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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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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그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사람의 훤칠한 키, 뚜렷한 이목구비, 놀라운 스펙, 어마어마한 연봉, 성공과 부, 권력. 그런데 이 같은 것을 보고 부러운 마음을 갖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싶습니다.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는 부러움의 감정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서 가상 현실을 경험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이 되어서 한번 쯤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단, 현실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생이 어떤지 알 길이 없습니다. 앞뒤 생각하지 않고 과감하게 몸을 던져 지금과 완전히 다른 인생에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라 생각하며 쉽게 단념하곤 합니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 <빅 픽처>에서 벤은 고액의 연봉에 안정된 직장을 다니는 부유한 뉴요커인 인물입니다. 두 아이와 부인이 있는 가정의 가장으로 앞에서 말한 '그 사람'과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지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 스스로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 꿈인 사진사가 되지 않았다는 후회가 가득한 인생을 살았고, 자신의 직업에 대한 회의감이 가득한 매일을 살아가고 있으며, 아내인 베스와도 거의 대화가 없는 상태가 지속되는 불행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웃인 게리가 아내와 불륜관계란 것을 알고, 홧김에 그를 살해합니다.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 그는 인생의 절벽 끝자라가에 메달려 있는 기분으로 살아가다가, 자신이 저지른 살인으로 인해 이제는 본격적으로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희망도 없다, 살아갈 의미도 없다, 그리고 살아 갈 수도 없다고 여겨야 할 벤은, 뜻밖에 자신의 죽음을 가장하여 자신이 죽인 게리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바로 자신이 그 토록 바래왔던 사진사의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물질적 안정'이라는 미명 하에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그저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라 생각하지만, 그 생각은 가짜일 뿐이고, 언젠가 새롭게 깨닫게 된다. 자기 자신의 등에 짊어진 건 그 물질적 안정의 누더기 뿐이라는 걸.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소멸을 눈가림하기 위해 물질을 축적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축적해놓은 게 안정되고 영원하다고 믿도록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그래도 언젠가 결국 인생의 문은 닫힌다. 언젠가는 그 모든 걸 두고 홀연히 떠나야 한다. (251쪽) 


    벤은 살인을 저지른 뒤, 게리의 시체를 숨겨서 완전 범죄를 성립시킬 기회를 얻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벤은 자신의 가짜 죽음을 만들어 내고 게리의 삶을 살아보기로 결심합니다.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결정을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살인을 덮기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처럼 보이지만, 하나 밖에 없었던 선택지가 아닌, 많은 선택 중에서 하나를 고른 것입니다. 이런 선택의 기로에서 친구 빌의 조언과 상사 잭의 조언은 서로 상반된 입장을 보였습니다. 누구의 조언이 당연히 옳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벤의 입장에서는 반반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벤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잭의 조언을 받아들입니다. 자신의 인생도 완전히 도로에서 비껴나갔다고 여긴 것인지, 벤은 사진사 게리의 인생을 살아보기로 합니다. 


    "그래서 어쩔 건데? 앞으로 삼십 년 동안 다른 삶만 꿈꾸며 살 거야?"

    "나도 잘 모르겠어."

    "내 말 잘 들어, 친구. 인생은 지금 이대로가 전부야. 자네가 현재의 처지를 싫어하면, 결국 모든 걸 잃게 돼. 내가 장담하는데 자네가 지금 가진 걸 모두 잃게 된다면 아마도 필사적으로 되찾고 싶을 거야. 세상 일이란 게 늘 그러니까." (119쪽) 


    "이제 와서 가장 참기 힘든 게 뭔지 아나? 언젠가 죽는다는 걸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는 거야. 변화를 모색하거나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서거나 다른 생을 꿈꿀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오리란 걸 알면서도 나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일인 양 살아왔다는 거야. 이제는 더 이상 환상조차 품을 수 없게 됐어. 인생이라는 도로에서 완전히 비껴난 것이지." (49쪽)
 


    게리의 삶을 얻고, 숨어지내야만 하는 벤은 항상 조심스럽게 지냅니다. 최대한의 인간관계를 자제하고 적은 돈으로 궁핍한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꿈이 있었습니다. 사진을 찍고, 그의 사진을 인정 받고 싶다는 꿈 말입니다. 몬태나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을 때, 모든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습니다. 그건 책을 읽고 있는 저 또한 묘하게 그렇게 느꼈습니다. 대리만족이라고 해야할까요. 좀 유별난 방법을 택하긴 했지만, 자신을 찾아 나선 벤의 모험이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다고 여겨졌습니다. 잘 되었으면 좋겠고, 또 왠지 잘 될 것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벤은 너무 일이 잘 풀려도 문제가 생기는 상황입니다. 숨어 지내야만 하는데 사진으로 갑자기 유명해 지는 일이 생기면 도피 생활이 들통나버리기 때문입니다. 역시 '소설'은 그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누구나 자유로운 삶을 꿈꾼다. 그러나 그런 자유, 그 텅 빈 지붕과 마주하게 되면 두려움 밖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란 끝없는 무의 공간을 바라보는 것과 같으니까. 아무것도 없는 영역을. (271쪽) 


    진정한 자유를 얻은 듯 하지만, 벤은 스스로를 구속하게 하는 장치를 만들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좋아하는 직장을 얻게 되고, 명성과 부를 얻었지만, 그것들이 자신을 또 구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얻었구나 싶은데, 이제는 그것을 버리고 떠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인생이란 이런 것이구나를 여실히 보여준 대목이었습니다. 또 옛날 생각이 나고, '그때 그랬으면' 이라는 후회가 생깁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지나간 인생을 돌이킬 수는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벤의 인생은 두 번이나 크게 불타서 재밖에 남지 않은 상황을 맞이하지만, 또 그 잿더미 속에서 새로운 희망의 씨앗이 자라서 새싹을 튀우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난다 한들 무엇인가로 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벤의 본성은 변하지 않지만, 그래도 자신의 꿈을 간직한 채 살아왔다는 것이 새싹을 튀울 원동력의 밑거름이 되어, 어찌하든 흘러가는 인생을 살아가게 합니다. 잘 나간다고 달리지 말고, 못 나간다고 투덜대지 말라,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이 선택하는 것에 따라 인생이 어떤 모양새가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선택에 의해 지금은 엉뚱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디로 가야할 지 그것만 알고 있으면 어떤 형태로던 간에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단 겁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고 있다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에게는 늘 두 가지 선택의 순간이 존재한다. 그런 까닭에 후회할 가능성 역시 늘 존재한다. 첫 번째 순간은 뷰파인더에서 우리를 노리는 사건이 벌어질 때다. 두 번째 순간은 촬영한 필름을 모두 현상 인화하고 효과가 떨어지는 것들을 버려야 할 때다. 그 두 번째 순간에서 우리는 자신이 어느 지점에서 실패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지만 이미 때늦은 순간이다. (133쪽) 


    그런데 차를 타고 도로를 달리다 보면 유턴도 있고, 후진도 있습니다. 인생에서도 그런게 있으면 참 좋을 것인데요. 실제론 기름의 양은 일정하게 정해져 있고, 뱅뱅 돌아서 가다보니 결국 기름이 다 떨어져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잖아요. 내비게이션을 장착한 연비 좋은 차를 태어나자마자 몰고 다녔다면 또 금방 그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하잖아요. 참,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헉, 시발 쿰."을 외치며 정신이 바짝 들 정도로 현실같은 꿈에서 된통 당해봐야 한다는 것인가요. <빅 빅처>의 벤이 소설 막바지에서 꿈에서 깨어나며, 이 스펙타클한 꿈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변호사 사무실로 출근하고 새 아침을 맞이하는 장면이 있다면, 그때 벤은 무엇을 느꼈으며 그때 벤의 가슴에 품고 있던 그 씨앗은 과연 발아할 기회를 갖게 되었을까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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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ㅇ난감 - 상.중.하 세트
꼬마비.노마비 지음 / 애니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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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대학생이고 편의점 알바생인 이탕에게 '행운의 7'처럼 문득, 한 사건이 일어날 그 날이 찾아옵니다. 이성적이고 감정적이고, 를 구별할 시간조차 없었던 순간적인 반응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된 이탕. 그리고 그 살인을 계기로 연속 살인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기에 이릅니다. 또 그 살인 사건을 맡게 된 장난감 형사. 증거도 단서도 없고, 유령처럼 떠도는 범인을 손에 넣게 위해 휘저어 보지만 풍선껌 풍선처럼 매번 헛빵만 뻥 터집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는, 이름처럼 난감한 상황에서 사건은 미궁으로 빠지고, 자수를 결심한 살인자 이탕은 살인을 당한 '피해자'가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영웅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영웅스런 살인자가 되기로.
 
    살인자 주인공. 제가 무척 좋아하는 설정이며 캐릭터입니다. 살인자가 주인공일 수 있는가, 가능하긴 합니다. 흔히 우리는 정의의 편에 서서 이야기를 보려고 합니다. 아니면 우리 편이 그냥 정의의 편이라고 믿기도 하죠. 그런데 살인자가 정의의 편이고 우리의 편일 수 있을까요. 쇼타임의 미드, 덱스터(Dexter)에서 덱스터가 바로 그런 캐릭터입니다. 꼬마비/노마비의 <살인자o난감>을 보고 저는 이 덱스터가 떠올랐습니다.
 
    이탕은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본능에 의해 그 자리를 피해 도망쳐 숨습니다. 신이 의도한 것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이탕이 죽인 그 피해자는 흔히 우리가 말하는 죽어 마땅한 놈이었고, 다행히 범인으로 이탕을 지목할 만한 증거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상황의 사건이 또 벌어집니다. 어쩌다 이탕이 또 사람을 죽이게 되었는데, 이 사람 역시 죽어 마땅한 놈인 것입니다. 이렇게 '연쇄적'이지 않은 '연속적'으로 똑같은 일이 이탕에게 일어나게 되는데, 단 한가지 바뀐게 있다면 이탕의 살인이 이제는 의도적으로 변했다는 점입니다. 스스로를 사람들의 죄를 심판할 수 있는 영웅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막상 <살인자ㅇ난감>의 이탕을 보고 비슷한 캐릭터로 덱스터를 지목했지만, 근본적인 부분을 뜯어보면 이둘은 굉장히 다른 캐릭터입니다. 덱스터는 이탕처럼 허술하지 않습니다. 미리 먹잇감(덱스터가 죽일 사람)을 범법행위의 강도에 따라 구분지어 놓고 심판을 위한 준비를 철저히 행합니다. 그리고 스스로가 저지르는 살인은 자신의 욕구에 의한 잘못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탕은 일단 살인을 저지르고 나니 내가 죽인 사람이 나쁜놈이었다, 그리고 내가 저지른 이 살인은 스스로의 노력없이도 증거는 남겨지지 않는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의 추종자 역시 이탕은 신이 자신에게 내린 '영웅'이라고 여기며 그의 살인에 동행합니다. 
 
    그러면 이탕같은 살인마 영웅이 어떻게 등장할 수 있었을까요. 이탕은 선도 악도 아닌 중간에 있는 평범한 인물로 그려져 있습니다. 실종된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 우연히 마주친 오래된 친구와 조우하는 모습에서는 인간적인 모습을 마저 보여줍니다. 본격적인 살인마의 길로 한참을 들어선 뒤에 보여준 모습이라 역시 본성(보통사람이다)은 변하지 않았다고 보여집니다. 한마디로 인간적이란 거죠. 이것은 이탕이 곧, 책을 읽고 있는 평범한 우리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태어날 때 부터 특별했던 덱스터와는 다른 경우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악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털어서 먼지 나오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길을 가다가 이탕이 칼을 휘두르고 마구 찔러대도 그 '아무나'는 '아무나'가 아니라 더러운 범죄행위를 저질렀던 인물이 당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첨 확률이란게 요즘 세상에서는 굉장히 높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인자ㅇ난감>은 '우리들의 세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범죄도 마찬가지, 정의롭다면 우리편? 하지만 그게 아니라 우리편이기 때문에 정의로워 보이는 세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잘못된 의식을 가지고, 범죄를 알고 있지만 그것을 용인하고 있는 사람들이 길거리의 사람들처럼 많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뉴스나 신문에 나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사람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그렇다는 겁니다. 여기에 <살인자ㅇ난감>은 이탕, 송춘 등의 인물을 통해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런 세상을 보여주고 세상을 볼 수 있는 올바른 눈을 뜨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문제 의식 때문에 살인마 이탕은 영웅이다라고 꼬아놓은 작가의 생각을 담아 놓은 것 같습니다. 
 

살인은 절대적 죄가 될 지언정, 그 대가로 죽음이 면죄부가 되어선 안된다.


    이 때문에 살인자가 영웅이 되는 난감한 상황에서 장난감형사는 위와 같은 말을 합니다. 살인은 절대적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작가는 이런 난감한 경우를 이야기하면서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의견이 오고가는 것을 신경쓰지 않습니다. 범죄를 저지른 경찰과 정치인, 사회현상 따위를 이야기하면서 체제전복을 노리는 것도 아니고, 혼돈을 조장하기 위한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이미 답이 나와 있는데, 이것을 보고 이게 무엇이냐고 하는 질문은, 해서 뭐하겠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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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미스터리 2011.가을 - 33호
청어람M&B 편집부 엮음 / 청어람M&B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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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추리소설? 보통 추리소설하면 영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을 떠올립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추리소설이? 물론 당연히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생겨난 고정관념일지 몰라도 단단하게 꽉 자리잡힌 그것 때문에 서점을 가서도 영문 소설과 일본 소설 코너만 서성거리기 일쑤입니다. 2년 전에 추리문학관을 갔습니다. 그리고 김성종 작가님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대표작이라고 하는 한권의 추리소설을 읽어보고 크게 실망했습니다. 이렇다 저렇다 판단할 위치는 아니지만, 마치 신문 귀퉁이에 짧게 나와있는 가쉽기사를 읽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추리소설은 제가 가장 즐겨찾는 최고의 취미지만, 그 이후로 국내의 추리소설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계간 미스터리>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불과 얼마전의 일입니다. 그와 동시에 이번에 나온 가을호를 접할 수 있게 되는 행운을 었으니, 이것은 무엇인가에 이끌려 나를 이곳으로 인도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경험이었습니다. 특집 기사로 크게 할애한 '다시, 김내성'을 필두로, '번역가 정태원 추모' 특집 기사, 미스터리 신인상 당선작인 홍성호의 <위험한 호기심>, 국내 단편 두작품으로 정석화 <킬 힐>과 정명섭 <우리 동네 살인마>, 그리고 청어람 장르작가 특별전 김이제의 <막다른 골목>, 2011 여름추리소설학교 참가일기와 해외 단편 로로시 세이어즈의 <알리바바의 주문>까지, 실로 엄청난 읽을거리가 담겨져 있는 추리소설 잡지였습니다.


특집 기사 '다시, 김내성'을 통해 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가슴 뭉클함을 느꼈습니다. 국내 추리소설 작가 1호라고 할 수 있는 김내성님의 추리소설 사랑과 그 때문에 마음 속에 품을 수 밖에 없었던 한(恨)같은 것이 보였습니다. 일본과 국내를 오고가며 앞으로 국내 추리소설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고민하고 배우고 연구하는 모습들에 묘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추리소설에 대한 자잘한 잔지식들도 늘어난 것 같아서 무척 유익한 기사였습니다.


탐정소설의 연령은 겨우 1세기를 좀 넘어섰을 뿐이다. 탐정소설의 선조(先祖)인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가 <모르그 가의 살인(The Murder in the Rue Morgue)>이라는, 실로 역사상 최초의 탐정소설을 발표한 것이 1814년의 일이니까, 금년에 들어서 115세를 맞이한 계산이 된다. (다시,김내성, 38쪽)


그러면 탐정소설은 언제까지나 탐정이 범인을 찾아내는 것으로만 능사를 삼고 그 피상적인 객관묘사에만 그쳐야 하느냐? 종래의 탐정소설은 그랬으면 되었다. 그리고 현재도 각국에서 제작되어 나오는 탐정소설은 태반이 다 그렇다. 작품의 중요 주제는 어디까지나 범인과 탐정이 기발한 트릭(위계 僞計)에만 치중해왔고 문예작품적인 주제인 인간성의 오묘(奧妙)에는 모두가 다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쓸쓸하고 서글픈 일이 나니냐? 인간성에 제거되어 있는 탐정문학의 장래를 생각할 때, 나는 무한한 고독감을 느끼는 것이다. 탐정소설로 인간성을 주제로 작품을 제작할 수는 없느냐? 이것이 나의 불타는 야망의 하나로 되어 있었다. 그 조건적인 애로와 난관을 어떻게 하여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인가? 다시 말하면 탐정소설의 조건을 준수하면서 문예작품적인 것을 주제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일까? (다시,김내성, 11쪽)


위의 인용문을 얼핏보면 본격류 추리소설에 대한 회의적이고 자조적인 푸념으로 보입니다. 결국 추리소설이 타의에 의한 문학성을 인정받고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한 방법을 위한 고민일 것입니다. 얼마 전에 추리소설의 문학성에 대한 글을 본 기억이 납니다. 저 스스로도 지하철을 타고갈 때 혹시나 주위를 의식하고 책의 제목을 가리진 않았을까 되새겨 보게 만든, 가시가 돋혀있는 따가운 글이었습니다. 결국 스스로에게도 추리소설이 떳떳하지 못하고 낮은 수준의 소설이다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런 것에 대한 돌파구로 김내성님은 인간성을 주제로 작품을 제작했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럼 문득 요즘 작가들은 어떤 돌파구를 마련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역사소설의 형태를 띈 추리소설이 해법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건 또 꽤 오래전부터 시도되었던 것이기도 할 테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런 시도가 이어지고 시행착오를 거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두번째 특집 기사는 번역가 정태원님을 추모하는 기사입니다. 번역가 정태원, 서점의 영미 추리소설 코너에서 아무책이나 10권을 집어보라고 하면 무조건 그의 이름이 안에 들어있을 정도로 유명한 분입니다. 마지막 번역작이 <셜록 홈즈의 라이벌들>이라니. 아아,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분의 업적은 단지 외국의 서적을 번역했다는데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번역했던 수많은 책들은 지금 추리소설을 즐기는 팬들과 추리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들에게 교과서와 같은 책들이기 때문에 정태원님은 번역가인 동시에 추리학교 선생님이라고 여겨집니다.


"결국 내가 추리소설을 좋아한 만큼 추리소설이 나를 먹여 살렸다고 할까. 많은 출판사에 추리소설 기획을 해주었고, 번역도 많이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생활하는 것만큼 행복한 삶은 없을 것이다. 지금 나 못지않은 마니아들을 보면 그들이 자랑스럽다. 언젠가는 우리 추리소설을 이끌고 나갈 사람들이다." (코난 도일 <공포의 계속> 작품 해설에서 - 정태원) (누구보다도 추리소설을 사랑했던 사람을 보내며 - 박광규, 291쪽)


세번째 특집 기사는 여름추리소설학교 이야기였습니다. 이렇게 꿈과 같은 모험이 현실 세계에서도 있었다니 아니, 이런 학교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꿈에서도 몰랐을 것입니다. 매년 있는 행사라고 합니다. 과연 내년에도 추리학교가 개교할 수 있을지 지켜봐야겠습니다. 추리문제를 내고 힌트를 제공한 뒤 서로 불타는 눈빛을 내뿜으며 추리대결을 펼쳤던 강연을 시작으로, 추리작가님들과 추리협회 선생님들의 강연, 그리고 뒷풀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경기 양주시 백석읍 기산리 휴양소의 추리학교에서 갑자기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국내 추리의 대가들이 모인 그 자리는 급기야 혼란에 빠져드는데, 때마침 지나가던 명탐정이 한 사내를 범인으로 지목하기에 이르른데……. 물론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단지 제 상상속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와 같은 추리학교는 상상속의 동물, 기린과 같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이 특집 기사에서 저는 신세계를 봤습니다.


위의 특집 기사 외에도 국내외 단편들과 미스터리 신인상 작품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계간지는 전체적으로 꽉찬 느낌이 들었습니다. <계간 미스터리>는 저에게 신세계를 보여줬고, 추리소설을 더 사랑하게 만들었습니다. 뿌리를 알게 해주었고, 집이 어디인지 가르쳐 줬습니다. 앞으로도 무한한 발전을 이어갔으면 좋겠고 그럴 것이라 믿으며, <계간 미스터리>에서 보여준 노력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추리소설을 사랑하고 읽어 나갈 것이란 희망을 느낍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추리소설 입문자들이 조금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잡지다운 모습으로 사진과 그림을 많이 담았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해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김내성'에 실렸던 작가 김내성님의 속마음을 '다시' 보며 글을 마칩니다.


자기의 작품을 아무리 세상에 내놓아도 평 한마디 받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고독한 것은 없다.
태작이라도 묵묵, 걸작이래도 잠잠- 이것은 작가로서의 고독을 넘은 하나의 비애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훌륭한 탐정문단을 가진 내지(內地) 문단을 그리워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자기가 영국이나 미국에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恨) 해보는 적도 있다.
탐정작가여, 어서어서 나오라! 그리하여 우리 조선문단으로써 하나의 훌륭한 탐정문단을 가지도록 하라! (1939년 8월 4일- 박문(博文) 11호) (다시, 김내성,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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