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존 그린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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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병원에서 뜻밖의 암 선고를 받았을 때, 입에서 튀어나온 첫 마디 말은 한탄의 소리도 아니었고 체념의 소리도 아니었습니다. 부정하려는 단계를 그대로 뛰어 넘어 버린 것인지, 입에선 분노의 말이 마구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암입니다'라는 말에 답할 수 있었던 유일한 소리는 의외로 '아이 썅'하는 욕이었습니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 지랄맞게도 이런 병에 걸려버렸으니 개똥같은 이 세상과 우주가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차차 주위 사람들을 정리해야만 했고, 갑자기 좁아진 나의 세상과 공간에 적응해야만 했습니다. 



    대단한 꿈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내 안에 암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 안에 있던 다른 가능성들이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견디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 꿈들은 평소에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고 듣도 보도 못한 가능성들이었지만, 앞으로 그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결이, '당신은 암이요'라는 말과 함께 정해지자 아직도 남아있을 다른 가능성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무리 작더라도 주워 모아보기로 했습니다. 평소에 감명깊게 읽었던 소설에 대한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바다 건너에 있는 작가를 직접 찾아가 작가만 알고 있을 뒷이야기를 미리 들으려 하는 마지막 여행처럼 말입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조급한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길지 않은 인생동안 내가 세상에 남겨놓은 대단한 업적은, 암과 대항해 죽는 날까지 싸우다, 싸우다 결국에 죽었다는 암적인 영웅의 일대기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남아 있는 시간들이 더욱 부족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런 식으로 병과 싸우다 허무하게 죽을 수 없다는 생각, 세상에 어떤 식으로든 기념이 될 만한 상처를 남겨 놓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불안함이 생겼습니다. 의미있는 상징을 담아서 꽤 멋진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상징하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있지만 담배에 불을 붙이지 않음으로서 죽음에게 힘을 주지 않았다는 상징과 같이, 비록 암에 걸려 몸이 병들었지만 아직 내 이야기는 암으로 인해 주제가 바뀌거나 주인공이 바뀐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며 소설 마지막 장의 'To Be Continued'를 박아 놓은 것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나의 죽음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에게 슬픔이 전이되고 그래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 싫기도 합니다. 그래서 관계를 정산하고 자신의 죽음이 세상에 끼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길 바랍니다. 그래서 협상을 시작합니다. 멀리하고 더욱 멀리하고, 정리하고 또 정리하고. 거대한 우주를 바라보고 약간의 체념을 보태어 단순한 것을 느끼려 했습니다. 감당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류하고, 기억이 스며있는 추억의 장소를 팔아 버렸습니다.



    존 그린『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암에 걸린 두 어린 남녀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조금 우울한 이야기일 것 같지만, 사실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유쾌한 이야기를 하며 병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또 아니었습니다. 도도하고 깔끔하고 발랄한데 부정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암 이야기가 재미없다는 소설의 말처럼, 소설은 암에 관한 이야기보다 병과 죽음에 대처하는 인물들의 이야기, 그리고 의미있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작은 움직임, 그리고 남녀간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울고 있으면서 동시에 미소지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잔디밭에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 보며 별들을 이어서 나만의 별자리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17에서 18. 이 두 숫자 사이에는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작은 무한대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무런 생각도 않고서 그저 시간을 소비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문득 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이건 뭐랄까, 동정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감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무한대는 다른 무한대보다 더 클 수 있다고 인정하고, 그대로 내려 놓은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작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도 무한대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죽든 이제는 그냥 그걸로 괜찮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이건 암 이야기는 아니다. 암 이야기는 재미대가리 없기 때문이다. 암 이야기에서는 암에 걸린 사람이 암과 싸우기 위해 돈을 모으는 자선단체를 설립한다. 안 그런가? 그리고 이런 헌신적인 자선단체 활동은 암에 걸린 주인공의 내면에 있던 인간의 선량함을 일깨우고, 그 사람은 암 치료라는 유산을 남겼다는 면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과 격려를 받게 된다. 하지만(…). (54쪽)



    "모든 구원이란 일시적인 거야. 난 그 애들에게 일 분쯤 시간을 벌어줬어. 그 일 분으로 한 시간을 더 벌 수도 있고, 그 한 시간으로 일 년을 벌 수도 있지. 아무도 그들에게 영원한 시간을 줄 순 없어, 헤이즐 그레이스. 하지만 내 인생이 그 애들에게 일 분을 벌어 줬어. 그건 무가치한 게 아니야." (65쪽)



    "전 말이죠. 그런거예요. 그러니까 수류탄 같은 거라고요, 엄마. 전 수류탄이고 언젠가 터져 버릴 테니까 사상자 수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싶다고요, 아시겠어요?" (108쪽)



    "죽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의 문제는."

    그가 말을 하다가 문득 멈추었다.

    "문제는 그들을 낭만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면 나쁜 놈이 되는 것 같단 말이지. 하지만 사실은…… 매우 복잡한 것 같아. 그러니까, 초인적인 힘으로 영웅적으로 암과 싸우고 절대로 불평하거나 마지막 순간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기타 등등 어쩌고저쩌고 하는, 성실하고 단호한 암환자에 대한 말들 너도 알지?" (183쪽)



    "하지만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소설의 저자가 소설 속 캐릭터들에 대해 특별한 통찰력을 갖고 있을 거라는 이 어린애 같은 생각은…… 참으로 우스꽝스럽구나. 그 소설은 종이에 몇 글자 끄적거린 걸로 만들어진 거야. 그 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그런 끄적거림의 바깥에서는 아무 생명력도 없어. 그들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소설이 끝나는 순간 존재하기를 멈춰 버렸지." (203쪽)



    세상은 소원을 들어주는 공장이 아니야. (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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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와 런던 미라 살인사건
시마다 소지 지음, 김소영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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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저는 이 소설을 읽고서,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정말로 이것은 진짜였습니다. 황량한 부두와 템스 강 수면의 풍치에 잘 녹아들어, 백만 개의 말을 초월해 런던이 가진 기쁨이며 슬픔을 제게 호소하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셜록 홈즈가 갑자기 짚어 든 가방에서 바이올린을 꺼내 들어 나쓰메 소세키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켠 멘델스존의 무언가 선율처럼, 제 가슴 속에서 이토록 과장된 말이 저도 몰래 솟아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2.

    시마다의 글은 고지식하게 젠체하지 않는다. 분명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또 소설을 위해 많은 조사를 했을 테지만, 알고 있다는 티를 내지 않으며 적당한 높이에서 독자와 나란히 나아가길 추구한다. 더군다나 그는 그의 매작품마다 틀에 얽메이지 않으려 하며 자유로운 글을 쓰기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어찌보면 그런 그의 노력이 대단히 어려운 글을 쓰는 사람들의 눈에 하찮아 보일 수도 있겠다. 게다가 그가 추구한 새로운 것이란 것이 사실은 모방과 흉내내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세상에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으니 이 부분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



    3.

    하지만 별일 아닌 것 같은 것에서 창조적인 요소를 찾아내는 것이 바로 예술가가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시마다 소지의 글은 템스 강 앨버트독에 정박하려 하지 않고, 항상 어디론가를 향하고 있으며 언제든지 출항할 준비를 다 마친 증기선의 알람 소리처럼 사람의 마음을 설레이게 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좋습니다. 그리고 그의 소설,『나쓰메 소세키와 런던 미라 살인사건』은 영국 유학 경험이 있는 나쓰메 소세키가 런던에서 셜록 홈즈와 조우하지 않았을까 하는 재미있는 생각을 담고 있는 추리소설입니다. 그래서 소설은 나쓰메의 서술과 왓슨의 서술을 교차적으로 보여줍니다. 제가 지금 어설프게 흉내내고 있듯이, 완전히 다른 형태의 글을 서로 다른 시점에서 한번씩 보이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런 구조가 대단히 재미있습니다. 말하는 사람에 따라 사용하는 단어와 용어의 차이를 구별해가며 읽는 것은, 소설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재미이고, 추리하며 가지고 놀 작은 장난감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4.

    소설에서 왓슨이 들려준다는 설정의 글은 코난 도일이 직접 쓴 소설이라 여겨도 될 만큼의 완성도를 갖고 있다. 이런 소설을 패스티시라고 하는데, 이 소설은 나쓰메 소세키의 글이라고 여겨지는 부분도 동시에 등장하기 때문에 그 완성도는 더욱 높다고 할 수 있다. 홈즈의 모험담은 지금까지 공개된 이야기로 60편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시마다는 도쿄 국회도서관에서 나쓰메의 수기로 보관된 기록과 그동안 왓슨이 공개하길 꺼리며 숨겨두었던 수기를 발견함으로써 61번째 홈즈의 모험담이 바로 이 런던 미라 살인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동시에 이 소설을 나쓰메의 문학을 공부하는 수험생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며,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더 강조한다.



    5.

    61에 대한 연구는 소설 안에서도 잠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주홍색 연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레이첼도 아닌, 이 61에 대한 연구는, 그것을 쫓는 과정에 고요한 새벽 안개의 런던 시내를 시끌벅적하게 만드는 마차 추격신이 빠진 듯해 다소 밋밋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연구의 존재만으로도 셜록 홈즈 시리즈의 부활이라고 외치게 할만큼의 향수를 만들어 냅니다. 특히 일본으로 돌아가려 하는 나쓰메 소세키를 배웅하기 위해 나타난 홈즈와 왓슨의 모습은, 62번째 이야기가 어딘가에 있다는 강한 믿음과 함께 어딘가에 있어야만 한다는 강한 집착을 만들어 냅니다. 홈즈가 만들어낸 바이올린 선율은 셜로키언들이 숨겨진 왓슨의 수기를 찾아내고야 말겠다 라는 집념을 담아, 홈즈를 그리워하는 우리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었습니다. 



    6.

    앞에서 한번 언급했듯이 이 소설은 독자의 기대치에 따라 유동적인 만족감을 선사한다. 큰 기대를 하고서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런던 소식』을 미리 읽어본 독자에게는 이 소설을 통해 역사적 사실과 그의 문학 활동에 대해 고증할 수 있을 것이고, 셜로키언들은 홈즈의 이야기를 통해 지나간 홈즈의 모험담을 비롯한 그의 사소한 버릇과 런던의 풍경을 관찰하는 것으로서 기대했던 만큼의 지식과 재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홈즈와 나쓰메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의 독자라 하더라도 가벼운 추리소설 정도의 느낌으로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7.

    개인적으로 시마다 소지의 『나쓰메 소세키와 런던 미라 살인사건』은 제가 원하는 추리소설의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잔재미가 가득 담겨있고, 설정된 인물이 개성있어서 재미있는 모습을 보이고, 가슴이 먹먹하게 만드는 약간의 감동이 배경의 느낌, 그리고 감정의 묘사와 함께 잘 어울어져 문학적인 느낌을 살짝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설을 다 읽어서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마자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고 궁금하게 만듭니다. 또한 무언가를 더 자세하게 알고 싶어서, 혹은 놓친 부분이 있지 않을까 우려해서 다시 한번 더 읽어보게 만듭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소설은 연구가 필요한 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추리소설이 좋습니다.







    세상에 새로운 사건이란 없어요. 언뜻 보기에는 별일 아닌 것 같아도 창조적인 요소를 찾아내는 것이 예술가의 눈이겠죠. (49쪽)



    "우리가 직면한 이 사건도 진행이 이렇게 독특한 만큼 자네도 기록자로서 구미가 당기겠지. 그런데 왓슨, 부탁이 있네. 이 사건은 나의 보기 드문 대실패의 기록이 되리라고 생각해."

    거기까지 말한 그는 오랜만에 자신이 애용하는 흔들의자에 몸을 깊이 묻고, 꽤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파이프 연기만 뿜어댔다. (136쪽)



    "왓슨, 이제서야 나도 고통에서 벗어날 때가 왔네. 자네의 작가적 영감이 이끄는 바가 있어서 이 사건의 전개 과정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대중서로 만들 생각이라면, 진정 힘을 발휘한 것은 내가 아니라 이 멀리서 온 손님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써넣어야 하네. 내 역은, 이번에는 참으로 미약했어." (168쪽)



    "와, 놀랐습니다. 저는 범인을 잡을 땐 한바탕 난리법석을 떨며 추격전을 벌인 끝에 잡는 거라고 생각해 왔는데요. 당신의 유명한 이름과 함께 몇 가지 소문은 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긴 했지만 그것도 상당히 축소된 이야기였던 것 같네요. 홈즈 씨가 가만히 있어도 범인이 저절로 빨려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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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향기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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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죽이는 방법, 알려줄까? 

    어느 여름 날, 한가하게 거실에 누워 하얀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저에게 친구가 불쑥 이상한 소리를 꺼냈습니다. 평소에 이렇게 이상하고 잔인한 소리를 스스럼없이 하던 친구라 갑작스런 친구의 그 말에 처음에는 대꾸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 했던 제 표정을 읽은 겐지, 친구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지더니 다시 한번 같은 소리를 되풀이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친구의 입을 통해 나올 다음 이야기를 조심스레 기다려 보기로 했습니다. 언젠가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일이 생길지 모르니 방법 정도는 알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홉 살이었던 저는 머리가 어지러워질 정도로 크게 울어대고 있던 말매미 울음소리와 함께 이어들릴 친구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박 향기』는 일정한 간격으로 이루어진 열한 편의 단편이 실려있습니다. 제목만 언뜻 봐선 달달한 여름날의 추억을 담고 있을 법한 모양을 하고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수박 향기』는 꽤 잔인한 짓을 하고서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미스터리한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매 단편마다 여름이라는 배경과 여름과 관련된 소재들이 등장하고, 또 어린 소녀의 시점에서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편들을 하나의 제목으로 묶어 두는 데 크게 무리가 없단 생각을 합니다. 한결같이 꾸준한 느낌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내년 여름에 『수박 향기』가 생각나서 또 꺼내어 읽어본다 하더라도 처음 읽었을 때와 같은 강도로 미리 기대하고 예상하고 있던 이상야릇한 느낌이 제게 똑같이 다가올 것 같습니다.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이야기가 불쑥 나타나서 천천히 제 쪽으로 오다가 돌연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깔끔한 꿈같은 느낌으로 말입니다.



    에쿠니 가오리의 글은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꽤 흥분할만한 극적인 이야기를 전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일정한 간격으로 뱉어내고 있습니다. 약간의 어두운 색을 보태어 놓고서 말입니다. 어쩌면 그녀는 크게 소리내어 말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녀의 입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일지 모릅니다. 이야기가 어둡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어둡다고 말할 수 없고, 잔인해 보이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잔인하다고 할만한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미스터리한 이야기이지만, 이런 이야기가 그렇게 대단한 미스터리라고 할만한 것인가, 하는 등등의 의문으로 사람을 무척 헷갈리게 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어린 소녀의 시선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엔 아직 어려서 세상을 잘 모를 듯해 보이지만 이야기속의 소녀 자신은 무언가를 굉장히 많이 알고 있다고 여기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미스터리함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고 유치한 느낌의 것은 아닙니다. 어린 아이들은 순수하기 때문에 어른들이 쉽게 느낄 수 없는 기괴한 현상에 잘 노출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선과 악의 구분없이 순수함에서 우러난 잔인함이 아이들에게선 잘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덮어두고 숨기려해도 자연스레 스며드는 향기, 혹은 소리처럼, 조금씩 천천히, 그리고 꾸준하게 나타나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주거주거주거주거. 주거는 말매미 울음소리입니다. 아마도 죽어, 라는 소리를 표현하려 했던 것이겠죠. 『수박 향기』에서 잠시 나왔던 이 소리가 아직도 제 귓가에서 죽어라고 울어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친구가 하려던 소리에 귀기울이기 위해 옆에 쌓아두었던 책을 천천히 펼쳐 보았습니다. 그리고 읽었습니다. 저는 책 안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들이 굉장히 잔인한 모습으로 죽임을 당하더라도 저는 아무 말없이 조용히 눈으로 훑어 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그저 그들의 죽음을 방관하고 있었습니다. 가끔 그들이 무슨 말을 제게 건내려 했지만 저는 일부러 못본 채하며 무시했습니다. 그러다 잠깐 책읽기를 멈추고 거실의 하얀 천장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생각이 없는 듯한 멍한 표정으로 누워서 선풍기가 만들어내는 바람소리를 들어 보았습니다. 그러다 눈을 감으면 또 다시 친구가 제 옆에서 속삭입니다. 

    있잖아, 사람 죽여봤어?







    가장 서글픈 것은 저녁때였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몸속에서 꾸물꾸물 기어올라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작은 몸집조차 길들지 않은 고양이마냥 어쩌지 못했다. 체념한 심정으로 이불 속에서 울 때가 오히려 더 편했다. (11쪽)



    머리를 올려놓으면 공기를 빵빵하게 불어넣은 비닐이 약간 아래로 휘었고, 그 때문에 자신의 무게를 인식하게 되어 슬펐다. 자신의 무게. 정말 그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나는 일곱살이고 언니는 아홉 살이었지만, 우리는 각자의 혼돈의 무게를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죽을 만큼 나른하고, 실제로도 아직은 모두가 죽음과 매우 가까운 장소에 있었다. 사람은 살아 있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생리적으로 알고 있었다. (42쪽)



    불가사의한 여름이었다. 사소한 일을 유독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64쪽)



    "매일 재미나게 지내고 있어?"

    불쑥 그렇게 묻기도 했다. (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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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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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해야하는 이유를 모르고 공부했던 어린 시절에 윤동주의 시를 공부하면서,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이라는 문장에 붉은 펜으로 밑줄을 긋고 그 옆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끄적거려 놓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저는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적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무엇을 그렇게 외우기 위해 노력했던 것일까요. 지금은 그때 적어 놓고 외웠던 것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기억나는 것이 없지만, 윤동주의 시를 오랜만에 만나니 열심히 공부하던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문득 무언가가 그립습니다. 시는 그런 식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렇게 열심히 필기를 했던 이유는, 아마도 그렇게 열심히 필기하면 남들처럼 윤동주를 느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어서 일 것입니다.

 


    이정명『별을 스치는 바람』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일어난 어떤 살인사건에 대한 조사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살인사건이 대개 그러하듯 가려져 있던 부분을 들쳐내는 과정은 먼지가 잔뜩 쌓인 해묵은 책을 건드린 것처럼 우리를 계속해서 콜록거리게 만들고, 드러난 진실에 대한 반전과 그에 따라 파생된 또 다른 반전은 우리의 안경을 계속해서 닦도록 하며 눈 앞의 것을 재차 확인하게 만듭니다. 소설은 마치 갈기갈기 찢어 한데 섞어 놓은 한 페이지의 내용을 다시 짜 맞추어야 하는 퍼즐처럼 1944년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있었던 일을 조금씩 보여줍니다. 그리고 당시 그 형무소에는 시인 윤동주가 있었습니다.



    전쟁 속에서 꾸준함을 잃지 않는 예술적 행위는 생각만으로도 가슴 벅참을 만들어 냅니다. 악취 속에서 태어나 먼지 속을 굴러다녔기 때문에 일자무식이라 할지라도 예술을 통해 나름의 느낌과 생각이 피어오르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었던 것인가 봅니다. 감성은 누구나 자기 안에 품고 있는 것일 테니까요. 소설에서 예술은 콘크리트 보도블럭을 깨고 자라난 잡초처럼 강한 생명력을 갖고서 아군과 적군의 구분없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흘러갑니다. 그리고 그런 흐름을 통해 한 인물이 깨어나고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괜한 흥분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은 전쟁 속에서 작은 희망을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예술이 우리에게 희망을 품게 합니다. 그러한 예술 중에서 문학이 있을 것이고, 문학 안에는 시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 안에는 사람 윤동주가 있었습니다.



    소설은 시와 책과 음악과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전쟁 속에서 우리들이 지켜야하는 것들에 대해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문장을 사용하여 격한 감정을 싣고서 흥분하듯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명사와 형용사, 쉼표와 마침표의 위치, 그리고 소설에서 시가 등장하는 시점, 그리고 행간과 여백의 공간, 각 장의 소제목까지, 모든 것들이 다 계산에 의해 배치되어 있는 듯 보여 치밀함이 느껴졌습니다. 소설의 문장들이 꽤 무거워서 빠르게 읽어 내려갈 순 없었지만, 오래동안 꼭꼭 씹어 천천히 삼켜야 했던 문장들이라 오히려 좋았습니다. 더군다나 형무소의 어두운 분위기와 절묘하게 잘 맞아떨어진 듯 했습니다.



    소설에는 윤동주의 시가 많이 나옵니다. 그의 시를 만난 것은 오래전에 헤어지고 잊혀져 생사조차 알 수 없던 옛 친구를 길가다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반가운 나머지 익숙한 그 시구들을 소리내어 천천히 읽어 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목소리가 만들어 낸 작은 울림과 떨림은 고요했던 제 감성을 자극해 괜한 짓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별을 스치는 바람』을 읽고 하늘을 우러러 한점의 부끄럼 생길 일을 저질러 버렸습니다. 시인 윤동주에 대한 시를 써버린 것입니다.




    시인 윤동주


                                               김크롱



나는 당신에게 할 말이 많은데

당신은 내게 말을 걸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당신의 시를 소리내어 읽어보지만

그렇다고 내가 당신의 말에 귀기울인 건 아니에요


 

책을 읽어 무엇하고 

시를 써서 무엇해요

 


당신을 따라서 릴케, 바레리, 지드를 읽었건만

내 안에 그들은 살아있지 않아요


당신이 만든 은밀한 지하 도서관은

벌레가 파먹은 잎사귀처럼 바스락거리지만

내 안에 살아 남은 당신은

형무소 돌담처럼 침묵하고 있어요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내 안에 없었고

프로메테우스는 끝없이 침전하고 있어요

 


모두 다 불태워 몸을 녹일 수 있다면

내 안의 당신을 태워 마음을 녹이겠어요


당신의 몸에 붉게 그어진 두 줄은

내가 한 적 없는 검열의 상흔


그래서 당신은 무슨 말을 했던가요

그런데 나는 왜 아직도 이런가요








    사람들은 필적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고백하는 것이 아닐까? 글씨의 형태와 윤곽과 위치는 쓴 사람의 심성과 욕망뿐 아니라 당시의 기분과 분위기까지 말해 준다. 획의 삐침과 굳셈에 감춰진 심성, 물음표와 따옴표, 마침표와 온갖 구두점에 숨은 성정, 자간과 행간의 간격과 밀도에서 엿보이는 심리 상태, 꾹꾹 눌러쓴 서체의 고집과 마침표와 따옴표를 생략하는 단순함, 천천히 또박또박 쓴 꼼꼼함과 날아가듯 흘려 쓴 문장의 순발력, 위쪽 모서리부터 써나가는 알뜰함. 심지어 텅빈 백지조차도 글을 쓰지 않은 그 사람에 대해 말해 준다. (1권, 37쪽)



    그는 결코 알지 못했다. 읽는다는 것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것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감각이라는 사실을. 한 줄의 문장을, 한 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한 인간을, 혹은 그의 세계를 읽는 행위라는 것을. (1권, 169쪽)



    "그런 것들을 느껴서 무엇을 하겠다고?"

    동주는 회의를 담은 물음표에 이어질 말들을 생각했다. '세계는 화염에 휩싸였고 청년들은 병정개미처럼 죽어 가는데…….' 그렇다. 시는 총알을 막지 못하고 문장은 전투를 중단시키지 못한다. 어쩌면 시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공허한 시인의 위로와 초라한 시의 격문이 무슨 소용인가? 동주는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전쟁의 광기가 언어를 초월해도 그 야만성을 증거할 것은 결국 언어밖에 없을 것이다. 가장 순결한 언어만이 가장 참혹한 시대를 증언할 수 있을 것이다. (1권, 227쪽)



    "논리에 어긋나는 거짓으로 어떻게 진실을 말할 수 있죠?"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야. 거짓과 더러움과 악으로 가득하지. 하지만 그런 모순이 우리의 삶을 떠받치고 있어. 모순은 거짓이 아니라 진실을 강화하는 방식이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 때문에 인간은 죄에서 벗어났지.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괴로우면서도 행복할 수 있었던 거야. (2권, 78쪽)



    "책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죽어갈까?" (2권, 172쪽)



    나는 나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2권, 234쪽)



    누군가는 그것들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고 들은 것들을 절대 망각 속에 사라지게 할 수 없습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무, 심지어는 거짓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과거의 잘못을 다시 곱씹을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새 출발 하자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잊지 않아야 돌이켜 볼 수 있고, 돌이켜 보아야 과오를 찾을 수 있고, 과오를 찾아야 잘못을 인정할 수 있고, 잘못을 인정해야 용서를 빌 수 있으며, 용서를 빌어야 용서받을 수 있고, 용서받아야 새롭게 출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권, 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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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밀란 쿤데라 전집 10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민음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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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이라고 부르기도 어색한 한 도시에서 태어났지만, 고향 곁 엄마 품을 떠나서 객지 생활을 시작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물론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다고 생각할 만한 거리의 장소라 크게 멀다고 여긴 것은 아니었지만, 최근들어선 그렇다고 해서 고향이란 곳이 쉽게 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구나를 느낍니다. 물리적인 거리가 아니라 심적인 거리가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멀지만 가깝고, 가깝지만 먼 느낌으로.


 

 


    가끔 고향에 가면 오래 전 친구를 만나게 되는 일이 생깁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항상 우리는 정체되어 전혀 자라지 않았구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끊임없이 과거에 얽메이고 '그땐 그랬지'하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주 보지 못한 친구들과 함께 한 그 시간만큼은 잠시 옛시절로 돌아가 즐거웠던 날을 되새겨 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친구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선 매번 공허한 무언가가 느껴졌습니다. 연결되지 않은 느낌. 정강이를 잘라내어 발목을 허벅지에 붙여 놓은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그것은 향수라는 단어가 제게 주는 조금 특별하고 개인적인 느낌입니다.



    그런데 그 느낌마저 최근엔 조금씩 쪼그라들고 있는 듯합니다. 어렸을 땐 어제가 그립고 지난 주가 그립고 지난 학년이 그립고 그랬는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리움이라는 감정의 단위가 점점 커져버리는 것 같습니다. 일 년 전의 일에 대해 그다지 그립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며, 곧 있으면 10년 단위를 훌쩍 뛰어넘은 시간에 대한 향수도 거의 느낄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어쩌다 어렵게 피어난 향수마저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점점 묽어지는 향수를 느끼고 있으니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뭔가를 잡고 싶고, 이대로는 안 될 것만 같고, 그래서 당장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다는 조바심을 만들어 냅니다.



    밀란 쿤데라『향수』는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향수의 느낌 외에 다른 이야기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쿤데라만의 고정된 스타일대로 4명의 남녀가 등장해서 각자가 갖는 생각을 들려주는 형태의 이야기입니다. 소련의 체코 침공과 맞물려 망명을 택했던 인물들이 고향인 체코에 잠시 돌아오면서 보며 느낀 것들을 꽤 어려운 말로 풀어놓고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과 체제에 대한 비판과 함께 그 당시 개인이 느꼈을 감정을 저로서는 완벽하게 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무언가를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계속해서 가슴속에 자리잡게 합니다. 그래서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한 각각의 인물들에게서 괜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굉장히 어려워 보이고 재미없을 것 같은 쿤데라의 소설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재미는 역시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글에서 튀어나온 그, 혹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 맞춰가며 퍼즐을 맞춰보는 것부터가 소설이 갖는 대단한 재미입니다. 쿤데라는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독자가 모두 다 듣길 원하기에 그는 독자들에게 끈기를 갖게 할 장치를 마련하는데 그게 바로 이 사랑이야기인 것입니다. 결국 이들의 사랑이 어떻게 끝나는가, 그것이 궁금해서라도 우리는 끈기를 갖고서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개인의 감정과 생각의 흐름을 나노 단위로 해체해 놓아서 꽁꽁 숨겨둔 비밀을 들킨 듯한 기분이 들게끔 하기도 하고, 또 무한히 깊게 공감하여 함께 울게 만들기도 하는데, 이런 그의 글은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쿤데라의 소설은 간단하게 줄거리를 요약해내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각 장면들에 대해 언급하며 여러 문장으로 요약하려 하면 더 힘들어 질 것 같습니다. 그러니 단 한 문장으로 짧게 요약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게 오히려 쉽기도 하겠고, 또 함축적으로 여러가지 의미를 담은 듯해 보일 수도 있으니 어쩌면 더 멋있어 보일 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이 소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보자면 '향수는 상대적인 시간에 따른 착각의 감정이다.'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가요. 조금 쿤데라틱한 문장이 되었나요.






    낮이 되면 그녀에게 고향의 편린들을 마치 행복의 이미지처럼 보내 주었던 바로 그 무의식이라는 영화 감독은 밤만되면 그곳으로의 끔찍한 귀환을 만들어 냈다. 낮은 버림받은 조국의 아름다움으로 빛났으며 밤은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두려움으로 빛났다. 낮은 그녀에게 자신이 잃어버렸던 낙원을 보여 주었으며 밤은 자신이 도망쳐 나온 지옥을 보여 주었다. (21쪽)



    그녀는 또다시 깊은 슬픔에 사로잡혔으나 그에게는 결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사랑이란 서로에게 모든 것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모든 것. 근본적인 단어. 모든 것, 그러므로 그녀가 그에게 기약한 육체적 사랑뿐만 아니라 용기, 즉 중대한 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사소한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필요한 용기, 다시 말해서 학교의 우스꽝스러운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아주 사소한 용기. 헌신적인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부끄럽게도 이러한 용기를 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 얼마나 기이한가, 이 얼마나 눈물이 날 정도로 기이한가. 그녀는 그에게 모든 것을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순결뿐만 아니라 그가 원한다면 자신의 건강이나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떠한 희생까지도.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보잘것없는 교장 선생님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사소함에 굴복했어야 하는가? 그녀는 자신에 대해 느끼는 불만은 견디기 힘들었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의 째째함 따위는 삼켜 버릴 위대함에 다가가고 싶었다. 그가 결국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을 위대함. 그녀는 죽고 싶었다. (108쪽)



    사랑이라는 개념(위대한 사랑,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랑)도 아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좁은 한계에서 생겨난 것 같다. 이러한 시간이 무한하다면 조제프는 죽은 그의 아내에게 그토록 집착했겠는가? 그토록 일찍 죽어야 하는 우리로서는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126쪽)



    "소비에트 제국은 주권을 갖고자 하는 나라들을 더 이상 굴복시킬 수 없어서 무너졌어. 그러나 이 나라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자기 주권을 지키지 못하고 있어. 이들은 자신들의 경제도, 외교도, 심지어는 광고 문안까지도 선택할 수 없지." (157쪽)



    그들의 합의는 완전하다. 왜냐하면 그녀 또한 오래전부터 말하지도 듣지도 못했던 말들로 흥분했기 때문이다. 비속한 말들의 폭발 속에 이루어진 완전한 합의! 아, 그녀의 삶은 얼마나 불쌍했던가! 놓쳐 버린 모든 죄악들과 실현되지 않은 모든 부정(不貞), 이 모든 것을 그녀는 탐욕스럽게 겪어 내고 싶었다. 그녀는 결코 체험하지 못한 채 상상하기만 했던 모든 것을 겪어 보고 싶었다. 관음증, 노출증, 타인들의 외설적 모습, 터무니없는 말실수들을. 지금 그녀가 실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녀는 해 보려고 노력하며 실현할 수 없는 것은 그와 함께 높은 목소리로 상상한다. (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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