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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 허풍담 2 - 북극의 사파리
요른 릴 지음, 백선희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아무리 그럴싸하게 잘 포장된 고급 철학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재미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재미가 없다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고, 그럼 그 철학은 탄생과 동시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일테니까요. 그래서 일단 모든 것에는 무조건적으로 재미가 필요합니다. 재미가 있어야만 사람을 끌어들이고, 관심을 이어갈 수 있는 끈기를 만들어내며, 또 그러다보면 그 속에 숨겨져있던 깊은 생각을 발견하게 되고, 그래서 대단한 무언가가 머리에 박히고 가슴에 새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시작이 별 것 아니었을지 몰라도 마지막엔 거대한 깨달음을 얻고서.
그렇다고 시시덕거리기만한 헤픈 재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웃음에도 뜻이 있어야 합니다. 실컷 웃고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하나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이런 건 결국 재미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실컷 웃고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웃기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조금 달라져 있음을 느낀다, 이것이 철학적 의미를 품고 있는 웃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 바로 진정한 재미입니다. 조금 진지해서 어려울지 모르는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비교적 쉽고 매끄럽게 전달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한 재미, 이것이야말로 고급의 재미이고 제가 원하는 모양의 재미입니다.
요른 릴의 『북극 허풍담』에서 저는 그런 '고급의 재미'를 봤습니다. 어찌보면 마침 제 개그코드와 잘 맞아 떨어진 소설이었기 때문에 혼자서 과장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한 두가지의 의미있는 교훈을 전달을 위해 시트콤처럼 구성된 이 북극의 이야기가 마치 눈보라가 몰아치는 그린란드 대륙의 하얗고 넓은 허허벌판 속에서 대피소로 여겨질 작은 동굴을 만난 것과 같이 반갑고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눈보라가 그칠 때까지 동굴속의 가장 따뜻한 자리에서 한숨 눈을 붙이고 일어나보니 그 동굴은 엄청나게 큰 한마리의 곰이 겨울잠을 자고 있던 동굴이었고, 마침 가장 따뜻했던 그 장소는 곰의 아랫배가 위치하고 있던 곳이었다, 라는 웃겨도 웃지도 못할 미치고 팔짝뛸 노릇의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받아 마신 것과 같은 교훈을 얻음과 동시에 우연히 겨울잠을 자고 있던 곰 한마리를 손쉽게 사냥할 수 있었다, 라는 따뜻한 배부름까지 느껴지는 그런 식으로 말입니다. 『북극 허풍담』의 느낌을 표현하자면 그렇습니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그린란드 북동쪽 연안에는 2년 계약직의 사냥꾼 몇 명을 비롯하여 온갖 부류와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간에 뚜렷한 층이 나뉘어 있지 않고 오히려 모두가 자연의 일부로 여기며 결국 모든 것은 거기서 거기라는 두루뭉술한 사고를 보입니다. 아직 북극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들은 이들이 말하는 자연에 적응하지 못해서 약간 모난 모양을 하고 있지만, 결국엔 북극에서 그들은 존재이유를 찾고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며 북극의 모양으로 다듬어 집니다. 그러다 결국엔 순수한 북극이 됩니다.
투박한 이들의 삶이 매일 비슷해서 단조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왠지 저는 이런 느슨함이 좋습니다. 왜 그런지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선 그리움이란 것이 느껴집니다. 사람이 거의 살지않는 곳이라 가장 가까운 이웃을 방문하기까지 닷새동안 썰매를 끌고 가야할 북극이지만, 이곳에서는 왠지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했던 가까운 사람, 가깝다고 여길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사람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북극이라는 공간자체가 그립습니다. 한번도 가본 적이 없고, 죽기 전에 단 한번이라도 그곳에 가볼 수 있을까 싶습니다만.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사연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사연이 타인이 보기엔 비록 작고 소박한 것일지 몰라도 그들 스스로가 생각하기엔 세상의 전부를 말하는 큰 이야기일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크기가 아닐 것입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의 입모양과 흔들리는 눈빛, 하던 이야기를 잠시 쉬고 내뱉는 숨소리,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커피잔을 잡고 놓는 손의 움직임, 이런 모든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진실된 무언가가 중요한 것일 겁니다. 비단 사람뿐만아니라 북극에 살고 있는 동물과 식물, 나무로 만들어진 오두막 집과 그 집의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굉음을 내며 부서지는 빙하와 일 년에 한번만 북극을 방문한다는 왕복선의 뱃고동 소리마저도 그것만이 갖는 나름의 사연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연을 『북극 허풍담』을 통해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다는 것에 무한한 행복을 느낍니다. 순박한 마음에서 우러난 소심한 떨림들이 북극의 찬 기운을 이겨냈습니다. 아아! 북극에서 살고 싶습니다.
향수병은 이내 강박증에 가까워졌다. 안톤은 온종일 추억의 우수에 젖어 지내기 위해 포장지로 사용했던 신문에서 흥미로운 것을 잘라 내 모으기 시작했고, 저녁마다 등불 아래서 그걸 읽고 연구했다. 지나간 세월의 편린들을 읽으며 그는 병적인 희열을 느꼈다. 주식 시세표를 맛있게 읽고, 1년 반 전 아센스 영화관의 상영 시간표를 읽으며 황홀해했다. 에트루리아 도자기에 관한 스물여섯 줄짜리 연구에 대해서는 곧 모르는 게 없어졌다. 그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친구에게 열광적으로 얘기했고, 에르버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흥미를 보였고 충분한 집중력을 드러냈다. (2권, 24쪽)
크게 보면 인생은 참으로 살아 볼 만한, 경이롭고도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어. (2권, 82쪽)
"친구, 명명백백하잖아.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한테는 바위틈의 물처럼 빤히 들여다 보이는 얘기지. 라스릴의 문제는 썰매 끈이 한 무더기 뒤엉킨 것과 똑같아. 이 이미지를 사용해서 얘기하자면, 이 문제는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뒤엉켜서 그걸 푸는 데는 내가 방금 언급한 모든 요소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개똥도?"
"그럼, 그것도 그렇지." (3권, 22쪽)
그러나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레우즈는 시를 까먹어 버렸다. 정신이 혼미해졌는지 단 한 줄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마치 내면에서부터 얼어붙은 느낌이었고, 그의 뇌는 호메로스의 웃음만이 쩌렁쩌렁 울리는 텅 빈 공간일 뿐이었다. (3권, 100쪽)
유년기를 오직 한곳에서만 보냈다면, 그리고 그곳이 강렬한 인상과 모험으로 가득한 곳이었다면 나이가 들어서 살짝 우수에 젖어 흥미진진했던 그 시절을 이따금 되돌아보는 걸 피하기란 어렵다. 인간은 젊은 시절의 무훈을 되살고 싶어 하고, 넘치는 힘과 터무니없는 자신감을 잃어버린 것을 아쉬워한다. 그래서 평화로운 지금의 삶을 짧은 한순간일지언정 젊은 시절의 풍랑 심한 방황과 기꺼이 맞바꾸고 싶은 순간이 있다. (3권, 105쪽)
"전혀 모르지만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는 법이잖습니까?" (3권, 177쪽)
"자연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어 장치를 갖고 있어. 제아무리 센 자라 하더라도 저항할 수 없는 용수철을 갖고 있다고." (3권, 220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