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왕조실록 살림지식총서 511
이희진 지음 / 살림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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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 있어서 유사역사학자가 제일 많이 분포되어 있는 구간은 단언컨데 고조선 ~ 삼한시대가 아닐까 싶다. 제일 큰 이유는 관련 기록이 매우 부족하다는 데 있다. 그나마 있는 기록이라고는 중국 역사서에 실려있는 몇 줄이 고작이다. 다만 중국 역사서에 실린 내용은 자국(중국) 우위 관점에서 쓰여져 있으며, 같은 단락에서도 앞뒤가 다른 모순적인 내용들도 왕왕 나온다. 여기서 문제는 이를 교차검증할 또 다른 역사서가 없다는 점이다. 국내 역사서에도 고조선 ~ 삼한에 대한 기록이 있기는 하나, 최소 1천년 이후에 쓰인 기록이다보니 ‘역사적 사실’이라기 보단, ‘단군신화’ 같은 신화의 관점으로 쓰여진 기록이 고작이다. 이러한 문제점들로 인해 우리는 지금까지도 고조선에 대한 내용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거짓인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이 역사책 『고조선왕조실록』은 앞서 말한 수많은 문제점을 인지한다. 그래서 고조선 시대구분과 자손들 등 현재 여러 학설이 제기된 주장을 소개하고, 왜 이런 이런 시비들이 생겨났는지도 간략하게 정리해서 알려준다. 또한 고조선을 비롯하여, 고조선이 망하기 전부터 존재가 확인된 부여, 동예, 옥저 등 고대 한반도에 세워졌던 국가들도 간략하게나마 다루고 있다.



▶ 고조선

고조선을 세운 시조가 단군이라는 사실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 이른바 단군 신화는 『삼국유사』를 시작으로, 광개토대왕릉비까지 많은 기록이 확인되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신화’로 기술되었으므로, 여기서 역사적 사실을 유출하는 건 후대 사람들의 몫이다. 


‘단군신화’는 고조선 건국신화로써 등장한다. 천지창조에 관한 내용이 없으며, 환웅 세력이 내려왔다는 점을 미루어볼때 고조선을 세운 집단은 외지에서 이동해왔음을 추측할 수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웅녀와 호랑이 이야기로 미루어볼때, 이 땅의 원래 주인은 ‘곰 토템’을 믿는 집단과 ‘호랑이 토템’을 믿는 집단이 공존해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조선은 외지에서 온 ‘하늘’을 믿는 환웅 집단과 ‘곰 토템’ 집단이 연합하여 세운 나라라 할 수 있다. ‘호랑이 토템’ 집단은 단군신화에 근거하여, 권력에서 배제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늘과 곰을 믿는 두 집단이 융합하여 세운 고조선. 고조선의 시조 ‘단군 왕검’. 우리는 국사시간에 이렇게 배웠다. ‘단군’은 신을 모시는 사람, ‘왕검’은 통치자, 고로 고조선은 제정일치 된 나라.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단군 왕검’은 건국 시조의 이름이 아닌, 지배자를 뜻하는 명칭이다. 예컨대 1대 단군, 2대 단군 … 이런 식이다. 


주변 세력과 엮여 국가의 위상을 갖추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첫 기록은 『전국책』에 나온다. 기원전 4세기 중반무렵 전국칠웅의 하나인 연나라와 관련된 내용이다. 중국 전국시대에 주나라가 쇠퇴하고 각 지역의 제후들이 왕이라 칭하는 틈을 타 “고조선도 이웃 나라 연과 비슷한 시기에 왕을 칭했다”는 것이다. 또 얼마 후 “연을 공격하려다가 대부 예의 만류로 그만두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중국 쪽 기록에 “교만하고 잔인하다”고 했는데 그 정도로 당시 고조선이 강력한 국가였음을 암시한다. p 035


기원전 222년 진이 연을 멸망시켰을 때, 고조선의 부왕은 진에 복속할 것을 청했다. 부왕의 뒤를 이어 준왕이 즉위할 즈음, 진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나면서 중국 유민들이 고조선으로 피신해왔다.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중원을 통일한 전한은 연과 진이 사용했던 장성이 너무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를 포기하고 요동의 옛 장성과 요새를 수리하여 고조선과 경계를 패수로 재조정하는 정도에 그쳤다. p 036






▶ 기자조선

기자조선은 고조선을 세운 단군 세력을 몰아내고, 중국(상나라)에서 건너온 유민이(기자 세력) 고조선을 찬탈했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현재 우리 학계에선 입증할만한 고고학적 발견이 없기 때문에, 존재자체를 부정한다(연장선상에서 ‘기자동래설’도 부정). 무엇보다 진나라 이전 사료에는 기자가 조선으로 건너가 지배자가 되었다는 내용이 발견된 바 없다. 그러다 한나라 이후 갑자기 기자가 조선으로 갔고, 조선사람들을 교화시켰다는 내용들이 살을 더해가며 구전되었다. 이후 한반도에 여러 나라가 들어섰지만, 기자조선에 대해선 크게 개의치 않아했다. 그러다가 고려 말 주자학이 한반도로 들어오고, 조선 건국 후 본격적으로 주자학을 신봉함에 따라 기자조선에 대한 비중이 급격하게 커졌다. 조선 양반들은 고조선을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구분하며, 기자조선에 정통성을 실어주었다. 



▶ 위만조선

기원전 195년 연나라 유민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했다. 위만은 고조선 준왕의 신임을 얻어 ‘박사’ 관직을 받았는다. 1년 뒤 위만은 준왕을 배신하고 왕위를 찬탈한다. ‘위만조선’의 시작이다. 하지만 위만이 정말 연나라 출신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위만이 망명할 당시 “상투를 틀고 조선옷을 입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만은 연나라가 아닌, 조선출신이라는 학설도 제시되었다. 위만에게 쫓겨난 준왕은 남쪽의 진국(辰)으로 피신해서 한왕(韓)이라 칭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준왕 및 그 후손들이 끊어진 뒤에도 한왕(韓)에게 제사를 지내고, 한(韓)을 이어가고자 했다.


위만은 전한 혜제가 즉위했을 무렵 정치적 타협을 이루었다. 외신이 되어 변방 오랑캐들의 침략을 막아주는 동시에 오랑캐 수장들이 한나라와 교류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그렇지만 위만 정권의 실제 행보는 달랐다. 한과 타협을 통해 키운 힘을 바탕으로 주변 세력을 흡수해나갔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진번, 임둔, 옥저, 동예 같은 곳이 위만 정권에 복속되었다. p 040



이후 위만조선에 대한 내용은 위만의 손자 우거왕으로 넘어간다. 기원전 128년 예맥이 우거왕을 배신하고 요동군에 투항했다는 내용을 시작으로, 고조선이 전한에 침공에 맞서다가, 결국엔 위만조선 멸망까지에 대한 내용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있다. 


기원전 108년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왕검성을 함락시킨 한나라는 고조선 영역에 낙랑, 임둔, 현도, 진번 4개의 군을 설치했다. 이때 설치된 이른바 한사군은 이후 만주와 한반도 지역 고대국가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때 많은 고조선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이주했다. p 050


고조선 사회상은 전해지는 기록이 거의 없지만,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고조선에는 ‘8조법금’이 있었다고 한다. 『한서』에 8조 중 3조 내용이 전해진다.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며, 남의 신체를 상한자는 곡물로 보상하고, 도둑질 한 자는 그 집의 노예살이를 하거나, 50만전을 배상하라는 내용이다. ‘화폐’와 ‘노비’가 있음으로 모아, 고조선은 사유재산 및 최소 귀족과 노예 계급이 있는 사회였다. 뿐만 아니라, 한나라와 전쟁 시 한나라가 고전했던 것으로 보다 고조선의 군사력이 막강했음을 알 수 있다. 




▶ 삼한

고대 국가인 마한, 진한, 변한으로 알려진 ‘삼한(三韓)’, 하지만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여 삼국통일을 ‘삼한일통’이라고도 불렀다. 이후 ‘한(韓)’은 고려와 조선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으며, 훗날 대한제국, 대한민국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말하는 ‘한민족’의 한도 이 ‘한(韓)’이다. 이토록 중요한 한(韓). 그 시작은 언제부터일까.


1. 한(韓)씨 성을 가진 고조선 준왕에서 시작되었다: 위만에게 쫓겨난 후 남쪽으로 가 ‘한왕’을 자칭했다는 위 내용의 연장선상에 있다.

2. ‘크다, 높다’라는 뜻을 가진 알타이어 ‘한(khan, han)’: 신라의 ‘거서간’과 비슷한 맥락이다

3. 간(馯)이라는 종족 이름

4. 그 외 


저자는 1번, 고조선 준왕에게서 ‘한(韓)’의 기원을 찾았다. 준왕이 남쪽 진국으로 향한 뒤 한왕을 자칭한 점, 준왕의 자손이 끊겼음에도 불구하고 ‘한(韓) 지역’ 사람들이 준왕에게 계속 제사를 지낸 점, 고조선 멸망 후 삼한이 그 유산을 잇고자 한 점 등이 그 근거다. 그런데 한(韓) 지역에 살던 사람들에 대한 기원은 조금 다르다. 진한(辰韓)지역에 살던 사람들 중 일부는 중국 진나라(秦)와 한나라(漢)에서 망명온 유민들의 후손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진한을 辰韓이 아닌, 秦漢으로 쓰기도 했다. 


약간 삼천포긴 한데, 일본 역사서에 따르면 기원전 207년에 진나라(秦) 유민들이 한반도로 대거 이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진나라(秦) 유민들 후손이 기원후 3세기 즈음부터 일본으로 건너가, 도래인 ‘하타 씨’로 살아간다.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도래인 ‘하타 씨’ 기록을 이 책에서 보게 될 줄이야!



백제가 여러 나라 중 하나라는 구절 또한 마찬가지다. 『후한서』와 『삼국지』가 묘사한 3세기 중반까지도 백제가 주변 세력을 통합한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는 근거로 활용된다. 또 이러한 문제는 고조선과 삼한의 연결 문제와 관련된다. 뿐만 아니라 삼한의 발전 단계에 대한 시비로도 이어진다. 준왕의 설화에 사실이 반영되어 있음을 인정하면 ‘삼한’ 내지 ‘진국’의 시작을 기원전 3세기 이전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진국’이 존재했느냐 아니냐의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수준의 체제를 갖추었느냐는 문제까지 걸린다. p 067


이 시비는 단순히 삼한의 시작과 발전 단계 문제로만 그치지 않는다. 백제, 신라 같은 고대국가의 시작과 발전 단계 문제와 직접 연결되는 것이다. 일부의 주장대로 『후한서』와 『삼국지』의 내용을 믿는다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나 신라라는 고대국가가 들어설 틈이 없다. 즉 백제와 신라의 초기 역사가 조작되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삼국사기』 내용을 믿는다면 『삼국지』에 기록된 삼한의 역사는 대부분 기원전의 상황이고, 예수가 탄생했을 즈음에 고구려, 백제, 신라 같은 나라들이 세워졌다고 봐야 한다. 즉 중국 정사를 믿느냐 『삼국사기』를 믿느냐에 따라 삼한과 그 뒤를 이은 한국계 고대국가의 발전 단계가 완전히 달라지는 셈이다. p 069


일반적으로 삼한이 기원전 2세기 정도에 시작되었다고 보지만, 그보다 훨씬 늦추어 보는 학설도 있다. 이렇게 학설이 천차만별인 이유는 하나다. 삼한 역사 기록 역시 많지 않으며, 남아있는 기록도 대부분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존하며 발생한 현상이다. 『사기』와 『한서』의 기록도 존재하나, 이 세 역사서는 전부 자국우월주의(중국)에서 편찬된 사서이기에, 한반도에 있는 나라들은 대체로 발전하지 못한, 미개한 모습으로 묘사했다.


삼한에서는 매년 5월에 씨뿌리기를 마치면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때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모여 노래하고 춤을 추고 놀았다. 10월 추수를 끝내고 나서도 같은 행사를 치렀다. 그래서 한(韓) 사람들의 풍속이 노래하고 춤추며 술 마시고 비파 뜯기를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변한, 진한에 비파와 비슷한 현악기가 있었고, 이것이 훗날 가야금으로 발전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또 국읍마다 하늘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제사를 맡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이들을 ‘천군’이라고 불렀따. 천군이 지배하는 곳으로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놓고 귀신을 섬기는” ‘소도’가 있었다.p 072



중국 역사서에서 삼한의 정치 발전 상황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던 것 처럼 묘사되지만, 농사와 양잠, 길쌈 등의 산업은 일찍부터 발달했다고 나온다. 땅이 기름져서 오곡이 잘 자랐다고 한다. 특히 평야가 많은 삼한 지역에는 벼농사가 일찍부터 시작되었고, 수리 시설인 저수지도 많이 만들어진 듯하다.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 제천 의림지 등이 이때의 저수지이다. 목축은 물론이고, 해안 지대에서는 어업이 성행했다. 특히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났고 널리 쓰였다. 그래서 철이 돈처럼 사용되었으며 예, 마한, 낙랑, 왜 등에서 사갔다고 한다. p 076



 이 외에 ‘부여, 옥저, 동예, 읍루, 두막루’에 대한 내용은, 이 역사책을 읽을 사람들을 위해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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