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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왕조실록 ㅣ 살림지식총서 520
구난희 지음 / 살림 / 2016년 6월
평점 :
육퇴 후 잠들기 전 짧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찾으며 책장을 둘러보다 눈에 띈 책, 『발해왕조실록』. 살림출판에서 출간된 지식총서 중 한 권이다. 살림지식총서는 권당 200페이지 내외로, 짧은 시간 후루룩 읽을 수 있다. 우리집에 있는 지식총서는 내 편협한(?) 관심사로 인해 역사 관련 총서만 모아뒀는데, 그게 딱 눈에 띄었다. 살림지식총서는 모으긴 많이 모았는데, 실제로 읽은 책은 10권 미만이라는게 함정이랄까. 당분간 이른 육퇴가 가능하면 한 권 씩 읽을 예정!
그리하여 오늘 리뷰는 지식총서 중 한 권인 『발해왕조실록』이다. 발해 관련 역사책을 읽은 적이라고는 정조 연간 집필된 유득공의 『발해고』가 전부였다. 그 이후로는 뭐 딱히 발해를 주제로한 역사책은 읽은 기억이 없다. 또 『발해고』에서 읽었던 내용들이 딱히 기억도 안나고 그래서 아주 새로운 마음으로!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발해’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라고는 국사책에 실린 내용들만 알고 있는, 정말 백지장 같은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여기서 TMI 하나. 라떼 시절 보았던 드라마 《대조영》를 기억하는 사람은, 책을 읽으며 잠깐이지만 머리속에서 최수종 아저씨를 만날지어다.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는 부흥운동을 차단하기 위해 고구려 왕족 및 유민들을 당으로 끌고 갔다. 왕족은 대게 수도 장안에, 나머지 유민들은 고구려 영토와는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분산배치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은 거셌다. 당나라는 이를 무마시키고자 보장왕을 ‘조선왕’으로 책봉하고, 고구려 유민 재이주 정책을 취하는 등 여러 방안을 모색했다. 하지만 고구려 유민들은 말갈족과도 연합하여 부흥운동을 시도했다. 심지어 당나라 곳곳에서 여러 이민족들의 반당운동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영주지역에서 봉기한 이진충의 난 역시 대표적인 반당운동 중 하나다.
당나라에 반당운동이 거세지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은 사람이 있으니 바로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다(대중상/걸사비우or 대걸중상/걸사비우). 걸걸중상은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부친이며, 걸걸사비우는 이들의 측근이었다.
초반 승세에 기세가 오른 당군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도망하는 대조영 집단을 추격하여 천문령에 이르렀고 당군은 매복해 있던 대조영 군사들에 의해 포위되어 섬멸당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당군은 수천 명에 달했고 이해고는 달아나 겨우 목숨만 부지했다. 천문령 전토의 승리는 당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하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의 의작 이룬 승리였고, 그것을 이끈 결정적 원동력은 대조영의 탁월한 정세 판단과 추진력이었다. p 015
대조영은 천문령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이후 고구려 옛 영토인 동모산에 터를 잡고, 698년 나라를 건국했다. 동모산은 고구려 고씨들의 부족인 계루부의 영토였기에, 이는고구려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건국 당시 나라 이름은 ‘진국’이었으나, 어느 시점에서 나라이름을 ‘발해’로 바뀐다. 『신당서』에 언급된 “고왕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한다”는 내용으로 보아, 대조영 재위 후반부에는 ‘발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발해’라는 국명이 발해 스스로 바꾼 것인지, 당이 내린 이름인 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대조영 사후 아들 대무예가 왕이 되었으니, 2대 무왕이다. ‘무(武)왕’이라는 호칭에서 보이듯, 대무예는 당과 전쟁을 치르며 발해가 군사적으로도 ‘강국’임을 대내외에 알리며 위상을 높혔다. 특히 일본에 보낸 국서에 “발해국은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 이래의 오랜 전통을 이어받았다”라고 명시하여, 발해가 고구려와 부여를 계승한 나라이며, 그 영토를 회복했다고 천명했다. 『신당서』 무왕의 평가는 이렇다. “넓은 땅을 개척하여 동북의 여러 오랑캐들이 두려워하여 발해의 신하가 되었다.”
무왕 사후 그의 아들 대흠무가 왕이 되었은, 3대 문왕이다. ‘문(文)왕’이라는 호칭에서 보이듯, 대흠무는 대내정책을 통하여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발해의 독자적인 3성 6부제가 이때 정비되었다. 뿐만 아니라 군사제도인 10위 제도,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한 5경 제도 등 문왕은 넓은 영토를 원활하게 다스리기 위한 내치에 많은 힘을 다했다. 내치에만 치중하면 대외관계에서 어려울 수 있는데, 문왕은 외치에도 탁월했다. 부친때와는 달리 당과 우호관계를 조성하였다. 특히 이 때 당에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 당나라를 포함하여 주변국이 위태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문왕은 이를 기회삼아 천도를 단행하여 나라의 안위를 지켰다. 당 뿐만 아니라 주변국과 수시로 왕래하며 외교에 천재적인 면모를 보였다. 이때 당은 문왕을 ‘발해국왕’으로 책봉한다. 발해는 명실상부 황제국이 되었다.
문왕 사후 왕권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문왕의 장자는 재위 당시에 사망하고, 어린 손자 대화여만 남아있던 상황이었다. 장자에 한해서만 이렇고, 문왕의 차남이하도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왕위는 적장자(손자) 대화여가 아닌, 문왕의 친척동생인 대원의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얼마 못가 ‘국인’에게 살해당했다.
4대왕 대원의왕(시호 없음) 사후 왕위는 문왕의 손자였던 대화여에게 돌아갔다. 5대왕 성왕이다. 추정이지만 대원의왕을 죽인 세력은 문왕 지지층, 정확히는 대조영에서 이어지는 적장자 계승을 지지하는 세력들로 추정된다. 하지만 성왕 역시 1년도 못되어 사망한다. 사유는 알려진바 없다.
성왕 이후 왕위는 문왕의 막내아들인 대승린에게 돌아갔다. 6대왕 강왕이다. 강왕은 15년 정도 재위하였는데, 그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 다만 주변국 기록을 당, 일본과 교류에서 탁월한 외교술을 보였다. 내치 기록은 없으나 15년간 재위한 것으로 보아, 강왕은 앞서 왕위 계승 다툼으로 인한 혼란을 잠재웠고, 내치에도 탁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강왕 사후 그의 아들 대원유가 왕위에 오르니, 7대왕 정왕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일본 사신파견 정도이며, 재위 4년만에 사망한다. 정왕 사망 후 그의 동생인 대언의가 왕위에 오르니, 8대왕 희왕이다. 희왕 역시 주변국에 남아있는 기록, 즉 대외적인 기록들만 확인된다. 재위 6년만에 사망한다. 희왕 사망 후 그의 동생인 대명충이 왕이되니, 9대왕 간왕이다. 하지만 재위한지 1년이 못되어 사망한다.
6대왕 강왕 이후 9대까지 적자계승이 아닌, 형제계승이 지속되었으며 이 역시도 재위기간이 짧았던 것을 보아, 강왕 이전에 있었던 왕위 계승 다툼이, 강왕 사후에 다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9대 간왕이 죽으며 대조영 직계 왕위 계승은 끊겼다. 이후 왕권은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 후손에게로 넘어간다. 대야발의 4대손인 대인수, 그가 발해 10대왕 선왕이다. 선왕의 등극은 ‘해동성국 발해’의 시작이었다.
선왕 대인수는 13년간 통치하면서 발해를 크게 발전시켰다. 연호는 ‘건흥’이다. 연호로 보아 앞 시대의 혼란을 일소하고 새로운 중흥을 시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선왕 때 발해는 가장 전성기를 이루었어며, 이러한 발해를 두고 당은 ‘해동성국’이라 표현했다. p 064
선왕은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했을 뿐 아니라 연해주 일대를 넘어서 헤이룽강까지 장악했음을 알 수 있다.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압록강 박작성 일대, 남쪽으로는 신라와 접경하고, 북쪽으로는 헤이룽강에 이르렀따. 당시 영토는 고구려 최대 영토의 1.5~2배에 달했다고 한다. 동시대를 함께한 신라 영역의 4배 이상이었다. 이렇게 확장된 영토를 배경으로 선왕은 5경 15부 62주라는 지방제도를 완비했다. p 065
선왕은 대외 정책도 활발했다. 내적으로는 군사제도를 정비하며 방어에도 만전을 기했고, 외적으로는 당, 일본, 신라에 사신을 수시로 보내며 외교에 힘썼다. 특히 외교에 있어서 늘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주변국인 당과 일본, 신라을 넘어서, 바닷길을 이용해 서역과도 교류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둔황문서에 ‘고려(당시 발해를 뜻함)’가 등장하고, 연해주 발해 유적지에서는 이슬람 아비스 왕조의 은화가 발견되기도 했다.
선왕 사후 손자인 대이진왕이 11대 왕으로 즉위했다. 현재까지 전해진 시호는 없다. 그는 조부인 선왕처럼 발해의 발전과 융성을 이어나갔고, 주변국과 교류도 활발했다. 눈여겨 볼만한 건 당대 이야기가 문학작품에서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 때 『발해국기』를 편찬했다. 현재는 소실된 사서지만, 『발해국기』는 『구당서』, 『신당서』, 『송사』 등 중국 당대 사서 집필 시 기본자료로 활용되었다.
대이진왕 사후 동생인 대건황왕이 12대 왕으로 즉위했다. 역시 주변국 기록으로 확인된 대외교류 일부분만 전해지고 있다. 대외교류 기록과 14년간 재위한 것으로 보아, 조부 선왕과 형인 대이진왕의 뒤를 이어 안정적으로 발해를 다스린 것으로 추정된다.
대건황왕 사후 아들로 추정되는 대현석왕이 13대 왕에 즉위했다. 대현석왕 역시 주변국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대현석왕 재위기간은 24년으로 역시 선왕들의 뒤를 이어 안정적으로 발해를 다스린 것으로 추정된다.
14대 대위해왕은 가계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선대왕까지 부자계승 및 형제계승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아, 대건황왕의 아들로 추정하고 있다. 이 즈음에 당에 파견간 사신이 신라 사신보다 아랫자리를 받고, 당 빈공과에 발해 유학생이 신라 유학생보다 낮은 점수를 받은것으로 보아, 발해의 영향력이 위치가 이전에 비해 다소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15대 대인선왕은 발해 마지막왕으로 대위해왕처럼 가계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앞선 사례들을 미루어보아, 부자상속으로 추정할 뿐이다. 대인선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가 906년으로, 당시 주변 정세는 매우 혼란했다. 발해 남쪽에 있던 통일신라는, 다시 삼국으로 분열되어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가 싸우고 있었다. 발해 북서쪽으로는 거란족이 통합하여 나라를 세워 당과 발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나라는 망해가고 있었다. 발해는 거란을 상대하기 위해 신라와 잡고자 하였다(비밀결원). 또한 고려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어 도움을 받고자 하였다. 하지만 거란의 대대적인 침공에 발해는 지도상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항복 이후에도 발해인은 자국의 멸망을 인정하지 않았다. 거란은 17일에 조칙을 내려 발해인들을 회유했고 19일에는 강말단 등을 파견하여 병기를 수색했는데 발해인들은 그를 살해했다. 20일에는 대인선왕이 거란에 반대하는 기치를 내걸었고 야율아보기는 다시 상경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때 대인선왕은 말 앞에서 죄를 청했다 하는데 이후 행적은 뚜렷하지 않다. 7월에 왕후와 함께 거란군에 의해 거란 본토로 끌려가 거란이 정해준 상경임황부 서쪽에 성을 쌓고 살았으며, 자신은 오로고, 왕후는 아리지라는 거란식 이름을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p 103
거란에 의해 발해는 망했지만, 발해인들의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많은 발해유민이 고려로 귀화했다. 그 중에는 발해 세자 대광현도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대광현에게 ‘왕계’라는 이름을 내려 고려 왕족에 추가하고, 백주 땅을 주어 발해 왕가를 잇게 했다. 그렇게 고려로 귀화한 발해 유민은 30만명으로 추정된다. 이는 발해가, 고려는 고구려를 이은 나라이자, 자신들과 뿌리가 같은 나라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발해 유민들의 고려 귀화 외에도, 발해 부흥운동은 약 200년 간 지속되었다. 『요사』, 『송사』에는 후발해, 정안국, 흥료국, 대발해국 등이 등장하는데, 이들 나라 모두 발해 유민들이 발해 부흥운동 과정에서 세운 나라다. 물론 오래가지는 못했다.
발해인은 멸망 후에도 자신들의 고유 습속과 생활 방식을 잃지 않았고 스스로 발해인이라는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1009년 거란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송나라 왕증이 남긴 여행기는 이와 관련된 여러 사실을 전하고 있다. 발해가 망한 지 80년이 지난 후에도 이들을 거란인이 아닌 발해인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의미가 각별하다. p 117
발해는 가깝게는 주변국, 멀게는 서역까지 활발하게 교류했던 외교 천재의 나라였다. 특히 정확한 정세 판단으로 국운이 흔들릴만한 공세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발해인의 유연한 외교술과 대처능력은 그 어떤 나라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그 어떤 나라보다도 이민족과 이문화에 개방적이었고, 이를 적절하게 받아들여 ‘발해’의 정체성에 맞게 융합하였다. 발해의 이런 모습은 지금의 ‘대한민국’에는 찾아볼 수 없는, 꼭 필요한 모습이다.
잊혀진 제국 ‘발해’, 광활한 북방 영토를 다스렸던 해동성국 ‘발해’.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자랑스런 우리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