 친절하지만 수다스러운 숙모, 할 일도 없이 마냥 앉아 있어야 하는 시간, 힘을 내라며 자꾸만 말을 거는 아버지를 견디느라 소년은 완전히 지치고 말았다. 낯설고 외로운 마음으로 한스는 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 P24
그런데 계단을 다 내려가기도 전에 불행이 시작되었다. 2층에서 만난 뚱뚱하고 거만해 보이는 부인이 숙모가 무릎을 굽혀 인사를 건네자마자 거침없이 입담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수다는 15분 이상 지속되었다. 한스는 계단 난간에 기대어 있었는데 부인의 개가 냄새를 맡고 한스를 향해 짖기도 했다. 확실하진 않았지만 두 사람이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 P24
숙모를 기다리는 동안한스는 길가에 수줍게 서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이기도 하고 골목의 부랑아들에게 놀림을 받기도 했다. 가게를 나온 숙모는 한스에게 초콜릿 바를 내밀었다. 한스는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예의 바르게 인사하며 받았다. - P25
그때까지 쉬지 않고 말하던숙모가 잠시 한숨을 쉬더니 애정 가득한 미소로 한스에게 이제 초콜릿을 먹으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스는 초콜릿을 먹고 싶지않았다. "세상에, 지금 수줍어서 그러는 건 아니지? 그러지 말고 어서먹으렴!" 어쩔 수 없이 한스는 초콜릿 바를 꺼내 한참 동안 은박지를 벗긴 후 작은 조각을 살짝 베어 물었다. - P25
한스는 한숨을 내쉬며 (중략). 문득 자신이 매우 불행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다시 한번 불규칙동사를 떠올려 보았는데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소스라치게 놀랐다. 모든 걸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선발고사가 바로 내일인데! - P26
다음날, 아침 한스가 커피를 마시며 시험장에 늦지 않기 위해 시계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그 시간에 고향에서는 많은 이들이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먼저 구둣방 주인 플라이크는 아침 수프를 먹기 전에 기도를 올렸다. - P27
마을 목사는 한스를 위해 기도하지는 않았지만 아침 식사를하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지금쯤 기벤라트가 시험장에 들어가겠군. 그 아이는 대단한 인물이 될 거야. 이제 곧 모두가 그 아이를 주목하겠지. 그러면내가 라틴어 공부를 도와준 게 헛수고가 되지는 않을 거야." 담임교사는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학생들에게 말했다. "이제 슈투트가르트에선 선발 고사가 시작되겠구나. 우리 모두 기벤라트의 행운을 빌자. 물론 딱히 행운이 필요하진 않을거야. 너희 같은 게으름뱅이 열 명을 합친 것보다 똑똑하니까 말이야." - P27
겁먹고 놀란 모습으로 조교의 지시를 따르면서 넓은 홀을 가득 채운 창백한 소년들을 보고 있자니 마치 고문실에 갇힌 범죄자가 된 기분이었다. 드디어 교수가 들어와 지원자들을 조용히 시킨 후 라틴어 문장력 시험문제를 받아쓰게 했다. 그제야 한스는 문제가 우스울 정도로 쉽다는 것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재빠르게그리고 즐겁게 초안을 쓴 후 신중하고 깔끔하게 답안을 작성했다. 일찌감치 답안을 제출한 학생들 중에는 한스도 있었다. - P28
"라틴어 시험은 어땠어? 쉬웠지?" 한스가 물었다. (중략) "그 문제 아직 가지고 있어?" 소년이 노트를 가져왔다. 둘은 함께 문제 전체를 한 단어 한단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괴핑겐에서 온 아이는 라틴어를 매우잘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그 아이는 한스가 한 번도 들어보지못한 문법 표현을 두 번이나 사용했다. - P29
집에 돌아오자마자 한스는 책상에 앉아 다시 한번 -mi로 끝나는 그리스어 동사를 복습했다. 라틴어 시험은 자신 있었지만 그리스어는 한스에게 특히 어려운 과목이었다. 그리스어를 좋아하고 거의 열광할 정도였지만 그건 작품을 읽을 때뿐이었다. - P30
다음 날 시험 과목은 실제로 그리스어이어서 독일어 논술 시험이 있었다. 그리스어 문제는 꽤 길었으며 전혀 쉽지 않았다. 논술 주제는 매우 까다로운 데다 논점을 혼동할 여지가 있었다. 오전 10시가 넘어가자 고사장 안이 후덥지근해지더니 푹푹 찌기 시작했다. 한스는 좋지 않은 깃펜으로 쓰느라 두 장의 답안지를 망치고 나서야 그리스어 답안을 말끔하게 쓸 수 있었다. - P30
식사를 하면서 한스는 어떤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고 어깨만 으쓱했고, 그저 죄지은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숙모는 한스를 위로했지만 아버지는 화가 나서 인상이 험악해졌다. 식사가 끝난 후 아버지는 아들을 옆방으로 끌고 가서 다시 꼬치꼬치캐물었다. "시험을 못 봤어요." 한스가 말했다. "왜 정신을 안 차렸어? 더 집중했어야지, 제기랄!" - P31
그리고 10분간 또 다른 세 명의 시험관 앞에 앉아 그리스어를 번역하고 다시 여러 질문을 받았다. 마지막 질문은 불규칙적으로 조합되는 부정과거형에 대한 것인데 한스는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럼 나가도 좋습니다. 저쪽 오른쪽 문으로 나가세요." 한스는 문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문을 나가면서 갑자기 부정과거형이 생각났다. 걸음을 멈추었다. (중략) "아닙니다. 다만, 지금 막 부정과거형이 생각났습니다." 한스는 시험장을 향하여 큰 소리로 답을 외쳤다. 그때 한 시험관이 웃는 모습을 보았고, 한스는 머리까지 시뻘게져서 시험장을 뛰쳐나왔다. - P32
거리를 걷는 동안 한스는 마치 자신이 몇 주째 이곳에 와 있으며 다시는 여기서 나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정원과 푸른 솔숲, 강가 낚시터가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오랜 옛날의 풍경같이 느껴졌다. 오늘 당장 집에 갈 수만 있다면! 어차피 시험을 망쳤으니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도 없었다. - P32
아이가워낙 지치고 처량해 보였던지 어른들은 한스에게 계란 수프를 먹이고 바로 잠자리에 들게 했다. 다음 날은 수학과 종교과목을 볼 차례였고, 시험이 끝나면 마침내 집에 갈 수 있었다. 오전 시험은 매우 잘 치렀다. 어제 주요 과목에서 그렇게 실수해놓고 오늘 시험을 잘 보다니 한스는 어처구니가 없어 마음이 씁쓸했다. 어쨌든 드디어 집으로 돌아간다! - P33
"슈투트가르트는 좋았니?" 늙은 하녀 안나가 물었다. "좋았느냐고요? 아니, 시험이란 게 무슨 좋은 일이라도 되는줄 아세요? 전 이렇게 집에 돌아와서 기쁠 뿐이에요. 아버지는 내일 오실 거예요." 한스는 신선한 우유를 그릇에 가득 부어 마신 다음 창문에 걸려 있는 수영 바지를 낚아채 밖으로 뛰어나갔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수영하러 가는 풀밭 쪽으로는 가지 않았다. - P34
다음 날도 쉬는 날이었다. 한스는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늦잠을 자고 자유를 누렸다. 점심때는 아버지를 마중 나갔는데, 아버지는 아직까지도 슈투트가르트의 즐거움에 푹 빠져 있었다. "시험에 합격하면 원하는 건 뭐든지 해도 좋다." 아버지가기분이 좋아서 말했다.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해봐라!" "아녜요. 아녜요." 소년은 한숨을 쉬었다. "저는 떨어질 것 같아요."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너는 합격할 거야!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하고 싶은 걸 얼른 말해봐." - P36
"제가 시험에 떨어지면 김나지움에 가도 될까 해서요." 아버지 기벤라트는 기가 막혔다. "뭐? 김나지움?" 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김나지움에가겠다고? 어떤 놈이 그딴 걸 알려주더냐?"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어요. 저 혼자 생각해본 거예요." - P37
한스는 창틀에 앉아 깨끗이 닦인 마룻바닥을 30분이 넘도록 응시하면서 자신이 신학교나 김나지움에도 못 가고 대학에도 갈 수 없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보았다. 어쩌면 치즈 가게나 사무실에 들어가 수습생으로 일해야 할지도 모른다. - P37
월요일 아침 일찍 한스는 학교에 다시 나갔다. "잘 지냈니?" 교장이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나는 네가 어제 찾아올 줄 알았다. 시험은 잘 보았니?" 한스는 고개를 숙였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이냐? 잘 못 보았니?" "네, 그런 것 같아요." "어디 기다려보자꾸나!" 교장이 한스를 위로했다. "아마도오늘 오후에는 슈투트가르트에서 소식이 올 거다." - P38
한스가 다가가자 담임교사가 손을 내밀었다. "축하한다, 기벤라트 주 선발고사에서 네가 이 등으로 합격했다." - P38
"이제 집에 가보렴." 교장이 말했다. "아버지께 이 소식을 전해드리렴. 그리고 앞으론 학교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팔 일 뒤면 방학이 시작되니 말이다." 소년은 현기증을 느끼며 길을 나섰다. 길가에는 보리수나무들이 서 있고 광장에는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지만 전보다 더 아름다웠고 의미 있었으며 기쁨이 넘쳤다. 선발 고사에 합격했다! 그것도 이 등으로! - P39
"아버지, 주머니칼 좀 빌려주세요!" "뭐하려고?" "나무 막대기를 만들어야 하거든요. 낚시하려고요." 아버지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자, 여기 2마르크를 줄 테니 이제 네 칼을 사도록 해라." 아버지는 환하게 웃으며 관대하게 말했다. "단, 한프리트 상점 말고 맞은편 대장간에 가서 사야 한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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