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청춘의 초상 - 조국의 독립에 바친 뜨거운 젊음, 한 장의 사진이 증언하는 찬란한 그 순간
장호철 지음 / 북피움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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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장에는 일제강점기 관련 역사책들이 꽤 있다. 일제 수탈과 침략에 대한 역사와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의 역사. 결이 확연히 다른 두 역사는 읽는 이로 하여금 상반되는 감정을 들게한다. 어느 쪽을 선호하고 읽느냐는 개인의 자유이지만, 잊지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이 모든 역사를 절대 잊지않고 ‘기억’하고 기록하여, 우리 후손들이 이 사실을 명확하게 알게 할 것. 그리하여 우리에게 매우 당연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격이 어떻게 주어졌는지를 인지하고, 우리에게 ‘대한민국’ 이라는 나라를 남겨준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 이게 바로 내가 역사책을 읽고 또 읽는 이유다.



누군가의 자식이었고, 누군가의 배우자였으며, 누군가의 부모였던 독립운동가들. 그들이 바라던건 내 후손들이 ‘우리나라’에서 ‘우리말’을 쓰며 ‘자유’롭게 살수 있는 것. 단지 그뿐이었다. 그 하나만을 위해 독립운동가들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이 역사책은 독립운동가 26명에 대한 역사책이다. 독립운동이라는 특성상 자신을 드러내고 할 수 없기에, 광복 80주년을 맞은 아직까지도 후대가 확인하지 못한 무명의 독립운동가가 많다. 아직 발굴되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을 찾는 일은 전문가들에게 맡기자. 우리는 발굴된, 그리고 아직 발굴되지 못한 모든 독립운동가들을 기리고 그들을 기억하자. 




김란사, 조선의 앞길에 등불을 켜다

안창호, 미국 최초의 한인촌을 세우다

김알렉산드라, 조선인 1호 볼셰비키 혁명가 아무르강에 혁명의 꽃으로 지다

장인환, 샌프란시스코에 울린 3발의 총성

안중근, 세 번의 “코레아 우라”

이재명, 을사오적을 처단하리라

김익상, 감시대상 12310번 의열단원의 슬픈 독립투쟁

유관순, 영웅도 신도 공주도 아니었던 10대 독립운동가의 순수

김상옥, 수백 일경과 벌인 전설의 총격전

나석주, 황해도를 뒤흔든 투사

김마리아, ‘대한독립’과 결혼한, 조선이 낳은 혁명 여걸

박자혜, 홀로 두 아이를 키우며 일제의 압제와 싸우다

이봉창, ‘신일본인’에서 ‘독립투사’로

윤봉길, 중국 백만 대군이 못한 것을 해낸 스물 넷 청년

백정기, 함정수사에 걸려든 미완의 거사 상하이 ‘육삼정 의거’

윤동주, 마지막 여름방학 그는 돌아오지 못했다

김규식, 영특한 소년 ‘좌우합작’과 ‘납북협상’을 주도하는 정치가가 되다

김구, 26년간 임시정부 이끈 민족주의자의 풍찬노숙의 역사

전명운, 미주 한인사회의 통합을 앞당기다

차마리사, 여성해방은 경제적 자립에서 시작된다

김원봉, ‘현상금 100만 원’의 사나이

주세죽, 단발머리의 모던 걸? ‘코레예바’의 사랑과 혁명!

연미당&엄항섭, 파수꾼으로 임정과 함께한 부부, 분단 조국에서 이산의 비극을 겪다

권기옥, 창공을 날아올라 일왕 궁궐 폭격을 꿈꾸다

정정화, 권문세가 셋째딸, 임정 밀사로 압록강을 건너다

장준하, 그해 여름, ‘돌베개’를 베겠노라 다짐하다




김알렉산드라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는데, 재판장은 “당신은 조선인이기 때문에 러시아 국사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 그러니 죄를 뉘우치면 석방하겠다.”라고 제안하지만, 그는 이를 간단히 거부하며 “적위군과 함께 이 전쟁에 참여한 수백 명의 조선인은 소비에트 권력을 방어하는 것이, 조선을 해방에 이르게 해줄 것을 알기 때문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것이다.”라고 답했다. 1918년 9월 25일, 김알렉산드라는 하바롭스크 아무르강 유역 우초스 절벽에 섰다. 사형 집행관들은 포로들의 눈을 흰 수건으로 싸매고서 강변 바위 위에 세운 뒤 총살하고 그 시신을 강물에 던져넣었다. p 039


‘유관순 누나’, 친근하고 정겹게 부른 호칭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기실 이 호칭은 관행적인 남성 위주의 시각을 대변한다. 그가 스물 이전에 순국한 ‘소년’이었다고 한들 우리 사회에서 그를 ‘ㅇㅇㅇ형’이라 부를까. 더구나 ‘ㅇㅇㅇ오빠’는 언감생심이다. 호명의 주체로 여성을 상정하는 일도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공적 호칭으로 ‘유관순 언니’가 없는 것도 같은 이유다. 장소천이나 박두진에게는 1902년생인 유관순이 ‘누나’임직하지만 이미 그가 태어난 지 100년이 훨씬 지났다. 그런데도 여전히 ‘누나’로 불리는 것은 그를 온전한 한 사람의 독립운동가로 바라보는 걸 방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를 ‘유관순 열사’라 부를 때 그는 ‘이준 열사’와 같은 위상의 공적 영역에 존재하는 인물이 된다는 점을 되새길 만하다. p 099


“대한독립과 결혼하였다”라는 진부한 표현마저 그의 삶을 아우르는 데 모자를 정도로 김마리아는 평생 독신으로 독립운동과 민족 교육, 여권 신장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었다. 두 차례의 투옥 중에 여성으로서 치욕적인 고문을 받아 한쪽 가슴을 잃고 늘 안섶과 겉섶의 길이가 다른 특별한 저고리를 입어야 했던 사람이었다. p 124


독립유공자 가운데 여성의 비율이 3%가 채 되지 않는 현실은 옥바라지와 경제활동, 양육까지 병행하며 항일투쟁에 참여한 여성들의 희생이 재조명되어야 할 필요성을 웅변으로 증명한다. 그늘에 가려진 부인들의 뼈를 깎는 희생은 남편에 부수되는 ‘내조’가 아니라 동등한 ‘투쟁’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아쉽다. 내로라하는 독립운동가들의 투쟁과 헌신은 바로 그들 가족의 희생을 전제로 가능했기 때문이다. p 142





#김알렉산드라. ‘한인 사회주의자 동맹’ 창당 및 한인무장부대를 조직하였고 출판사 ‘보문사’ 운영했다. 하지만 김알렉산드라를 비롯한 연해주 일대를 근거지로 두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광복 이후 오랜 시간 남한과 북한 양쪽에서 그 이름조차 금기시 되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남한에서 그들은 그저 사회주의자였고, 북한에서는 김일성 우상화의 걸림돌이었으니까.


#유관순. 과거에는 유관순 열사 이름뒤에 따라오는 호칭은 늘 ‘누나’였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이름 뒤에 의사, 열사, 지사를 붙여 존경받아 마땅할 사람으로 인식하였지만, 유관순 열사만큼은 달랐다. 국가적 차원에서 유관순 열사는 ‘유관순 누나’ 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2000년대가 시작되면서, 그 이름 뒤에 ‘열사’가 붙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김마리아. 2.8독립선언 대회에 참가했으나, 정작 2.8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조선 청년 대표 11명 중에는 여성이 없었다. 김마리아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동등하게 독립운동을 참여하지 못하는 현실을 자각했다. 여권 신장에 중요성을 깨닫고, 교육하며, 여성지도자들과 함께 대한대국부인회를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아 임정으로 보내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일제에 잡힐 때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끔찍한 성고문을 당했다. 


#박지혜. 그녀의 남편은 단재 신채호다. 다들 신재호는 알지만 박지혜는 모른다. 비단 그녀뿐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 대다수는 남성이다. 왜일까? 이 역시 남성 위주 시각의 대표적인 폐해다. 


이들은 살아서 조국이 광복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살아서 독립을 보지 못했던 것이 어쩌면 이들에겐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민족의 ‘단합’과 ‘통일’이 진정한 광복이라고 믿은 김규식은 해방 공간에서 일관된 태도로 좌우합작과 통합을 이루려고 애를 썼다. 1948년 1월, 유엔 한국위원단이 서울에 들어오자, 그는 남북협상에 들어갔다. 그해 2월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안에 ‘극소수의 이익을 위한 정권’이라며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p 205


일제의 전시 동원 체제하에서 이화의 김활란은 일제에 협력하면서 이화여전 교장에 취임했지만, 같은 시기에 근화여학교의 경영권을 잃은 차미리사는 일제에 협력하지 않고 울분을 삭이며 은거해야 했다. 해방 이후 김활란은 이승만과 손을 잡고 단독정부 수립 운동을 벌였지만, 차미리사는 남북협상을 주장하며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김구 진영에 합류했다. 해방 정국에서 단독 정부 설립을 반대하고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성명서에 서명한 108인 중 유일한 여성이 차미리사였다. 일찍이 1907년에 의혈 투쟁을 주장한 바 있는 그는 해방 공간에서도 남북 분단을 반대한 유일한 여성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p 240


1944년에 임정의 군무부장에 취임한 김원봉은 1945년 12월 임시정부 환국 2진으로 귀국하였다. 1946년 6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을 인민공화당으로 개칭하고 연합전선 구축에 노력하였으나, 같은 해 10월 께 좌익 활동 혐의로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붙잡혀 가서 따귀를 맞는 등 수모를 겪고 밤낮을 통곡했다고 한다. 20년 가까운 세월을 오직 조국 독립 일념으로 일제와 싸워온 투사인 그가 더러운 친일파 노덕술에게 당한 모욕감과 치욕은 쉽게 삭일 수 없는 것이었다. p 250






#김규식. 그의 독립운동 행보에서 빠질 수 없는 키워드는 ‘좌우합작, 민족통합’이다. 임정에 민족혁명당을 참가시켜 좌우합작을 성공시킨 존재역시 김규식이었다. 해방 직후만 해도 김구선생은 반공 우파 노선을 확실히 했던 것에 반해, 김규식은 여운형과 함께 해방이후에도 꾸준히 좌우합작, 민족통합을 외쳤다(김구 선생이 좌우 합작을 외치게 된 건 나중일). 그의 바람대로 조국이 독립을 맞이했지만, 그가 원하는 형태가 아니었다. 결국 대한민국은 두개의 나라로 쪼개졌다. 설상가상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김규식은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어 지병으로 사망했다. 김규식도 여타 독립운동가들처럼 남한에서 그 이름이 금기시 되었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외치던 이승만의 정적이라는 이유가 첫번째고,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었다는 이유가 두번째였다.



#차미리사. 조국 독립을 꿈꿨던 덕성여대 설립자 차미리사와 일제 부역자 이화여대 초대 총장 김활란의 상반된 행보. 여성 교육의 선구자라는건 차미리사와 김활란이 같았지만, 차미리사는 독립운동을, 김활란은 친일행위를 했다. 광복 후에 차미리사는 김구 선생과 뜻을 함께했지만, 김활란은 여느 친일부역자들이 그렇듯 이승만과 함께했다. 



#김원봉.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자 의열단 창립자 약산 김원봉. 일제는 현상금 100만원을 내걸 정도로 김원봉을 무서워했고 두려워했다. 심지어 김원봉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좌우 상관없이 그 누구와도 협조했던, 유연한 민족주의자였다. 하지만 오랜시간 남과 북 모든 곳에서 그 이름이 금기시 되었다. 남한에서는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북한에서는 김일성 우상화 정책에 장애물이라는 이유로. 



#박차정. 김원봉의 부인 박차정 역시 의열단원이었으며, 아버지 김두봉 역시 독립운동가였다. 1939년 쿤룬산 전투에서 총상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박차정 역시 남편 김원봉과 같은 이유로 오랫동안 그 이름이 금기시 되었다. 남한에선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북한에서는 김원봉의 부인이라는 이유로.






이들은 생전에 조국 독립을 마주했다(박차정 제외). 하지만 그들이 원했던 조국 독립이 맞았는가? 아니다. 반쪽짜리 독립이었다. 조국은 둘로 쪼개졌고, 쪼개진 반쪽짜리 나라에서는 권력 우상화 정책으로 독립운동가들이 숙청되었다. 남한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그랬고, 북한 김일성이 그러했다. 남한에 남아있던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 정권 때 ‘빨갱이’로 낙인찍히며 고문을 당하는 등 온갖 수모를 당했다. 왜? 이승만 정권은 친미라는 이름아래 가려진 친일부역자들과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마저 대놓고 훼방하며,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독립운동 과정의 모든 이야기를 기억하고 또 기록하고, 후대에 전승해야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자유를 안겨준 선대를 기리고,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멸문 지경까지 간 그들의 후손들을 도와야한다.


반대로 독립운동가를 핍박한 일제와 그들에게 부역한 반민족행위자들 역시 반드시 기억하여, 그들의 후손이 우리 땅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없게, 반민족행위를 하면 대대손손 멸문을 당하는 결과가 돌아온다는 것을 배워야한다.


이게 바로 우리가 독립운동사를 배우고, 기억해야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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