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배를 타라 - 상
후지타니 오사무 지음, 이은주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영화 한편을 보고서 보기 흉한 꼴을 하고 펑펑 울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사토루와 같은 나이의 어린 시절의 일입니다. 그날은 중간 고사가 있기 전날밤이었고, 밤새도록 시험 공부를 할 생각으로 늦은 시각까지 책상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다 몰려오는 잠을 쫒을 겸 어두운 거실의 TV 앞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이 깰까봐 소리를 낮춰놓고 조용히 TV를 봤습니다. 그때 본 영화가 <시네마 천국>입니다.
지금의 전 그때 그 영화를 보지 않고 영원히 그 영화의 존재를 모르고 지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아름답고 감상적이었던 120분의 주요 장면으로 요약하고, 이런 식의 짧은 영상 하나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 서글펐고 가슴 시렸습니다. 물론 영화의 그 장면들만이 토토의 인생사에서 중요했던 유일한 장면임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의 기억은 좋든 싫든 간에 잔인할 정도로 아프거나 가슴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기억만을 남겨 놓습니다. 지금의 제가 그때 그시절 시험을 잘 봤는지 어찌 되었는지 전혀 기억해내질 못하지만, 시험 전날에 공부한답시고 밤 늦게까지 있다가 영화 한편을 보고 결국 밤새도록 울었다는 기억만 남아있듯이 말입니다.
저는 그 영화의 장면 중에서도 특히 오랜 세월이 지나서 중년이 된 남녀가 재회한 그 부분에서 눈물을 펑펑 쏟아냈습니다. 자동차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와 여자. 남자가 실내등을 켜자, 여자는 등을 끄며 그러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 장면. 우습지만, 어린 제가 그때 그 장면을 보고 세월의 덧없음을, 그리고 지금의 이 모든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그건 지금의 제 인격의 한 부분을 만든 주요 장면일지 모릅니다. 아무튼 저는 그 장면을 보며 분노했습니다. 그때 흘린 눈물의 시작은 분노의 감정이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탄 배는 끊임없이 어디론가를 향해 흘러가야만 하는가. 스스로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름에 모든 것을 내맡겨야 하는가. 그 자리에 멈춰있을 수도, 그리고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가. 의지와 상관없이 어디론가를 향해 흘러가야만 하는 인생에 대해 분노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분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 눈물은 곧 체념의 눈물로 변했습니다. 세상의 거대한 흐름 앞에서 자신이 너무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무엇도 거스를 수 없는 나약함에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세상에 분노해서 크게 소리쳐보아도 반혀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결국엔 그런 분노와 소리침은 공허한 것이라는 것에 좌절했습니다. 그리고 싫어졌습니다. 무엇이 싫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당시의 전 그저 모든 게 다 싫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전 무척 어리석었고, 어렸습니다. 그렇다고 지금의 제가 그때와 비교해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고 성숙해진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저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어리석고, 어리고, 여전히 그때와 마찬가지의 미성숙한 상태입니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현재의 저는, 그 이후 오랜 시간동안의 제 자신이 지내온 모습을 과거의 저와는 달리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제 자신이 파도와 타협하던 모습과 흘러가는 배 위에서 그저 물에 빠지지 않기만을 위한 버팀의 시간을 보낸 모습을 알고 있다는 것. 그 시간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차이뿐입니다.
서점에서 '후지타니 오사무'라는 이름을 검색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책을 제외하곤 검색되어 나타난 책의 제목이 없었습니다. 예전에 다른 소설이 나왔던 적이 있지만 지금의 서점에는 없는 모양입니다. 유명하지 않거나 재미가 없었거나 아무튼 여러 이유로 인해 국내에서는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검색 결과 없음'이라는 메세지를 보고 저는 묘하게 안도하고 있었습니다. 자서전인지 무언지 알 수 없는 이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이 제 글 또한 그런 자서전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니 그점이 참으로 역설적으로 보입니다. 혼자 간직하고 싶은 이야기.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이야기. 그런데 가끔 보고 싶은 이야기. 『배를 타라』는 저를 이기적으로 만드는 소설입니다. 부끄러운 제 자신을 말하고 있었던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후지타니 오사무는 이 소설을 쓰고 인터뷰를 통해 "청소년들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썼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른이 되고 다시 이 소설을 봤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제게 있어선 솔직히 그때 읽든 지금 읽든 차이점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아직까지 전 청소년 때의 제 모습과 달라진 것이라곤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르겠습니다. 10년, 20년 뒤,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이 소설을 읽는다면 지금은 보지 못했던 무언가를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저는, 어린 그 시절 <시네마 천국>을 보고 울었던 과거의 모습을 한 채 『배를 타라』를 읽으며 여전히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자신을 '고귀한' 존재라 느끼던 자애심이 순간 부서졌을 때 한꺼번에 밀려들었을 혼란. 자신의 한계를 깨달으며 방황할 수 밖에 없었던 현실. 아름다웠던 기억들, 아련한 추억들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 회상의 재료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회상은 결국 천 페이지를 넘기지 못할 이야기일 뿐이다는 사실에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소심한 남성에 대해 분노했습니다. 아니, 그것은 남성의 소심함이었습니다. 남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소심한 모습, 그것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저 자신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소심함은 사실이었고, 저 자신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남자들이 가지고 있으며 충분히 그것을 인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설은 그것을 철학적으로 분석해서 합리화하려는 청소년기의 소심한 몸부림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괜히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대로 놓아두면 될 것을 저는 그것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부정하기 위한 분노였습니다. 화를 낸다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고, 아닌 척 할 수 있을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저를 분노하게 만들었던 것은, 왜 우리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잔인하게 흘러갈 수 밖에 없는가. 그리고 한없이 아름답고 순수하며 깨끗한 무언가는 왜 세상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으려 하는가. 소설의 이야기마저 왜 꼭 현실의 모습을 하고선 잔인하게 흘러가야만 하는가. 불길한 예감은 왜 이토록 잔인하게 적중해서 내 가슴을 후벼파야만 하는가. 이런 것들이 저를 괴롭게 했고 여러번 분노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잠시 분노를 가라앉히기위해 읽던 책을 내려놓고 책읽기를 수차례 쉬어야만 했습니다.
그나마 소설은 읽기를 잠깐 멈추면 그만일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의 세상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화가나면 화가 나는대로 눈물이 나면 눈물이 나는대로, 그래도 세상은 흘러갑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정도로 힘들고 아프고 슬퍼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눈물 범벅이 되어 전혀 앞을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도 눈물을 닦아낼 그 시간은 여전히 흘러가고 있으며 잠깐 멈추거나 돌아볼 수가 없습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은 언제 파도칠지 모를 먼 바다의 모습을 하고 우리의 배를 흔들고 있습니다. 항해하며 느낄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배를 타지 않으면 그만일 감정일 것입니다. 하지만 소설은 우리에게 '배를 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배를 탄 이후의 모든 일들은 그저 '그것으로 됐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결론짓기에 그것은 끝을 낼 답이 아니라고 여기며, 그래서 무언가 아쉽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러한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결국에 우리들은 혹시라도 이 항해가 끝나는 종착점 어딘가에는 우리가 그동안 품었던 질문에 대한 답이 존재하고 있진 않을까 하는 의문, 기대감, 희망, 호기심 등등, 항해를 해야만 하는 여러가지 이유를 갖고서 계속해서 나아갈 뿐입니다. 그 자리에 멈춰있을 순 없기 때문입니다.
고귀한 인간은 자신을 기준으로 사물을 판단하므로 타인을 동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고귀한 인간 자신이 더욱 '가혹'한 상황에 처해 있으니까. (上 30쪽)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건너편 쪽을 마주볼 수 있는 장소에서 그녀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가 내려오자마자 하행선 전철이 들어와, 나를 쳐다본 그녀를 금방 볼 수 없게 되었다.
순간, 내가 사랑에 빠진 것을 확실히 알았다. (上 84쪽)
나는 어떤 투명한 쓸쓸함 갓은 것이 가슴속에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 당시에는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어쩌면 이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의 주역이 될 수 없다. 우리 인생의 주격은 음악이고, 음악의 이 절대적인 아름다움 앞에서 우리의 기쁨이나 슬픔, 분노나 초조함 같은 건 거의 의미가 없다. 음악은 이 세상에 태어났으나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앞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불쌍한 협잡물에 지나지 않는다. (上 135쪽)
사랑의 아픔이니 사랑의 슬픔이라는 말은 소설이나 영화는 물론이고 텔리비전의 멜로드라마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알아주지 않으면 남자들은 대부분 울거나 한숨을 쉬거나 일기를 쓰거나 벽을 치거나 빗속에서 절규하거나 했다. 소설은 그런 남자들을 아름답게 그리고, 영화는 그들을 슬픈 음악으로 포장한다. 하지만 실제로 자신이 그런 처지가 되면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그 상황에서는 아름다움이란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다. (上 150쪽)
이 아름다운 여인에게 싸움을 거는 건 얼마나 쉬운 일인가. 사랑하고 있다고 본심을 고백하는 것에 비하면 말이다. (上 251쪽)
맞아, 미나미. 나 역시 착하기만 하지는 않아. 가능하면 미나미의 연습 시간을 절반이나 그 이하로 줄여서 함께 여러 곳에 가고 싶어. 아침부터 밤까지 쭉 둘이서만 있고 싶어. 그리고 나는 너와 섹스가 하고 싶어. (上 316쪽)
그 말은 격려가 되었다. 동시에 가슴 한쪽에 얼마간의 불만도 느꼈다. 그 무렵 나는 이미 자신을 한 사람 몫을 하는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 '자신'이다, 자신이라는 것은 이미 만들어져 있다고 선생님이 아닌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사람들에게 제시할 수 없었다. 조금도 미숙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모든 것이 확실히 미숙했다. (上 353쪽)
내가 지금까지 책을 읽는다는 명목으로 해왔던 정체가 한순간에 드러났다. 이해한 것도 아니고 공감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난해해 보이는 책을 선택하여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페이지를 넘기고 정말로 공감한 것처럼 책을 덮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이 확실히 주위 사람들에게 목격되었는지를 확인했고, 그곳에 아무도 없을 때는 자기 자신을 목격자로서 속여넘겼다. 자신을 속인 것이다. 그런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행동을 나는 지금까지 몇 년 동안이나 '독서'라는 명목으로 해왔던 것이다. (下 31쪽)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겋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악기에는 악기 자체의 원리가 있고 인간의 육체에도 독자적인 원리가 있다. 연주는 그 두 원리가 서로 겹쳐지는 부분에서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연주자는 그 원리를 조합하여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악기와 자신의 육체에 관련된 지식과 경험, 단련은 단순히 '악기를 꺼내서 켜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下 50쪽)
늠름하고, 참을성 있게, 그리고 말하지 말 것.
그렇다면 젊은이여 너는 사나이답게 승리를 거둘 것이다. (下 64쪽)
나는 패배한 수컷이었다. 인간인 패자에게는 아직 미학이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수컷인 패자에게는 미학 같은 건 없었다. 그저 한없이 우스꽝스럽고 보기 흉하고 무가치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下 98쪽)
진짜 되고자 하는 사람이 되기까지 나는 너무 부족한 겁쟁이였다. 게으른데다 눈곱만큼의 재능도 없는 한심한 인간이었다. (下 279쪽)
음악은, 인간이 인간을 부르기 위해서 만들어졌던 것이다. 음악은 아름답고, 사람은 아름다운 것에 매료된다. 그곳에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반드시 누군가가,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자신 이외의 누군가가 다가올 것이다. 최초의 음악을 만들어 낸 인간은, 여기에 없는 사람, 여기에 자신이 있다는 걸 모르는 누군가를 부르기 위해서 지금 이렇게 플루트를 불고 있는 것이다. 오직 혼자서. (下 315쪽)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 밤 나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을 절감하고 울었던 것 같다. 그것은 행운이나 불행 같은 것은 아니었다. 운명이나 숙명 같은 것과도 조금 달랐다. (下 338쪽)
아무도 없는 곳에서 연주하는 독주에도 청중은 있다.
왜냐하면, 너를 보고 있는 또 하나의 네가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下 351쪽)
그것으로 됐다. (下 368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