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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왜 한국역사에 집착하는가 - 홍성화 교수의 한일유적답사기 ㅣ 일본은 왜 한국역사에 집착하는가 1
홍성화 지음 / 시여비 / 2023년 4월
평점 :
한동안 한일고대사 역사책을 멀리했었다. 시중에 나온 한일고대사 관련 책들은 내용이 대게 비슷해서, 내용면에서 업데이트된 부분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대게 비전공자들이 쓴 책이었으며 본인 연구결과가 아닌, 과거 다른 학자들이 공개한 연구결과가 반복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러다보니 어쩔수없이 한일고대사책을 멀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작년에 알라딘에서 홍성화 교수가 한일고대사 책을 출간했다는 알람이 떴다. 이것은 바로 구매하라는 하늘의 계시!! 왜? 나는 홍성화 교수가 2008년에 출간했던 『한일고대사 유적답사기』를 읽고, 많은 걸 배웠다. 틈만 나면 읽었고, 책 속에 들어있는 내용을 어느정도 눈 감고도 남에게 알려줄 수 있는 정도까지 되어서야, 책을 책장에 꽂아두었다. 무엇보다 이 책으로 하여금 한일고대사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하는지 배웠다. 그런 홍성화 교수의 신간이 나왔으니 당연히 읽어야하는 것!
그래서 바로 구매했지만, 1분 1초가 아쉬운 워킹맘은 이 역사책 『일본은 왜 한국역사에 집착하는가』를 제대로 읽지를 못했다. 그러다가 몇 달전 2권 발매 알람이 떴고. 하하하. 부랴부랴 2권까지 구매 완료. 그렇게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책을 펼치기 전엔 한일고대사에 국한될거라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한일관계사를 전방위적으로 아우르고 있었다. 더 좋아!!!! 그리고 역시 현직 전공자답게, 새로운 가설들과 연구결과 등 많은 내용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정신이 혼미해질정도! 그치 본디 역사책이란 바로 이런거지.
정말 포스팅하고 싶은 내용들이 너무 많지만, 일단 고대사 부분만 기록해본다.
1. 칠지도의 진실
지금까지 우리나라와 일본은 칠지도를 근초고왕 때 만들었다고 보았다. 다만 우리나라는 근초고왕이 칠지도를 ‘하사’한 것으로 보고, 일본은 칠지도를 ‘헌상’한 것으로 보았다. 칠지도에 새겨진 일부 명문과, 역사서를 토대로 추정한 것이었다. ‘하사’와 ‘헌상’의 차이일뿐, 적어도 369년 근초고왕때 칠지도가 일본으로 왔다는 건 양국에서 인정하는 통설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통설을 뒤집는 새로운 이론이 나왔다. 칠지도의 제작년대가 바뀐것이다.
칠지도 명문을 찍은 확대 근접사진과 X-레이 사진으로, 육안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웠던 일부 한자가 확인된 것이다. 기존 통설인 근초고왕 369년은, 명문에 새겨진 일부 한자를 중국 동진의 연호로 보고 추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새로이 확인된 한자로 인해, 이는 중국의 연호가 아닌 백제 자체 연호로 추정된다고 한다. 연호와 함께 새겨진 날짜, 일간지를 비교검증한 결과 제작년도는 408년. 전지왕 때다. 고구려와, 당 등 주변국에 대항하기 위해 왜와 긴밀한 사이를 유지하던 바로 그때다.
중요한 것은 칠지도가 전지왕 4년에 제작되었다고 한다면, 408년 경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를 통해 칠지도가 만들어진 정황을 여타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408년이면 광개토왕비문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에 침탈당했던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대항하던 시기이다. 비문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게 58성 700촌을 빼앗긴 백제는 이후 왜와 화통을 하여 고구려에 대항하게 된다. 이러한 정황은 비단 광개토왕비문만이 아니라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를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다. 즉 396년 고구려의 백제 공격 이후에 백제는 태자였던 전지를 일본에 보내 일본과 우호를 맺고 있다. 이후 405년 아신왕이 죽자 백제로 돌아와 왕으로 등극한 인물이 바로 전지왕이다. p 051
특히 『삼국사기』 전지왕 5년조(409년)를 보면 왜국 사신이 야명주를 선물로 가지고왔는데, 왕이 후하게 대접해주었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왜국 사신이 돌아갈 때, 전지왕이 사신을 통해 왜왕에게 보낸 선물 중에 408년에 만들어진 칠지도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타이밍이다.
그동안 일본에서는 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왜곡, 해석하면서 일본의 역사를 구성해왔던 것이다. 칠지도는 408년 백제의 전지왕 4년 11월 16일에 만들어져 백제왕세자 구이신이 진귀하게 태어난 것을 계기로 왜왕에게 하사된 칼로서 그동안 칠지도를 『일본서기』 진구기를 근거로 하여 369년 백제에서 제작되어 372년 백제가 일본에 헌상했다는 일본학계의 통설은 타당하지 않게 되었다. p 055
『삼국사기』에 드물게 왕후의 기름이 기재된 전지왕의 부인 팔수부인을 비롯하여 책계왕의 부인 대방왕녀 보과, 침류왕의 어머니 아이부인 세 명이 왜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라던가, 새롭게 확인된 칠지도의 명문과 전지왕 연관성이 더 궁금한 사람은 책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2. 한일 고분에 얽힌 수수께끼
한일 고대사 관련 서평이나 유적지 답사기 포스팅에서 누누히 언급했듯, 일본 고대사 주요 자료인 『고사기』, 『일본서기』는 그대로 믿어서는 절대 안되는 책이다. 물론 완전 거짓은 아니다. 대충 5%의 진실에 95%과장(또는 왜곡)이 들어갔다고 해야할까? 당대 집필된 역사서긴 하지만, 후대 천황주의적 사관에 입각하여 집필되었다. 그러다보니 인간 신이자 만세일계 혈통이라는 천황을 강조하기 위해 많은 내용들이 과장되거나 왜곡되었다. 거기다 소위 백 살 넘게 살았다는 천황들이 들어가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당대 집필된 중국 사서가 남아있고, 당대는 아니어도 후대에 집필된 우리나라 사서 『삼국사기』도 남아있기에 이 사서들을 교차검증이 가능했다. 따라서 일본 사서에 있는 연대가 대략 120년의 차이가 난다는 것이 학계 통설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고 하면, 일본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알려진 고분 형식 전방후원분 때문이다. 일본 궁내청은 일본 곳곳에 산재해있는 고분, 전방후원분에 각각 고대 천황 무덤이라고 소개해왔다. 헌데 일단 그 천황이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점에 1차 함정이 있고, 실질적으로 연구&발굴을 허가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조성연대 파악도 어려워서, 실제 어떤 천황의 무덤인지 매칭이 어렵다는 2차 함정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끊임없이 만세일계 혈통이라고 우기지만, 왕조교체설에 대한 타당한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렇게 지들 땅에 있는 전방후원분에 대한 정확한 연구 결과도 없는 주제에, 한반도 남부에서 확인된 전방후원분을 임나일본부의 근거로 써먹으려고 수시로 발악을 하고 있다. 일본 국사 교과서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들어가있고, 한반도 남부지역이 야마토 정권 영향력 하에 있었다고 간접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닌코쿠에 대해서는 밥 짓는 연기가 나지 않는 것을 보고 백성의 곤궁함을 살펴 3년간 부역을 면제시킴으로써 성제라는 칭송을 들었따는 전승을 남기고 있다. 인덕(仁德)이라는 이름도 ‘어질고 덕이 있는 천황’으로 덧씌워진 듯해서 닌토쿠 천황 자체가 실재하지 않는 조작된 천황이라는 설도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학자들은 궁내청이 붙여준 대로 닌토쿠 천황릉이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일단 천황이라는 칭호도 7세기 후반에나 성립되었돈 것이기 때문에 이 시기의 왕을 천황이라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p 060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형 무덤과 일본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그중 하나는 전방후원형 무덤이 왜인의 집단 이주에 의해 생겼고 그 배경에 규슈나 왜 왕권의 개입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근거는 빈약하다. 단순히 일본과 관련된 유물이 출토되고 외형이 비슷한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것만으로 전방후원형 무덤을 만들었던 이들을 왜인으로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라 전방후원형 무덤은 단순히 외형만으로 판단하기보다는 그 내부에 보이는 무덤방의 형식 및 유형을 함께 아울러 판단해야한다. P 065
규슈 계통과 흡사한 돌방무덤은 영산강 유역뿐ㅁ나 아니라 서부 경남의 고성이나 진주, 의령, 거제 등에서도 발견된다. 이들 지역은 서해안과 남해안을 따라 분포하고 있으며 해안을 통해 일본 열도와 연결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 지역들의 초기 돌방무덤은 그 모양이 규슈 계통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곳에서 출토된 이미 현지화된 토기라든지, 대부분의 돌방에서 발견된 관고리와 관못, 꺾쇠로 미루어 볼 때 백제의 매장 방식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따. 사후에 대한 의식적인 관념은 백제의 것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특히 돌방무덤 안에 독널무덤이 놓여있는 것은 물론, 금동관모, 금동신발, 고리자루큰칼 등 소위 백제 계통의 위세품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백제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P 066
한반도 남부 전방후원분의 주인들. 일본이 말하는대로 임나일본부의 근거가 되기엔, 부족한 것이 많다. 그 중에서도 일부를 이런 전방후원분은 백제 중앙이 아닌 변두리에 있다는 점이다. 한반도 남부를 장악한 사람들이 중앙이 아닌 변두리에 묻혔다? 누가봐도 이상하다. 무엇보다 일본 내에서도 백제식 굴식돌방무덤을 비롯한 한반도계 유적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뭐, 애초에 우가우가하던 석기시대에 머물러있던 섬나라를, 단숨이 청동기&철기시대로 점프시켜준 사람이 다름아닌 한반도인이니, 한반도계 유적이 발견되는 건 정말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의 논리대로라면, 임나일본부는 개소리고 고대일본을 다스린건 한반도라고 보아야하는게 아닌가.
자기들 편한대로만 해석하고, 불리한건 생략하는 그들의 행태란. 에휴.
3. 인물화상경은 누구를 위해 만들었던 것일까?
나름 한일고대사책을 읽으면서 관련 유물을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일본화상경이라는 유물은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게된 유물이다. 이 전까지는 이 유물에 새겨진 명문 해석이 여러 버전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일본서기』에 의거하여 백제가 진구에게 헌상한 칠자경이 바로 인물화상경이라고 하는 설이다. 내용면에서도 명문에 새겨져있는 인물이 일본의 호족이라는 설 등 여러모로 천황주의적 사관에 입각한 해설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이 해설들이 타당하지 않다는 반박이 나오기 시작했다. 첫번째, 1971년, 우리나라에서 무령왕릉 발굴시 발견된 지석. 두 번째 그동안 잘못 판독되었던 글자를 정확하게 판독하게 된 것이다.
무령왕릉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피장자가 확인된 백제왕 무덤이다.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지석에는 무령왕의 이름이 ‘사마’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학계에서는 ‘사마’라는 이름을 쫓으며, 여러 사서 교차검증 결과 일본의 한 섬인 가카라시마가 무령왕 탄생지라는 것까지 밝혀진다. 『삼국사기』에는 무령왕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없지만, 『일본서기』에 해당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실제로 가카라시마에서도 이와 관련된 동굴과, 전승이 내려오고 있었다.
다시 인물화상경으로 돌아와서! 무령왕이 일본에서 태어났고, 이름이 ‘사마’라는 사실을 염두해두고 인물화상경의 명문을 보자. 내용이 많이 달라진다. 아래는 새로 해석된 명문이다.
미년(기미년,479년) 8월 10일 대왕년(삼근왕의 치세) 남제왕(동성왕)이 오시사카궁에 있을 때 사마(무령)가 오랫동안 섬길 것을 생각하면서 귀중비직 예인금주리 2인을 보내서 아뢴 바 동 이백한을 올려 이 거울을 취한다. p 089
지금까지 일본 고대 왕권과 관련된 유물로, 일본 국보에 등록된 인물화상경의 진짜 모습은 백제 왕권과 관련된 유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삼근왕과 동성왕, 무령왕의 관계는?
『일본서기』에는 개로왕의 동생 곤지의 첫째아들을 무령왕, 둘째를 동성왕으로 본다. 반면에 『삼국사기』에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두번째 자식으로 나온다. 무엇보다 무령왕릉 지석에 새겨진 생몰연도와 『일본서기』의 생몰연도가 일치한다. 따라서 무령왕은 곤지의 아들이자 동성왕의 이복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동생인 동성왕이 먼저 즉위하였고, 이런 동생을 섬길것을 서약한다는 내용이 바로 인물화상경의 명문인 것이다.
현재 인물화상경은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고 한다. 근데 나는 왜 못봤는가. 분명 도쿄국립박물관에 갔었는데!! 이래서 사전 지식이 중요하다. 봤어도 내용을 모르면 백프로 그냥 지나치게 생길 유물이니, 뭐. 어쩌면 그 앞을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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