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 미쓰다 신조 작가 시리즈 1
미쓰다 신조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며칠 전에 미쓰다로부터 선물을 받았습니다. 수고스럽게도 일본에서 직접 항공택배를 통해 보내주었습니다. 그것은 미쓰다 신조의 소설, 『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의 특별 한정판 에디션이었습니다. 상업적인 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모습의 두툼하고 웅장한 모습을 한 책입니다. 팬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소장가치를 지닌 도서로 여겨지겠지만, 지하철에서 책을 펴서 읽다간 옆사람에게 피해를 줄 정도로 거대한 크기의 책입니다. 그런데 책을 들거나 옮길 때마다 책 안에서 희안한 진동이 느껴졌습니다. 두툼하고 어색한 길이의 책등 안에 어떤 빈 공간이 있는데 그 안에서 어떤 덩어리 하나가 굴러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깝지만 칼로 그 책등을 찍어서 쩍 갈라보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안에 서양식 집 모양을 한 조그만 모형이 있었습니다. 소설에서 말했던 그 인형장 말입니다. 히히히.


 


 


    미쓰다 신조의 『기관, 호러작가가 사는 집』은,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그것의 끝과 경계를 전혀 헤아릴 수 없는 호러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소설은 작가 미쓰다 신조 본인이 등장해서 호러 소설을 집필하는 한 작가가 기이한 집에서 경험했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메타적 구조를 통해 가상과 현실의 넘나듬, 그러니까 소설의 안과 밖으로 넘나듬이 묘한 현실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분명히 호러소설인데, 이 이야기는 당연히 가짜인데, 가짜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는데, 왜 이렇게 진짜같지? 라는 말이 안되는 비논리적인 사고의 전개를 경험했습니다. 호러소설이니 말이 안되는 것은 당연한데 왜 이렇게 사람을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것입니까. 



    이 책이 주는 현실감은 이야기 속에서 미쓰다 신조 본인의 생각을 본인의 입으로 직접적으로 내뱉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리 느껴집니다. 작가로서 고민하는 부분들, 그리고 다른 작가들의 소설에 대한 자신의 생각, 독자와의 만남과 독자와 나누는 대화. 이 모든 것이 무척 사실적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 부분은 사실인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굳이 호러 소설 속 이야기의 진위를 하나하나 따져본들 밑도끝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점들이 현실과 교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은은하게 분위기를 몰아가는 모습이 재미있습니다. 특히 다른 작가들의 소설을 언급하는 부분은 이미 아는 작가들의 이름과 소설의 제목을 보는 것 만으로도 반가움을 느꼈고, 몰랐던 작가들의 이름과 그들의 소설 제목을 봤을 땐 새로운 책을 소개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마저 느껴낄 수 있었습니다.



    미쓰다 신조의 이야기는 참으로 집요합니다. 집요하고 끈덕지게 물고 늘어져 독자를 설득시키는 맛이 있습니다. 분명히 시작은 '기껏해야 호러소설일 뿐이지 않는가'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하는 삐딱한 자세로 말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결국 저는 이 작가의 집요함에 항복했고 가슴 속에 무거운 공포를 느끼며 이 이야기를 진짜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야기 안에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야기 안에 또 이야기가 있고, 그런데 또 그 이야기 안에 이야기가 있어서, 어디에서 부터가 가짜라고 딱 잘라 말하기가 힘듭니다. 소설 속에서 현실을 현실이라고 인지할 수 있는 장치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걸 찾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공포 영화에서 곧 죽을 사람들이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귀신이나 괴물이 나올 것 같은 어두침침한 장소를 향해 뭔가에 홀린 듯 제 발로 걸어가듯이 소설의 다음 장을 천천히 넘기도록 합니다. 바로 눈 앞에 무언가가 일렁거리며 현실 밖의 이야기라고 넌지시 알려주고 있으며 잡힐 듯 말 듯하게 보이고 있지만,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마음을 다잡고 무엇이 무엇이었는지 진실을 인지해내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호러작가가 사는 집으로 집요하게 몰아붙인다, 히히히.

미쓰다 신조 작가 시리즈의 시작점으로 여러분을 초대.



    공포 이야기에서 결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야기 속 갈등이 모두 다 해결되고 속편에 대한 기대감도 느껴지지 않는 말끔한 공포라면 그것은 더이상 공포가 아닐 것입니다. 뚜렷한 형체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확신이 생길 찝찝한 여운같은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이 주는 찝찝함은 정말로 대단합니다. 끝난 듯 한데 아직 끝나지 않은 구조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더 이상 남아있는 페이지가 없는데 이야기가 더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아아, 이런 찝찝함. 그런데 저는 이런 느낌의 이야기가 좋습니다. 이런 선물을 이렇게 직접 손수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쓰다 신조 님. 히히히.







    확실히 그 순간,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을 정도로 '섬뜩'했다. 하지만 어째서 그랬는지 코토히토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무슨 일이 터지지 않는 한 왜 '섬뜩'했는지는 알아낼 수 없었지만 그 순간 몸을 덮친 '섬뜩'함에서는 지금까지 체험한 적이 없는 뭔가, 압도적인 힘 같은 뭔가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쩌라는 말인가. (99쪽)



    아까도 말했듯이 확실히 소설을 쓰다 보면 작가가 의도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갈 때가 종종 있다. 그러니까 나는 이번에도 그렇게 신경은 쓰지 않았다. 하지만 연재를 하면서 점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쓰면 쓸수록 어쩐지 들어가면 안되는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듯한 꺼림칙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한줄 쓸 때마다…… 한 문단을 쓸 때마다…… 한 회 분량을 쓸 때마다…… 조금씩이기는 하지만 곰팡이나 잿물 같은 것이 서서히 몸에 차오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최근에야 겨우 그 곰팡이나 잿물 같은 것이 사실은 공포라는 감정이 아닐까, 하고 깨닫기 시작했다.

    괴기소설을 쓰는 작가 스스로 공포를 느끼는 소설. (169쪽)



    그렇구나. 저 계단처럼 보이는 것은 역시 상처다. 위장을 절개한 수술 자국이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위장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저 상처를 벌리면 된다. 아까 전에 본 피의 환상은 바로 힌트였다. (245쪽)



    특히 현대인이라면 유령의 형태와 출현 방법이 어지간히 참신하지 않는 한 겁에 질려 벌벌 떨 지경까지는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은 '일어났다고 하는' 괴이한 일 그 자체, 현상 그 자체에 무서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즉 미지의 뭔가에 대해 느끼는 불안이다. (281쪽)



    예, 집에 홀린 거예요. (342쪽)



    호러의 성립. 그것은 작중 인물의 공포를 독자가 자기 일처럼 느낄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미쓰다 신조는 의성어, 의태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면서(히히히, 라는 웃음) 아주 끈질기고 집요하게, 때로는 우직하고 딱딱하게, 또는 과도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화자의 흐름에 밀착해 그 심리를 그려낸다. 그리고 그 일그러진 심리가 뭔가에 홀린 듯한 공포를 독자에게도 전염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호러작가가 사는 집』에 나오는 편집의 뒷이야기나 취미나 기호를 드러내는 이야기도 화자가 어떤 인간인지를 뚜렷하게 드러내 그 내적 세계를 더 현실적으로 구축하기 위한, 발생하는 괴이한 일을 믿도록 하기 위한 필연적 수단이다. (4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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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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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역할놀이. 롤플레잉 게임. 일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규칙을 정해두고 그 안에서 자기가 해야하는 역할을 그 인물이 된 듯 충실히 행하는 게임이 있습니다. 이런 게임의 진정한 매니아들은 게임 속 대사와 행동, 심지어 채팅까지도 가상의 시공간에 알맞는 말투와 어휘를 사용해가며 완벽히 그 곳에 녹아들어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데 동참하곤 합니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만들어 그곳에서는 확연히 구분된 또 다른 나를 위한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세상에서 아무리 실제와 다른 캐릭터를 만들어 게임을 한다해도 무의식 중에 성격이 새어나와 표출되어버리는 어찌할 수가 없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완전하게 분리된 자아를 갖고 있지 않는 한 완벽하게 녹아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미나토 가나에『고백』에서 이런 식으로 펼쳐지는 게임을 봤습니다. 소설은 여섯 장으로 나뉘어 한 사건을 두고 각 인물이 가졌던 생각과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사건과 이야기 속에서 이들은 완전히 분리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인물이 가지고 있던 기억과 생각이 그들이 처한 상황과 그들의 시선을 기준으로 조금은 엉뚱하게, 혹은 어디로 튀어버릴지 모를 이야기를 합니다. 많은 인물들 중에서 분명히 가해자도 있고 피해자도 있고, 착한 사람, 나쁜사람도 있는데 이런 기준을 임의로 정해서 무조건적으로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며 주사건과 관련 없는 일이 사소한 모습을 한 채 숨겨져 있던 것을 발견하고, 그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들의 입장을 헤아리며 '그럴 수도'라며 수긍하게 됩니다. 이렇게 설득당하는 기분이 참으로 묘합니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그들의 행동에 동의하고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알 것도 같다 라는 미묘한 감정의 흔들림이 생겨납니다.



    이런 느낌은 소설 속 인물들이 생명력을 얻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가끔은 한 권의 소설을 다 읽고도 주인공의 얼굴이 전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이야기가 재미있었고 구성도 좋았는데, 어떤 연유로 인해 소설 속 인물들이 생각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인물을 만들고 다듬는데 성의가 부족했다는 느낌이랄까요. 반면 『고백』은 인물을 만들어 내는데 정성을 다한 작가의 노력이 느껴집니다. 생명을 불어넣기 위한 입김같은 것 말입니다. 모든 인물들이 이야기 속에서 빛을 내고 있으며 각자의 매력이 느껴집니다. 시선을 완전히 옮겨가며 이야기를 풀어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TV채널 바꾸듯 손쉽게 잘도 풀어냈습니다.



미나토 가나에의 데뷔작이면서 대표작이 되어버린 소설.

제 딸을 죽인 범인이 우리 반에 있다며 시작한 고백의 끝은 어디로.



    게임을 언급했던 이유는 소설 속의 인물들, 아이나 어른이나, 모두에게서 당돌한 맛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괜히 극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내며 극에 치닿는 인물들의 행동이 과민반응같아 보이고 과장되어 보입니다. 아무리 살인사건과 관련되어도 그 정도는 아니다 라는 생각 말입니다. 물론 이점이 장점으로 작용하여 소설에서 속도감이 느껴졌고 읽는 내도록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고 봅니다. 일본 학원물 애니나 영화, 소설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식의 극적임 말입니다. 또 개성이 뚜렷한 수많은 인물을 만들어 내, 그들의 성격을 두각시켰던 게임을 잘 만들었던 일본스타일의 문화가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을 보고 '게임'이란 단어가 생각났습니다.



    『고백』의 이야기를 가상의 판타지라고 정해 놓고,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게임을 펼친다면 과연 나는 어떤 인물을 선택했을까. 이 중에서 어떤 인물이 가장 재미있을까, 혹은 이야기 속에 그대로 녹아들어 역할놀이를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발칙한 상상이지만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완전히 그들이 되어서 그들의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같이 느끼며, 그들의 입장이 되어서 이야기해보는 게임.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은 그런 식의 고백을 '게임'하고 있는 소설입니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해도 마나미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자신의 죄를 반성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두 사람이 생명의 무게와 소중함을 알았으면 합니다. 그것을 안 후에 자신이 저지른 죄의 무게를 깨닫고, 그 죄를 지고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54쪽)



    착한 일이나 훌륭한 행동을 하기란 힘듭니다. 그렇다면 가장 간단한 방법은 무엇일까. 나쁜 짓을 한 사람을 질책하면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가장 먼저 규탄하는 사람, 규탄의 선두에 서는 사람에겐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겠지요. 아무도 찬동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규탄하는 누군가를 따르기란 무척 쉽습니다. 자기 이념은 필요 없고, '나도, 나도'하고 말만 하면 그만이니까요. 게다가 착한 일을 하면서 일상의 스트레스도 풀 수 있으니 최고의 쾌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한 번 그 쾌감을 맛보면 하나의 제재가 끝나도 새로운 쾌감을 얻고 싶어 다음번에 규탄할 상대를 찾지 않을까요? 처음에는 잔학한 악인을 규탄했지만, 점차 규탄받아야 할 사람을 억지로 만들어 내려 하지 않을까요? (78쪽)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느 집단에 속하거나 직함을 얻음으로써 안도하고 있지 않을까요.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아무 직함도 없다는 말은 자기가 사회의 일원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 하지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은둔형 외톨이'니 '니트족'이니 하는 이름을 붙여버리면 그 시점부터 그것이 그 사람들의 소속이자 직함이 되고 맙니다. 사회 속에서 '은둔형 외톨이'나 '니트족'이라는 자리를 확보한 사람들은 그것만으로 안심해서 일을 하거나 학교에 가려는 노력을 그만두는 거예요. (127쪽)



    능력도 없는 주제에 자존심만 센, 그런 놈들이 제일 싫거든. 발명가인 내 입장에서 보면 너는 어디로 보나 인간 실패작이야. (171쪽)



    그런데 세상은 대체 범죄자의 어떤 점을 궁금해 할까? 태생? 내면에 숨은 광기? 아니면 역시 사건을 일으킨 동기일까? 그렇다면 그 언저리 부터 써볼까 한다. (207쪽)



    이 녀석을 죽일까? 살의란 일정한 거리가 필요한 인간이 그 경계선을 넘어왔을 때 생기는 감정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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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 - 방탕아인가, 은둔의 황태자인가? 김정남 육성 고백
고미 요우지 지음, 이용택 옮김 / 중앙M&B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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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3대째 세습으로 이어져온 북한의 권력 구도는 그들이 추구하는 체제에 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내부 사정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삼남인 김정은이 권력을 승계하고 북한 내 모든 지도층 권력을 끌어모아 확고한 자리를 마련하기까지 장남 김정남의 존재가 큰 변수가 될 것은 분명합니다. 조선시대 태종이 세자책봉에 불만을 품고 왕자의 난을 일이키듯 김정남이 북한 지도층에 그런 난을 일이킬지도 모른다는 전망과 함께, 그렇기 때문에 중국 정부가 김정남을 호위하며 중국에서 김정남을 잡아두고 있는 것이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습니다.

 

 


    일본내 북한 전문 기자, 고미 요지가 쓴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는, 김정남과 공항에서 우연히 마주친 인연을 계기로 주고받은 이메일 내용과 직접 만나 인터뷰했던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기자 입장에서 고미 요지는, 그대로 은둔해버릴지도 모를 김정남을 어루고 달래며 세상에 꺼내놓기 위한 작업을 조심스레 펼쳐보입니다. 아닌 척하며 자극적이고 민감한 질문을 슬며시 해보기도 하고, 그 질문 때문에 갑자기 돌아서 버릴지 모를 김정남의 미세한 반응에 주목하기도 합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서 그런 부분들이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김정남이 인터뷰를 통해 말했던 국제 사회에 대한 견해, 그리고 북한의 외교, 정치, 경제 분야에 대한 해법 제시 등은 전문적인 지식과 타당한 근거를 통해 전망하고 예측하고 있진 않습니다. 그저 이 분야에 대해 조금만 관심을 갖고 신문 기사 국제면을 주시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정남의 육성 인터뷰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북한 지도부의 핵심 인물, 그 중에서도 김정일의 장남이 그런 말을 직접 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더욱 가치있어 보입니다.



    김정남은 2001년 일본에 밀입국하려다 처음 언론에 노출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의 사진이 북한의 황태자라는 이름을 하고 인터넷을 떠돌았으며, 그 사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그는 가족과 함께 디즈니 랜드에 가려고 했다고 합니다. 북한의 여권으로는 출입할 수 있는 나라가 거의 없기 때문에 도미니카 여권을 만들었고, 위조한 여권으로 일본에 가려다 일본의 출입국관리국에 잡힌 것이라고 합니다. 방식은 틀렸지만, 소시민적인 인간미가 느껴지는 대목이었습니다. 북한의 절대 권력을 쥐고 있었을 것 같았던 북한의 황태자에게 이런 고충이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김정남은 인터넷과 매우 가까운 사람입니다. 고미 요지와 주고받은 150통의 이메일 중에서 하루에 몇번씩 실시간으로 즉시 답장을 보내주기도 했으며, '노코멘트'라는 영어식 한글을 사용하기도 하고, 'ㅋㅋㅋㅋ'라는 인터넷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이메일 본문의 내용만을 봐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굉장히 개방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또 그는 한국인 친구도 많이 있으며, 중국이나 일본의 한국식 술집에 자주 간다고 합니다. 그런 그는 북한 문제에 대한 질문마다 항상 "북한은 개혁·개방을 해야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실제로 정치적인 발언과 국제 사회에 대한 견해를 많이 표하고 있지만, 스스로는 북한의 정치와 권력에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떤 말이 진실인지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그가 상당히 개방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지금 현재 김정남은 북한 정부로 부터 어떤 압력을 받고 있으며 그 때문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김정일 사망 이후 김정남은 고미 요지와 연락이 뜸해져 있는 상태입니다. 김정은의 권력 승계가 완료될 때까지 김정남의 발언 하나하나가 북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국과 마카오를 떠돌며 은둔 생활을 하는 방탕한 황태자라 할지라도 매우 신중을 기하고 조심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나라를 자유롭게 오가지 못하고, 떳떳하게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황태자라니. 그의 기구한 인생에 연민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은밀하게 주고 받은 이메일과 첩보작전을 연상케 하는 비밀 인터뷰까지.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은 묘하게 재미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에 근거해 각색한 소설과는 분명히 달라 보입니다. 이메일의 원문을 그대로 담았기 때문에 느껴지는 어색함이 오히려 현장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김정남이 했던 이야기들에서 큰 의미를 둘 순 없을 것입니다. 그는 조심스럽고 중립적인 입장의 묘한 대답만을 하고, 또 민감한 사항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피해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메일와 인터뷰 내용을 통해 볼 수 있었던 그 외적인 부분을 통해 인간 김정남을 알 수 있어서 무척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들은 굉장히 흥미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목할 이 책이 이제 세상에 나왔고, 일본을 통해 북한 지도층에서 이 책에 실린 김정남의 발언 내용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북한이 김정남을 어떻게 다룰지, 이 책으로 인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무척 궁금합니다.







    김정남은 북한 경제에 관해 "개혁·개방을 하지 않으면 경제 파탄이 일어날 것은 불 보듯 뻔하지만, 개혁·개방을 하면 체제 붕괴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만 축내고 있는 셈입니다"라며 정확하게 분석한다. (9쪽)



    빗장을 꼭꼭 걸어 잠근 비밀의 나라로, '이메일'이라는 매우 현대적이면서 가느다란 실 한 가닥이 비집고 들어가 이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41쪽)



    일본에는 김정남 씨에게 관심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국제 감각도 있으시고 외국 생홛도 길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다른 잡지나 《문예 춘추》에 앞으로 수기를 쓰시는 문제에 대해 검토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정남 씨에 대한 오해를 풀 수도 있고, 공화국에 대하여 호소하고 싶은 것을 모두 정확하게 게재할 수도 있습니다. 고미 요지 드림. (64쪽)



    어릴 때 북한에서 외부인과 철저히 격리되어 살았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부친이 당시 유부녀이자 유명 영화배우이던 모친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을 북한 주민들에게 극비에 부치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관저 밖으로 나갈 수도, 친구를 사귈 수도 없습니다. 어릴 적 그 외로움이 아마도 자유를 선호하는 지금의 저를 만든 것 같습니다. 신문 기사는 게재되었나요? 김정남 드림. (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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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라 - 상
후지타니 오사무 지음, 이은주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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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영화 한편을 보고서 보기 흉한 꼴을 하고 펑펑 울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사토루와 같은 나이의 어린 시절의 일입니다. 그날은 중간 고사가 있기 전날밤이었고, 밤새도록 시험 공부를 할 생각으로 늦은 시각까지 책상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다 몰려오는 잠을 쫒을 겸 어두운 거실의 TV 앞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이 깰까봐 소리를 낮춰놓고 조용히 TV를 봤습니다. 그때 본 영화가 <시네마 천국>입니다.

 


 


    지금의 전 그때 그 영화를 보지 않고 영원히 그 영화의 존재를 모르고 지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아름답고 감상적이었던 120분의 주요 장면으로 요약하고, 이런 식의 짧은 영상 하나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 서글펐고 가슴 시렸습니다. 물론 영화의 그 장면들만이 토토의 인생사에서 중요했던 유일한 장면임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의 기억은 좋든 싫든 간에 잔인할 정도로 아프거나 가슴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기억만을 남겨 놓습니다. 지금의 제가 그때 그시절 시험을 잘 봤는지 어찌 되었는지 전혀 기억해내질 못하지만, 시험 전날에 공부한답시고 밤 늦게까지 있다가 영화 한편을 보고 결국 밤새도록 울었다는 기억만 남아있듯이 말입니다.



    저는 그 영화의 장면 중에서도 특히 오랜 세월이 지나서 중년이 된 남녀가 재회한 그 부분에서 눈물을 펑펑 쏟아냈습니다. 자동차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와 여자. 남자가 실내등을 켜자, 여자는 등을 끄며 그러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 장면. 우습지만, 어린 제가 그때 그 장면을 보고 세월의 덧없음을, 그리고 지금의 이 모든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그건 지금의 제 인격의 한 부분을 만든 주요 장면일지 모릅니다. 아무튼 저는 그 장면을 보며 분노했습니다. 그때 흘린 눈물의 시작은 분노의 감정이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탄 배는 끊임없이 어디론가를 향해 흘러가야만 하는가. 스스로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름에 모든 것을 내맡겨야 하는가. 그 자리에 멈춰있을 수도, 그리고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가. 의지와 상관없이 어디론가를 향해 흘러가야만 하는 인생에 대해 분노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분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 눈물은 곧 체념의 눈물로 변했습니다. 세상의 거대한 흐름 앞에서 자신이 너무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무엇도 거스를 수 없는 나약함에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세상에 분노해서 크게 소리쳐보아도 반혀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결국엔 그런 분노와 소리침은 공허한 것이라는 것에 좌절했습니다. 그리고 싫어졌습니다. 무엇이 싫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당시의 전 그저 모든 게 다 싫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전 무척 어리석었고, 어렸습니다. 그렇다고 지금의 제가 그때와 비교해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고 성숙해진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저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어리석고, 어리고, 여전히 그때와 마찬가지의 미성숙한 상태입니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현재의 저는, 그 이후 오랜 시간동안의 제 자신이 지내온 모습을 과거의 저와는 달리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제 자신이 파도와 타협하던 모습과 흘러가는 배 위에서 그저 물에 빠지지 않기만을 위한 버팀의 시간을 보낸 모습을 알고 있다는 것. 그 시간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차이뿐입니다.



    서점에서 '후지타니 오사무'라는 이름을 검색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책을 제외하곤 검색되어 나타난 책의 제목이 없었습니다. 예전에 다른 소설이 나왔던 적이 있지만 지금의 서점에는 없는 모양입니다. 유명하지 않거나 재미가 없었거나 아무튼 여러 이유로 인해 국내에서는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검색 결과 없음'이라는 메세지를 보고 저는 묘하게 안도하고 있었습니다. 자서전인지 무언지 알 수 없는 이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이 제 글 또한 그런 자서전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니 그점이 참으로 역설적으로 보입니다. 혼자 간직하고 싶은 이야기.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이야기. 그런데 가끔 보고 싶은 이야기. 『배를 타라』는 저를 이기적으로 만드는 소설입니다. 부끄러운 제 자신을 말하고 있었던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후지타니 오사무는 이 소설을 쓰고 인터뷰를 통해 "청소년들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썼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른이 되고 다시 이 소설을 봤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제게 있어선 솔직히 그때 읽든 지금 읽든 차이점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아직까지 전 청소년 때의 제 모습과 달라진 것이라곤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르겠습니다. 10년, 20년 뒤,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이 소설을 읽는다면 지금은 보지 못했던 무언가를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저는, 어린 그 시절 <시네마 천국>을 보고 울었던 과거의 모습을 한 채 『배를 타라』를 읽으며 여전히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자신을 '고귀한' 존재라 느끼던 자애심이 순간 부서졌을 때 한꺼번에 밀려들었을 혼란. 자신의 한계를 깨달으며 방황할 수 밖에 없었던 현실. 아름다웠던 기억들, 아련한 추억들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 회상의 재료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회상은 결국 천 페이지를 넘기지 못할 이야기일 뿐이다는 사실에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소심한 남성에 대해 분노했습니다. 아니, 그것은 남성의 소심함이었습니다. 남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소심한 모습, 그것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저 자신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소심함은 사실이었고, 저 자신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남자들이 가지고 있으며 충분히 그것을 인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설은 그것을 철학적으로 분석해서 합리화하려는 청소년기의 소심한 몸부림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괜히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대로 놓아두면 될 것을 저는 그것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부정하기 위한 분노였습니다. 화를 낸다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고, 아닌 척 할 수 있을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저를 분노하게 만들었던 것은, 왜 우리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잔인하게 흘러갈 수 밖에 없는가. 그리고 한없이 아름답고 순수하며 깨끗한 무언가는 왜 세상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으려 하는가. 소설의 이야기마저 왜 꼭 현실의 모습을 하고선 잔인하게 흘러가야만 하는가. 불길한 예감은 왜 이토록 잔인하게 적중해서 내 가슴을 후벼파야만 하는가. 이런 것들이 저를 괴롭게 했고 여러번 분노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잠시 분노를 가라앉히기위해 읽던 책을 내려놓고 책읽기를 수차례 쉬어야만 했습니다. 



    그나마 소설은 읽기를 잠깐 멈추면 그만일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의 세상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화가나면 화가 나는대로 눈물이 나면 눈물이 나는대로, 그래도 세상은 흘러갑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정도로 힘들고 아프고 슬퍼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눈물 범벅이 되어 전혀 앞을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도 눈물을 닦아낼 그 시간은 여전히 흘러가고 있으며 잠깐 멈추거나 돌아볼 수가 없습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은 언제 파도칠지 모를 먼 바다의 모습을 하고 우리의 배를 흔들고 있습니다. 항해하며 느낄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배를 타지 않으면 그만일 감정일 것입니다. 하지만 소설은 우리에게 '배를 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배를 탄 이후의 모든 일들은 그저 '그것으로 됐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결론짓기에 그것은 끝을 낼 답이 아니라고 여기며, 그래서 무언가 아쉽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러한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결국에 우리들은 혹시라도 이 항해가 끝나는 종착점 어딘가에는 우리가 그동안 품었던 질문에 대한 답이 존재하고 있진 않을까 하는 의문, 기대감, 희망, 호기심 등등, 항해를 해야만 하는 여러가지 이유를 갖고서 계속해서 나아갈 뿐입니다. 그 자리에 멈춰있을 순 없기 때문입니다.









    고귀한 인간은 자신을 기준으로 사물을 판단하므로 타인을 동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고귀한 인간 자신이 더욱 '가혹'한 상황에 처해 있으니까. (上 30쪽)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건너편 쪽을 마주볼 수 있는 장소에서 그녀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가 내려오자마자 하행선 전철이 들어와, 나를 쳐다본 그녀를 금방 볼 수 없게 되었다.

순간, 내가 사랑에 빠진 것을 확실히 알았다. (上 84쪽)



    나는 어떤 투명한 쓸쓸함 갓은 것이 가슴속에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 당시에는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어쩌면 이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의 주역이 될 수 없다. 우리 인생의 주격은 음악이고, 음악의 이 절대적인 아름다움 앞에서 우리의 기쁨이나 슬픔, 분노나 초조함 같은 건 거의 의미가 없다. 음악은 이 세상에 태어났으나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앞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불쌍한 협잡물에 지나지 않는다. (上 135쪽)



    사랑의 아픔이니 사랑의 슬픔이라는 말은 소설이나 영화는 물론이고 텔리비전의 멜로드라마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알아주지 않으면 남자들은 대부분 울거나 한숨을 쉬거나 일기를 쓰거나 벽을 치거나 빗속에서 절규하거나 했다. 소설은 그런 남자들을 아름답게 그리고, 영화는 그들을 슬픈 음악으로 포장한다. 하지만 실제로 자신이 그런 처지가 되면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그 상황에서는 아름다움이란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다. (上 150쪽)



    이 아름다운 여인에게 싸움을 거는 건 얼마나 쉬운 일인가. 사랑하고 있다고 본심을 고백하는 것에 비하면 말이다. (上 251쪽)



    맞아, 미나미. 나 역시 착하기만 하지는 않아. 가능하면 미나미의 연습 시간을 절반이나 그 이하로 줄여서 함께 여러 곳에 가고 싶어. 아침부터 밤까지 쭉 둘이서만 있고 싶어. 그리고 나는 너와 섹스가 하고 싶어. (上 316쪽)



    그 말은 격려가 되었다. 동시에 가슴 한쪽에 얼마간의 불만도 느꼈다. 그 무렵 나는 이미 자신을 한 사람 몫을 하는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 '자신'이다, 자신이라는 것은 이미 만들어져 있다고 선생님이 아닌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사람들에게 제시할 수 없었다. 조금도 미숙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모든 것이 확실히 미숙했다. (上 353쪽)



    내가 지금까지 책을 읽는다는 명목으로 해왔던 정체가 한순간에 드러났다. 이해한 것도 아니고 공감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난해해 보이는 책을 선택하여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페이지를 넘기고 정말로 공감한 것처럼 책을 덮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이 확실히 주위 사람들에게 목격되었는지를 확인했고, 그곳에 아무도 없을 때는 자기 자신을 목격자로서 속여넘겼다. 자신을 속인 것이다. 그런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행동을 나는 지금까지 몇 년 동안이나 '독서'라는 명목으로 해왔던 것이다. (下 31쪽)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겋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악기에는 악기 자체의 원리가 있고 인간의 육체에도 독자적인 원리가 있다. 연주는 그 두 원리가 서로 겹쳐지는 부분에서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연주자는 그 원리를 조합하여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악기와 자신의 육체에 관련된 지식과 경험, 단련은 단순히 '악기를 꺼내서 켜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下 50쪽)



    늠름하고, 참을성 있게, 그리고 말하지 말 것.

    그렇다면 젊은이여 너는 사나이답게 승리를 거둘 것이다. (下 64쪽)



    나는 패배한 수컷이었다. 인간인 패자에게는 아직 미학이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수컷인 패자에게는 미학 같은 건 없었다. 그저 한없이 우스꽝스럽고 보기 흉하고 무가치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下 98쪽)



    진짜 되고자 하는 사람이 되기까지 나는 너무 부족한 겁쟁이였다. 게으른데다 눈곱만큼의 재능도 없는 한심한 인간이었다. (下 279쪽)



    음악은, 인간이 인간을 부르기 위해서 만들어졌던 것이다. 음악은 아름답고, 사람은 아름다운 것에 매료된다. 그곳에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반드시 누군가가,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자신 이외의 누군가가 다가올 것이다. 최초의 음악을 만들어 낸 인간은, 여기에 없는 사람, 여기에 자신이 있다는 걸 모르는 누군가를 부르기 위해서 지금 이렇게 플루트를 불고 있는 것이다. 오직 혼자서. (下 315쪽)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 밤 나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을 절감하고 울었던 것 같다. 그것은 행운이나 불행 같은 것은 아니었다. 운명이나 숙명 같은 것과도 조금 달랐다. (下 338쪽)



    아무도 없는 곳에서 연주하는 독주에도 청중은 있다.

    왜냐하면, 너를 보고 있는 또 하나의 네가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下 351쪽)



    그것으로 됐다. (下 3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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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터스 블랙 로맨스 클럽
리사 프라이스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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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미래는 과학의 발달로 인해 인류가 200세 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옵니다. 그러다 대규모 화학전쟁이 발발합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20대와 80대 사이에 위치한 중장년층의 인류는 세상에서 사라지고, 인류는 두 극단적인 무리로 나뉩니다. '스타터'라는 미성년자 집단과 '엔더'라는 노년층 집단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프라임 데스티네이션이라는 이름의 한 의학미용 회사가 노인들에게 미성년의 몸을 빌려주는 사업을 시작합니다. 부유한 노인들은 거액을 들여 젊음을 빌리고, 가난한 아이들은 그들에게 몸을 맡깁니다. 리사 프라이스『스타터스』는 이런 미래 세상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보통의 SF소설들이 그렇듯, 『스타터스』도 우울한 미래 세상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으며, 권력과 부는 특수 계층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들에겐 지금 당장의 배고픔이 급한 일이기 때문에 자유와 평화, 평등, 권리, 행복과 같이 기본이라 여겨지는 당연한 것들이 하찮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보호자가 없는 무지한 아이들은 불합리한 체제 속의 불평등한 계약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럴 수 밖에 없었다'라는 설정이 보여주는 불편함은 미래를 그린 소설과 영화 속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그림이라 이제는 꽤 친숙하게 느껴졌습니다.



    숲을 보호하자는 문구가 적힌 전단지를 배포함으로써 자연보호운동을 실천하자. 이런 운동은 의도는 좋았지만 방법이 틀렸단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환경운동가들이 많은 것을 그것 자체로 부정하고 거부하는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스타터스』에 젊은이의 몸을 대여하고 점유하는 행위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런 시스템을 파괴하려는 한 엔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엔더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스타터의 몸을 잠시 빌려서 사용합니다.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지만 저는 이런 행위를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방법들 중에서 가장 좋지 않은 방법을 선택한 것 같급니다. 이 모습이 매우 이기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발생한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을 합의하에 금전으로 보상하려는 뒷처리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체를 렌탈해줬던 스타터는 그 엔더에게 마음을 열고 순수했던 의도만을 이해하며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갑갑할 노릇입니다. 역시 자본의 힘은 위대하다는 것일까요.



    그런데 한편,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 소설에서 세대차이에서 오는 계층간의 갈등이 해소되는 모습을 부분적으로나마 보이려 했단 생각이 듭니다. 중간층이 없어져 소통의 끈이 끊겨버린 세상에서 결국 이들이 동시에 추구하려는 세상의 모습은 하나라는 것을 말합니다. 얘나 어른이나 같은 것을 즐기며 같은 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결국 세대간의 격차는 좁혀질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의 관심을 사기 위해서 어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없는 무언가, 그러니까 자본의 힘을 이용한 선심보이기가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반면 소설 속의 엔더들에게서 경험에서 우러난 진지한 대화와 깊이있는 사색, 현상에 대한 통찰력 같은 지혜가 보이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스타터들에게 엔더가 이런 식으로 접근했다면 조금 더 훈훈한 내용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쩌면 스타터나 엔더나 외모가 같다면 완전히 '같을 수 있다'라는 것을 보임으로서 계층간의 벽을 허물기 위해 작가가 의도한 장치였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해봅니다. 혹은 괜히 이 모든 것을 복잡하게 해석하려는 저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렵고 복잡한 듯해 보이는 이야기를 했지만, 소설『스타터스』는 단순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또 소설로 말하려했던 것은 단순히 미래의 모습 보여주기에 그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린 아이의 몸을 빌려서 새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는 자극적인 소재를 속도감있게 풀어쓴 이야기. '일지도 모른다'는 식의 독특한 상상력을 동원한 미래 모습보이기. 그리고 사춘기 십대 소녀의 알쏭달쏭 사랑의 감정 배우기. 환상적 신데렐라 판타지 이야기.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 모든 것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잘 버무려 놓았단 생각입니다. 속도감 있는 전개에 적절한 반전까지 SF영화 한편을 본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읽기에 좋아 보였던 소설입니다.









    곧, 나는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릴 것이었다. 곧, 내 몸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거였다.

    꿈을 꾸고 있었다. 꿈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그런 꿈이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거란 얘기는 듣지 못했는데. 하지만 정말 나는 꿈을 꾸는 중이었다. (74쪽)



    신데렐라가 그 멋진 무도회 드레스를 입고 신나게 즐겼던 밤에, 왕자에게 고백하려고 한 적이나 있나? 오 그런데요 왕자님, 저 마차는 제 것이 아녜요, 전 실은 더부살이 하고 있는 지저분하고 가여운 맨발의 청소부일 뿐이거든요. 이런 고백을 하려고 생각이나 했느냐 말이야. 아니지. 신데렐라는 그저 순간을 즐겼잖아.

    그리고 나서 자정이 지나자 조용히 사라졌을 뿐. (145쪽)



    그 애는 내게 작별 키스를 했다. 전과 같지 않았다. 죽음의 무게처럼 우리의 입술에 달라붙은, 내 거짓말의 무거운 짐이 얹혀 있었다. 그 애는 떠났다. (3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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