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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의 가르침
셔윈 B. 눌랜드 지음, 명희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의 저자인 셔윈 B. 눌랜드는 책 제목 그대로 계속해서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예일대 의대 교수로, 대표적인 질병인 심장질환, 알츠하이머, 에이즈, 암 등이 의학적으로 어떻게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묘사하고 있다. 그는 책을 통하여 죽음에 대한 의학적, 현상적, 정서적, 당위적 이해를 통하여 존엄한 죽음을 준비시키고자 한다.
그가 책을 통하여 가장 강조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죽음은 자연의 섭리이고 법칙이다. 그것을 부인하거나 거스르려는 헛된 희망과 노력, 그리고 시도는 자칫 홀로 버림받은 채로 외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저자는 먼저 죽음의 당위성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여러 번 언급하고 주요 질병이 신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의학적으로 설명한다
"그들이 숨을 거두는 진짜 이유는 다 낡아빠진 신체 조직 때문이다."
"무릇 모든 살아 있는 생물이 때가 되어 죽음으로써 생의 무대를 다음 세대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자연의 섭리다."
"셀윈 박사는 내게, "그저 때가 되니까 죽는 겁니다"라고 간단히 말했다."
책에는 각 질병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 모든 내용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중에서 노인들이 자주 소변을 보는 이유와 방광 조절 능력 상실을 설명한 부분은 그래도 쉽게 이해가 된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요도 기관의 중추적 역할을 맡고 있는 신장의 기능이 퇴행하는 것처럼 방광도 영향을 받는다. '방광'은 일종의 신축성 있는 근육으로 만들어진 두터운 풍선이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방광은 신축성과 팽창성을 잃으므로, 전과는 달리 소변을 많이 담지 못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노인들은 자주 소변이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또한 노령은 방광 근육과 소변이 새어 나오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셔터 메커니즘 사이의 조화를 깨어버린다. 이 때문에 일부 노인들-전립선 이상이나 정신에 이상이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심하다-은 방광의 소변 조절 기능에 곤란을 겪게 된다. 이러한 방광의 조절 능력 상실은 노쇠한 환자들에게 최대의 적인 요도 감염의 주된 원인이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유지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아마도 대소변을 직접 가리는 것이 아닐까. 그만큼 대소변을 가리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인간의 존엄성과 밀접히 관련된 요소라고 생각한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늘 냄새나는 상태로 있는 자신을 상상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책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노령, 즉 나이가 들면, 다른 말로 하면 특별한 일이나 병이 없어도 시간이 지나면, 방광 근육과 셔터 메커니즘 사이에 조화가 깨어진다. 이런 사실을 알고 이해한다고 하여도 나이가 들어 나에게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적잖이 당황할 것이고 정서적으로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 그래도 그나마 나를 추스르고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디딤돌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긍정적 에너지가 그리고 희망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생에 정해진 한계점이 있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인생은 균형 있는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자연이 우리의 자식들로 하여금 이 세계를 이어가게 만든 것처럼, 죽음을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존엄성 있는 죽음의 기본 요소다."
"세월이 흘러 죽음이 다가온 순간은 영적으로 매우 신성한 시간이다. 그 시간에는 죽어가는 자와 세상에 남게 되는 자 사이에 합당한 영적 교류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죽음이 바로 희망 있는 죽음이요, 존엄성 있는 죽음이다. 올바로 된 죽음은 쉽게 부인할 수 없는 죽음이다. 사랑하고 사랑받던 사람들과 나누게 되는 마지막 교감, 위로, 사랑, 그리고 슬픔, 이러한 감정들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은 당사자들로 하여금, 아름다운 죽음은 가치 있는 것이라는 생각과 하느님의 존재와 내세에 대한 희망을 갖게 만든다."
저자가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염려하는 것은 의학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이다. 저자는 의학이 인간의 삶을 연장시켜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죽음이라는 운명을 무조건 부인하게 만들기도 했다고 말한다. 또한 의학에 대한 오해와 관련하여 의사의 역할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음을 지적한다. 의사는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에게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최신 의학 기술과 기계에 의존해 환자의 목숨을 연장시키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써야 하는가?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환자나 가족이나 의사들에게 지나친 집착이나 위험이 가득한 치료를 고집하는 대신, 좀 더 현실적인 면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은 비단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암을 비롯한 중병으로 말기에 이른 환자의 경우, '희망'은 반드시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암 전문의들이 얘기하는 얄팍한 통계에 귀를 기울여 헛된 희망을 품는 환자들이 아직도 부지기수이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낭비할 뿐 아니라, 더 무거운 짐을 진 채 자기 자신은 물론 사랑하는 사람들에까지 고통을 준다. 평화로운 죽음을 간구하면서도 살고자 하는 본능이 더 강렬하여 그 권리를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책의 서두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의사가 되기 위한 '예도'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은 치료 과정 중에 희미하게나마 성공 여부를 확신, 가능, 불가능으로 구분해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일이다.
의사는 개인적인 지적 호기심, 즉,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환자의 치료에 계속 매달리면 안 된다. 그런 의사가 많이 있겠냐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지만 저자에 의하면 저자 자신도 그랬고 많은 의사들이 이와 같은 동기로 환자에 매달린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로 '수수께끼의 유혹이 워낙 강한 탓도 있겠지만, 자신을 패배자의 위치에 두고 싶지 않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에게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환자는 물론 의사 자신까지 끌어당겨가며, "뭔가를 또 시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하에 죽음의 존재를 부인하려 드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의 강력한 힘과 더 나아가 죽음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의식이 의사라는 직업을 통해 투영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결정을 절대 의사에게 맡기거나 이양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 대목에 이르면 좀 충격적이다. 세계 최고의 대학이라 할 수 있는 예일대에서 의대 교수를 하고 있는 저자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 말이다. 그는 자신과 자기를 가장 잘 아는 사람과 논의해서 자신의 마지막을 결정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러기 위해선 모두가 자신의 질환과 죽음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친구가 있다고 해도 진정한 판단은 환자 자신이 질환과 죽음에 대해 얼마만 한 지식을 갖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너무 오랫동안 투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생을 늘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즐길 수도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너무 일찍 싸움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앓고 있는 질환이 어떤 성격의 것인가를 정확히 알 때, 싸워야 할 시간과 멈춰야 할 시간들을 판단,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럴 경우 우리의 슬픔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에 국한될 뿐, 잘못 내려진 결정으로 인한 불필요한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의학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치료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과도한 진료와 의사의 잘못된 동기에 의한 집착으로 인해 인생의 마지막을, 가장 아름답게 존엄하게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보다 더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통계 수치에 매달리기보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