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전기 -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존재하는 그 땅의 역사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유달승 옮김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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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루살렘의 역사는 곧 세계의 역사입니다. 역사의 입장에서 볼 때 천년 만년 태평성대를 누렸던 왕국은 단 한줄로 요약할 수 있는 재미없는 역사가 되겠지만, 계속해서 치고 박고 싸워서 며칠사이에 땅주인이 여러번 뒤바뀌었다면 그것은 재미있는 역사가 될 것이고 할 이야기가 많은 역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수시로 뒤바뀌었던 이야기들이 여러가지 형태의 기록으로 잘 남겨져 있다면 그것은 더욱 생동감 넘치는 역사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너무 생생해서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처절한 이야기가 될 지라도 말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의 신이 사는 집이자 두 민족의 수도이며 세 종교의 사원이고, 하늘과 땅에서 두 번 존재하는 유일한 도시라고 합니다.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뭔가 굉장히 복잡한 구성을 이루고 있는데 이 책을 통해 예루살렘의 역사를 찬찬히 살펴보니 이렇게 알차고 다양한 구성을 이룰 수밖에 없구나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구성은 근본적으로 조화를 이룰래야 이룰 수가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예루살렘을 이야기할 때 서로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예로들며 그들이 서로를 최대한 자극하지 않도록 하라고 경고하고 있나 봅니다. 예루살렘의 역사를 보면서 만약에 전세계가 다시 전쟁의 포화에 휩싸이는 그날이 온다면 아마도 예루살렘이 그 중심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예루살렘 전기』는 한 인물이 아닌, 한 도시와 지역 전체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 기록은 전기傳記가 아니라 전기戰記에 가깝습니다. 예루살렘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는 이 책을 보고 있자니 마치 예루살렘이 평화로웠던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듯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 책이 말하는 예루살렘의 모든 기록은 전쟁의 기록입니다. 서로 미워하고 그래서 싸우고 또 죽이고, 그 죽음을 복수하고, 또 그 복수를 복수하고. 신의 도시이고 하늘과 가장 가까이 닿아있다던 예루살렘이 정말로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고 원하던 그 천상의 도시가 맞긴 한 것인가 묻고 싶습니다. 만약 지구상에 지옥으로 향하는 문이 있다면 그 문은 분명 예루살렘에 있을 것입니다. 



    처음 이 책의 첫 페이지를 열었을 때 현재의 예루살렘이 왜 이런 골치아픈 동네가 되었을까에 대한 질문에 답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이쪽저쪽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본 후 개인적으로 무언가 결론을 내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그렇게 하질 못하겠습니다. 예루살렘의 주인이 태초부터 누구였다고 단정지어 말한다는 것이 억지스러워 보입니다. 예루살렘의 위치가 지정학적으로 제국이 생겨날 때마다 주인이 바뀔 수밖에 없는 위치이고, 또 큰 전쟁이 발생할 때마다 수많은 민족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썰물처럼 빠져나갈 수밖에 없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거쳐갔던 민족과 종교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지금까지도 약간의 경계를 허물지 않고 서로 절대로 섞이지 않은 상태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기합니다.



    한편 예루살렘이 도대체 어떤 마력과 같은 힘을 지닌 장소이기에 그토록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인가 하는 괜한 궁금증이 생겨납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에 홀린 듯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출구가 없는 이 좁은 지역으로 이방인들이 몰려들다보니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런 잦은 사고들이 큰 전쟁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외모가 다른데다 언어까지 다르니 분명히 서로가 서로를 다른 생명체 보듯 했을 겁니다. 애초에 서로가 다름을 인정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예루살렘을 가운데 두고 싸우는 여러 민족과 종교에 대한 천 페이지에 가까운 방대한 이야기를 보고있으니 모래탑 가운데 깃발 하나를 꽂아두고 누가 모래탑을 무너트리는지 게임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지금의 예루살렘은 중앙에 꽂혀있는 깃발 주위에 모래가 얼마남아있지 않은 상태로 보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위태롭습니다. 그리고 이 게임이 끝나는 것은 세상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다면 예루살렘에 속해있는 종교와 민족은 서로 상대방을 자극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고, 또 세계가 나서서 예루살렘의 일에 간섭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현재 모습에 대한 책임은 세계의 역사에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모든 도시가 외부의 사고방식이 들어오는 창구이지만 예루살렘은 외부세계를 비추어 내부의 삶으로 드러내는 양면거울이었다. 절대적인 신앙의 시대든, 정의로운 제국의 건설이든, 복음의 계시든, 세속적인 민족주의든 간에 예루살렘은 그 상징이자 지렛대가 되었다. 그러나 서커스의 거울이 그러하듯, 거울에 비친 모습은 언제나 왜곡되고 기형인 경우가 많았다. (16쪽)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 (197쪽)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무슬림과 프랑크 양쪽 모두에 의해 예루살렘 땅이 파괴되었으므로 양쪽 모두에 책임이 있다. 우리가 할 얘기는 예루살렘, 십자가, 그리고 이 땅에 관한 것이 전부이다. 예루살렘은 우리 예배의 중심이며 우리는 결코 예배를 포기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살라딘은 알 쿠드스가 무슬림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했다. "예루살렘은 우리의 것인 동시에 당신들의 것이다. 예루살렘은 당신들에게보다 우리들에게 더 위대하다. 예루살렘은 우리의 예언자께서 밤의 여정을 온 곳이며 천사들이 모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434쪽)



    중동에서 일어나는 일이 흔히 그러하듯, 유럽인들은 동양인들이 자신들의 선한 의도에 의한 정복을 감사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518쪽)



    그리스도교 복음주의자들과 유대인 랍비들 모두가 유대인의 귀환을 꿈꾸었다. 그것은 몬티피오리의 업적이었다. 새로운 유대인 부호들, 특히 로스차일드 가문의 엄청난 부는 바로 그 당시에 디즈레일리가 말했던 것처럼 히브리 자본가들이 팔레스타인을 사들인다는 개념에 힘을 불어넣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국제 정치와 금융의 결정권자로서 그 힘이 최전성기에 올라 있었으며 런던은 물론 파리와 비엔나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몬티피오리에게 돈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몬티피오리의 변치 않는 꿈은 "예루살렘이 유대인 제국의 수도가 되도록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585쪽)



    미국과 이스라엘은 그 이상의 것을 공유하고 있다. 두 나라 모두 '신이 관여하는 자유'라는 이상 위에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새로운 시온, 즉 '언덕 위의 도시'이며 이스라엘은 회복된 옛 시온이다. (825쪽)



    평화의 씨앗은 단순히 자갈밭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 땅을 독에 물들게 했다. 평화가 평화를 만든 사람들을 불신하게 만들었다. 예루살렘은 오늘날 정신분열적 두려움 속에 존재하고 있다.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은 감시 서로의 동네에 들어가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는다. 세속적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쉬지 않고 불경한 옷을 입는다는 이유로 돌을 던지는 초정통파 유대인들을 회피한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은 성전산 기도를 시도함으로써 경찰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무슬림들의 불안을 자극한다. 그리스도교 종파들은 여전히 서로 으르렁거린다. 예루살렘 시민들의 얼굴은 긴장돼 있고, 목소리는 화가 나 있다. 그리고 누구든 심지어 자신이 신성한 계획을 실행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세 종교의 종교인들조차도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8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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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알렉스 형사 베르호벤 추리 시리즈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서준환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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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밀히 따지자면 제 첫번째 프랑스 추리소설은 피에르 르메트르의 『알렉스』가 아닙니다. 그 유명한 모리스 르블랑의 소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셜록 홈즈와 더불어 아르센 뤼팡은 당연 특별대우를 해줘야만 할 것 같아서 논외로 했습니다. 그들의 작품은 성지와도 같아서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로 인해 자연스레 경로우대하듯 자리를 양보하게 됩니다. 아무튼 원로급 작품에 대해 요즘의 소설을 나란히 두고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어보이니 일단은 그렇게 하기로 하고, 그래서 이 소설이 제가 지금까지 읽어본 유일한 프랑스 추리소설이 될 터이니 마담 알렉스여, 봉쥬르.

 

 

    최근들어 유럽의 미스터리소설, 그 중에서도 북유럽 지역의 소설이 국내에 많이 소개되었고, 그래서 꽤 많은 유럽소설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추리소설은 같은 유럽 대륙의 소설이라 하여 한대 묶어놓기가 애매해 보입니다. 굳이 범죄를 다룬 소설이라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라, 프랑스 소설에서는 파리 특유의 진동하는 하수구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온갖 종류의 병균을 지니고 있을 법한 팔뚝만한 크기의 쥐가 어딘가 흑사병을 옮기려는 듯 붉은 색의 두 눈으로 주위를 살피고 연신 코를 킁킁거리며 찍찍 소리를 낸 후 축축하고 끈적한 하수구 물기에 발을 담그려는 것 같은 느낌의 냄새 말입니다.



    사건에 대한 묘사나 인물에 대한 설명에 대해 비교해보자면 북유럽의 소설은 꽁꽁 얼려놓았던 칼로 무언가를 스윽 베는 느낌이 납니다. 그것은 굉장히 차가운 감각이라 순간적으로 시원하고 후련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또 스스로가 무언가에 베였다는 것을 인지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반면 프랑스 소설은 불로 달구어진 칼의 느낌입니다. 그런데 그 칼을 짧은 시간에 슥삭 해치울 생각으로 강하게 휘두르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날을 세워 지긋이 힘을 주어 누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날카로운 부위로 인해 생긴 상처로 핏물이 스며들 때 바로 뜨거운 날붙이로 인해 지저져 상처가 강제로 아물게하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처와 고통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며 고마워해야할지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아무래도 이렇게 북유럽 소설과 프랑스 소설의 느낌차이는 지정학적인 위치차이 때문에 차갑고 뜨거운 간격이 생겨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알렉스』는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의 큰 이야기는 하나의 반전을 이루고 있어서 장면과 상황이 극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는 각 장 안의 짧은 장면들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어찌보면 이런 장면의 전환이 참으로 불친절하게 보입니다. 나는 나대로 갈테니 따라올테면 따라와보라는 식의 전개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추리소설이 헨델과 그레텔의 빵부스러기처럼 추리할만한 요소를 심어놓고 독자들이 흘려놓은 단서를 발견하고 따라가는 달콤한 맛을 선사하고 있는데 반해 이 소설은 철저하게 독자를 소설 밖으로 밀어내고 추리해볼만한 것따위를 던져주고 있지 않습니다. 추리할 것이 없는 추리소설, 처음에는 이런 느낌의 소설이 무척 싫었습니다만 소설을 읽다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은근히 이게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미묘하지만 일단은 다행이었습니다.



살인마는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반전에 반전, 그리고 또 그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프랑스 추리소설.



    소설의 불친절함은 소설 속의 주인공 카미유와 무척 닮아 있습니다. 그는 고양이와 함께 사는 독신남 형사로,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로 개인적인 상처와 무거운 삶의 짐을 짊어지고 사는 인물입니다. 프렌치코트같은 느낌이 나지만 키가 너무 작아서 프렌치코트는 카미유에게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시종일관 츤츤한 카미유의 삐딱한 시선이 소설의 맛을 살짝 더 고급의 그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반면 작가의 생각과 느낌이 작가 스스로가 갖고 있을 법한 고정관념에 따라 가끔 소설속에서 차갑게 드러난 부분들이 있는데, 카미유와 캐릭터가 겹치는 듯해 보여서 차라리 카미유의 입을 빌려서 말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미스터리 소설을 즐기는 사람으로서 각 나라의 다양한 소설을 읽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그리고 충분히 소설의 맛을 음미한 뒤 이렇게 소문난 맛집을 소개하듯 사방팔방 알리는 것도 저에겐 즐거운 일입니다. 『알렉스』를 통해 프랑스 추리소설이라는 요리의 맛을 느껴보았습니다. 이건 뭐랄까, 나쁘지 않은 맛인데 문화적 충격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 표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메뉴판을 보고 주문했던 요리에서 내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맛의 요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이 요리가 맛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더 먹어봐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메뉴 개척의 길은 멀고도 험난합니다.






    그가 또 다시 그녀를 후려갈기지 않게 하려면 아주 빨리 알몸이 되어야 한다. 그녀는 휘청거리면서도 몸 위에 남아 있는 옷가지 모두를 재빠르게 벗는다. 그리하여 결국 알몸으로 그 앞에 선다. 그녀는 팔뚝으로 몸을 가려보지만, 이 순간, 자기가 모든 것을 잃었으며, 이런 상실감이 언제까지도 아물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된다. 그녀의 이 참담한 몰락은 절대적이다. 되도록 빨리 옷을 벗어던지면서 그녀는 무엇이든 응하고 말았으며, 모든 요구에 "네"라고 답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는 방금 전에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또 다시 자신의 감각이 아득해져가는 걸 느낀다. 마치 자기 몸 바깥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그녀에게 질문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난 것도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당신이 원하시는게…… 뭔가요?" (52쪽)



    그녀는 울면서 웃는다. 그녀로서는 아직 살아 있어서 행복한 건지 혹은 여전히 알렉스로 남아 있어 불행한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247쪽)



    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해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283쪽)



    자기 습관에 대한 집착은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개인적인 의식의 수행이 된다. 그것은 카미유에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방식이기도 하다. 산다는 건 크고 작은 의식들을 끊임없이 거행하는 일이다. 하지만 자신이 의식의 접전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298쪽)



    자기 자신의 실상과 정확히 마주할 때,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노릇일지도 모른다. (387쪽)



    진실이라, 진실이라…… 바로 이 자리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반장님이겠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한테 가장 절실한 미덕은 진실이 아니라 바로 정의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렇지 않은가요? (5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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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너 매드 픽션 클럽
헤르만 코흐 지음, 강명순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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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너』라는 제목에서도 느껴지지만, 이 소설은 다른 감각보다 특히 미각을 자극하는 맛이 느껴지는 소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맛있는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맛있는 문장과 맛있는 전개. 헤르만 코흐라는 작가의 소설을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만, 이정도의 소설을 쓸 수 있는 작가라면 그의 다른 소설도 이 정도의 퀄리티를 가진 또 다른 맛을 느끼게 해줄 일류요리일 것이란 짐작을 해봅니다. 그래서 그의 또다른 소설의 맛은 어떠할지 그것이 무척 궁금합니다. 비단 맛뿐만이 아니라 영양소도 충만한, 그러니까 이런 소설은 우리 몸에 매우 유익할 그런 소설이란 말입니다.

 


    우리에게 유익할 영양소라 한다면, 이 소설이 가진 영양소는 '자녀에 대한 맹목적인 보호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라는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는 데 있습니다. 소설속의 한 개인이 자신의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택한 행동들이 꽤나 극단적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이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누구나 비슷한 행동을 하려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완벽하게 동일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생각만큼은 소설처럼 극에 이르는 상황까지 충분히 가고도 남았을 것이라 여깁니다. 자녀 문제에 대한 소설속 양쪽 부모의 입장과 생각에 무척 공감하는 바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설은 청소년 폭력과 입양문제, 계층간의 갈등과 같은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에 대해 소설은 뚜렷한 해답을 제시해주진 않습니다. 문제를 확장시켜가며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그것도 괜찮다면 이런 경우는?' 하는 식으로 질문을 계속합니다. 그런 질문들이 점점 극한의 상황에까지 오게 되고, 가족의 위기가 최절정에 이르게 되면서, 이 소설의 백미라 할 수 있는 '고도의 까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맹목적으로 자녀를 보호하려던 인물의 비틀어진 행동과 생각들을 꼬집으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가족은 위기를 삐뚤어진 방식으로 극복해 나가고 서로를 끌어앉으며 더욱 똘똘 뭉칩니다. 그리고 결국 가족간의 사랑을 재확인합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결과가 사람을 미치고 팔짝뛰게 만듭니다만, 이런 식의 '고도의 까기'를 통해 '혹시 당신네 가족도 이런가'라는 배배꼬인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끊임없이 계속 해온 질문에 대한 결정타를 날리며 한 편의 블랙코미디같았던 소설의 모든 코스 요리를 마칩니다.



    이 소설이 영양소가 충만했던 요리였다면 맛 또한 놓치지 않았던 일류 요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네덜란드의 국민작가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헤르만 코흐의 글은 '재미'가 있었습니다. 소설의 시작은 값비싼 레스토랑에 가족들이 모이고, 가족 문제에 대한 지겹고 뻔한 이야기를 할 듯한 시작을 보입니다. 그런데 에피타이저, 메인요리, 디저트가 나오며 이야기는 코스 요리가 나오는 속도에 발맞추어 점점 본격적인 긴장감을 갖습니다. 시작부터 화자는 괴팍할 정도로 이상한 시선으로 수많은 관찰을 해대고, 또 그런 관찰을 통해 속으로 온갖 부정적인 상상을 해대는데, 그런 삐딱함이 무척 재미있습니다. 신경쇠약에 걸린 소시민의 과민반응이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그런식의 행동과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끝에 밝혀지긴 하지만, 이런 삐딱한 양념이 이 소설을 매우 맛있게 합니다. 그래서 뒤에 이어질 이야기가 무척 궁금해지고, 어디로 튈지 모를 전개와 뜻밖의 반전들에 대해 어느 순간부터 계속 기대하게 합니다. 그러다 언제가부터는 이런 괴상한 인물의 매력에 푹 빠져들게 됩니다. 분명히 뭔가가 잘못된 것이라 그것을 지켜보기가 편하지 않은데, 괜히 계속 지켜보게 하는 마력과 같은 힘에 이끌리게 됩니다. 엄청난 열량을 가진 검은 초콜릿 덩어리에 계속해서 손이 가는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가족문제를 다룬 소설을 볼 때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가족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정해진 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워집니다. 또 집단주의로 인해 더욱 잔인하고 이기적으로 변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가족 이외의 존재를 쉽게 타인이라 단정짓고 나머지를 밀어내려는 결정을 쉽게 해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 개인적으론 이 소설의 이상한 인물과 이상한 가족의 선택과 행동에 매우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나 다 이정도의 이기적인 마음을 갖고 있진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한편 설마 이정도로 삐뚤어져 있진 않겠지 라며 안도하는 마음도 생겨납니다. 그런데 저만 이렇게 극단적으로 삐뚤어진 인물의 생각에 공감하며 똑같은 표정을 짓고서 웃고 있는 것이라면 그건 정말로 저 혼자만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인데, 그럼 전 또 뭐가 됩니까. 결국 결론은 제가 정신병자라는 소리인가 봅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앞으로 남은 우리 인생은 또 어떻게 바뀌었을까?

    지금 내가 아내에게서 들이마시고 있는 것은 단순히 행복의 냄새뿐일까? 혹시 멀리 사라져 간 과거에 대한 그리움은 아닐까? 하마터면 잃어버렸을지도 모르는 행복했던 시간들에 대한 그리움. (20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뭔가 있었다. 앞으로 남은 저녁 시간 동안 대격돌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는 내 소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뭔가가 있었다. 총이 나오는 연극을 상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서막에서 총이 등장하면 관객들이 마지막 장에서 분명히 그 총이 발사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그게 바로 드라마의 법칙이니까. 발사되지 않을 총이라면 애당초 등장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58쪽)



    그걸 더 자세하게 묘사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를테면 사고가 일어나긴 했는데 피를 보고 싶지 않아서 그냥 지나칠 때의 마음이라고 해 두자. 아니, 더 간단하게 말하면 로드킬을 당해 길가에 널브러져 있는 짐승을 보는 심정과 흡사하다. 약간 떨어진 곳에 죽은 짐승이 있는 건 알았으나 피를 보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돌릴 때 같았다. 혹은 구토가 나서 더 자세하게 들여다 볼 수 없어 허공을 올려다보거나 약간 떨어진 풀밭에 피어 있는 꽃을 바라보는 척하면서 외면할 때. 딱 한군데, 로드킬 당한 짐승이 있는 길 가장자리만 빼놓고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릴 때의 심정 말이다. (116쪽)



    맞다. 겉으로 보면 난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난 삼위일체로 구성되 우리 가정의 확실한 부속품이었다. 우리 가정의 다른 한 부속품은 병원에 있었다. 난 모터가 세 개달린 여객기의 비행사였다. 지금 그 비행기의 모터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불안해 할 필요는 없었다. 비상착륙을 하면 되니까. 그 정도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난 비행사로서 천여 시간의 비행경험이 있다. 그러니 나는 분명히, 비행기를 안전하게 지상에 착륙시킬 것이다. (239쪽)



    아내가 우리 아들에 관한 중요한 결정을 나와 의논하지 않고 내리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면,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나 자신이었을 것이다. (250쪽)



    지금 난 시기상의 차이는 있겠지만 학부모라면 언젠가는 한 번쯤 맞닥뜨리게 되어 있는 딜레마에 빠졌다. 부모라면 당연히 자기 자식을 변호하고 아이의 입장을 옹호하려 들 것이다. 하지만 이럴 때 죽자사자 달려들어서는 안 된다. 또 너무 뛰어난 언변으로 상대방을 궁지로 몰아서도 안 된다. 선생님들을 말로 제압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결국은 앙갚음이 고스란히 아이한테 돌아가게 될 것이다. 부모의 논리가 선생님의 논리보다 더 뛰어날 수는 있다.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은 바로 아이이다. 부모의 논리에 밀린 선생님은 결국 그 좌절감을 아이한테서 보상받으려 들 테니까. (3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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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
릴리 블레이크 지음, 정윤희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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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목이 무언가 롤플레잉 게임을 연상케 하는 오묘한 모양의 이름을 하고 있지만,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백설공주와 사냥꾼'이라는 구수한 제목으로 뒤바뀌는 반전이 있습니다. 백설공주,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 백설공주의 이야기인데요, 그 이야기를 조금 각색해서 영화화하기 위해 만든 글, 그리고 그 시나리오를 팬들에게 미리 공개하는 형식의 소설이란 느낌이 듭니다. 구체적인 형태의 영화가 나오기 이전에 콘티를 짜려고 설렁설렁 써놓은 글이랄까요. 그렇다보니 무언가 체계적이고 꽉 차있는 듯 한 진중한 맛을 느끼려 하기보다는 여러가지를 따지려 들지 않고 정말로 가볍게 마녀의 사과를 아무런 의심없이 넙죽 받아먹듯 그렇게 읽으면 좋을 듯해 보이는 글입니다.


 

 


    꽤 오래전 TV에서, 우리가 매우 잘 아는 동화의 원작은 어린이들이 절대로 읽을 수 없을 만큼의 잔인한 내용과 묘사를 담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기억 때문에 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땐 은근히 기대를 했습니다. 그리고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의 첫 페이지를 열어 보았습니다. 굉장히 잔인하거나, 혹은 굉장히 야하거나 둥 중 하나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 기대에 부흥할 만한 글이 아니라 조금 안타깝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그저 어른 전용의 동화책이길 바라는 '순수'한 마음으로 읽으려 했던 것뿐이었습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더 헌츠맨' 즉, 사냥꾼이 백설공주와 더불어 주요 인물로 등장합니다. 왕자도 아니고, 일곱 난장이도 아니고, 뜬금없이 왠 사냥꾼이 주인공이냐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사냥꾼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나쁜 여왕에 의해 사랑하는 아내를 잃을 수밖에 없었던 슬픈 '과거'가 있는 남자인데, 아마도 굉장히 준수한 외모를 가진 근육남이 아닐까 싶습니다. 뭣 모르던 7살의 꼬마 공주가 10년간 옥살이를 하다 때늦은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경험할 나이즈음에 처음으로 만난 이성다운 이성이 바로 이 사냥꾼이었다는 점에서 백설공주가 이 사냥꾼을 바라보는 두 눈에 하트모양이 절로 생겨버린다 할지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에는 국경이고, 사별한 아내이고, 뭐고 다 없는 것이니 말입니다. 다만, 왕자님같은 한 명의 인물이 또 등장하긴 하는데 이 부분이 참으로 애매합니다. 그 때문에 '과거'가 있는 홀아비 사냥꾼의 위치도 참으로 애매해지구요. 하지만 우리 시대의 엄친아인 왕자님을 제껴내고 아리따운 백설공주의 마음을 사냥꾼이 쟁취할 수 있다는 부분은 아마도 전세계 모든 홀아비들의 로망이자, 꿈 오브 드림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은 아마 이미 개봉했거나, 가까운 미래에 개봉할 영화일 것 입니다. 이미 포스터까지 나와 있고, 또 그 포스터를 이 책의 표지에 적용한 것을 보면 더욱 그래 보입니다. 그래서 영화는 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조금스레 궁금해 집니다. 그리고 영화 <그림형제 - 마르바덴 숲의 전설>같은 느낌의 영화가 될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을 것 같단 생각을 해봅니다. 타겟을 확실하게 잡고, 한 쪽을 집중공략하는 내용을 담아, 어설퍼 보이지 않을 동화가 되어야 할텐데 일단 걱정이 앞섭니다. 마녀가 백설공주에서 슬며시 다가가 음흉한 미소를 품고 건내줄 그 맛있어 보이던 빨간 사과를 일단은 제가 하나 드리겠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어서 신선한 걸 하나 가져와. 당장!" (45쪽)



    "맞아요." 백설공주가 피식하고 웃었다. 공주는 자기 뺨이 붉게 달아오른 것을 사냥꾼이 눈치치지 못하길 바랐다. "똥이 우리를 부르네요." (130쪽)



    이런 어설픈 결말은 공주도 원치 않을 것이다. 이렇게는 아니다. (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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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실살인게임 마니악스 / 우타노 쇼고 / 한스미디어

 

오랜 시간동안 이 소설의 국내 발간일을 기다려왔습니다. 단순한 추리를 넘어서 이것은 게임입니다. 독자를 향해 날리는 소설의 직구에 정면으로 승부해보자. 당연히 소설에 당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이 소설과의 승부는 그저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침대특급 하야부사 1/60초의 벽 / 시마다 소지 / 해문


우리는 아직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의 그 여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잔잔한 인간미가 느껴지던 요시키 형사의 등장 시리즈 첫 작품이라고 하니 꼭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듭니다. 이번에는 또 어떤 본격적 사회파 미스터리를 가지고 나왔을지 매우 기대됩니다.









 조화의 꿀 / 렌조 미키히코 / 북홀릭


렌조 미키히코의 5년만의 신작. 그리고 2010년 이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 1위. 그외에도 기타등등의 수많은 수상 기록들. 이 미스터리가 읽고 싶지 않을 수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이 무더운 여름밤, 방구석에서 이런 최고의 유괴 미스터리 소설을 읽으며 미스터리한 기운에 풍덩 빠져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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