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푸른 눈의 증인 - 폴 코트라이트 회고록
폴 코트라이트 지음, 최용주 옮김, 로빈 모이어 사진 / 한림출판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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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그 날, 광주에는 푸른 눈의 외국인이 있었다. 영화 『택시운전사』로 널리 알려진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비롯하여 선교사들, 그리고 평화봉사단 의사들. 이들 중 한 사람,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의 나병환자들을 돌보던 폴 코트라이트. 그는 뒤늦게나마 광주에서 한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회고록을 출간했다. 


이 회고록을 출간한 최용주님은 이 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회고록은 아마도 광주항쟁을 직접 목격한 외국인이 기록한 최초의 출판물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광주 시민이 아닌 외부인의 관점에서 기록했다는 점에서 광주항쟁의 성격과 의의를 객관적으로 조명하는 소중한 자료이며, 광주항쟁을 둘러싼 수많은 왜곡과 폄훼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짓인지를 반증하는 증언록의 가치를 갖는다. P 232



작년 겨울, 난 광주에서 5.18의 흔적을 따라 돌아다녔더랬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당시 들렀던 장소들, 당시 보았던 사진들이 자꾸 오버랩되었다. 얼마전 광주법정에 참석한 전두환이 5.18 당시 헬기 사격을 계속 부인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분노가 치밀었다. 어떻게 40년이 흐른 지금까지 진상규명을 비롯하여, 피해자들의 명예회복, 시민학살에 대한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건지. 시민학살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왜 아직도 떵떵거리며, 피해자들을 조롱하고 있는건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폴 코트라이트는 광주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나주의 한센병 환자 정착촌인 호혜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때로는 환자들의 수술을 위하여. 환자들과 함께 순천의 병원까지 가야 할 때도 있었다. 나병 환자들은 일그러진 외모로 인해 밖에 나가는 것을 극도로 꺼려 했으나, 순천에 있는 병원을 가려면 밖에 나가는 건 당연하고 버스도 수차례 타야했다. 



병원 가는 길에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야 하는데, 사람들이 환자들 대신에 차라리 외국인인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P 033



아, 폴 코트라이트, 그러니까 저자는 정말 환자을 생각하는 참된 의사였다. 이런 사람이 40년 전 그날, 광주에 방문하게 된 건, 순전히 나병 환자들 수술을 위해 순천에 가기 위함이었다. 당시 나주에서 순천까지 가는 버스는 광주 터미널을 경유했다. 5월 19일, 그는 환자들과 순천까지 가는 길에 광주 터미널에 들렀다. 거기서 그는 참상을 마주했다.



모두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우리는 뒤를 돌아봤다. 그 젊은이가 바닥에 쓰러졌고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에서는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바닥에 쓰러진 그를 내려다보는 군인들 표정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P 056 (5월 19일)



문이 닫히고 버스가 터미널을 빠져나올 때 까지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승객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가끔 흘낏 창밖을 쳐다볼 뿐이었고,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표정들이었다. 도대체 군인들이 국민을 왜 이렇게 대하는 것일까? 어제 이곳, 광주에서 무슨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P 057 (5월 19일)



“어제는 정말 참혹했어. 전두환의 군인들이 데모하는 사람들만 보이면 달려들었어.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말이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몰라. 사람들 얘기로는 백 명은 넘을 거래.” P 063 (5월 19일)



저자가 광주를 들렀던건 5월 19일, “작전명: 화려한 휴가”가 시행된 바로 다음 날이었다. 당시 광주의 상황은 이러했다.



5월 18일, 공수부대가 전남도청, 금남로, 충장로 등을 중심으로 시위대 진압을 실시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눈 앞에 있는 시민들은 전부 짓밟혔고, 맞았고, 죽어나갔다. 폴이 광주에 들렀던 5월 19일에는 11 공수여단이 추가로 증파되어 더 많은 광주시민 학살이 진행되고 있던 바로 그 때였다. 물론 이러한 사항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 당신은 우리를 대변해주어야 해요.”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내 가슴 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지금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없어요. 세상 사람들은 이 나라 군인들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고 있어요. 미국인인 당신이 증인이 되어 우리를 대신해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사정을 알려주세요.” P 070 (5월 20일)



폴을 향한 할머니의 슬픔어린 이 말은, 폴이 회고록을 쓰고자 한 이유였다. 그렇게 폴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 그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폴에게는 ‘푸른 눈의 외국인’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으니까. 



나는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는 이 사건들로부터 감정적인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애썼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군인들이 자행한 학살의 공포와 군인들의 퇴각이 준 흥분이 뒤엉켜서 이 항쟁에 열광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만은 없는 처지이다. 한국에 계속 있으려면 냉정을 유지하고 객관적인 관찰자로 남아있어야만 했다. P 085 (5월 21일)



폴은 외국인이라는 무기를 방패삼아 광주와 나주를 오갔다. 물론 광주 밖을 나오는 교통편은 끊긴지 오래였고, 모든 길목마다 군인들이 검문중이었지만. 5월 21일, 이날은 신군부가 처음으로 ‘광주사태 담화문’을 발표한 날이다. 요지는 단순했다. 광주사태를 일으키는 불순분자들이 바로 빨갱이라는 것. 뿐만 아니라, 이날 공수부대에게 발포명령을 내리며 실탄을 지급했다.



대형 시내버스 두대, 승합차 한 대, 그리고 승요차 한 대가 도로에 널브러져 있었다. 차량 여기저기에 총알구멍이 뚫어져 있었다. 모든 차에 성한 유리창은 하나도 없었고 내부 여기저기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어제 환호하던 젊은이들이 타고 다니던 바로 그 버스였다. 


길 한가운데 자전거를 팽개치고 털썩 주저앉았다.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한동안을 멍한 상태로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으나, 어제 아침 남평으로 들어오던 젊은이들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성취감과 정열이 넘치던 바로 그 청년들. 그들이 한국의 미래였다. P 097 (5월 22일)



광주를 짓밟았던 계엄군이 광주 외곽으로 물러났다. 외곽에서 광주 진출입로를 원천 봉쇄하며, 이 곳을 지나려하는 시민들은 남녀노소 상관없이 무차별 사격이 가해지고 있었다. 폴이 이 도로를 지나 광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건, 본인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무기 ‘푸른 눈의 외국인’이라는 신분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지금 친북 공산주의자들이 광주를 장악했다고 말하고 있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이제까지 내가 보고 겪은 사건은 이 나라의 그 어느 곳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광주의 실제 모습은 철저하게 은폐되고 있었다. P 105 (5월 22일)


“미국 정부가 광주사태에 어떻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해?”

“모르겠어. 하지만 전두환이 미군과 모종의 협의가 없이 광주로 군대를 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래 네 생각이 맞을 것 같아. 젠장! 그렇다면 미국이 이 만행의 공모자가 된 거잖아! 미국 대사관은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까?”

“글쎄, 대사관에서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가만 있으면 안되지.” P 113 (5월 23일)


“우리가 토론해야 할 문제가 또 하나 있어. 미국 문화원 운영자가 전화를 했어.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는데 우리들에게 광주를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왔대.” P 124 (5월 23일)



폴을 비롯한 다른 평화봉사단원 데이브, 팀, 주디. 그들은 어떻게든 광주의 진실을 외부에 알리고자 했다. 심지어 자국, 그러니까 미국 정부가 가만히 있다는 사실에도 분노를 표했다. 아마 이때부터 이들은 지금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한것 같다. 광주의 진실을 외부에 알리고자, 광주에 들어온 또 다른 푸른 눈의 외국인 기자들을 만나자고.



“우리가 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해요.”

독일 기자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으나 떨리고 있었다. 옳다.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었다. 우리가 들어야 할 이야기는 동굴처럼 어두컴컴하고 침울한 이 방에 모두 있었다. P 134 (5월 24일)



도대체 어떤 정부가 이 할머니를 죽였을까? 얼마나 많은 이름 모를 할머니들이 죽었을까? 얼마나 많은 할머니들이 가족들을 기다리며 누워있고,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할머니 앞에서 통곡을 했을까? 로빈은 할머니 옆의 작은 관으로 갔다. 우리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안내하던 의대생이 먼저 말했다.

“이 어린이도 같은 시각에 죽었습니다. 부모를 찾고 있는데, 죽은 할머니와 이 어린이가 친척사이인지는 모르겠어요.”

시신은 얼굴만 남기고 천으로 둘러져 있었다. 충격을 받은 우리는 이 어린이의 관을 쳐다보며 아무말 없이 서 있었다. 잠시 후 우리는 긴 한숨을 토해내고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시신들이 그야말로 즐비했다. P 136 (5월 24일)



“저 사람이 사진을 찍고 있어요. 그런데 사진을 해외로 가지고 나가려면 쉽지 않을 거에요.”

내가 로빈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과연 로빈이 이 사진을 해외로 제대로 반출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군인들이 그의 카메라와 필름을 압수할 수도 있었다. P 146 (5월 24일)



폴 일행은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인터뷰를 하며 광주의 진실을 알렸고, 광주시민들과의 통역도 맡았다. 최대한 사실 그대로 독일기자에게,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폴 역시 상상하지 못할 참상을 계속해서 마주했으나, 그럴 수록 폴의 마음속에는 더욱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만 불타오를 뿐이었다. 푸른 눈의 외국인들은 머나먼 타국 땅에서 일어난, 이 참극을 어떻게든 외부에 알리고자 노력했다. 팀은 계속해서 독일 기자들의 통역을 맡았고, 폴은 광주를 떠나 서울에 있는 미국대사관에 알리기 위해 떠났다. 하지만 바로 이때부터 푸른 눈의 외국인이어도 광주를 벗어나기가 어려워졌기에, 폴은 정말 죽음을 무릅쓰고 인적없는 산을 넘어, 광주를 벗어나 나주까지 왔다. 본인의 ‘원래’ 근무지였던 나주 호혜원으로.




물론 나주에서도 서울까지 나오는 길은 힘들었다. 군인들은 광주 뿐만 아니라 전남의 길목을 막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광주보다는 덜 했는지, ‘푸른 눈의 미국인’이라는 무기로 겨우 겨우 서울까지 올라왔다. 드디어 미국 대사관에 이 사실을 알릴 수 있겠구나 싶었던 폴이었다.



우리는 대리대사의 사무실 밖에서 2시간을 기다렸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그 자리를 일어나 나왔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대사관은 과주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나는 마침내 이 책을 통해서 도청 앞의 할머니가 들려주기를 원했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 P 178 (5월 26일)



1980년의 미국은 한국과 한국인을 실망시켰다. 나는 이 책을 쓴 미국인으로서 미국인과 한국인이 우리 공동의 역사, 공동의 열망, 나아가 공동의 고통을 서로 더 잘 이해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서로 배워야 할 것이 정말 많다. 나는 지금도 배우고 있다. P 182, 에필로그



폴을 비롯한 평화봉사단원이 ‘설마?’하고 의심했던 그 생각. 아니었길 바랬던 그 생각은 나중에야 사실로 밝혀졌다. 미국의 비밀해제 문건 중 미국이 신 군부의 무력진압을 용인한 내용이 남긴 문서들이 속속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폴도 입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으나, 미국이 묵인했으리라는 생각을 안고 살았다. 광주의 진실을 알릴 그 때를 기다렸고, 바로 지금이 그 때라는 생각을 했기에 이 회고록을 출간한 것이리라.





광주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작년 겨울에 포스팅을 했었다. 그리고 이 포스팅은 지금도 여전히 논란의 댓글들이 달린다. 포스팅을 했던 당시에는 그런 논란 댓글들은 바로 삭제했었는데, 이제는 삭제를 하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했다.



앞서 제주 4.3항쟁에 관련된 포스팅에도 위와 비슷한 덧글들이 아주 자주 달리고 있다. 이런 덧글들의 공통점은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과, 정부군에 학살된 피해자들을 ‘폭동, 폭도, 빨갱이’라고 지칭한다. 전두환이 발표했던 ‘광주사태 담화문’의 내용을 그대로 믿으며, 독재 군사정권을 찬양하는 그런 사람들. 지금까지 경험상 이런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증거를 들이밀어도 믿지 않는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이런 사람들은 미국을 찬양하고, 성조기를 흔든다. 그렇다면 이들은 미국인이 쓴 이 회고록을 어떻게 바라볼까?


얼마 지나지 않으면 이 포스팅에도 위와 같은 논란을 일으키는 덧글들이 달리겠지. 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이 정말 좋아하는 미국인 조차도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고,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에 의해 일어난 학살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아직도 이 일이 빨갱이가 일으킨 폭동인 것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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