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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서나 배웠다
신정일 지음 / 파람북 / 2025년 10월
평점 :
오늘 읽은 에세이 『언제 어디서나 배웠다』는, 읽으면서도 왜인지 낯설지가 않았다. 왜일까? 저자 때문인가 싶기도 하다. 동 저자의 다른 책을 몇 권 읽어본 적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읽었던 저자의 책들은 대게 문화유산 답사와 관련된 인문기행서였다. 그래서 그런가? 이 책을 받고나서, 기존과는 다른 장르라 살짝 놀란감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는 역시! 이 에세이 『언제 어디나 배웠다』는 저자의 트레이드 마크인 인문기행의 ‘기행’만 빠졌을 뿐, ‘인문’은 그대로 가져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지면 곳곳에 배움에 관한 선현들의 말귀와 함께, 저자가 그동안 살면서 느끼고, 경험하고, 실천한 ‘배움’이 곳곳에서 묻어나온다. 진정한 ‘공부’가 무엇인지, ‘배움’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이 에세이를 추천한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 앎이니라_공자
너 자신을 알라_소크라테스
마음이 텅 비어 있을 때 기억이 잘 스며들고, 집착에 얽매이면 기억이 흐트러진다_정이천
나는 성공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성공에 고생할 만한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_스펜서
칭찬을 받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지 말고, 모욕을 당했다고 괴로워 움츠러들지 말고,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서 출발하라_마르크스
누구는 언어에 능하고, 누구는 숫자에 밝다. 누구는 길을 잘 찾고, 누구는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린다. 저마다 잘하는 공부가 있고, 못하는 공부가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결국은 다 다르면서도 비슷비슷하다. 그게 자연스럽다. 그러니 배움의 길에 들어선 우리들은 서로의 부족함을 비난하지 말자. 다름을 이해하고 채워주는 공동체를 만들어보자. 그래야 진정한 배움이 숨 쉴 것이다. p 021
답은 간단하다. 공부가 즐거우려면, 내가 좋아하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내 세계와 연결되는 것부터. 남들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 말고, 내가 궁금한 것부터. 노는 것처럼 배우고, 배우는 것 처럼 노는 것. 맹자가 말한 대로 즐거우면 생기가 나고, 생기가 나면 또 다른 앎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p 032
배움은 제도에 갇힌 것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에서 솟아나는 것이어야 한다. 그 길은 누구에게는 정규일 수도 있고, 또 누구에네는 야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길을 얼마나 뜨겁게, 얼마나 진실하게 걸었는가이다. 아무도 깔아주지 않은 흙길, 바람 부는 길,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길, 그 길 위에서 나는 나의 선생들을 만나고, 나를 만난다. 그것이 내가 선택한, 야매의 품격이다. p 057
내가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부’는 중요하다. 얼마나 ‘공부’를 잘하느냐에 따라, 최상위권 대학 입학 여부가 갈리기 때문이다. 최상위권 대학만 가면 고소득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고, 상류층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가 넓어진다는게 그 이유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늘 자녀들에게 ‘공부’를 말한다.
이런 세상을 살면서 늘 궁금했다. 정말 사회에서 말하는 ‘공부’가 진짜 공부인가. 소위 학교 성적에 필요한 국/영/수/사/과 등에 한정되어 좋은 점수를 받는 게 공부일까. 국/영/수 등 이른바 정규 교육과정의 교과목이 아닌, 내가 정말 궁금해서 알고 싶은 분야를 공부하는 건 공부가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의문을 제시하면 ‘네가 아직 어려서그래, 일단 좋은 성적을 받고나서 이야기하자’ 등의 어른들의 무마가 뒤따른다.
대다수의 아이들은 부모가 말하는 ‘공부’를 이해하고, 따른다. 어떤 아니는 정규 교육과정 자체가 좋아하서 공부를 하는 아이도 있을 것이고, 부모의 말이니 어쩔수 없이 억지로 공부하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좋아하지도 않는데 억지로 공부하는 것. 과연 효과가 있을까? 물론 어느정도는 효과가 있겠지만, 일시적일뿐이다. 억지로 한 공부의 끝은 언제터질지 모를 활화산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다 무시하고, 책상에 앉혀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공부를 시키는 것. 이게 과연 정상적인 행동일까.
이런 물음에 대다수의 부모들은 할 말이 있다. 언제나 아이가 좋아하는 것만 하게 해주고 싶은데, 사회가 허용해주지 않는다고. 나는 이런 대답을 그저 어른들의 이기적인 변명이라 생각했는데, 아이를 키우며 깨달았다. 이들의 변명이 이기적인 변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정말 사회가 아이들을 ‘성적 순’으로 길들이며 키우고 있었음을. 만약 이런 사회를 무시하고 정말 ‘아이’가 원하는 것을 가르치고자 한다면, 그 아이는 훗날 성인이 되었을 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짝 벗어난 위치에 서있게 됨을 말이다. 예외적으로 극히 소수는 자본주의 정점에 설 수도 있지만.
사회가 원하는 게 아닌, 내 아이가 원하는 것을 마음 껏 배우고 공부할 수 있는 날은 언제쯤 올런지!
자연은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에 우선 아이여야 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이 질서를 거슬러 억지로 성숙을 강요하면 우리는 설익고 맛없는, 곧 썩어버릴 과일을 얻게 될 것이다. 즉, 우리는 애늙은이들을 만들게 된다_루소
물오리가 날 때부터 헤엄을 치듯이, 어린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착한 일을 할 천성을 지니고 있다. 그 천성을 일일이 간섭하면 그것은 물오리에게 헤엄을 금하는 것과 같다_플로베르
현자는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남을 돕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가르친다. 존재들을 억지로 이끌지 않고, 스스로 살게 하며, 독립하지 않고 스스로 이루어지도록 둔다_노자
아이들을 다시 보니 정말 그랬다. 그들은 놀이를 통해 사회를 배우고, 몸을 움직이며 사고의 경계를 확장하며, 다른 존재들과 부딪히며 감각과 감정을 익히고 있었다. 놀이는 곧 삶이고, 삶은 곧 배움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어른들은 종종 망각하는데 말이다. 어린이는 작은 어른이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 온전한 하나의 우주라고 칭해야 하지 않을까. 그 세계는 자율과 자유 속에서 피어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어른의 역할은 무엇이곘는가. 어른이 원하는 어떤 것을 어린이에게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율이 자생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 아닐까. p 097
시간이 흐르며 나는 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강요는 삶을 단순하게 만들 수는 있겠지만, 삶의 깊이를 앗아가기도 한다는 것. 애매한 상황일수록 자유를 허용할 줄 아는 유연함, 그것 또한 삶의 지혜라는 것을. p 132
너무 개입하지도, 완전히 방관하지도 않는 것.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 삶에 필요한 자세라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너무 가까우면 서로 상처받고, 너무 멀면 소통이 단절된다. 사랑도 적당한 긴장감이 있어야 더욱 잎어진다. p 143
내 아이가 원하는 것을 배우고 공부할 수 있는 날. 그런 날이 오기 위해선 지금과 같은 극한의 자본주의(물질만능주의)가 사그러져야한다. 정규 과정에서 배우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야한다. 놀이터에서 놀면서 배우는게 있고, 흙을 밟으며 배우는게 있고, 나무를 만지며 배우는 게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과거야 빠른 성장이라는 목표가 있었기에, 자본주의라는 가치관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아니지않은가. 목표가 사라진 지금 우리가 보고있는 건, 낡아빠진 목표를 계속해서 밀어부쳐서 발생한 자본주의의 고질적인 폐해일 뿐이다. 이런 낡아빠진 목표로 인해 내 아이가 ‘배움’의 기회를, 즐거움을, 성취감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것을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고, 미안할 따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