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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마을 이장인디요
김유솔 지음 / 상상출판 / 2024년 11월
평점 :
오늘 읽은 에세이는 무려 MZ세대 ‘이장’ 이야기다. 요즘 MZ세대는 회사원 보다는 평생가는 기술직, 전문직을 선호한다던데! 이 에세이 주인공은 영화 《파묘》처럼 묘지 이장사를 하려는걸까? 라는 생각을 하며 책을 집어들었다. 어라? 뭔가 이상하다. 표지를 보니, 그 이장이 아니다. 놀랍게도 시골마을 ‘이장’ 이다. 내가 알고 있는 시골 마을의 대표! 그 이장이었다. 심지어 그냥 시골도 아니고, 쩌어기 남쪽마을. 남쪽마을에서도 땅끝마을보다 더 멀리 있는, 바다 건너에 있는 완도군이다. 지금이야 완도대교가 있어서 자동차를 타고 오갈 수 있다지만, 60년대 초반 까지는 배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었던 섬이다. 그런 섬 마을 이장이 나보다도 어린, 20대라고?! 충격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20대가 이장을 할 수 있지? 아니 그전에 완도에 살고 있다고? 내륙에 있는 시골에도 청년 보기가 어려운데, 땅끝마을보다 더 멀리 있는 완도에 살고있다고? 온갖 호기심이 밀려오기 시작했고, 이 호기심은 에세이를 빠르게 읽게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근데 이런 호기심이 나만 있는 건 아니었나 싶은게, 이 에세이 저자이자 현재 ‘이장’인 김유솔은 TV 에도 얼굴을 여러번 비췄던 것이다. 어르신들이 주로 보는 아침방송과, MZ세대가 주로 보는 물어보살 같은 프로그램에!
사람들을 따라서 예쁜 바다에 놀러가도 사람들이 예쁘다고 하는 풍경에 큰 감흥을 못느껴 왔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평생 이 바다가 예쁜 줄도 모르고 살아서 다른 바다도 그렇게 예쁜 줄 몰랐던 것이었다고. 막연히 완도에 내려와 사는 상상을 해봤다. p 061
나의 가장 큰 재능은 바로 오지랖이다. 처음부터 내 재능을 알고 있던 건 아니고, 사진관 일을 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나부터도 그랬지만 증명사진이라고 하면 본인 기준 예쁜 옷을 차려입고 머리도 멋있게 하고, 화장도 하고서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닌가? p 081
어려서부터 완도에서 나고 자란 김유솔. 한창 학교 다닐 땐 또래 애들이 다 그렇듯, 집을 떠나고 싶은 욕망이 가득했던 그녀였다. 거기에 실천력까지 남다른 그녀는 고3이 되자마자, 완도를 떠나 서울로 향한다. 꿈인 ‘디자이너’를 위해서! 부모를 비롯하여 마을 사람들은 ‘서울 사람들은 눈 뜨고 코 베가니 조심해야돼~’ 라고 많은 걱정을 했지만, 웬걸? 서울 사람들은 코 베기는 커녕, 타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항상 바쁜 사람들 투성이었다. 완도 사람들과는 매우 다른 서울 사람들. 완도 소녀 유솔은 그렇게 서울살이에 적응해갔다.
여유 조차 없던 서울 살이 중 모처럼 만의 휴가를 고향인 완도에서 보내고자 내려왔다. 그렇게나 떠나고 싶은 완도였는데, 막상 다시 찾아오니 그 때와는 사뭇 다른 감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는 완도를 떠났을 때처럼, 다시 서울을 떠나 완도로 돌아왔다. 완도를 떠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마음가짐으로.
완도에서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 바로 전공을 살린 사진관이다. 그녀는 완도에 남아있는 어린 학생들을 위해! 그들의 언니와 누나가 되어주기로 결정했다. 10대때 그토록 원했지만, 완도에는 없었던 그들을 공감해주던 언니와 누나가 되기로.
"용암리 이장 해 보지 않겠어요?"
내가 잘못 들은 걸까? 당시 내 나이는 24살. 내가 아는 ‘이장’이라는 말에 다른 뜻이 더 있나? p 089
사진관을 하며, 그녀의 재능인 오지랖을 펼치기 시작한 유솔. 그녀의 오지랖은 어린 학생들을 시작하여 동네 어르신들에게까지 뻗어나갔다. 그런 그녀를 눈여겨 본 한 사람! 당시 용암리 이장님이셨다. 자네, 이장 한 번 해보지 않을텐가?
영문 모르고 힘을 실어 준 할아버지, 할머니께는 나중에 이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씀드렸는데, 할아버지 이름을 팔아 이장이 되었다며 몹시 자랑스러워하셨다(?). 이제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나는 진짜 이장이 되었다. 엄마 나 이장 됐어! p 099
사실은 이럤다. 그간 매일 가겠다고 약속을 잡는 건 왠지 어색하니까, 약속하지 않은 날에는 괜히 용건이 있는 것처럼 경로당에 들러서 이것저것 묻곤 했다. 그게 어르신들에게는 용건이 없으면 경로당을 찾지도 않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어르신들은 계속 서운해하고 있었다. 한층 밝아진 어르신들은 앞으로도 이렇게 종종 찾아와서 함께 점심을 먹자며 이번 점심도 약속 없으면 먹고 가라고 했다. p 115
본투비 완도 태생인 김유솔. 그녀는 그렇게 용암리 이장이 되었다. 그것도 최연소 이장! 나이드신 분도 이장을 처음 맡으면 힘들진데, 마을 주민들이 전부 어르신인 상황에서 20대가 여성이 이장이 되었으니, 그녀를 바라보는 눈은 각양각색이었다. 당사자도 그랬다. 이장은 무슨 일을 해야하는가! 어떻게 해야 마을 대표를 할 수 있는가!
이장을 맡으며 어려운일도 분명 있었다. 20대 이장과 마을주민이 대부분 어르신인 그들 사이에는 무언가 말하기 어려운 벽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벽은 서로를 잘 몰랐기에 생겨난 생각의 차이였다. 어르신도 20대 이장이 처음이고, 20대 이장도 어르신들과 부대끼는게 처음일테니까. 그 벽을 허무는 순간 20대 이장과 동네 어르신은 서로가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아무리 우리끼리라도 이장을 함부로 부르면 안 돼.
이장이 나이는 어려도 우리 마을을 대표하는 큰 어른이나 다름 없어.
우리가 높이 세워 줘야 다른 마을 사람들도 우리 이장 무시 못 해.
다들 밖에서 이장 함부로 부르지 말어!
든든한 마을 어르신들을 등에 업고, 오늘도 나는 어깨를 활짝 펴고 이장 일을 시작한다. p 142
별 것 아닌 나의 모습도 대단하다고 장하다며 추켜세우 주는 마을 분위기 덕에 나는 어느 순간부터 마을에 없으면 안 되는 기특한 이장이 되어 있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완도에 살고 싶어지게 만들었다. 나를 완도에 정착하게 만드는 건 아무래도 ‘사람들’인 것 같다. p 143
소문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많은 어르신들이 내 얼굴을 볼 때마다 김치는 아직 있냐고 물어보게 되었다. 이런 사소한 정을 서울에서는 잊고 살았는데 용암리에서, 우리 마을에서 느낄 수 있는 큰 행복인 것 같다. 아, 이 마을, 정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도 어머니들이 담그신 파김치를 먹기 위해 짜장라면에 물을 올리러 간다. p 149
기성세대라고 해서 어르신들이 이런 (코 피어싱을 한)내 모습을 절대 이해 못 하실거라는 건 나의 오만한 착각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어른들은 젊은 사람을 그들의 방식대로 이해하고 싶어 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오히려 이해 못 하실거라고 생각하는 우리 세대의 고정 관념이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게 아닐까? p 164
이장 일을 하다 보면 대다수의 사람이 그렇게 어르신들과 지내다 보면 불편하지 않냐, 힘들지 않냐고 많이들 물어보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어디서 비싼 돈 주고 맛없는 밥 사먹을 까봐, 돈 많이 써서 저축도 못하고 시집 못 갈까 봐, 야위어서 몸 아플까 봐 걱정하면서 맛있는 게 생기면 잊지 않고 불러준다. 그렇게 어르신 들의 보살핌과 사랑으로 기름지게 살이 오르고 있는 나는, 바로 밥 잘먹는 기특한 용암리 이장이다. p 170
나는 불과 최근까지 ‘시골텃세는 도시민도 못이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얼마전에 읽은 안동 폐교살이 에세이를 읽으며 깨달았다. 시골에 대한 내 생각은, 정말 편협하고 오만하기 그지 없는 도시민의 불손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은지 얼마 안된 오늘 『제가 이 마을 이장인디요』를 읽게 된 것이다. 이 에세이를 읽고 나니 더 확실해졌다. 시골 텃세는 도시민들이 만들어낸, 불손한 환상이었다. 오히려 시골 어르신들은 도시민보다 더 깨여있는 진정한 어른이었다. 단지 도시민들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
장가를 와야 해. 이장을 델고 가블믄 안 되고 장가를 와야 돼, 알겠지?
어르신들은 용건이 끝났으니 이제 바쁘면 가 봐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p 178
더 많은 사람이 ‘완며들게(완도에 스며들게)’끔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다. 그렇게 잘한다 잘한다, 칭찬을 들으며 일했더니 2023년에는 ‘전남형 청년 마을 만들기’ 사업도 진행할 수 있었다. 1년 동안 청년 마을을 구성하고 외부에서 청년들을 모집해 한달 살기를 제공하며 참여자들과 함께 전시와 플리 마켓 행사를 열었다. p 207
완도로 내려오면서 일이 없어지고 내 꿈이 작아질까 봐 걱정을 해 왔지만, 걱정이 무색하리만큼 완도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종종 일에 깔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또 놀기도 많이 놀고 있다. 서울에서 했던 ‘잘 먹고 잘 살기’의 균형에 대한 고민을 완도에서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가끔 밤을 새며 일할 때, 터무니없지만 ‘완도에서도 밤샐 일이 있네’ 하면서 기쁘기도 하다.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거니까. p 218
현직 완도 용암리 이장 청년 김유솔은 앞으로도 계속 용암리에 남을 생각이다. 중년이 될 김유솔도 계속해서 용암리에 있을 것이며, 노년의 김유솔 역시 용암리에 있을거라 한다.
노령화로 인해 20년후면 시골 마을들이 사라질거란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김유솔은 그렇게 사람들을 불러모아 20년 뒤에도 완도 용암리 마을을 지키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