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일상이란, 그저 반복되는 하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새로운 거 하나 없는, 그저 시간이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그런 일상이었다. 저자의 일상도 나처럼 시간이 흘러가는, 반복되는 일상인건 분명 다를 바가 없 는데, 그는 달랐다. 매 하루마다 감동을 받았고, 고마워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 걸까? 싶었다. 그 이유가 궁금했고, 찾고 싶었다. 단순히 문장 속에서 그 이유를 찾는 게 아닌, 내 스스로 그 이유를 찾아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내 일과를 들려주면, 대단하다든가 너무 금욕적이라는 반응을 보이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상과 일을 소중히 생각한 결과이자, 더 큰 잠재력을 발휘하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루라는 시간을 최대한 즐겁게 보내며 솔직하게 감동하기 위한 컨디션 만들기라고 할까. - P3

발견하는 것은 감동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 감동하는 만큼 발견할 수 있다. P 28 - P28

사람이든 물건이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너그러운 마음의 눈으로 내 안을 들여다보면, 겉으로 드러나기 않았던 근사한 부분이나 자랑할 만한 모습, 숨어있던 다양한 면모가 보인다. 모두 얼핏 봐서는 보이지 안는 것들이다. P 33 - P33

좋은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내게 일어난 모든 일에 진심으로 고맙다고 생각하며 감사의 말을 반복했다. P 56 - P56

일이나 일상에서 상대방의 편리를 위해 애써 작은 수고를 들이거나 마음을 기울여도 실제로는 잘 드러나지 않아 상대방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때도 있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배려가 상대방을 알게 모르게 기분 좋게 만들고 이것이 요리에서는 맛있음으로 연결된다. 일상에서는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거나 쾌적함, 즐거움으로 연결된다. P 83 - P83

주택 한 채와 만난 나는 오늘의 일상, 오늘의 일, 오늘의 모든 것에 깃든 ‘보이지 않은 곳의 몸가짐’을 정비하고 싶어졌다. P 121 - P121

종이컵에 "Thanks!"라고 적어준 것이 오늘이 처음이 아닌지도 모른다. 여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내가 부끄러워졌다. 잘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곳에 수고를 들여 감사의 말을 써주다니, 서서히 감동이 스며들었다. 한마디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소중한 것을 배웠다. 늘 감사하다. P 142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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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푸른 눈의 증인 - 폴 코트라이트 회고록
폴 코트라이트 지음, 최용주 옮김, 로빈 모이어 사진 / 한림출판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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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그 날, 광주에는 푸른 눈의 외국인이 있었다. 영화 『택시운전사』로 널리 알려진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비롯하여 선교사들, 그리고 평화봉사단 의사들. 이들 중 한 사람,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의 나병환자들을 돌보던 폴 코트라이트. 그는 뒤늦게나마 광주에서 한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회고록을 출간했다. 


이 회고록을 출간한 최용주님은 이 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회고록은 아마도 광주항쟁을 직접 목격한 외국인이 기록한 최초의 출판물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광주 시민이 아닌 외부인의 관점에서 기록했다는 점에서 광주항쟁의 성격과 의의를 객관적으로 조명하는 소중한 자료이며, 광주항쟁을 둘러싼 수많은 왜곡과 폄훼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짓인지를 반증하는 증언록의 가치를 갖는다. P 232



작년 겨울, 난 광주에서 5.18의 흔적을 따라 돌아다녔더랬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당시 들렀던 장소들, 당시 보았던 사진들이 자꾸 오버랩되었다. 얼마전 광주법정에 참석한 전두환이 5.18 당시 헬기 사격을 계속 부인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분노가 치밀었다. 어떻게 40년이 흐른 지금까지 진상규명을 비롯하여, 피해자들의 명예회복, 시민학살에 대한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건지. 시민학살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왜 아직도 떵떵거리며, 피해자들을 조롱하고 있는건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폴 코트라이트는 광주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나주의 한센병 환자 정착촌인 호혜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때로는 환자들의 수술을 위하여. 환자들과 함께 순천의 병원까지 가야 할 때도 있었다. 나병 환자들은 일그러진 외모로 인해 밖에 나가는 것을 극도로 꺼려 했으나, 순천에 있는 병원을 가려면 밖에 나가는 건 당연하고 버스도 수차례 타야했다. 



병원 가는 길에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야 하는데, 사람들이 환자들 대신에 차라리 외국인인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P 033



아, 폴 코트라이트, 그러니까 저자는 정말 환자을 생각하는 참된 의사였다. 이런 사람이 40년 전 그날, 광주에 방문하게 된 건, 순전히 나병 환자들 수술을 위해 순천에 가기 위함이었다. 당시 나주에서 순천까지 가는 버스는 광주 터미널을 경유했다. 5월 19일, 그는 환자들과 순천까지 가는 길에 광주 터미널에 들렀다. 거기서 그는 참상을 마주했다.



모두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우리는 뒤를 돌아봤다. 그 젊은이가 바닥에 쓰러졌고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에서는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바닥에 쓰러진 그를 내려다보는 군인들 표정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P 056 (5월 19일)



문이 닫히고 버스가 터미널을 빠져나올 때 까지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승객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가끔 흘낏 창밖을 쳐다볼 뿐이었고,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표정들이었다. 도대체 군인들이 국민을 왜 이렇게 대하는 것일까? 어제 이곳, 광주에서 무슨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P 057 (5월 19일)



“어제는 정말 참혹했어. 전두환의 군인들이 데모하는 사람들만 보이면 달려들었어.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말이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몰라. 사람들 얘기로는 백 명은 넘을 거래.” P 063 (5월 19일)



저자가 광주를 들렀던건 5월 19일, “작전명: 화려한 휴가”가 시행된 바로 다음 날이었다. 당시 광주의 상황은 이러했다.



5월 18일, 공수부대가 전남도청, 금남로, 충장로 등을 중심으로 시위대 진압을 실시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눈 앞에 있는 시민들은 전부 짓밟혔고, 맞았고, 죽어나갔다. 폴이 광주에 들렀던 5월 19일에는 11 공수여단이 추가로 증파되어 더 많은 광주시민 학살이 진행되고 있던 바로 그 때였다. 물론 이러한 사항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 당신은 우리를 대변해주어야 해요.”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내 가슴 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지금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없어요. 세상 사람들은 이 나라 군인들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고 있어요. 미국인인 당신이 증인이 되어 우리를 대신해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사정을 알려주세요.” P 070 (5월 20일)



폴을 향한 할머니의 슬픔어린 이 말은, 폴이 회고록을 쓰고자 한 이유였다. 그렇게 폴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 그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폴에게는 ‘푸른 눈의 외국인’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으니까. 



나는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는 이 사건들로부터 감정적인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애썼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군인들이 자행한 학살의 공포와 군인들의 퇴각이 준 흥분이 뒤엉켜서 이 항쟁에 열광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만은 없는 처지이다. 한국에 계속 있으려면 냉정을 유지하고 객관적인 관찰자로 남아있어야만 했다. P 085 (5월 21일)



폴은 외국인이라는 무기를 방패삼아 광주와 나주를 오갔다. 물론 광주 밖을 나오는 교통편은 끊긴지 오래였고, 모든 길목마다 군인들이 검문중이었지만. 5월 21일, 이날은 신군부가 처음으로 ‘광주사태 담화문’을 발표한 날이다. 요지는 단순했다. 광주사태를 일으키는 불순분자들이 바로 빨갱이라는 것. 뿐만 아니라, 이날 공수부대에게 발포명령을 내리며 실탄을 지급했다.



대형 시내버스 두대, 승합차 한 대, 그리고 승요차 한 대가 도로에 널브러져 있었다. 차량 여기저기에 총알구멍이 뚫어져 있었다. 모든 차에 성한 유리창은 하나도 없었고 내부 여기저기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어제 환호하던 젊은이들이 타고 다니던 바로 그 버스였다. 


길 한가운데 자전거를 팽개치고 털썩 주저앉았다.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한동안을 멍한 상태로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으나, 어제 아침 남평으로 들어오던 젊은이들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성취감과 정열이 넘치던 바로 그 청년들. 그들이 한국의 미래였다. P 097 (5월 22일)



광주를 짓밟았던 계엄군이 광주 외곽으로 물러났다. 외곽에서 광주 진출입로를 원천 봉쇄하며, 이 곳을 지나려하는 시민들은 남녀노소 상관없이 무차별 사격이 가해지고 있었다. 폴이 이 도로를 지나 광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건, 본인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무기 ‘푸른 눈의 외국인’이라는 신분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지금 친북 공산주의자들이 광주를 장악했다고 말하고 있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이제까지 내가 보고 겪은 사건은 이 나라의 그 어느 곳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광주의 실제 모습은 철저하게 은폐되고 있었다. P 105 (5월 22일)


“미국 정부가 광주사태에 어떻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해?”

“모르겠어. 하지만 전두환이 미군과 모종의 협의가 없이 광주로 군대를 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래 네 생각이 맞을 것 같아. 젠장! 그렇다면 미국이 이 만행의 공모자가 된 거잖아! 미국 대사관은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까?”

“글쎄, 대사관에서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가만 있으면 안되지.” P 113 (5월 23일)


“우리가 토론해야 할 문제가 또 하나 있어. 미국 문화원 운영자가 전화를 했어.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는데 우리들에게 광주를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왔대.” P 124 (5월 23일)



폴을 비롯한 다른 평화봉사단원 데이브, 팀, 주디. 그들은 어떻게든 광주의 진실을 외부에 알리고자 했다. 심지어 자국, 그러니까 미국 정부가 가만히 있다는 사실에도 분노를 표했다. 아마 이때부터 이들은 지금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한것 같다. 광주의 진실을 외부에 알리고자, 광주에 들어온 또 다른 푸른 눈의 외국인 기자들을 만나자고.



“우리가 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해요.”

독일 기자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으나 떨리고 있었다. 옳다.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었다. 우리가 들어야 할 이야기는 동굴처럼 어두컴컴하고 침울한 이 방에 모두 있었다. P 134 (5월 24일)



도대체 어떤 정부가 이 할머니를 죽였을까? 얼마나 많은 이름 모를 할머니들이 죽었을까? 얼마나 많은 할머니들이 가족들을 기다리며 누워있고,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할머니 앞에서 통곡을 했을까? 로빈은 할머니 옆의 작은 관으로 갔다. 우리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안내하던 의대생이 먼저 말했다.

“이 어린이도 같은 시각에 죽었습니다. 부모를 찾고 있는데, 죽은 할머니와 이 어린이가 친척사이인지는 모르겠어요.”

시신은 얼굴만 남기고 천으로 둘러져 있었다. 충격을 받은 우리는 이 어린이의 관을 쳐다보며 아무말 없이 서 있었다. 잠시 후 우리는 긴 한숨을 토해내고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시신들이 그야말로 즐비했다. P 136 (5월 24일)



“저 사람이 사진을 찍고 있어요. 그런데 사진을 해외로 가지고 나가려면 쉽지 않을 거에요.”

내가 로빈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과연 로빈이 이 사진을 해외로 제대로 반출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군인들이 그의 카메라와 필름을 압수할 수도 있었다. P 146 (5월 24일)



폴 일행은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인터뷰를 하며 광주의 진실을 알렸고, 광주시민들과의 통역도 맡았다. 최대한 사실 그대로 독일기자에게,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폴 역시 상상하지 못할 참상을 계속해서 마주했으나, 그럴 수록 폴의 마음속에는 더욱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만 불타오를 뿐이었다. 푸른 눈의 외국인들은 머나먼 타국 땅에서 일어난, 이 참극을 어떻게든 외부에 알리고자 노력했다. 팀은 계속해서 독일 기자들의 통역을 맡았고, 폴은 광주를 떠나 서울에 있는 미국대사관에 알리기 위해 떠났다. 하지만 바로 이때부터 푸른 눈의 외국인이어도 광주를 벗어나기가 어려워졌기에, 폴은 정말 죽음을 무릅쓰고 인적없는 산을 넘어, 광주를 벗어나 나주까지 왔다. 본인의 ‘원래’ 근무지였던 나주 호혜원으로.




물론 나주에서도 서울까지 나오는 길은 힘들었다. 군인들은 광주 뿐만 아니라 전남의 길목을 막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광주보다는 덜 했는지, ‘푸른 눈의 미국인’이라는 무기로 겨우 겨우 서울까지 올라왔다. 드디어 미국 대사관에 이 사실을 알릴 수 있겠구나 싶었던 폴이었다.



우리는 대리대사의 사무실 밖에서 2시간을 기다렸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그 자리를 일어나 나왔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대사관은 과주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나는 마침내 이 책을 통해서 도청 앞의 할머니가 들려주기를 원했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 P 178 (5월 26일)



1980년의 미국은 한국과 한국인을 실망시켰다. 나는 이 책을 쓴 미국인으로서 미국인과 한국인이 우리 공동의 역사, 공동의 열망, 나아가 공동의 고통을 서로 더 잘 이해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서로 배워야 할 것이 정말 많다. 나는 지금도 배우고 있다. P 182, 에필로그



폴을 비롯한 평화봉사단원이 ‘설마?’하고 의심했던 그 생각. 아니었길 바랬던 그 생각은 나중에야 사실로 밝혀졌다. 미국의 비밀해제 문건 중 미국이 신 군부의 무력진압을 용인한 내용이 남긴 문서들이 속속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폴도 입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으나, 미국이 묵인했으리라는 생각을 안고 살았다. 광주의 진실을 알릴 그 때를 기다렸고, 바로 지금이 그 때라는 생각을 했기에 이 회고록을 출간한 것이리라.





광주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작년 겨울에 포스팅을 했었다. 그리고 이 포스팅은 지금도 여전히 논란의 댓글들이 달린다. 포스팅을 했던 당시에는 그런 논란 댓글들은 바로 삭제했었는데, 이제는 삭제를 하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했다.



앞서 제주 4.3항쟁에 관련된 포스팅에도 위와 비슷한 덧글들이 아주 자주 달리고 있다. 이런 덧글들의 공통점은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과, 정부군에 학살된 피해자들을 ‘폭동, 폭도, 빨갱이’라고 지칭한다. 전두환이 발표했던 ‘광주사태 담화문’의 내용을 그대로 믿으며, 독재 군사정권을 찬양하는 그런 사람들. 지금까지 경험상 이런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증거를 들이밀어도 믿지 않는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이런 사람들은 미국을 찬양하고, 성조기를 흔든다. 그렇다면 이들은 미국인이 쓴 이 회고록을 어떻게 바라볼까?


얼마 지나지 않으면 이 포스팅에도 위와 같은 논란을 일으키는 덧글들이 달리겠지. 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이 정말 좋아하는 미국인 조차도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고,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에 의해 일어난 학살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아직도 이 일이 빨갱이가 일으킨 폭동인 것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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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조금도 아니고 어떻게 행복하기만 하겠는가. 서로 행복한 시기가 다를 뿐이다. 자기가 행복할 땐 남을 보지 않아서 서로 엇갈릴 뿐이다. 이 글을 쓰다 네이버에서 ‘행복이란’을 검색해 보니 ‘행복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한다. 뭐야, 언제부터 인생에 그런 복표가 있어야 했던거야. 그럼 지금부터라도 행복해 볼까. 아, 귀찮은데. - P3

인맥이나 팔로맥(follow脈)이나 모두 소중한 인연이라고 생각한ㄴ다. 그러나 인맥의 수나 팔로어 수가 그 사람의 완성도는 아니니 이 숫자의 많고 적음에 연연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 제일 구려 보이는 사람은 인맥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인맥이 넓다고 떠들어 대는 사람이다. P 065 - P65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오조오억 명이더라도 나는 누군가가 싫어하는 오조오억 명에 들어가기 싫은 게 사람의 마음. P 085 - P85

그렇게 콘서트에 가기 시작한 지 4년째 봄에는 헬로콘, 여름에는 스콜콘, 겨울에는 헤프닝콘을 꼬박꼬박 가고 있다. 딸이 아이돌 그룹 덕질 할 때 "걔네는 무슨 콘서트를 일 년에 한번 씩해!"그랬는데, 막상 덕질을 해 보니 일년에 서너 번도 적더라고요. P 196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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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는 정답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을 고민한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온라인상에서 어떻게 하면 남들 눈에 더 좋은 사람으로 보일지 고민한다. 내 스스로에게 좋은 사람이 아닌, ‘남들 눈’에 보이는 좋은 사람 말이다. 물론 나 역시도 그렇고 말이다. 이런 생각이 워낙 당연한 거였기에, 이게 내 자신을 갉아먹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내 스스로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이제는 조금 벗어나보려 한다. 타인이 보는 내가 아니라, 내 스스로가 나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를. 내가 눈치를 보는 사람이 타인이 아닌, 오롯이 내가 되기를 바라며 올 한해를 살아보려 한다.

대화를 나눌 때 ‘무심코 상처를 주는 말은 하지 말아야지’, ‘즐거운 이야기를 해야 해’, ‘분위기에 맞지 않는 말은 금물이야’라고 상대방을 계속 의식하게 됩니다. (중략) 따돌림을 받고 싶지 않은 마음과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강한 나머지 친구사이에도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합니다.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 마음대로 행동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의견에 공감하고 있나요? - P5

이렇게까지 극단적이지 않더라도, 타인을 많이 의식하는 유형은 쉬는 시간처럼 사람들이 모여 정해지지 않은 주제로 수다를 떠는 상황에 약하다. 얼굴을 아는 정도의 사람들과 우연히 방향이 같아 전철을 타는 등의 상황은 특히나 부담스럽다 P 033 - P33

사람들은 장소에 따라 어울리는 ‘나’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모범생 같은 행동을 할지, 쾌할한 모습을 연출할 지는 그 장소의 분위기나 평소의 대인관계를 바탕으로 판단한다. P 039 - P39

메세지를 보고도 빨리 대답하지 않으면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끼거나, 서먹서먹해질지도 모른다며 걱정한다. 다른 친구들은 답을 했는데 나만 답을 하지 않거나 하면 그룹에서 빠지고 싶어서 일부러 그런다는 오해를 사지 않을 지 불안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혼자 있을 때도 친구들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답장하는 데 신경을 쓰게 된다. P 056 - P56

특히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대면 상황과 달리 SNS는 내 모습이 상대에게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친구의 글을 읽고 의견이 좀 달라도 ‘좋아요’를 누르는 일이 많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며 자랑하는 사진을 보고 ‘왠 자랑질이야!’라고 성질을 내면서도 ‘좋아요’를 누른다. 쇼핑할 때마다 사진을 일일이 올리는 친구, 조금이라도 좋은 곳으로 외출하면 그 풍경을 찍어 올리는 친구의 사진을 보면서도 ‘자기의 일상을 하나하나 다른사람에게 알릴 필요가 있나?’라며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면서도 반사적으로 ‘좋아요’를 누른다. (중략)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자신의 포스팅에 모두가 ‘좋아요’를 누르거나, 호의적인 댓글을 달아주면 굉장히 기분이 좋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올린 사진을 보며 자신처럼 ‘이런 사진을 왜 올렸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이처럼 생각하면 SNS는 상대의 속마음을 매우 읽기 어려운 커뮤니케이션이다. P 076 - P76

타인의 비위를 맞추려고 세상을 사는게 아니다. ‘미움 받고 싶지 않아’라거나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라는 등 타인의 평가만을 걱정하는 삶이란 참으로 쓸모없다. 미움받는 것을 걱정하는 대신 자신에게 솔직해지자는 말은 실제로 큰 도움이 된다. P 094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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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문들은 인간 ‘박완서’가, 작가 ‘박완서’가 되기 전에 겪었던 그 사건들이, 훗날 작가 ‘박완서’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 가를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준다. 분명 ‘간접적’으로 나타낸 것이겠지만, 이 역시 작가 박완서가 직접 겪었던 이야기이기에 생각보다 강하게 와닿기도 한다. 그래서 그럴까, 나는 이 서문집이, ‘박완서’라는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일기 내지는 수필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머니 책의 서문을 모아 이런 책을 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것은 김윤식 선생님의 서문집을 보고 나서였습니다. (중략) 놀랍게도 서문을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리기도 하고 불끈 용기가 솟기도 하고 눈물이 어리기도 합니다. 타인을 생각하고 전체 속에서 자신을 낮추는 가식이 아닌 겸양, 진실과 책임과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반성이 밑받침이 된 오만은 쉽게 흉내 낼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고개를 숙이게 합니다. - P6

책을 다시 꾸밀 때마다 좀 손을 보려고 다시 읽어보게 된다. 지금의 안목으로 눈에 거슬리는 표현의 과장이나 치졸이 자주 눈에 띄어서 고치려면 어쩐지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못 고치고 만다. 유치함조차 그것을 썼을 당시의 젊고 착하고 순수한 마음의 나타남 같아서 소중한 생각이 들곤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처녀작을 느즈막이 사십 세에 썼지만 이십 세 미만의 젊고 착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섰다고 기억된다. 그래 그런지 그것을 썼을 당시가 암만해도 사십 세 같이 않고 아득하고 풋풋한 젊은 날 같다. P 22 『나목』 재출간 - P22

혼자 사는 여자는 다만 혼자 산다는 이유만으로 불행하기만 한 것일까? 아내가 남편 외의 외간 남자에게 한눈 판 건 두말할 여지도 없이 부도덕하고, 이구동성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반면, 남편이 아내 외의 여자를 장난삼아 범한 것에는 그도록 관대하고 떳떳하다고까지 부추기는게 과연 미풍양속일까? P 67 『서 있는 여자』 - P67

이 이야기를 꾸민 나의 첫 번째 소망도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 마음이 되어 아이들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리려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복동이 또래의 막내 손자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중략) 이 이야기를 꾸민 내 욕심도 재미 말고 또 하나 있는데 그건 아이들이 자기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남의 생명의 가치도 존중할 줄 아는 편견 없는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고 감사하며 신나게 사는 것입니다. P 162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 - P162

곧 6.25가 났다. 오빠와 숙부님이 비명에 죽고, 고향 땅은 북쪽 땅이 되었다. 전쟁의 와중에 죽었으되 전사도 폭사도 아닌, 사상의 대립이 초래한 동족 간의 전쟁이라는 특구성에 희생된 고통스럽고 값 없는 그들의 죽음은 그 후 오랫동안 나에게 악몽으로 남아있다. P 38 『창밖은 봄』 - P38

6.25 때의 체험은 하도 여러 번 욹궈먹어서 6.25 때 내가 어떻게 지냈나는 많이 알려진 셈이다. 그러나 1.4 후퇴 후 텅 빈 서울에 남아서 겪은 일은 유일하게 이 작품에서만 울궈먹었다. 실은 이 경우 울궈먹었단 말도 합당치가 않다. 내가 울궈먹었다는 말을 쓸 때는 체험에다 적당히 소설적인 허구를 가미한 경우인데 이 소설 중에서도 그 시기(이 소설은 1950년 6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의 얘기를 월별로 엮어놓았다)는 의식적으로 허구를 배제하고 철저하게 사실 묘사만 했다.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지금까지도 나는 그때 내가 과연 그 일을 꿈이 아닌 생시로 겪은 걸까 문득문득 의심스러워질 적이 있다. 이 거대한 도시가 하룻밤 새 텅 비고 인기척의 완전한 진공상태가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그대는 상상할 수 있는가. P 46 『목마른 계절』 재출간 - P46

여기 모인 글들은 내 개인의 흔적인 동시에 내가 작가로서 통과해온 70년대, 80년대, 90년대가 짙게 묻어나 있는 글들이다. 우리는 앞만 보고 달리다가도 우리가 살아낸 시대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문득 뒤돌아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무의미한 현실도 좋은 추억이 있으면 의미 있는 것이 되고, 나쁜 기억도 무력한 현재를 고양시킬 수 있는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저절로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P 142 『아름다운 것은 무엇을 남길까』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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