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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전기 -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존재하는 그 땅의 역사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유달승 옮김 / 시공사 / 2012년 5월
평점 :
예루살렘의 역사는 곧 세계의 역사입니다. 역사의 입장에서 볼 때 천년 만년 태평성대를 누렸던 왕국은 단 한줄로 요약할 수 있는 재미없는 역사가 되겠지만, 계속해서 치고 박고 싸워서 며칠사이에 땅주인이 여러번 뒤바뀌었다면 그것은 재미있는 역사가 될 것이고 할 이야기가 많은 역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수시로 뒤바뀌었던 이야기들이 여러가지 형태의 기록으로 잘 남겨져 있다면 그것은 더욱 생동감 넘치는 역사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너무 생생해서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처절한 이야기가 될 지라도 말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의 신이 사는 집이자 두 민족의 수도이며 세 종교의 사원이고, 하늘과 땅에서 두 번 존재하는 유일한 도시라고 합니다.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뭔가 굉장히 복잡한 구성을 이루고 있는데 이 책을 통해 예루살렘의 역사를 찬찬히 살펴보니 이렇게 알차고 다양한 구성을 이룰 수밖에 없구나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구성은 근본적으로 조화를 이룰래야 이룰 수가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예루살렘을 이야기할 때 서로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예로들며 그들이 서로를 최대한 자극하지 않도록 하라고 경고하고 있나 봅니다. 예루살렘의 역사를 보면서 만약에 전세계가 다시 전쟁의 포화에 휩싸이는 그날이 온다면 아마도 예루살렘이 그 중심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예루살렘 전기』는 한 인물이 아닌, 한 도시와 지역 전체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 기록은 전기傳記가 아니라 전기戰記에 가깝습니다. 예루살렘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는 이 책을 보고 있자니 마치 예루살렘이 평화로웠던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듯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 책이 말하는 예루살렘의 모든 기록은 전쟁의 기록입니다. 서로 미워하고 그래서 싸우고 또 죽이고, 그 죽음을 복수하고, 또 그 복수를 복수하고. 신의 도시이고 하늘과 가장 가까이 닿아있다던 예루살렘이 정말로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고 원하던 그 천상의 도시가 맞긴 한 것인가 묻고 싶습니다. 만약 지구상에 지옥으로 향하는 문이 있다면 그 문은 분명 예루살렘에 있을 것입니다.
처음 이 책의 첫 페이지를 열었을 때 현재의 예루살렘이 왜 이런 골치아픈 동네가 되었을까에 대한 질문에 답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이쪽저쪽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본 후 개인적으로 무언가 결론을 내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그렇게 하질 못하겠습니다. 예루살렘의 주인이 태초부터 누구였다고 단정지어 말한다는 것이 억지스러워 보입니다. 예루살렘의 위치가 지정학적으로 제국이 생겨날 때마다 주인이 바뀔 수밖에 없는 위치이고, 또 큰 전쟁이 발생할 때마다 수많은 민족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썰물처럼 빠져나갈 수밖에 없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거쳐갔던 민족과 종교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지금까지도 약간의 경계를 허물지 않고 서로 절대로 섞이지 않은 상태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기합니다.
한편 예루살렘이 도대체 어떤 마력과 같은 힘을 지닌 장소이기에 그토록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인가 하는 괜한 궁금증이 생겨납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에 홀린 듯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출구가 없는 이 좁은 지역으로 이방인들이 몰려들다보니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런 잦은 사고들이 큰 전쟁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외모가 다른데다 언어까지 다르니 분명히 서로가 서로를 다른 생명체 보듯 했을 겁니다. 애초에 서로가 다름을 인정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예루살렘을 가운데 두고 싸우는 여러 민족과 종교에 대한 천 페이지에 가까운 방대한 이야기를 보고있으니 모래탑 가운데 깃발 하나를 꽂아두고 누가 모래탑을 무너트리는지 게임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지금의 예루살렘은 중앙에 꽂혀있는 깃발 주위에 모래가 얼마남아있지 않은 상태로 보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위태롭습니다. 그리고 이 게임이 끝나는 것은 세상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다면 예루살렘에 속해있는 종교와 민족은 서로 상대방을 자극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고, 또 세계가 나서서 예루살렘의 일에 간섭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현재 모습에 대한 책임은 세계의 역사에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모든 도시가 외부의 사고방식이 들어오는 창구이지만 예루살렘은 외부세계를 비추어 내부의 삶으로 드러내는 양면거울이었다. 절대적인 신앙의 시대든, 정의로운 제국의 건설이든, 복음의 계시든, 세속적인 민족주의든 간에 예루살렘은 그 상징이자 지렛대가 되었다. 그러나 서커스의 거울이 그러하듯, 거울에 비친 모습은 언제나 왜곡되고 기형인 경우가 많았다. (16쪽)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 (197쪽)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무슬림과 프랑크 양쪽 모두에 의해 예루살렘 땅이 파괴되었으므로 양쪽 모두에 책임이 있다. 우리가 할 얘기는 예루살렘, 십자가, 그리고 이 땅에 관한 것이 전부이다. 예루살렘은 우리 예배의 중심이며 우리는 결코 예배를 포기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살라딘은 알 쿠드스가 무슬림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했다. "예루살렘은 우리의 것인 동시에 당신들의 것이다. 예루살렘은 당신들에게보다 우리들에게 더 위대하다. 예루살렘은 우리의 예언자께서 밤의 여정을 온 곳이며 천사들이 모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434쪽)
중동에서 일어나는 일이 흔히 그러하듯, 유럽인들은 동양인들이 자신들의 선한 의도에 의한 정복을 감사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518쪽)
그리스도교 복음주의자들과 유대인 랍비들 모두가 유대인의 귀환을 꿈꾸었다. 그것은 몬티피오리의 업적이었다. 새로운 유대인 부호들, 특히 로스차일드 가문의 엄청난 부는 바로 그 당시에 디즈레일리가 말했던 것처럼 히브리 자본가들이 팔레스타인을 사들인다는 개념에 힘을 불어넣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국제 정치와 금융의 결정권자로서 그 힘이 최전성기에 올라 있었으며 런던은 물론 파리와 비엔나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몬티피오리에게 돈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몬티피오리의 변치 않는 꿈은 "예루살렘이 유대인 제국의 수도가 되도록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585쪽)
미국과 이스라엘은 그 이상의 것을 공유하고 있다. 두 나라 모두 '신이 관여하는 자유'라는 이상 위에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새로운 시온, 즉 '언덕 위의 도시'이며 이스라엘은 회복된 옛 시온이다. (825쪽)
평화의 씨앗은 단순히 자갈밭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 땅을 독에 물들게 했다. 평화가 평화를 만든 사람들을 불신하게 만들었다. 예루살렘은 오늘날 정신분열적 두려움 속에 존재하고 있다.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은 감시 서로의 동네에 들어가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는다. 세속적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쉬지 않고 불경한 옷을 입는다는 이유로 돌을 던지는 초정통파 유대인들을 회피한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은 성전산 기도를 시도함으로써 경찰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무슬림들의 불안을 자극한다. 그리스도교 종파들은 여전히 서로 으르렁거린다. 예루살렘 시민들의 얼굴은 긴장돼 있고, 목소리는 화가 나 있다. 그리고 누구든 심지어 자신이 신성한 계획을 실행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세 종교의 종교인들조차도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837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