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약을 먹었습니다 - 유산균부터 바이러스 치료제까지 지금 필요한 약슐랭 가이드
박한슬 지음 / 북트리거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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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회사를 다니다보니, 회사 독서통신을 통해 약에 대한 책을 자주 읽었다. 이 책 『오늘도 약을 먹었습니다』도 그 중 하나다. 지금까지 읽어본 제약 관련 책들은 대게 약의 역사 또는 발견등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이 책은 결이 조금 다르다. 저자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말 그대로 ‘약술랭가이드’!



이 약을 먹어도 되는건지, 계속해서 먹어도 문제는 없는건지, 백신이나 항생제등을 꼭 사용해야하는건지, 우리가 의사 또는 약사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묻지 못했던 그런 질문들을, 속시원하게 설명해준다. 거기다 저자가 말하는 15가지 약들은 일상생활에서 뗄레야 뗄수 없는 약들이다보니, 읽는 내내 집중도 최강이었다.



대표적으로 우리 상전한테 꾸준히 챙겨주는 프로바이오틱스, 친정 아빠가 주기적으로 바르는 무좀약, 내 삶에서 뗄레야 뗄수 없는 진통제와 알러지성 비염치료제, 이 땅에 태어나면 무조건 맞게되는 백신이나, 아프면 처방받는 항생제나 항바이러스제 등. 일상생활에서 너무 친숙한 약들이다. 근데, 친숙함과는 별개로 내용 자체는 잘 알지 못한다는게 모순이랄까.



15가지 약 이야기에 들어가기 앞서, 프롤로그도 꼭 읽어봐야한다. 


지금까지 난 약을 하루에 세 번 먹는 이유는 약사가 그렇게 하라고 했고, 거기다 뭐 약효 지속시간도 있을 것이고, 약을 제때 챙겨먹을 수 있도록 제때 먹는 밥에 결부시켰거니 뭐 이렇게 생각했었다. 근데 생각보다 하루 세 번 약 먹기는 꽤 중요했다.


약을 하루에 세 번 먹는 제일 중요한 이유는 정말로 ‘약효’ 때문이었다. 근데 여기서 밑줄쫙!! 약 먹는 걸 건너뛰어도 안되고, 건너뛰었다고 두개를 한꺼번에 먹어도 안된다. 약 지속시간에 따라 정확하게 먹는게 제일 중요하다.


‘약효’는 약이 몸속에서 일정 농도 이상을 유지해야 나타난다. 약의 농도가 너무 낮으면 효과가 없고, 너무 높으면 독성이 나타난다. 약을 먹어서 약이 소화기관을 지나 혈액으로 흡수되기 시작하면, 이때부터 약효를 내기 위한 최소 농도인 최소 유효 농도에 도달한다. 보통 약 복용 후 늦어도 30분이내에 진행된다. 시간이 흐르면 약의 농도가 최소 유효 농도까지 떨어지며 약효가 사라는데, 약효가 사라지지 않게 하려면 혈액 중 약의 농도가 최소 유효 농도 이하로 떨어지기 전에 반드시 다음 약을 먹어야 한다. 약을 세 번 먹으라고 하는 이유다.


다만 약에 따라 소실속도가 다르다보니 하루 세 번 먹어야하는 약도 있지만, 하루에 두 번 먹는 약도 있고, 반대로 하루에 네 번 먹어야 하는 약도 있다. 전부 약효 지속시간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다. 




프로바이오틱스


프로바이오틱스는 적정량을 섭취했을 때 우리 건강에 도움이 되는, 살아 있는 미생물입니다. 일종의 먹는 세균 보충제인 셈인데요. 공식적인 정의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프로바이오틱스로 인정받으려면 한 가지 특성을 더 갖춰야 합니다. 몸에 들어온 미생물이 일시적이건 영구적이건 체내에 자리를 잡고 성장해야한다는 거죠. p 020



실제로 최근 한 연구에서 알러지 질환을 앓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신생아에게 출생 후 2년간 락토바실러스 람노서스 HN001 균주를 포함한 프로바이오틱스를 먹였더니, 아기였을 때는 물론 11세까지 아토피 발생이 유의미하게 감소했다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이처럼 프로바이오틱스를 이용해 면역 기능을 조절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시되면서, 원인을 알기 힘들었던 각종 면역 관련 난치병에 대한 치료법을 프로바이오틱스에서 찾으려는 노력도 조심스럽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장에 염증이 생기는 염증성 장 질환이나, 항생제의 부적절한 사용으로 발생할 수 있는 사망에 이를 정도의 심각한 설사에도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신경 질환과 마이크로바이옴의 관련성을 탐구하는 사람들도 있죠. p 022



과거와 달리 현대인들의 식단에 오르는 메뉴를 보면 비만과 성인병을 불러오는 가공식품 및 기름진 음식들이 많아졌다. 이런 식습관으로 인해 이른바 ‘비만세균’이 장을 장악하며, 몸에 염증반응을 일으키고, 당뇨병의 원인인 인슐린 저항성을 유발하는 등 건강에 적신호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비만세균을 없애는 방법은(전멸은 힘들겠지만), 그것들이 살기 어려운 환경으로 바꿔야하는 건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장내 유익균인 ‘프로바이오틱스’를 늘리는 것이다. 물론 건강한 식단과 같이해야 더 좋다. 



프로바이오틱스를 선택할 때는 눈을 크게 뜨고 똑바로 살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제약회사들은 어떤 종의 어떤 균주가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실제 임상 시험을 통해 밝혀내고, 순수하게 그 균주만 배양한 제품을 내놓습니다. 반면에 일부 업체의 제품은 그런 효과를 전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앞서 살펴본 ‘락토바실러스 람노서스 GG’와 같은 균주 이름을 전혀 명시하지 않고, ‘유산균 몇억 마리’라는 아무런 의미없는 수치만 강조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럼 어떤 프로바이오틱스를 먹어야 나름의 효과를 받을 수 있을까요? p 027




그럼 어떤 프로바이오틱스를 선택해야하는가!!! ‘유산균 몇억마리!’라는 문구만 거르면 일단 중간은 간다. 여기서 또하나. 간혹 프리바이오틱스를 프로바이오틱스로 오인하고 먹는 경우가 있는데, 프리바이오틱스는 프로바이오틱스의 먹이다. 프로바이오틱스랑 프리바이오틱스를 같이먹어야지, 프리바이오틱스만 먹는건 딱히 의미가 없다. 뭐 이미 장내 유익균이 많다면 모를까? 



이 책에는 각 증상에 대해 유요한 프로바이오틱스 균주들이 무엇이 있는지 알려준다. 


알러지성 비염완화: 락토바실러스 가세리/파라카세이 등


아토피 예방 완화: 락토바실러스 루테리/살리바리우스 등


노년층의 면역력 강화: 비피도박테리움 락티스


혈중 콜레스테롤 혹은 중성지방 감소: 비피도박테리움 롱검, 락토바실러스 루테리 등


과체중 완화 혹은 체중감량: 락토바실러스 가세리


항생제에 의한 설사 완화: 사카로마이세스 보울라디, 락토바일러스 카제이/람노서스 등




나랑 신랑은 유산균을 안먹은지 오래되긴 했지만, 우리 상전만큼은 꾸준히 유산균을 챙겨준다. 근데 어떤 균주들이 있는지 생각해본적이 없네? 책 읽은 김에 상전이 먹는 비오B타 베베골드 균주를 찾아봤다. 메인 균주가 락토바실러스 루테리, 락토바실러스 가쎄리! 이 둘이 제일 보편적인 균주인가보다.



겸사겸사 상전이 항생제 처방받을때마다 같이 처방되는 유산균인 비오플 성분도 검색! 사카로마이세스 보울라디. 오, 항생제에 의한 설사완화 기능. 역시 다 이유가 있는거였어!  



위에 옮겨적은 것 외에도 질환에 대한 균주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은사람은 책을 읽어보길! 균주가 너모 많아서 다 적기 어렵^_T







진통제


당연한 말이지만, 진통제가 질병자체를 치료하는 약은 아닙니다. 그럼 진통제는 어떻게 통증을 없애주는 걸까요? 타이레놀이나 게보린, 이지엔 같은 제품들은 COX효소를 억제하는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앞서 COX가 프로스타글란딘을 만들고, 프라스타글란딘이 통증과 발열을 일으킨다고 말씀드렸죠. 다행히도 프로스타글란딘의 수명은 30초 정도로 매우 짧습니다. 진통제는 COX 효소의 작용을 억제함으로써 새로운 프로스타글란딘의 생성을 막아주어, 우리의 고통을 줄여주죠. 진통제의 원리는 이렇듯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그렇다보니 시중에 판매되는 제품은 무척 다양해도 효과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p 107



이렇게 고마운 진통제에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습니다. 고용량의 진통제를 오래 복용한 사람들에게서 속 쓰림이나 심하면 위궤양 같은 증상이 발생했던 겁니다. 연구 결과 이런 위장 관계 부작용은 COX때문이었습니다. COX가 통증을 유발하는 물질만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소화기간을 소화액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물질을 만드는 과정에도 관여했던 겁니다. 진통제를 복용하면 통증을 유발하는 물질뿐만 아니라 소화기관을 보호해 주는 물질도 억제됩니다. 감기나 몸살같은 증상으로 병원을 찾으면 진통제와 함께 다양한 약이 처방되는데, 이 중에는 위 보호제 성분도 같이 포함된 경우가 많습니다. 되도록 식사 후에 진통제를 먹으라는 약사의 권유도 소화기관을 보호하기 위해서죠. p 108



마약성 진통제를 이용하면 환상통뿐만 아니라 극심힌 고통을 일으키는 삼차 신경병증이나 복합 부위 통증 증후군, 암 환자들이 겪는 암성통증, 수술 후 통증 등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습니다. 혹시나 마약성분이라는 점 때문에 의존성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런 부분을 고려해서 의료진이 투여량을 결정하니까요. 다만 마약성 진통제가 작용하는 수용체가 통증 신호를 전달하는 곳 말고 다른 곳에도 있어, 부작용이 발생할 위험성은 있습니다. p 110



살면서 진통제 안먹어본 사람이 있을까? 살면서 두통, 치통, 생리통(여성 한정)이 심해질 때 필수인 진통제! 그뿐인가? 아이키우는 부모라면 아세트아미노펜, 이부브로펜 계열 해열제 2종은 상시 보유해야한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 솔직히 진통제가 어떤식으로 통증에 반응하는지, 부작용은 얼마나 있는지 그런건 잘 모르다보니, 이 책을 읽으면서 진통제에 대한 새로운 지식 +1, +1, +1 …. 역시 약은 알고 먹어야한다...!



아세트아미노펜이 분해되는 과정이 알코올에 의해 방해를 받으면 NAPQI라는 간독성이 강한 물질이 간에 축적됩니다. 처음에는 메스꺼움과 식욕부진 같은 가벼운 증상이 나타나지만, 간의 손상이 진행되기 시작하면 극심한 구토와 복통이 시작됩니다. 심해지면 황달과 함께 의식이 혼미해지는 증상이 나타나 병원 신세를 지게 되는데, 아예 간이 괴사하여 간 이식을 받아야 하는 무시무시한 상황도 벌어질 수 있습니다. p 113



자자 이번엔 알콜을 사랑하는 성인들 주목! 약사가 타이레놀이나 감기약을 먹을 땐 왜 술을 먹지 말라고 하는지 궁금하지 않았는가! (알쓰제외ㅋ)



타이레놀 및 각종 진통제, 감기약 등 일상적으로 먹는 약에는 들어있는 아세트 아미노펜 성분이 분해되는 과정에서 알콜에 방해를 받으면, 간에 독성물질이 축적된다. 만약 숙취로 인한 두통이 너무 심해서 나는 꼭 진통제를 먹어야겠다! 고 생각한다면, 아세트아미노펜 계열이 아닌 이부브로펜 계열 진통제를 먹으면 된다. 다만 이부브로펜 계열은 속쓰림이라는 부작용을 동반할 수 있으니 이는 감수해야할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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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원 기행 - 역사와 인물, 교유의 문화공간
김종길 지음 / 미래의창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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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늘 읽은 인문학책은 오랫동안 책장에 꽂혀만 있던 『한국 정원 기행』이다. 늘 답사를 표방한 여행을 추구하던 나인지라, 옛 정원 또는 별서도 찾아다니는 상황이 종종 있었다. 그렇게 한 곳, 두 곳, 답사하는 곳이 늘어나다보니 정원에 대해 제대로된 이해가 필요하지 싶어서 구입했던 책이다. 이 책 속에 나와있는 정원은 50여 곳. 그 중에서 내가 가봤던 곳이 16곳이다. 


이중 경복궁, 창덕궁, 석파정, 청암정, 궁남지, 포석정, 수성동 등 대다수는 사전지식이 있는 상태에서 갔지만 식영정이나 명재고택, 방화수류정은 정원에 대한 이해도가 꽤 부족한 상태였다. 특히 식영정은 담양에 들렸다가 우연하게 방문하게 되었으며, 방화수류정은 그저 화성에 딸린 저수지정도로, 명재고택 정원은 뭐 다른 사대부 고택에 으레 있는 그런 정원이라는 정도가 끝이었다. 그러다보니 식영정에 갔을 땐 휴대폰을 들어서 열심히 검색! 명재고택 갔을 때도 검색! 거의 그 자리에서 검색하며 배경지식을 탐구하느라 정작 정원은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고나 할까?


진작에 우리나라 정원에 대한 인문학책 『한국 정원 기행』을 읽었더라면, 적어도 검색하는 시간보다 정원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달까.



최근 우리 옛 정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정원’ 대신 ‘원림’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리고 있다. 그 주장의 근거로 정원이라는 용엉가 일본에서 왔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원이라는 단어는 일본인들이 19세기 후반에 만들어낸 말로 일제강점기때 우리나라에 도입됐다. 그런데 문제는 간단치 않다. 엄밀히 따지자면 원림 또한 중국에서 온 말이기 때문이다. p 014



우리 옛 문헌엔 정원이 어떻게 표현됐을까. 가원, 임원, 임천, 원림, 구원, 원정, 정원, 화원, 원 등이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원림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쓰였고, 그 다음이 정원이었고, 다른 이름으로도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소쇄원처럼 ‘원’을 붙여 쓰거나 서식지처럼 정원의 주된 구성 요소를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어느 특정 용어로 통일해서 사용하지는 않았다. (…) 게다가 우리 정원에서 별서 정원의 경우 원림으로 불리는게 타당하지만 주택 정원이나 별당 정원은 원림과 분명 다른 요소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p 016



한국 정원에는 허, 원경, 취경, 다경, 읍경, 환경 등의 다섯 가지 경관 처리 기법이 있다. 비어(허) 있는 누정에서 멀리 있는 경치를 조망하고(원경), 주변 경관을 누정에 모으고(취경), 먼 곳의 다양한 경관을 누정으로 모으거나 누정에서 다양한 경관을 보거나(다경), 누정 속으로 자연 경관을 끌어들이고(읍경), 누정 주위에 자연 경관이 병풍츠럼 둘러(환경) 있게 한다. p 027



이 책에선 정원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을 비롯하여, 역사 속에서 정원을 누가, 왜, 어떤식으로 조성하였는지, 또 어떤 이름으로 불리웠는지를 쉽게 설명해준다. 거기에 더해 세부적으로는 우리나라에 있는 여러 정원을 소개하며, 그 정원을 어떻게 관람하고 향유할 수 있는지도 알려준다. 

개인적으로 책 속에 있는 정원 중 내가 직접 가봤던 정원 두 곳을 이 포스팅에 담아본다.




서울 석파정


흥선대원군이 탐이 나서 빼앗을 정도로 김홍근의 정원은 서울 제일의 명원이었다. 여기서 말한 김홍근의 별원이 지금의 석파정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흥선대원군과 김흥근의 질긴 악연을 엿볼 수 있다. 흥선대원군은 왜 이곳을 빼앗았고 김홍근은 어찌해서 빼앗길 수 밖에 없었을까. 그 내막을 좀 더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흔히 조선 말기에 세도정치를 일삼았다고 알고 있는 안동 김씨, 그중 ‘장동 김씨’에 대해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p 119



정조 재위시절 자하동 일대에 살던 안동 김씨 중 당대를 주름잡던 5명을 자하동 김씨, 줄여서 장동 김씨라 불렀다. 장동 김씨 중 한명인 몽와 김창집의 후손이 바로 김흥근이다. 김흥근과 흥선대원군이 처음부터 사이가 나빴던 건 아니었다. 고종을 옹립할 때까지만 해도 그들의 사이는 좋았다. 그러나 고종이 재위한 뒤에도 흥선대원군이 계속해서 정사에 참여하자, 이를 대놓고 마음에 안들어하면서 서로 척을 지게 되었다. 이후 흥선대원군은 김흥근이 소유한 땅을 빼앗기 시작했다. 김흥근은 자신의 별서인 ‘삼계동정사’ 만큼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이 고종을 대동하는 방법으로 빼앗고 만다. 빼앗은 ‘삼계동정사’는 ‘석파정’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한다. 이 정원의 앞산과 뒷산이 모두 바위이기에 붙인 이름이다. 대원군의 호인 ‘석파’ 역시 석파정에서 유래됐다.


조금더 과거로 올라가보자. 석파정 이전에 삼계동정사, 삼계동정사 이전에는 ‘소운암’이었다. 소운암은 조선 숙종 때 문신인 오재 조정만의 별장이었다. 오재 조정만은 노론의 거두 송시열의 수재자였다. 이 별장을 김흥근이 인수하여 ‘삼계동정사’가 되었고, 이를 흥선대원군이 빼앗아 ‘석파정’이 되었다. 



석파정은 인왕산 기슭 계곡에 있다. 19세기 말 격동의 시대에 왕과 왕실 사람들, 세도가들이 찾았던 비밀의 정원이었다. 예전의 석파정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던 모양이다. <석파정도> 병풍을 보면 석파정이 지금보다 훨씬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계류를 바라보며 들어앉은 사랑채, 안채, 별채 등은 당시 상류 계층의 정원이 얼마나 화려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p 126



사랑채 옆에는 별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이곳에 없다.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사들여 1958년에 자기 집 뒤뜰 바위 언덕으로 건물을 옮겼기 때문이다. 지금은 ‘석파랑’이라는 한정식집의 부속 건물로 쓰이고 있다. p 127



석파정을 대표하는 상징 공간은 계곡 깊숙이 숨어있는 정자이다. 서쪽으로 흘러내리는 계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점점 깊어지는 계곡 한가운데에 들어앉은 아름다운 정자 하나를 볼 수 있다. 정자의 이름은 ‘유수성중관풍루’, 그 뜻은 ‘흐르는 물소리 속에서 단풍을 바라보는 누각’쯤으로 풀이하면 될까. 가을날 온통 붉은 단풍에 둘러쌓인 이 정자를 바라보다 넑을 잃지 않을 사람, 아무도 없을 것이다. p 128



n년전 가을, 엄마와 함께 석파정에 갔었다. 사계절 내 아름다운 석파정이지만, 단풍이 물드는 가을의 석파정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특히 계곡 깊숙한 곳에 위치한 정자에 올라서서, 단풍구경을 한다면 꽤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봉화 청암정


권벌이 청암정을 조성할 때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청암정을 처음 지었을 때에는 온돌방이었고 둘레에 연못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온돌방에 불을 지피자 바위가 소리내어 울었다. 이를 괴이하게 여겼는데, 마침 이곳을 지나던 고승이 “이 바위는 거북형상인데 방에 불을 지피는 것은 거북이 등에 불을 놓는 것과 마찬가지요”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거북이를 태울 수 있는 아궁이를 막고 거북이가 물에서 살 수 있도록 바위 주변을 사방으로 파내어 연못을 만들고 물을 채웠다.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는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한다. p 264



처음 정원에 들어서면 연못 좌우로 풍경을 훑어보고 충재 쪽마루에 걸터앉게 된다. 충재는 선비의 공간인 만큼 단아하고 간결하다. 권벌은 평소 충재에 기거했는데, 평생 《근사록》을 즐겨봐서 충재에 ‘근사재’라는 현판을 걸었다고 한다. 잠시 충재에 걸터앉아 정원 안 풍경을 감상했다면 이제 연못을 건널 차례다. 연못에는 돌다리가 놓여있고 돌다리를 건너면 거북바위이고, 바위 위 돌계단을 오르면 정자 청암정에 이른다. 거북바위를 중심으로 삽아을 빙 둘러서 판 연못으로 인해 평범했던 바위 공간은 현실 세계인 인간의 땅과 구분되는 이상 세계인 무릉도원이 됐다. p 267



청암정은 봉암 닭실마을에 있는 정자다. 기묘사화 때 파직되어 귀향한 충재 권벌이 세웠다. 권벌은 귀향 후 안동이 아닌 봉화 닭실마을에 터를 잡았는데, 닭실마을이 권벌의 외가가 있는 곳이자, 어머니 파평 윤씨 묘소가 있던 곳이었다. 내가 청암정에 관심을 갖게 된건 사극에서 종종 그 풍광이 나오면서였다. 그래서 안동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봉화 닭실마을에 들렀고, 운 좋게 충재 권벌선생의 후손을 만나 연못 돌다리를 건너 청암정 내부까지 들어가는 귀한 경험까지 했으니 이 얼마나 운이 좋았던건지!



훗날 내 딸과 다시금 청암정에 들르게되면 그때 딸에게 자랑해야지. 엄마는 여기 돌다리도 건너봤다고! (※원래 청암정 내부관람은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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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죽음 수업 - 한 법의학자가 수천의 인생을 마주하며 깨달은 삶의 철학
이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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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그알 시청경력 1n년차라 왠만한 사건사고는 그 어떤 타격감 없이 ‘그렇구나’하고 넘어갔던 나다.  그알 시청경력이 몇 년 차인데! 이런거에 놀라고 호들갑떨어? 라고 생각했다. 하, 근데 아침 댓바람부터 눈물을 몽창 흘렸다. 그것도 회사에서! 날 오열하게 한 사건들은 ‘아이’였다. 정말로 오로지 성인들만 관련된 사건들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피해자, 가해자 또는 그 사이에 있는 또 다른 구성원이 중 하나가 성인이 아닌 ‘아이’가 들어가니까 와. 정신적 타격감이 너무 거셌다. 아이를 낳기 전엔 몰랐는데, 아이를 낳고 나니 이게 참 와닿는게 너무 달랐다.



내가 그 아이들을 후원한 것은 가장 먼저 그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지원만으로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두 번째 사람, 세 번째 사람이 함꼐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어 주면 좋겠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그저 엄청난 슬픔과 파괴 속에 남겨진 아이들을 위해 가장 먼저 본 우리 모두가 그 아이들을 안아주었으면 좋겠다. p 084




우리가 감히 유가족의 마음이 되어볼 수는 없다. 황망하게 떠난 가족이 얼마나 그리울지,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뜨거울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다. 무언가 몸을 움직여 행할 필요도 없고, 나의 시간이나 돈을 쏟을 필요도 없는, 아주 간단한 일이다.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것.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가장 마지막 사람이 되어주는 것이다. p 188




하교한 아이가 집에 오자 엄마가 죽어있었다. 아빠에게 전화했고, 아빠는 경찰에 신고했다. 아이는 그 날 자신이 보았던 상황을 경찰에 진술했다. 진술 속에서 아빠가 범인이라는 정황증거가 나왔다. 실제로 엄마를 죽인건 아빠였다. 이 아이는 엄마가 죽었는데, 엄마를 죽인 사람이 자신이 아빠고, 그 아빠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한 결정적인 증거가 자신의 진술이었다. 또 다른 가정에선 엄마가 아빠에게 맞아 죽고, 아빠는 자살해서 아이만 혼자 남았다. 다문화가정이라 국내에 친인척이라곤 고모 뿐이었다. 




이 아이들은 법에서 말한 피해자도 아니고 가해자도 아니다. 하지만 피해자가 아니라고 하기엔, 이 아이들에게 남겨진 고통은 뭐라 말할 수 있을까? 갑자기 자신을 사랑해주던 부모가 모두 사라졌을때, 엄마를 죽인 사람이 아빠였을때, 이 모든 진실을 감당하기엔 이 아이들이 너무나 어렸다. 무엇보다 아직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인데, 그 부모가 사라졌다. 이 아이들은 험한 세상을 부모라는 보호막 없이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대다수는 나라에서 어련히 잘 돌봐주겠지- 라는 생각을 하겠지만, 예상외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 아이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호 교수님은 남은 아이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후원자가 자신의 부모를 부검했던 사람이라는 걸 알면, 아이들은 다시금 슬픈 과거를 떠올릴지도 모르기에, 그렇게 되면 아이들에게 또다른 상처를 줄 지도 모르기에, 익명으로 후원을 시작했다고 한다.





법의 테두리 안에선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게 많지 않지만, ‘개인’은 가능하다. 이호 교수님처럼 개인적으로 후원할 수도 있고, 단체를 통해 후원할 수도 있다. 그러니 혹시라도 이런 아이들을 발견하게거든, 손을 내밀어주자. 그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도록. 부모는 아닐지언정, 그래도 자기를 걱정하고 지지해주는 어른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아이야


여섯 살이잖니


두 손으로 셈하기에도


네 개나 남은 나이인데


엄마와 3더하기 3은 6


아직 읽곱 여덟


셈하는 놀이도 끝나지 않았는데


하룻밤만 잔다더니 여직 그곳에서 놀고 있니


너의 향긋한 냄새는


너의 침대 배갯잎에도


너의 꼬꼬마 인형의 때묻은 뺨에도


그리고 지난번 소풍에 찍었던


사진 속의 네 미소에도 남아 있는데


너의 보송보송한 얼굴과


너의 고운 음성은


어디에 두었니


왜 그리 꼭꼭 숨었니


아이야, 천사의 나갯짓을 하고


오늘 밤 또 내일 밤


잠 못들어 뒤척이는 엄마 곁에


향긋한 너의 향기 뿌리며 오지 않겠니


내 그때라도 너의 보들보들한 뺨에 내 얼굴을 비비고


너의 은행잎 같은 손을 내 눈에 대어


흐르는 눈물을 막아보련만


오늘도 이 엄마는


너를 안았던 가슴이 너무 허전해


너를 부르며 피를 토한다


보고 싶은 내 아이야


귀여운 우리 아기야 


_ 박경란 「아이야, 너는 어디에」 中





「아이야, 너는 어디에」 이 시는 씨랜드 화재 후 아이를 잃은 부모를 보며 한 시인이 쓴 시다. 씨랜드 화재 이후 이렇게 아이들이 세상을 떠나는 일이 없을 거라고 믿었는데, 그 이후로도 수많은 아이들이 세상을 떠나는 크고작은 일이 되풀이 되었다. 




세월호 참사.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을 태운 배가 침몰했다. 배가 침몰할 당시만 해도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죽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왜? 배가 가라앉는데 꽤나 시간이 흘렀고, 침몰하는 배 주변에 해경을 비롯해 많은 배들이 와있었으니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299명이 사망했다. 그중 대다수는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이었다. 이 학생들이 사망한 이유는 단순했다. 어른들이 곧 구해줄거라는 믿음과 ‘가만히있으라’던 선내방송을 따랐을 뿐이다. 이 방송을 따르지 않고 자발적으로 뛰쳐나온 소수의 사람들(대다수가 성인)만 이 참사에서 살아남았다.




세월호 참사, 씨랜드 화재의 공통점. 바로 인재다. 관련자들의 사리사욕으로 시스템에 결함이 생겼고, 그 결함들이 쌓이고 쌓이다 발생한 인재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아낀다는 이유로 건축물을 지을 때 자재를 빼먹는 등 부실공사를 일삼거나, 적재용량의 몇 배를 더 실어서 운반하는 등 불법행위를 자행한다. 이런 불법적인 행태에 대해선 숨기거나 허위로 관청에 신고하고, 허위 신고를 잡아낼 기관들은 탁상머리에 앉아서 현황조사는 하지도 않은 채 허가를 내준다. 이런 시스템적 결함들이 쌓이고 쌓여 대형 참사라는 참담한 결과를 불러온다. 만약 저 시스템 안에서 단 한명이라도 올바른 사고로 악순환을 끊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참사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시스템 결함으로 인한 인재는 매년 지속되고 있다. 오송지하차도 참사가 그랬고, 이태원 참사가 그랬으며, 각종 건설현장에서 일어나는 산재사망사건들이 그렇다. 충분히 예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발생된다는 건, 아직 이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다. 정말 이런 시스템 결함으로 인한 죽음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우리는 사실 얼마나 위험에 가까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든 우리를 스칠 수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인지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세네카가 말했다. “누군가에게 일어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무엇이 위험하고 무엇을 고쳐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힌트는 사인 없이 죽어간 2만 8천 명 속에 있다. 우리 옆에서 조용히 사라져간 사람들, 죽어간 사람들 속에 우리 사회의 불완전함이 있다. p 047



부검을 하면서 언제나 결과에 대한 처벌과 책임에만 몰두하는 게 답답했다. ‘그 전에 원인을 먼저 파악하고 제거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나’. ‘어디선가는 여전히 삐걱대는 시스템 속에서 누군가가 또 죽음의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내가 예방법의학을 만들자고 주장헀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안 좋은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 길목에 작은 걸림돌 하나라도 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p 103



도덕적 선택의 아이러니에 놓였을 때 우리는 칸트의 정언명력을 떠올려야 한다. 칸트는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를 통하여 보편적인 법칙이 되도록 행동하라”라고 말했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지만, 그래서 과연 모든 사람이 선의의 거짓말을 허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 사회의 신뢰가 붕괴되고 말 것이다.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행동이 반드시 선한 결과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p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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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을 딛고 일어선 거장들의 실패학 수업
발검무적 지음 / 파람북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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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고 싶은 사람들은 으레 성공담을 읽는다. 하지만 그래선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성공하기 위해선 성공담이 아닌, 실패담을 읽어야 한다. 


사실 성공한 사람들의 일면을 보면 성공하기 직전까지 수두룩한 실패를 맞보았다. 수두룩한 실패를 겪고, 좌절과 고난을 겪으며 그들은 무언가를 얻고 또 깨우쳤다. 그리하여 결국엔 성공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성공하고자 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면은 보지 못하고, 그저 ‘무엇을’ 해서 성공했는지만을 쫓는다. 그런 행동이야말로 실패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오늘 소개하는 인문학책 『좌절을 딛고 일어선 거장들의 실패학 수업』은 말그대로 유명 인사들의 실패담이다. 여기서 말하는 유명인사는 어떠한 분야에서 뚜렷한 획을 그은 사람들을 말한다. 예컨대 당대에는 이해받지 못했으나 사후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건축가가 된 ‘가우디’라던가, 남아공의 흑백갈등을 봉합하고 모든 인종의 존경을 받는 ‘넬슨 만델라’같은 사람들 말이다.


1. 차별의 세상을 울려버린 영혼의 목소리, 빌리 홀리데이



1915년 미국 슬럼가에서 태어난 한 흑인 소녀. 아버지는 유랑악단, 어머니는 창녀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딸을 버리고 떠났다. 외가에 맡겨진 어린 소녀는 돈 벌이에 나서야 했다. 열 살 때 일하러 간 집에서 40대 백인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는데, 경찰은 오히려 소녀를 불량 소녀라며 감호소에 집어넣었다. 흑인이었기 때문에. 감호소에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흑인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 누구도 어린 흑인 소녀를 지켜주지 않았다. 



이후 그녀의 삶은 다른 흑인 여성들과 비슷했다. 백인의 집에서 하녀로 살다가, 대공황 속에서 슬럼가 속 창녀로 살아가는 것. 흑인 소녀 일리노어 페이건은 그런 가혹한 삶을 살았다. 그녀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한건 댄서로 취직하고자 찾았던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면서였다. 그녀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그녀의 노래애 전율을 느꼈고, 그녀의 노래에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그녀는 ‘빌리 홀리데이’라는 이름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누구나가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듣고 열광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무대 위에 한정되었다. 그녀가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녀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은 언제나 돈을 목적으로, 흑심이 가득한 사람들 뿐이었다. 빌리는 그런 사람들을 가려낼 수 없었다. 살면서 제대로 사랑받아온 적이 없고, 앞서 말했듯 가혹하고 각박한 현실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전 세계 재즈 역사에서 ‘빌리 홀리데이’라는 그 이름을 빛냈지만, 정작 그 속에 그녀 자신은 없었다.



그녀가 살아오며 배운 선택의 범위는 그녀가 보고 듣고 배운 정도를 벗어나지 못했을 뿐이다. 어려서부터 사창가에서 자라며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 고민할 겨를조차 없이 치이며 살아온 흑인 소녀에게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다르지 않은가? 시대는 변했고, 당신이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도 아니고, 시대가 당신의 인종을 차별하며 당신이 무언가를 할 수 없게 가로막고 있지도 않지 않은가? 그럼에도 세상의 불행을 혼자서 짊어진 듯 좌절하고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 빛이 쏟아지는 곳으로 나오길 꺼린다면, 그것은 결국 스스로가 자초한 파멸이고 인생이 고작 그것밖에 안된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p 089






2. 비관 속에서 피어난 희망의 판타지, 미야자키 하야오


태평양전쟁 시기에 태어난 미야자키 하야오. 그의 집안은 군용기 부품 생산 공장을 운영했다. 태평양 전쟁당시 카미카게 작전에 이용된 전투기 ‘제로센’ 부품도 미야자기 공장에서 생산했다. 이런 환경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매우 부유하게 자랐다. 군용기를 생산하기에 자연스레 그의 집안에는 일본제국 군인들이 자주 다녀가곤 했다. 이러한 유년시절는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복합적인 삶의 가치관으로 남는다.



집안이 군용기 부품 생산공장을 운영하며, 그는 자연스럽게 비행과 비행기의 날개 및 밀리터리에 대한 환상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반해 군용기 부품 생산 때문에 수많은 제국주의 군인들을 보고, 제국주의에 대한 환멸을 느꼈으며, 이는 그를 뼛속까지 반전주의자로 살게했다. 서로 모순되는 가치관이 복합적으로 섞여서, 지금의 미야자키 하야오를 만든 것이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그가 설립한 ‘지브리 애니메이션’ 작품 속에서 자주 나타난다.


이토록 부유한 유년시절을 보낸 미야자키 였지만, 성인이 된 후 애니메이션 제작자의 길로 들어서면서 늘 재정난에 시달렸다. 3억엔의 제작비를 들였던 <칼리오스트로의 성>이 흥행에 참패하고, <리틀네모> 제작 준비를 하던 와중에 회사와 이견차이로 퇴하하였으며, 미야자키의 명작으로 알려진  <바람의계곡 나우시카>는 인력난, 기간압박, 계획된 엔딩 변경 등 여러 문제를 안고 태어난 작품이었다. 이후 미야자키는 <천공의 성 라퓨타>를 기획하며 ‘지브리 스튜디오’라는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창립했다. 미야자키&지브리 신화의 시작이었다.


그는 생긴 그대로, 소심하고 소극적이며, 작품을 끝낼 때마다 은퇴하겠다고 징징거리는 성격으로 유명하다. 가난이 매일반이었던 전후 일본에서 유복한 가정에서 만화가를 꿈꾼 소심한 그가, 실패를 거듭하며 밀리고 밀려 돈을 마련할 방편으로 어쩔 수 없이 만든 영화가 그를 지금의 대가로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회사가 일본 애니메이션을 대표하는 지브리 스튜디오가 되었다. 그림체만 보더라도 그의 작품임을 알 수 있을 만큼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작업을 거의 혼자서 다 한다고 할 정도로 독특한 작업스타일을 갖게 되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것은 그의 성격이 빚어낸 자업자득의 결과였다. p 189



성공하기 전 미야자키의 삶은 실패로 얼룩졌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아니, 좌절했지만 꾸준히 다시 일어섰다. 실패 속에서도 끊임없이 조그마한 성과를 달성해나가며 경험치를 쌓았다. 실패를 통해 쌓인 경험치는 그의 자산이 되어, 그가 설립한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빛을 발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전설 미야자키 하야오&지브리 스튜디오의 성공은 수많은 실패가 거름이되어 탄생했다. 






저자는 유명인사들의 실패담을 핑계삼아 말한다.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당신은 최소한 배는 곯지 않고, 학교에서 기본교육도 받았으며, 총알이 눈앞을 지나가는 것마냥 죽음을 눈 앞에 둔건 아니지 않느냐고. 책 속에 있는 인물들은 하루벌어 하루 먹을 수 있었고, 기본교육은 언감생심이었으며, 죽음을 넘나드는 전쟁터에서도 살아왔다고. 이들처럼 생존의 기로에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벌써부터 좌절하고 모든 의지를 내려느냐고. 너는 충분히 할수 있는데 왜 벌써 포기하느냐고. 


지금 당장 현실의 벽에 부딪혀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그 모든 것이 인생의 자양분이 될지니. 모두가 조금 덜 아파하고, 딛고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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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 일본의 근대를 이끌다 살림지식총서 583
방광석 지음 / 살림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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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절대 잊어서 안되는 날이 있다. 날짜로 말할 것 같으면 8월 15일과 8월 29일. 15일 광복절은 국경일이기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반면에 29일은 생소한 사람이 많다. 그것도 아주 많이. 왜그럴까? 대략 백년하고도 15년 전 8월 29일, 그 날은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제일 치욕스런 날이었다. 그렇기에 공교육에서도 굳이 날짜를 부각시키지 않았고, 정부 차원에서도 29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1910년 8월 29일과 1945년 8월 15일은 일제강점기 시작과 끝이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 한일병합 조약이 성립되며 대한제국이 사라졌다. 그 과정에서 고종을 비롯한 조선왕실, 친일고관대작들은 나라를 건네주는 대가로, 자신들의 안위와 재산을 보장받았다. 대한제국 백성들이 어떻게되든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대한제국에 속했던 모든 사람들은 일본제국 사람이 되었다. 지도에서 대한제국(또는 조선)은 지워졌다. 


그렇게 지난한 시간이 지났다. 35년의 시간동안 후손들에게만큼은 우리나라, 우리말, 우리문화를 전해주고자 했던 조상들은 자신의 생명을 받쳐 독립을 이루어냈다. 그렇게 1945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이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조상들이 일궈낸 독립이다. 문득 몇 일전 독립기념관장의 개똥같은 광복절 연설이 떠오른다. 저런 인간이 독립기념관장이라니. 정말 윤석열 정부 때 임명된 인간들은 제대로된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 1도 없다.


자, 이제 생각해보자. 앞으로도 지금처럼 8월 29일에 의미부여를 하지않고, 아무날도 아닌 것처럼 가는게 맞을까? 그저 8월 15일 광복절만 가르치고 8월 29일은 그저 달력에 있는 어느날 처럼 취급하는게 맞을까? 지금까지 8월 29일의 중요성을 감춰왔기에, 앞서 말한 독립기념관장 같은 왜곡된 역사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건 아닐까?


​물론 8월 29일이 우리 역사상 제일 치욕적인 날이기에 숨기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오죽하면 경술년에 일어난 국가적 치욕이라고 하여 ‘경술국치’라 부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알아야한다. 언제, 어떻게, 왜 나라를 빼앗겨야만 했는지를. 그래야 나라를 되찾기위해 모든 것을 바친 조상들을 제대로 기릴 수 있다. 그 뿐인가. 왜 빼앗겼는지 알아야 앞으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할 수 있다. 지난 날의 잘못을 반성하여, 동일한 잘못을 하지 않게 경계하는 것. 바로 ‘징비’다. 여담이지만, 서애 선생이 ‘징비록’을 쓴 이유를 이 땅의 후손들은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보여서 슬프기 그지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리뷰하는 역사책은 『이토 히로부미』는 경술국치가 어떻게, 왜 발생했는지를 잘 알려주는 책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을 식민통치하기 위한 기구인 ‘통감부’의 초대 통감이자, 경술국치를 설계한 자이며, 안중근 의사가 의거 당시 사살한 조선 침략의 원흉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농민의 아들이었으나, 아버지가 조슈번 무사집안의 양자로 들어가며 무사 신분을 얻는다. 조슈번 무사가 된 이토는, 조슈번에서 유명한 학당을 찾아간다. 요시다 쇼인이 운영하는 쇼카손주쿠다. 그렇게 이토는 요시다 쇼인 제자가 되었다. 덧붙이자면 쇼카손주쿠에서 요시다쇼인에게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은 훗날 일본의 근대화혁명인 메이지유신을 주도한다.


여기서 주목할 건 요시다 쇼인이 이토에 대해 남긴 평가다. 요시다는 이토를 보며 ‘평범한 학생’라고 평가했다. 이토가 훗날 메이지 유신을 주도하고, 메이지 정부의 초대 총리가 되며, 한국을 침략하기 위한 수많은 정책에 깊숙히 관여하고, 결국 한일강제병합(경술국치)를 이끌어내는 구심점에 있었다는 점을 보았을 때 매우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왕정보고’ 이후 이토가 견지해온 ‘천황친정’은 대외적으로 정권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정치이념일 뿐 실제 정치주체로서 천황의 ‘친정’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천황의 능동적인 정치관여를 제도화하려 했던 천황친정운동도 이토 등 정부 수퇴에 의해 결국 좌절되었다. 입헌체가 수립되기 이전의 근대 태정관제는 전제군주제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천황은 권위의 원천으로만 기능하고 실제의 정치운영은 법치주의적 원칙 아래 번벌 관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p 020


1876년 9월 ‘점차입헌정체 조직’의 취지에 따라 원로원에 ‘국헌’ 초안의 기초를 명하는 칙어가 내려져 10월부터 1880년 7월에 걸쳐 세 차례의 초안이 작성되었다. 유럽 각국의 헌법을 참고로 장기간에 걸친 조사 끝에 「국헌안」이 제출되었지만 내각에서 채택되지는 못했다. 원로원 「국헌안」은 영국식 입헌정체 구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p 021



원로원의 「국헌안」은 여러차례 부침의 결과 결국 채택되지는 않았았지만, 이토를 비롯한 여러 관료들은 ‘입헌제’ 필요성 자체는 인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메이지 정부의 향후 방침은 ‘입헌제 수립’ 이라는 고무적인 결과를 얻었다. 그렇다면 이토가 「국헌안」을 반대한 이유는 무엇일까. 「국헌안」 속 정치 주체가 내각이 아닌 의회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토는 군주와 의회 권한을 제한하고, 내각 즉 관료 중심인 입헌제를 고수한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생각을 뒷받침하기위해, 직접 유럽 여러국가를 시찰하며 각국의 입헌제를 조사 및 연구했다.


이후 이토는 확신한다. 일본이 유럽 강국의 입헌제를 표방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대신 천황제를 중심으로 기존의 국가기구를 입헌적으로 바꾸면 입헌체제 수립이 가능하다고 말이다. 이 과정에서 이토 리더쉽이 부각되었고, 그렇게 정권의 지도자로써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토는 입헌정치의 상대화에 의해 헌법에서 행정으로 관심을 옮겨 “설령 아무리 좋은 헌법을 제정하고 좋은 의회를 개설하더라도 행정이 좋지 못하면 성과를 거둘수 없다”고 말하며, 행정조직 정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행정’의 강조는 이토의 일관된 국가기구개혁론의 연장선상에 위치한 생각이었다. p 046



이후 이토는 궁중개혁을 비롯해 국가기구개혁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이토가 헌법제정에 앞서 먼저 기구개혁에 나선 것은 유럽 체류 중에 슈타인의 가르침을 받아 헌법제정과 국회개설 전에 “제가(帝家)의 법, 정부의 조직 및 입법주 조직”을 확립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먼저 재상의 직권과 책임, 관청의 구성과 관리의 규칙, 시험 방법 등 ‘행정’의 조직과 규칙을 확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토가 궁중개혁, 내각제도의 개혁을 단행하는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이 입헌제 시행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p 048




이토는 유럽 시찰에서 귀족의 정치적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다. 하지만 기존 일본 전통 귀족들로는 입헌제 속 역할을 부여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하여 “오늘날 사족과 평민 공로자를 무식한 화족 및에 두면 안된다. 이미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면 아직 공로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라고 말하며, 새로운 작위제도를 만들었다. 그렇게 일본에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5단계 작위체계가 생겼고, 개인의 공로에 따라 작위가 부여되었다. 



또한 천황제 시절의 3대신(태정,좌,우)체제를 철폐하고 관제개혁을 통하여, 책임 내각제도를 수립했다. 이러한 이토의 개혁은 매우 급진적이어서 구체제 관료들과 귀족들에게 강한 반발을 불러왔으나, 이토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설득하며 밀어부쳤다. 시대가 이미 바뀌었기에, 일본도 흐름에 따라 바뀌지 않으면 결국엔 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토가 자국을 위해 입헌제를 고심하고, 헌법을 연구하며, 입헌제를 실시하는 유럽 여러나라를 시찰하며 공부하는 동안 우리나라는 무엇을 했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일본과 조선이 극하게 대비된다.



조선의 임금 고종은 전제군주인 ‘황제’가 되고자 했다. 세계사적 흐름을 완벽하게 역행하고 있었다. 그렇게 고종은 근대국가이자 전제군주국가인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물론 일본도 ‘일왕’이라는 군주가 있었으니 비슷하다고 우길 지도 모르지만, 놀랍게도 단 1도 같은게 없었다. 



군주가 있을 지언정 실질적 정치적 주체는 관료이며, 수많은 연구와 시행착오 끝에 제정된 헌법 아래 정치를 한 일본제국과 오로지 고종의 입맛에 따라 졸속 제정된 헌법과 고종의 입맛에 따라 널뛰는 정치를 한 대한제국. 이 확연한 차이야말로 한반도와 일본을 피지배국과 지배국으로 갈라놓는 제일 큰 원인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고종이 근대국가인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유은 오로지 황제 자신을 위함이었다. 자신의 부와 명예, 안위를 유지하기위해서. 




헌법은 매우 중대한 것으로 황실의 흥망과 큰 관계가 있으며 이를 잘못해 백년의 우환을 초래해서는 안된다. 자신은 적어도 사심을 개입하지 않고 제실과 국가를 위한 것만을 생각하며 헌법을 기초했다. p 068



동양에 있어 일본이 처므으로 입헌정치를 채용하게 되었는데, 유럽 각국에서 1,000여 년간의 전통이 있어 인민히 입헌정치에 익숙한 것과는 달리 전혀 새롭게 만드는 것으로 국가에 대해 이익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헌법을 제정하는 데 있어서는 먼저 일본의 기축을 구해야만 한다. 기축이 없이 정치를 인민의 망의에 맡겨 국가를 폐망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유럽에 있어서는 입헌정치의 전통이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가 깊이 사람들 마음에 침투하여 국가의 기축을 이루고 있는데 일본에 있어서는 종교의 힘이 미약하여 쓸모가 없다. 일본에 있어 기축이라고 말 만한 것은 오직 황실 뿐이다. 따라서 이 헌법초안에 있어서는 군권을 존중하고 이것을 기축으로 삼아 훼손돼지 않도록 매우 주의했다. p 069



메이지헌법은 이토 등 관료가 주도해 기존 번벌 지배구조를 보장하기 위해 군주제와 입헌제를 교묘하게 결합한 것이다. 위와 같은 강대한 천황대권이 헌법상 규정되어 있지만 실제 정치과정에서 천황대권을 행사한 것은 이토나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같은 메이지유신 이래 정권을 잡아온 원로들이었다. p 076



위에서처럼 이토는 ‘황실’을 중심축으로 삼되 입헌제의 원칙을 지켰고, 실제로 예산에 부여하는 입법권 등은 순수한 입헌제 원칙을 적용했다. 그렇게 1889년 2월 11일 대일본제국헌법이 공포되었다. 공포된 제국헌법은 위에서 아래로의 개혁 연장선이었으며, 기존의 군주주권을 유지하는 형태였기에 혼란을 잠재우며 국내 안정을 꾀하는데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여기까지가 일본에서 바라본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다. 나라를 근대화시키고, 헌법을 제정하며, 일본 양원제 확립에 기여한 사람. 일본인에게 이토 히로부미는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위인이다. 어디까지나 일본인에게만.






우리는 알고 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이토는 일본 내부적으로 훌륭한 정치가였다. 이렇게 훌륭한 정치가들은 하나같이 내부에 문제가 생겼을 땐, 외부로 눈을 돌리게 한다. 정치가 이토도 이 이치를 명확하게 꿰뚫고 있었고, 실제로 내부 정치 위기 탈피를 위해 외부에 있는 ‘조선’을 이용했다.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게 해준 것은 대외문제였다. 조선에서 발발한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빌미로 군대를 파견해 청일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제2차 이토 내각은 국내의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 청일전쟁의 승리를 통해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화’ 하려고 하였으나 요동반도를 중국에게 돌려주라는 독일,프랑스,러시아 3국 간섭을 수용하고 일본인이 민왕후를 살해한 을미사변으로 인해 조선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이것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력 확장을 꾀해온 일본의 조선정책이 일시적으로 좌절된 것을 의미한다. p 085



이토가 한국침략의 전면에 나서게 되는 것은 러일전쟁(1904~1905년) 이후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이른바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12월 21일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임명해 한국에 대한 ‘보호통치’를 시작했다.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는 구미 열강의 승인이 그 배경에 있었다. 미국은 1905년 7월 29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영국은 8월 12일 제2차 영일동맹조약을 조인하는 과정에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했다. p 091



1907년 6월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이토는 이를 계기로 한국지배 체제를 더욱 강화하려고 하였다. 이토 통감은 이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퇴위시킴과 아울러 한국의 내정권을 장악하고 통감의 권한을 대폭 강화한 ‘정미7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정부는 순차적으로 한국의 내정권을 장악하고 병합을 위한 기반을 닦는 정책을 취했으며, 그러한 과정을 거쳐 정부의 방침으로 한국병합을 결정한 것은 1909년에 들어서였다. p 092



정미7조약, 군대해산 등은 조선 내에서 경렬한 저항을 불러 일으켰고 그로 인해 전국적으로 항일의병 활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에 이토는 통감직을 사임하고, 극동문제 논의를 위해 러시아로 가던 중 하얼빈에서 독립운동가 안중근에게 사살된다. 이토가 안중근에게 사살된지 10개월 만에 일본은 한국을 직접 식민지로 삼았으니, 그 날이 바로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탄이다. 경술년에 일어난 국가적 치욕이라 하여 #경술국치 라고도 한다.



문제는 이 이후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사실상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병합에 소극적이었는데, 이토라는 큰 장애물이 사라지자 급하게 병합이 된게 아니라는 의견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토가 오히려 조선을 보호하였고, 오히려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사살하였기에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들어갔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궤변이다. 



이토는 조선을 식민지화 시키기 위한 정책을 차근차근 펼쳐나갔고, 이토가 통감직을 사임했을 직후에는 이미 병합을 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된 상태였다. 무엇보다 이토는 정한론(정확히는 해외팽창 정책)을 주창한 요시다 쇼인의 제자다. 이토 히로부미 뿐만 아니라 야마가타 아리토모, 기도 다카요시, 이노우에 가오루 등 메이지 정부 요인들 대다수가 요시다 쇼인의 제자였기에, 그들이 자국 내 정치 안정화를 끝난 뒤 조선을 식민지화 시키는 건 사실상 정해진 수순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여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가 절대 된 게 아니다. 이토는 처음부터 한반도를 식민지 삼기 위해 설계했던 사람이었고, 설계에 따라 한반도가 일제 식민지가 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진행하였으며, 준비가 완료된 뒤 실제 식민지배 도장을 찍는 날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처단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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