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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
로저 오스본 지음, 최완규 옮김 / 시공사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희한하게도 사람들은 선거때가 되면 지나간 일을 쉽게 잊어버리는 마법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평소에 주위사람들이 품은 불만과 저항의식을 볼 때 이 정도라면 앞으로 우리의 정치는 크게 변화하고 무한히 발전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변화는 그리 쉽게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음을 기다리는 시간만이 무한히 길게 느껴질 뿐입니다. 한 사람이 나서서 바꿀 수 있는 구조가 아닌 듯합니다. 힘을 모아 무리지을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 그리 말처럼 쉬운 일이란 말입니까.
로저 오스본의 『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는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발전해온 세계 민주주의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꾸준히 발전했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내세운 법과 정치가 교묘하게 권력과 부의 중앙집권을 도와 스스로 퇴보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민중은 그러한 역사 속에서 어떻게든 결국 체제 전복을 이루어 냈고, 민주주의 역시 그 안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적응한 결과 오늘날의 민주주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리스를 시작으로 로마, 중세 유럽, 아메리카, 근대 국가들에 이르기까지, 세계역사에서 민주주의가 움직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자연스레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우리는 안에서 만든 민주주의가 아니라 밖에서 만들어진 민주주의입니다. 뭔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고 정리하지 않은 상태에서 얼떨결에 남들이 만들어준 것이기 때문에 착오만을 겪으며 현재까지 온 듯합니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나날이 발전하고 깨어나는 민주주의에 대비하여 무언가를 방어할만한 충분한 구조를 마련한 뒤 발전을 가장한 민주주의의 먹이를 우리에게 던져주며 자신들에게 유리한 한국형 민주주의가 만들어질 시간을 갖춘 듯합니다. 물론 이러한 생각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저만의 생각입니다. 그랬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과 상상을 토대로 쓴 소설이나 다름없는 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소설을 조금 더 써보자면, 한일 문제는 당시 집권한 무리들의 사고에 의해 광복과 동시에 제대로 청산할 수 없는 민감한 사항이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이토록 문제가 되어 최근의 갈등과 분쟁을 만들어 낸 듯합니다. 무언가를 쥐고 있던 사람들이 그것을 놓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안으로부터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않은 채 무조건적으로 외부의 탓으로만 돌리고 있습니다. 일본이 현재와 같은 태도를 보일 수 있는 밑바탕엔, 우리 정부가 그동안 안일하게 대처한 외교와 내부에서 권력과 결탁한 부에 있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우선적으로 필요한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교묘하게 언론은 그런 비판의 목소리보다 일본 정부의 반응에 대한 자극적인 뉴스만을 우리들에게 보이고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려 합니다.
이런 식의 민주적 선동은 사람들을 조종하기에 매우 편리한 수단이 됩니다. 정부와 은행이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나라가 망했을 땐 '국가 부도, 파산 한국'과 같은 단어보다 'IMF사태'라는 단어를 사용해 교묘히 잘못을 외부로 돌리면 됩니다. 마치 국제통화기금이 우리나라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나있는 것처럼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일어나려 하면 탱크를 앞세워 언론을 통제하면 됩니다. 사람들이 수근거리며 나라가 어수선해지면 프로야구를 만들어 사람들을 경기장에 밀어넣고 그 안에서 소리지르도록 하면 그만입니다. 올림픽 때문에 사람들이 밤새도록 열광할 땐 게눈감추듯 공항을 매각해버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음날 일어나 비몽사몽간에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모른 채 인터넷으로 금메달 집계현황만 찾아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부터 우리는 평화를 사랑한 백의민족이라 길거리 한복판에서 AK47나 RPG7을 든 민주적 분노의 암살극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테니 자리 보존하기엔 이보다 더 좋은 나라가 없을 것입니다.
민주주의 역사를 이야기하다 보니 괜히 세계역사 속의 민주주의와 한참 비교된 우리의 상황 때문에 욱해져 책의 내용과 많이 벗어난 이야기까지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유라는 착각에서 민주적이라고 오해했던 개인의 소설을 혼자 보고 있으려니 분통터질 일뿐이라 언성이 조금 높아진 것 같습니다.
아무튼 민주주의는 식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신경써서 잘 가꾸면 깊게 뿌리박고 넓게 번창하여 쉽게 흔들리지 않을 거대한 숲을 이룰 테지만, 조금만 신경쓰지 않으면 금세 시들고 죽어버려 그 자리에 그대로 썩어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속의 우리가 이런 식으로 착오만을 경험하며 쇠퇴를 거듭하다간 나중에는 정말로 화분째 갈아버려야 할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그 전에 미리미리 신경써서 제때 물을 주고 좋은 거름을 챙겨주어 우리의 민주주의를 정성스레 잘 키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 역사의 결정판을 쓰겠다는 욕심을 부리기보다 민주주의의 과거에서 다양한 측면을 개관해보고, 오늘날 덧없는 민주주의의 기저에 깔린 복잡성과 다양성, 창의성을 고루 밝혀봄으로써 민주주의 자체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 책을 쓴 목적은 민주주의에 대해 확실하게 매듭을 짓거나 아예 밀쳐두자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와 우리 사회의 통치 방식에 대해 고민할 때 양분을 제공해줄 만한 역사적 밑거름을 제공하자는 것이다. (19쪽)
민주주의는 무미건조한 지적 개념이 아니라 우리 문화에 뿌리내린 온갖 믿음과 가정들을 한데 묶은 것이며 그만큼 싸워서 지켜낼 가치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비록 불완전하긴 해도 인간 삶의 커다란 딜레마, 즉 어떻게 해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존재하는 인간이 개인적으로도 번성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22쪽)
우리가 겪는 불행의 원인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우리는 만민이 만족할 수 있도록 노력했고, 잘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도리어 만인의 불만을 샀다. 우리는 왕의 비위를 맞추려 애썼지만, 내 생각에는 우리 모두의 목을 베는 것 말고는 그를 기쁘게 할 방도가 없는 듯하다. 우리는 또 썩어빠진 자들의 집, 그러니까 의회를 지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온통 썩어빠진 의원들로 가득했다. (156쪽)
수많은 나라가 민주주의를 받아들였지만, 정부가 민주주의의 기본 요소들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이제 한 나라의 정치 체제가 민주주의인가 여부가 아니라 얼마나 민주적이냐가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분석가들은 민주주의를 측정하고 평가하는 방법을 마련하기도 했다. (485쪽)
민주 사회는 수많은 삶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늘 현재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또 공동체적 창의성의 줄기찬 발로다. 그런 창의성을 유지하려면 엄청난 에너기자 필요하며, 이를 막으려는 세력 또한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그러다 보니 편가르기, 뒤봐주기, 이기주의, 냉소주의, 무관심, 조용한 삶 등의 꼬임에 빠져들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는 번성하려면 우리가 기필코 극복해야 할 유혹들이다. (497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