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잠복 ㅣ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원래 다작했던 작가였고, 그래서 세상에 남겨진 그의 작품이 많아서 인지, 처음 마쓰모토 세이초라는 이름을 들었던 날로부터 아직 일 년의 시간이 채 흐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벌써 그의 작품을 20여 편정도 읽어 보았습니다. 단편과 장편을 포함해서 말이지요. 하지만 아직까지 읽어보지 못한 그의 작품이 훨씬 더 많이 있다는 데 놀라움을 느끼며 한편으론 경외심이 생겨납니다. 세이초 선생님,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그 많은 작품들을 읽다보니 이제는 그가 어떠한 스타일의 글을 쓰는지 대충 파악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묘한 생각이 듭니다. 주제 넘은 소리일지 몰라도 이제는 눈을 감고서 그의 글을 읽어도 무언가―그것이 뭔지는 모르겠고 눈까지 감았지만―를 맞출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저기 저 멀리 건너편 테이블에 홀로 앉아있는 어느 마담의 작은 손에 쥐어진 와인잔 속에 담긴 액체의 빛깔만 보더라도 그 와인은 로마네꽁띠라고 맞출 수 있을 정도의 감이라고나 할까요. 그의 작품을 읽다보니 별의별 희안한 능력이 다 생겨나는 듯합니다.
《잠복》이라는 제목의 이번 단편집은 마쓰모토 세이초가 최초로 썼다는 추리소설 「잠복」외에 7편의 단편 추리소설이 실려 있습니다. 모든 단편집이 그러하듯 긴 여운을 주며 강한 인상을 남긴 작품이 있는 반면에 그러하지 못한 작품도 함께 실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대에 미치지 못한 작품이 있었다하더라도 저에게 이 책은 세이초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충분한 포만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대단한 작가의 글은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흥분된 일인 것입니다.
거장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사용해선 안된단 생각을 합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지 몰라도 장인이 한땀한땀 공들여 만들었다는 물건은 뜻밖의 일로 인해 그것이 진가를 발휘하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불현듯 손에 들려져 있던 검이 눈부시게 빛을 냈고 그 순간 검이 주인과 한 몸이 되어서 스스로 바로 앞의 적들을 미친듯이 베어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면, 그 이야기에 나오는 검을 나중에 따로 조사를 해보니 엄청난 거장이 아주 오래전 공들여 직접 제작했다던 바로 그 전설의 검이었다고 하더라, 하는 경우처럼 말입니다. 일필휘지. 쾌도난마. 일도양단. 세이초의 글에서는 미친듯이 펜을 휘두르다 깔끔하게 베어낸 느낌의 세련된 마무리를 볼 수 있습니다.
세련미는 또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소설의 배경은 50년 전의 일본 사회이지만 소설의 이야기에서는 전혀 낡은 느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물론 시대를 나타내는 몇몇 사물들의 모습이 언뜻 소설의 시대를 알아차리게 해주고 있긴 합니다만, 그런 것만 아니라면 매우 현대적인 느낌의 글이라 여겨집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술집 여성들은 물론 거의가 유카타를 입고서 끈 하나만 풀면 흐드러지게 내려앉을 벚꽃처럼 그대로 포개어질 것만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겠지만,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본다면 그런 시대적인 느낌이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대적인 느낌으로다가 검은 망사 스타킹에 가터벨트차림의 여성들이 눈 앞에서 아른거릴 정도입니다.
분명, 쉽게 쓴 단편들이 아니었겠지만.
이 정도의 단편을 뚝딱뚝딱 만들어 냈다는 것은 반칙이라 할 수 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세이초의 소설은 은근히 에로티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로 부부간의 불륜과 치정에 의한 살인, 혹은 동반자살, 질투와 시기심, 여성의 인권 같은 것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야기의 중심엔 항상 젊은 유부녀가 등장합니다. 언뜻 보기엔 크게 눈에 띄지 않을 외모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꽤 미인축에 들 것이라는, 이 틀에 박힌 묘사를 받은 인물이 약방의 감초처럼 빠짐없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런 인물을 통해 만들어진 소설의 에로티즘은 독자에게 묘한 불안감을 만들어내게 하기 일쑤입니다. 스멀스멀 속에서 피어오르는 불신과 의심, 증거에 따른 확신, 그리고 결단과 행동. 세이초의 소설에선 이런 일련의 흐름에 따른 심리의 묘사가 매우 탁월합니다.
그래서 세이초의 미스터리 단편집 《잠복》은 재즈와 닮아 있습니다. 단편을 모아 두었으니 화려한 변화를 즐길 수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되겠고, 이 단편집을 통해선 세이초만의 세련된 느낌의 선율을 들을 수 있으며 낮은 곳에서 크게 울려오는 불안과 같은 진동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거부할 수 없이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아름다운 마담이 한 손에는 립스틱 자국이 남겨진 와인잔을 들고, 다른 한 손에서는 피다만 담배 한 개피를 들고서 이쪽을 향해 연기를 품으며 무언가 눈짓을 보내는 듯합니다. 그런데 그 눈빛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는 확신이 들자마자 괜한 불안감에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단지 눈만 마추졌을 뿐이고 아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무언가 분명히 골치아픈 일이 생길 것만 같다는 수상한 기운이 생겨납니다. 그녀는 은밀한 걸음으로 이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옵니다. 곧이어 함께 마시길 권하며 내게 건낼 와인잔에는 청산가리가 녹아있을 것이라는 추측과 함께.
사다코에게 불이 붙었다는 것을 유키는 알 수 있었다. 저 지친 듯한, 정열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던 여자가 타오르고 있었다. 스무 살이나 연상에 인색하고 늘 심기가 불편해보이는 남편과 세 의붓자식으로 엮인 가정에서, 여자는 지금 해방되어 있었다. 그녀는 정신없이 매달리고 있다. (잠복, 84쪽)
누워서 신문을 반복해서 읽고 있자니, 다이치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나도 급기야 여기까지 떨어졌구나' 하는 서글픔이었다. 일본을 대표하는 신문에 기사를 쓰든 지방의 작은 신문에 쓰든, 그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하지만 허전한 마음은 논리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투영, 142쪽)
말로 설명하기 힘들었다. '굵은 목소리'라고 하면 너무 단순하다. 굵은 목소리에도 수천 가지 종류가 있다. 그런데 내가 '굵은 목소리'라고 대답하면, 듣는 사람은 어떤 고정된 유형을 만들어 버리지는 않을까? 그 점이 걱정된다. 예를 들어 '허스키한 굵은 목소리였다'고 말하면 어느 정도는 내 느낌을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겠지만, '허스키한'이라고 할 만한 특징이 없을 때는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감각을 말로 정확하게 표현한다는 건 애초에 무리가 아닐까? (목소리, 207쪽)
지친 아내에게 실증난 중년 남자가 자칫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품는 일이 많다고는 해도, 이는 용서할 수 없는 배신행위이다. 일본의 가족제도에서 남편이 차지하는 특수한 위치가 이러한 이기적인 자의식을 낳았다. 아직도 일부에서는 이러한 악습을 관대하게 보는 사고방식이 있는 듯하나, 반드시 타파해야 한다. (일 년 반만 기다려, 316쪽)
놀라는 내게 여자는 작은 목소리로 "선생님, 오늘 밤은 저를 마음대로 하셔도 돼요"라고 했다. (카르네아데스의 널, 378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