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마음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어디든 날아가는 풀씨

 


내 첫사랑은 작은 덧니를 갖고 있었다. 빠지지 않은 유치가 오른쪽 송곳니 옆에서 그가 웃을 때면 귀엽게 반짝였다. 그는 때로 덧니가 불편하다고 했지만 나는 자꾸 보고 싶어 실없는 농담으로 그를 웃게 하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가끔 서로에게 손편지를 썼는데, 요즘도 그의 편지 문장이 생각날 때가 있다. 어린 소년의 마음이 시간을 거슬러 다가와 가만히 내 어깨를 감싸는 것이다.

 

대학 첫 축제 파트너로 나를 초대하기 위해 그는 먼 길을 찾아왔다. 가고 싶은 마음은 절실했으나 엄마의 완강한 반대로 끝내 가지 못했다. ‘젊은것들이 같이 밤을 보내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엄마는 염려하셨고 그가 축제 파트너와 연애를 시작하며 내 첫사랑은 끝났다. 그해 가을에 내가 치명적인 짝사랑을 시작했으니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어차피 헤어질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뤼시를 따라서 여행을 했다. 가는 곳마다 가 흐르고 있었다. 뚱보 바흐가 연주하는 3시간짜리 음악극을 본 것도 같다. 뤼시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가볍게 사랑한다. 사랑에 목매지 않는 부분만 딱 닮고 싶다. 뤼시가 정말 사랑스럽지만 내 친구라면 힘들 것 같다. 나는 그녀에게 반해서 영혼까지 증발했는데, 그녀는 어느 날 풀풀 풀씨가 되어 날아갈 것 같기 때문이다. 한때 나도 민들레 꽃씨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떠다니는 것은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나는 땅에 심어져야 하는 사람이다. 가끔 여행지에서 들뜬 마음으로 날아다니기도 하지만 내가 살고 싶은 곳은 산자락에 있는 오두막이다.

 

지난해 늦가을 보뱅 작가의 부음을 듣고 나는 가슴을 쳤다. ‘너무 아깝다.’ ‘이제 그의 작품을 더는 만나지 못하는 건가?’ 작은 정원의 단풍나무 아래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슬퍼했다. 책의 리뷰를 쓰면서 때로는 이야기의 줄거리를 인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가벼운 마음은 한 편의 긴 시라고 느껴졌고 이야기는 그저 시의 여행을 위한 장치라고 여겨졌다.

 

내가 좋아한 문장은, ‘우울증이 뭔지 아니? 월식 본 적 있어? 우울증은 월식 같은 거야. 달이 마음 앞에 슬며시 끼어드는 거야. 그러면 마음은 자신의 빛을 더는 내지 못해. 낮이 밤이 되는 거란다. 우울증은 부드러우면서 캄캄해. 남편은 반쯤 회복했어. 어둠은 떠났고 부드러움은 남았지.’ 우울증에 대한 아픈 문장이 이렇게 거미줄로 짠 베일처럼 우아하다니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당신이 사랑받을수록 사람들은 당신을 더 사랑한다. 사랑받기 위한 비법은 관계가 시작될 때에 있다. 무엇보다 사랑받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도, 갈구하지도, 원하지도 말아야 한다.’ 이 또한 어떤 경지에 이르러야 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나는 글을 쓸 때 잉크로 쓰지 않는다. 가벼움으로 쓴다. 설명을 잘했는지 모르겠다. 잉크는 구매할 수 있으나 가벼움을 파는 상점은 없다. 가벼움이 오거나 안 오는 건 때에 따라 다르다. 설령 오지 않을 때라도, 가벼움은 그곳에 있다. 이해가 가는가? 가벼움은 어디에나 있다.’ 그런데 소나기를 맞아도 먼 산을 감싸는 비구름을 보아도 비에 젖은 메리골드의 눈물을 닦아 주어도 나에게는 가벼움이 보이지 않는다.

 

티타티티타티, 타타티타타티.’ 바흐의 음악이 이 한 문장에 들어 있다. 꽃으로 만든 망치에 맞은 기분이다. 언젠가는 나도 나만 아는 방식으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뤼시의 노래를 따라 부른다. 티타티티타티, 타타티타타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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