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 허풍담 2 - 북극의 사파리
요른 릴 지음, 백선희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아무리 그럴싸하게 잘 포장된 고급 철학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재미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재미가 없다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고, 그럼 그 철학은 탄생과 동시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일테니까요. 그래서 일단 모든 것에는 무조건적으로 재미가 필요합니다. 재미가 있어야만 사람을 끌어들이고, 관심을 이어갈 수 있는 끈기를 만들어내며, 또 그러다보면 그 속에 숨겨져있던 깊은 생각을 발견하게 되고, 그래서 대단한 무언가가 머리에 박히고 가슴에 새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시작이 별 것 아니었을지 몰라도 마지막엔 거대한 깨달음을 얻고서.



    그렇다고 시시덕거리기만한 헤픈 재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웃음에도 뜻이 있어야 합니다. 실컷 웃고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하나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이런 건 결국 재미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실컷 웃고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웃기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조금 달라져 있음을 느낀다, 이것이 철학적 의미를 품고 있는 웃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 바로 진정한 재미입니다. 조금 진지해서 어려울지 모르는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비교적 쉽고 매끄럽게 전달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한 재미, 이것이야말로 고급의 재미이고 제가 원하는 모양의 재미입니다.

 



 

    요른 릴『북극 허풍담』에서 저는 그런 '고급의 재미'를 봤습니다. 어찌보면 마침 제 개그코드와 잘 맞아 떨어진 소설이었기 때문에 혼자서 과장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한 두가지의 의미있는 교훈을 전달을 위해 시트콤처럼 구성된 이 북극의 이야기가 마치 눈보라가 몰아치는 그린란드 대륙의 하얗고 넓은 허허벌판 속에서 대피소로 여겨질 작은 동굴을 만난 것과 같이 반갑고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눈보라가 그칠 때까지 동굴속의 가장 따뜻한 자리에서 한숨 눈을 붙이고 일어나보니 그 동굴은 엄청나게 큰 한마리의 곰이 겨울잠을 자고 있던 동굴이었고, 마침 가장 따뜻했던 그 장소는 곰의 아랫배가 위치하고 있던 곳이었다, 라는 웃겨도 웃지도 못할 미치고 팔짝뛸 노릇의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받아 마신 것과 같은 교훈을 얻음과 동시에 우연히 겨울잠을 자고 있던 곰 한마리를 손쉽게 사냥할 수 있었다, 라는 따뜻한 배부름까지 느껴지는 그런 식으로 말입니다. 『북극 허풍담』의 느낌을 표현하자면 그렇습니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그린란드 북동쪽 연안에는 2년 계약직의 사냥꾼 몇 명을 비롯하여 온갖 부류와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간에 뚜렷한 층이 나뉘어 있지 않고 오히려 모두가 자연의 일부로 여기며 결국 모든 것은 거기서 거기라는 두루뭉술한 사고를 보입니다. 아직 북극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들은 이들이 말하는 자연에 적응하지 못해서 약간 모난 모양을 하고 있지만, 결국엔 북극에서 그들은 존재이유를 찾고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며 북극의 모양으로 다듬어 집니다. 그러다 결국엔 순수한 북극이 됩니다. 


    투박한 이들의 삶이 매일 비슷해서 단조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왠지 저는 이런 느슨함이 좋습니다. 왜 그런지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선 그리움이란 것이 느껴집니다. 사람이 거의 살지않는 곳이라 가장 가까운 이웃을 방문하기까지 닷새동안 썰매를 끌고 가야할 북극이지만, 이곳에서는 왠지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했던 가까운 사람, 가깝다고 여길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사람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북극이라는 공간자체가 그립습니다. 한번도 가본 적이 없고, 죽기 전에 단 한번이라도 그곳에 가볼 수 있을까 싶습니다만.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사연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사연이 타인이 보기엔 비록 작고 소박한 것일지 몰라도 그들 스스로가 생각하기엔 세상의 전부를 말하는 큰 이야기일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크기가 아닐 것입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의 입모양과 흔들리는 눈빛, 하던 이야기를 잠시 쉬고 내뱉는 숨소리,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커피잔을 잡고 놓는 손의 움직임, 이런 모든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진실된 무언가가 중요한 것일 겁니다. 비단 사람뿐만아니라 북극에 살고 있는 동물과 식물, 나무로 만들어진 오두막 집과 그 집의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굉음을 내며 부서지는 빙하와 일 년에 한번만 북극을 방문한다는 왕복선의 뱃고동 소리마저도 그것만이 갖는 나름의 사연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연을 『북극 허풍담』을 통해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다는 것에 무한한 행복을 느낍니다. 순박한 마음에서 우러난 소심한 떨림들이 북극의 찬 기운을 이겨냈습니다. 아아! 북극에서 살고 싶습니다.







    향수병은 이내 강박증에 가까워졌다. 안톤은 온종일 추억의 우수에 젖어 지내기 위해 포장지로 사용했던 신문에서 흥미로운 것을 잘라 내 모으기 시작했고, 저녁마다 등불 아래서 그걸 읽고 연구했다. 지나간 세월의 편린들을 읽으며 그는 병적인 희열을 느꼈다. 주식 시세표를 맛있게 읽고, 1년 반 전 아센스 영화관의 상영 시간표를 읽으며 황홀해했다. 에트루리아 도자기에 관한 스물여섯 줄짜리 연구에 대해서는 곧 모르는 게 없어졌다. 그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친구에게 열광적으로 얘기했고, 에르버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흥미를 보였고 충분한 집중력을 드러냈다. (2권, 24쪽)



    크게 보면 인생은 참으로 살아 볼 만한, 경이롭고도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어. (2권, 82쪽)



    "친구, 명명백백하잖아.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한테는 바위틈의 물처럼 빤히 들여다 보이는 얘기지. 라스릴의 문제는 썰매 끈이 한 무더기 뒤엉킨 것과 똑같아. 이 이미지를 사용해서 얘기하자면, 이 문제는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뒤엉켜서 그걸 푸는 데는 내가 방금 언급한 모든 요소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개똥도?"

    "그럼, 그것도 그렇지." (3권, 22쪽)



    그러나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레우즈는 시를 까먹어 버렸다. 정신이 혼미해졌는지 단 한 줄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마치 내면에서부터 얼어붙은 느낌이었고, 그의 뇌는 호메로스의 웃음만이 쩌렁쩌렁 울리는 텅 빈 공간일 뿐이었다. (3권, 100쪽)



    유년기를 오직 한곳에서만 보냈다면, 그리고 그곳이 강렬한 인상과 모험으로 가득한 곳이었다면 나이가 들어서 살짝 우수에 젖어 흥미진진했던 그 시절을 이따금 되돌아보는 걸 피하기란 어렵다. 인간은 젊은 시절의 무훈을 되살고 싶어 하고, 넘치는 힘과 터무니없는 자신감을 잃어버린 것을 아쉬워한다. 그래서 평화로운 지금의 삶을 짧은 한순간일지언정 젊은 시절의 풍랑 심한 방황과 기꺼이 맞바꾸고 싶은 순간이 있다. (3권, 105쪽)



    "전혀 모르지만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는 법이잖습니까?" (3권, 177쪽)



    "자연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어 장치를 갖고 있어. 제아무리 센 자라 하더라도 저항할 수 없는 용수철을 갖고 있다고." (3권, 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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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 레전드 시리즈 1
마리 루 지음, 이지수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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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개 눈엔 똥만 보인다고. 비슷한 판타지풍의 디스토피아 세상을 그린 소설이라 할지라도 현재의 처지나 고민, 머릿속을 가득 매운 생각들이 무엇인가에 따라 소설을 보며 집중하는 부분이 달라질 수 있구나를 느낍니다. 최근들어서 조금 달달하고 나긋나긋하며 어렴풋한 설레임같이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것이 느껴지는 풋풋한 소설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수확이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틴에이지 판타지소설에서 그것을 보았습니다.

 


 


    마리 루『레전드』가 그리고 있는 미래 세상은 여느 판타지소설이 보여주는 미래의 모습과 달리 뚜렷한 주제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미래의 모습이 틀어진 세상을 어설프게 드러내려한 헛된 노력이 아니어서 오히려 좋았습니다. 감정이 배제된 세상이라던지, 젊음이나 시간이 거래되는 세상이라던지, 하는 식의 모습이 아니라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정부의 독재와 억압 아래 계층간의 빈부 격차가 큰 사회이고, 아이들은 수능과 비슷한 시험을 치룬 뒤 점수에 따라 각각의 계층에 배속되는 세상을 그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은 꽤 어려운 시험인듯 해 보입니다. 만점을 받은 사람이 지금까지 딱 두 명있다고 하니까요. 여자 한 명, 남자 한 명.



    그런데 운명의 장난으로, 이 머리좋은 두 아이는 서로 각기 다른 계층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데이'라는 이름의 남자아이는『레 미제라블』, 혹은 『로빈 후드』의 이야기를 연상케 하는 모습으로 악명 높은 현상수배범이 된 빈민가의 아이이고, '준'이라는 이름의 여자아이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가며 최연소로 임관한 충직한 정부의 조직원이 된 아이입니다. 그런데 데이는 준의 오빠를 죽이고, 준은 데이의 엄마를 죽이게 됩니다. 나중에 어떻게 매듭짓든 일단은 이야기가 그런 식으로 흘러갑니다. 그런데 이 둘이 서로 사랑에 빠져버린다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의 함정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집안의 반대로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을 하는 것이라지만, 이 소설의 두 남녀 주인공은 서로가 철천지원수 1세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소설은 이 두 남녀 주인공의 시점을 교차로 보여주며 시간을 따라서 순서대로 보여줍니다. 소년과 소녀가 갖는 미묘한 감정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좋은 설정이었습니다. 연애소설로 치자면 이보다 더 좋은 설정은 없었을 것입니다. 십대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보니 오래되어 깊이있고 묵직한 포도주맛 사랑이 아닌, 시원하게 불꽃튀기고 치고 박고 싸우고 배신에 속삭임으로 이어지는 톡쏘는 맥주맛 사랑을 보여줍니다. 어쨌든 어떤 술이든 간에 취하는 건 마찬가지이니 서로가 서로에게 강하게 취해서 끌릴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흥미로워 보이면서 또 당연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 둘은 외모도 물론 보통 이상의 외모였겠습니다만, 뛰어난 관찰력, 그러니까 마치 홈즈가 왓슨하게 트릭을 설명해주는 식의 화려한 두뇌 액션에 서로 끌렸던 것 같습니다. 참 별게 다 끌린다 싶겠지만, 아무래도 역시 외모가 가장 중요한 요소였겠지요.



    최근에 나오는 판타지소설처럼 이 이야기 역시 단 권의 이야기로 끝날 듯해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 남아있는 많은 악당들이 존재하며, 또 잠깐 언급한 적이 있지만 아직 가보지 못한 지역과 만나보지 못한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레전드』는 '두 개의 심장 하나의 불꽃'이라는 소제목처럼 두 개의 심장이 만나서 하나의 불꽃을 이룬 서막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준과 데이, 그들의 모험을 응원합니다. 너희 둘은 이 암울한 세상을 밝게 비출 한줄기 빛이 되어 아름다운 사랑을 오랫동안 영원토록 해야 된 데이-.







    스키즈 경기장에서도 그랬지만 내 마음을 잠시 뒤흔들 만큼 예쁘장하다. 아니, 예쁘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아름답다. 그런데 아름다운 것뿐만이 아니라 소녀를 보면 자꾸 누군가가 떠오른다. 눈에 서린 표정 때문일지도 모른다. 냉정하고 논리적인 동시에 격렬하게 반항적인…… 뺨이 서서히 달아오르는 것 같아서 내리깔리는 어둠에 감사하며 얼굴을 홱 돌린다. 애초에 도와주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마음이 너무 흔들린다. 지금 당장 머릿속에 나는 생각이라고는 소녀에게 키스할 수만 있다면, 혹은 저 짙은 색깔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도록 허락해 준다면 내가 무엇을 포기할 수 있을까 하는 것뿐이다.

    "저기 말인데." (135쪽)



    소년은 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내가 자기를 빤히 살펴보고 있음을 깨닫고는 잠깐 멈칫한다. 뭔가 은밀한 감정이 순간 소년의 두 눈에 스친다. 아름다운 수수께끼. 내가 무슨 수로 소년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점들을 추측만으로 알아낼 수 있었는지, 소년 역시 내게 비슷한 의문을 품고 있음이 확실하다. 어쩌면 다음번에는 내가 소년에 관해서 또 어떤 점을 유추해 낼지 궁금해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소년이 내 얼굴에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어서 뺨에 와닿는 숨결까지도 느낄 수 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킨다. 소년이 조금 더 다가든다. 

    순간적인 찰나, 소년이 키스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154쪽)



    내 입에서 말이 채 다 나오기도 전에 소년이 상체를 내밀어 내 뺨에 손을 댄다. 여태까지 훈련을 받아온 나인 만큼 소년의 손을 막고 땅바닥으로 내리눌렀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못한 채 조금의 미동도 없이 앉아 있을 뿐이다. 소년이 나를 끌어당긴다. 숨을 들이마신다음 순간, 소년이 입술로 내 입술을 어루만진다. (162쪽)



    "너와 난 공동의 적을 가졌을지도 몰라. 그 적들이 우리를 서로 반목하게 만든 거지." (272쪽)



    "하루가 지난다는 건 새로운 24시간이 온다는 의미잖아. 그리고 또 뭐든지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난다는 뜻이기도 해. 사람은 순간에 살고 순간에 죽지. 그날그날을 열심히 즐기며 사는 거야." (3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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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 허풍담 1 - 차가운 처녀
요른 릴 지음, 백선희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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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한 세상의 북극탐험

    사냥꾼 크롱은 매일같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점사 대상을 향해 징표를 찍었고 레이드가 끝나면 혼자서 잠깐의 독서를 즐기며 그것이 인생의 낙이라 여겼다. 그런 그에게 『북극 허풍담』이란 책이 그의 손에 쥐어졌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행복한 세상을 향한 계단의 첫 번째 디딤석에 올라와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것은 북극을 향한 입장권이었다.



    『북극 허풍담』에서 작은 에피소드가 시작할 때마다 나오는 도입부의 독백을 흉내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러했습니다. 이 소설은 행복한 세상으로 갈 수 있는 입장권처럼 느껴지는 이야기입니다. 요른 릴이라는 타고난 이야기꾼이 자신의 북극 생활을 근거로 해서 지어낸 짧은 이야기. 그런데 이 이야기들이 너무나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어서 매일같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뭐 좀 재미난 일 없을까 하고 있던 저를 웃게 만들었습니다. 너무 웃겨서 그래서 무어라 말을 이어가질 못하겠습니다. 뭐 이런 세상이 다 있답니까. 하하, 하하하.

 



 

    소설은 그린란드 북동쪽 북극지역의 사냥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길고 추운 겨울을 견뎌내며 생존과 사냥에만 집중하고 있을 것만 같은 투박한 그들에게도 나름의 생각과 고민, 생활, 위기 등등 아무튼 뭐가 되었든 여러가지 작고 사소한 이야깃거리가 마구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전혀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전개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중에도 바로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도통 감잡을 수 없게 합니다. 흘러가는 이야기만으로도 자유로움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선과 반전을 넘나들며 뒤집고 흔들고 던졌다 받으며 절대로 틀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각오로 이야기는 자유를 즐기고 있습니다. 단, 재미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고려해서 말이지요.



    『북극 허풍담』은 휴가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잊고 이야기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휴가 여행때 함께 하고 싶은 책을 이야기할 때, 상처를 치유해주고 위안을 준다는 자기계발서와 더위를 싹 다 잊게 해준다는 공포소설따위는 이 이야기꾼이 들려준 북극 허풍담과 게임이 안됩니다. 세상을 완전히 잊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 풍덩 빠져들어서 이야기와 하나가 된다는 느낌입니다. 남동풍이 부는 어느날밤 문을 열고 나가 바지를 벗고서 한참을 뛰었습니다. 왜냐하면 사과맛 도넛을 닮은 엠마가 그리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라고. 지금 엠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어서 약간의 슬픔을 느끼고 있지만, 입고 있는 이 옷가지 모두를 내놓고서라도 엠마를 사랑할 권리를 갖고 싶었습니다. 비록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선 며칠밤을 눈보라를 뚫고고서 혹독한 추위와 맞서싸워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남자라면, 그리고 사나이라면, 또 사랑을 위해서라면, 한낱 스웨터 한 장쯤이야. 그런데 문제는 이 북극 동네에는 단 한명의 여자도 없다는 데 있습니다.



    제가 방금했던 이야기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 또한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도대체 이게 뭔가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이야기의 존재를 알았다는 것, 그리고 이 이야기를 읽었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낍니다. 우쭐해지는 기분까지 생깁니다. 이야기가 담겨진 꾸러미를 소유했다는 느낌, 그래서 행복해하고 웃을 수 있다는 권리를 얻은 느낌입니다. 7월 23일부터 3일간은 여름휴가 기간이니 아무도 나의 휴식을 방해할 수 없다는 기분, 혹은 7시 23분부터는 매일 찾아오는 내 쾌변의 시간이니 아무도 나의 공간에, 즉 신성한 변소에 침입할 수 없다는 신성불가침의 권리를 얻은 기분이 듭니다. 나 하나만을 위한 이글루를 찾은 것입니다. 드디어. 마침내. 만세!






    그들은 수탉의 철학에 관한 생각들을 주고받았으며, 그럼으로써 자연스레 자신들의 철학을 발전시켰다. 그렇게 그들은 여러 까다로운 문제들을 깊이 파고들어 토론하고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며 서로를 아주 흥미롭게 생각했다. (47쪽)



    우리 모두를 위한 자리가 있을 거야. 왜냐하면 그때가 되면 저 아랫동네에서는 역사가 끝날 테니까. 그 사람들은 다들 너무 똑같아져서 여담을 적는 부분에 한 줄이면 다 담을 수 있을 거야. 그 사람들한테는 역사가 없을 거야.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잘 새겨들어. 이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일이니까. 그 사람들은 현재까지 써온 역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여백 메우기요 수다일 뿐이며 우리에게 가르침을 줄 만한 무언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그때가 되면 눈길을 북쪽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거지. 곤경에 처하면 늘 그래 해왔으니까. 장담하지만 여기에 좋은 본보기가 있거든. 너와 나와 낯짝과 다른 사람들, 우리는 세계사의 본보기들이지. (69쪽)



    북극에서는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된다. 하나의 생각을 미리부터 배척하는 법이 없다. 첫째, 그 생각을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생각으로 밝혀질 수도 있기 때문이고, 둘째, 사냥꾼들 사이에 긴 대화와 토론으로 이해를 증진시킬 기회가 항상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한센 중위의 계획을 대뜸 물리치지 않았고, 이어지는 며칠 동안 그가 자기 계획을 펼치도록 내버려 둔 채, 찬반 양론을 비교 검토하는 데 몰두했다. (105쪽)



    이 대목에서 매스 맨슨은 빌리암이 이 주제에 적응할 수 있도록 계산된 침묵을 끼워 넣었다. 그가 방금 건드린 주제는 그린란드의 북동쪽 세계에서 접근이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희귀한 폭탄 같은 것이어서 조심스레 다루어야 했기 때문이다. 북극에서 여자란 먼 상상의 실체이기에 이곳 사람들은 모호하고 조심스러운 표현으로 암시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곳에서 이 피조물에 대해 천박하거나 외설적으로 말하는 것을 듣는 일은 극히 드물다. 모든 사냥꾼은 아름답고 고결한 자기만의 연애 사건을 혼자 간직하고 싶어한다. 사실 매스 매슨도 그저 여성에 대해 일반적인 차원의 생각, 작은 구체적인 경험을 이야기하는 데서 멈출 생각이었다. 경험하는 것도 감미롭지만 거기서 벗어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감미로웠던 모험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엠마가 무대에 등장했다. 그녀는 그의 상상에서 곧장 튀어나와, 그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준비를 갖추고 전면에 나섰다. (126쪽)



    그건 정말이지 감동적인 사건이었다. 이제 화상실은 시워츠에게 화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더 이상 화장실 없이 지낼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레우즈의 집이라 열쇠를 받으려면 매번 간청해야 했고, 그러자니 성가시기도 하고 굴욕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단 변소에 자리를 잡고 작은 창문 너머로 바깥을 내다보면 그 모든 불편이 싹 잊혔다. 그 순간 시워츠는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된 느낌이 들었고, 북극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지만 그의 뿌리가 저 아래 문명 세계의 어딘가로 뻗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날씨가 어떻건 아직도 바깥에서 볼일을 보고 있을 주변의 사냥꾼들을 연민 어린 마음으로 생각하며 자신이 남들과 다르며 우월하다고 느꼈다. 그는 변기에 올라앉은 사람이었다. 이 황홀한 순간만큼은 그가 그린란드 북동쪽에서 화장실에 앉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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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꾸는 책 읽기 - 세상 모든 책을 삶의 재료로 쓰는 법
정혜윤 지음 / 민음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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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저는 항상 책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이런 것일까요. 저는 지금 모니터 앞에서 최근에 읽었던 한 권의 책 이야기를 하려고 키보드를 투닥거리며 앉아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아직까지도 결정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매번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글을 쓰고 있는 중에도 계속해서 그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무언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글을 써내려가다가 이도저도 아닌 책 이이기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이건 고질병같은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그 고민은, 사람들에게 책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위치에서 책을 평가한 글을 쓸 것인가(사실 평가할 입장은 아니지만), 아니면 책을 보며 느꼈던 개인적인 감상과 생각을 기록하는 글을 쓸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선택의 고민입니다. 둘 다 적절하게 잘 섞어서 아저씨 여기 짬짜면 한 그릇이요, 라고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그렇게 손쉽게 단발의 주문으로 끝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저로선 매번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도 그것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고민만하다가 결국 이 글이 끝날 것이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책을 읽는 사람입니다. 이 말을 남들에게 한다는 게 무척 쑥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을 스스로가 할 수 있다고 자신에게 약간의 허용을 허락한 지 대략 10개월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래서 딱 그정도의 시간만큼은 책이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를 주는 지 몸소 체험해서 얻어 축적한 경험이란 것이 생겼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그동안 책읽기를 통해 얻은 경험이 이 책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과 얼마나 일치하는가를 비교해가며 이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과연 이 책은 흔한 책읽기 찬양을 드러내며 자기계발의 글에 그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우리들이 가졌을 궁금증을 해소시켜주며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는 글인가. 이런 부분에 대해 나름의 판단을 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제가 여기에서 무슨 평을 한단 말입니까. 그래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삶을 바꾸는 책 읽기』를 읽는 것 자체로로 우리는 삶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삶을 바꾸는 책 읽기』는 아마도 우리들이 평소에 책을 읽으며 품었을 법한 궁금증을 미리 예상하는 질문부터 하고 있습니다. 일단 책에서 이야기한 그 질문들부터 나열해보겠습니다. 바쁜데 언제 책 읽어요? 책 읽는 능력이 없는데 어떡하죠? 삶이 불안한데도 책을 읽어야 하나요? 책이 정말 위로가 되나요? 책 읽은 게 쓸모가 있나요? 책의 진짜 쓸모는 뭐죠? 책을 오래 기억하는 방법은?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 



    저자는 평소에 자주 받았던 이런 질문들에 대해 상냥하게 대답해줍니다. 그동안 읽었던 수많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하며 말이죠. 그런데 단지 밑줄을 그어놓고 이래서 이런 것이고 저래서 저런 것이라며 논리를 내세워서 우리를 설득하려는 내용의 글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점이 저는 매우 좋았습니다. 고리타분한 책 이야기를 하는 흔한 책이 아니었고,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묘한 끌림이 느껴지는 책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우러난 공감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한 따뜻한 속삭임이었다고나 할까요. 비록 세상이 이 책을 매우 대단하다고 인정할지 고전처럼 큰 울림을 준 책이라며 치켜세울지 어떨지 그것은 모를지언정 나는 이 책을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들게끔 한 귀엽고 예쁜 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사랑한다는 말은, 그러니까 보통의 사람이 맨정신으로 흔히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결국 저자는 우리들에게 책읽는 사람들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며 책 때문에 생겨난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는 데 성공합니다. 그 답이 최고의 답이 아닐 지 몰라도 적어도 책을 읽는 사람들만큼은 공감한다고 인정할 수 있는 답이란 생각을 합니다. 제가 여기에서 앞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따로 언급하진 않겠습니다. 책 읽기에 대한 모든 해답은 결국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것이요, 하는 식의 애매한 말장난을 치면 않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마지막까지 밝히지 않고 숨겨둔 비밀질문의 존재이유를 생각해보니 이 책의 비밀스러움이 제 글로 인해 이렇게 허무하게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은 듯해 보이기도 해서 일단은 그것이 무엇인지 여러분께 궁금증만 생기도록 만들어놓고 이렇게 허무하게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내야할 지 고민만하다가 역시나 이렇게 제 글이 끝나버리는군요. 저는 왜 항상 책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이런 식일까요.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은, 그것도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 손으로 직접 골라서 읽는 것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스스로 '굳이' 해 보는 경험입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키워 보는 경험입니다. 나를 키우는 시간은 내가 한 인간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다고 느낄 만한 시간입니다. (45쪽)



    책을 읽는 능력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책을 읽는 데 꼭 필요한 능력들이 있긴합니다.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능력, 자신을 채웠던 반복과 습관의 타율성을 비우고 새로운 리듬과 질서를 받아들이는 능력 같은 겁니다. (…) 진정한 독해력이란 문자를 정확히 읽어 내는 능력이 아니라 무엇을 읽건 거기에서 삶을 바라보는 능력입니다. (57쪽)



    저는 책에서 본 낙관적 비관주의자의 모습을 그에게서 봅니다. 그는 불안하기 때문에, 깊게 절망했기 때문에 변화를 향한 의지를 불태웁니다. (82쪽)



    진정한 위로는 진정한 희망이 그러하듯, 상황을 좋게 보는 데서 생기는 게 아니라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는 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101쪽)



    우리는 꼭 문학 평론가나 학자가 되려고 읽고 쓰는 것이 아닙니다. 사는 데 도움을 받고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서 읽고 쓰는 겁니다. 서평은 아마추어의 예술입니다. 서평은 자기 생각을 써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혼란스러워 보여도 진실된 마음이 담겨 있으면 됩니다. 서평은 자기 자신입니다. 나의 서평이 누군가의 마음과 통한다면 너무나 좋습니다. 나와 그 누군가는 친구가 된 셈이니까요. (167쪽)



    그리고 저도 모르게 저만의 기도 형식을 발견하게 된 듯합니다. "제가 읽었던 책들도, 그리고 제가 만났던 좋은 사람들의 영혼도 이렇게 제 혈관 어딘가에 흐르게 해 주십시오. 그것들을 지금 당장은 제가 불러내지 못한다고 해도 때가 되면 그것들이 '네, 저 여기 있어요.' 하고 나오게 해 주십시오. 절 혼자 가게 버려두지 마세요." 그래요. 제 기도는 절 혼자가게 버려두지 마세요, 였던 겁니다. (218쪽)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질문에서 시작되어 질문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뒤의 질문은 앞의 질문과 다릅니다. (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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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관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증말로. 물이 오를대로 오른 것일까요. 거의 매 작품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좋은 글을 보여줘서 개인적으론 이미 작가의 이름만으로 그의 소설은 믿을만하다고 여기고 있는 몇 안되는 작가중 한 명입니다만, 나무의 정확한 나이를 알려면 직접 베어서 나이테를 세어보아야 알 수 있듯이 이번에는 그가 또 어떤 소설을 가지고 나왔을까 궁금해서 직접 그의 소설을 베어 내어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역시 미치오 슈스케는 미치오 슈스케였습니다. 물이 오를대로 올랐군요. 그만큼 좋은 글이라 그의 소설의 나이테에 줄 하나가 더 그어지는 것이 느껴집니다. 증말로 신기하게 그런 느낌이 생생하게.

 



 

    굉장한 사건, 어둡고 무시무시한 음모, 미스터리한 전개, 소름돋게 만드는 대반전. 흔히 그의 소설에서 볼 수 있었던 이런 것들이 『물의 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치오 슈스케의 소설만이 갖는 공통된 무언가가 이 소설에도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집니다. 그것은 아주 낮은 곳에서 천천히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 썩 좋은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엄청나게 나쁜 것도 아닌데, 그것은 무언가 위로받길 원하고 치유가 필요한 그런 생각과 감정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굉장히 어른스러운 한 아이의 시선을 통해 그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소설속의 아이들이 나누는 대화와 고민, 생각과 감정을 보고 있으려니, 나는 이 나이때 무슨 생각을 하고 지냈던가 하는 생각에 괜히 제 자신이 움츠려들었습니다.



    아무튼 소설은 우리의 마음속에 낮게 흐르고 있을 어두운 감정을 조금 특이한 전개로 보여줍니다. 마음의 호수가 겨우 가라앉아 고요해졌다고 여기고, 침전한 감정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갈 때즈음, 다시 어두운 호숫물속으로 한 손을 집어넣어 훼훼 젓는 식으로다가 우리의 감정을 흐트려놓고 무언가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물의 관』은 상처을 치유하고 아픔을 딛고 일어나 성장하자는 내용의 소설입니다. 그리고 치유는 상처가 아프지않게 가만히 두고보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아픔을 꺼내어 똑바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설은 잔잔해지려는 우리의 감정을 계속해서 훼훼 젖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소설에서 보여준 어두운 무언가는 결국에 치유가 됩니다. 전혀 억지스럽지 않았고 확실한 경계를 넘어 한단계 발전했다고 여길만큼의 뚜렷한 형태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합니다. 흔한 성장소설의 모습처럼 모든 갈등이 자연치유되어 하하호호 웃는 식의 결말이 아니어서 개인적으로 무척 좋았습니다. 소설이 보인 치유는 완전하고 완벽한 치유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성장해야할 부분이 남아있고 계속 성장해야한다는 의미를 담은 여운이 느껴지는 결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결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소설에서 크고 중요한 인물과 인물의 대화 뿐만 아니라 매우 작게 묘사되고 있어서 거의 보일듯 말듯한 배경과 사물의 느낌이 좋았습니다. 이런 느낌은 『가사사기의 수상한 중고매장』에서도 똑같이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묘사하던 배경은 단순히 시점의 이동에서 온 보여주기식 배경이 아니라, 잔잔한 소리가 들리고 은은한 향기를 맡을 수 있는 '풍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풍경은 마치 살아있는 듯해 보여서 자세히 보고 있으면 그 풍경이 품고있는 기억마저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어쩌면 이런 풍경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 안에서 낮게 흐르고 있었던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끝으로, 우리는 세상의 어느 위치에 있든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일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상처주고, 또 상처받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처로부터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망각이라는 좋은 치료제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망각하려 노력해도 그렇게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그런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는 게 굉장히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무언가로부터 자신에게 가해질 고통에 방어하기 위해 잊어야 한다면 스스로가 추억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그속에서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단 생각을 해봅니다. 억지로 잊으려 하는 것이나 억지로 만들어낸 기억 속에서 사는 것이나 사실 별반 달라보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어찌되었든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면 일단은 한번 그렇게 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기왕에 이토록 살기 힘든 세상에 태어나 오늘을 살고 있는데. 아아, 증말로.





 


    하지만 괴롭힘이 중단된 그 순간, 이끼가 벗겨져 아쓰코의 마음은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나고야 말았다. 아쓰코는 언제 그 아이들의 손이, 발이, 말이 날아들지 모르는 캄캄한 곳에 벗겨진 마음과 함께 방치되었다. 밤바다라면 바닷가로 되돌아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아쓰코는 돌아가야 할 곳이 없었다. (59쪽)



    나, 내가 만든 추억 속에서 살아가기로 했어. (130쪽)



    ……그건 도대체 어떤 심리일까. 누군가를 비웃는 동안은 자기 자신이 조금 더 나은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도 모르지. (181쪽)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과 자기 자신. 그것들이 전부 철썩철썩 밀려오는 슬픔에 젖어 차가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알맹이를 모조리 꺼내서 지나가는 들개에게라도 먹이고 싶었다. (302쪽)



    뭔가를 해결하는 것과 뭔가를 완전히 잊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3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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