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할매신을 만나다 - 여성, 나 자신을 찾아서
김경희 지음 / 공명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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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역사가 아니다. 하지만 신화를 역사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창조된 이야기가 신화이며, 이 신화가 구전되어 후손에 닿는다. 후손은 신화 속에 얼켜있는 이야기를 씨줄날줄 분리하여 다시 역사적 사실을 찾아낸다. 그렇기에 신화는 정말 중요하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이들이 신화를 읽는게 아닐까?




우리나라에서도 신화는 꽤 인기있는 장르다. 하지만 대체로 그리스, 로마, 북유럽 신화가 인기 정점에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 아이들이 즐겨보는 신화 만화책도 그리스 로마신화다. 이 얼마나 아쉬운 이야기인가. 우리나라 신화가 아닌 타국 신화를 즐기고, 타국 신들을 익숙해하는 상황이라니. 근데 뭐 그럴만도 하다. 주자학을 신봉했던 조선 5백년도 버텼던 우리 신들이었것만, 결국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수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우리나라 신들은 대중들의 외면을 받고 있으니,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책 저자처럼 외면받고 있는 우리나라 여신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남아있다는 점이다. 헌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 저자는 우리나라 신이 아닌, ‘여신’이라고 지칭하며 우리나라 ‘여신’을 찾아다닌다. 나 역시 우리나라 신화 하면 ‘여신’을 먼저 떠올린다. 왜? 왜 여신이 먼저인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는 여성숭배가 당연시 되는 모계사회였다. 농경, 수렵, 채집을 하던 시기였던 고대는 노동력이 중요했다. 노동력 생산은 출산이 가능한 여성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여성의 권위가 높았다. 전 세계적으로 발굴되는 나체 여인상이 그 증거다. 따라서 고대부터 숭상되는 신은 여신이었다.



하지만 청동기/철기 시대에 이르며 사회가 변했다. 잉여산물이 생겨났고, 노동력 수요가 급감했다. 잉여산물을 노획하기 위한 영토싸움이 시작된다. 따라서 금속기를 휘두를 수 있는 남성의 지위가 높아졌다. 그렇게 부계사회가 시작되었고, 여신들은 지위를 잃었다. 모든 권능과 지위는 남신이 가져간다. 예컨데 어머니 신이었던 헤라가 훗날 제우스의 배우자이자 질투의 화신으로 변모하고, ‘샛별’을 의미하던 여신 루시퍼가 타락한 악마가 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나라도 단군신화가 들어오기전에는 부족별 토템신앙(곰, 호랑이) 라던가 마고할미(창조여신류)를 숭배했다. 하지만 철기를 지닌 고조선이 들어오며 토템신앙은 건국신화 속 하위신으로 흡수되고, 창조여신들은 산신이나 마을신으로 밀려났다.



이제 우리 나라 여신을 찾아볼까? 우리나라 여신들은 크게 건국신화, 산신, 마고신, 불교신, 자연신, 마을신, 무속신으로 나뉜다. 조금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불교신이면서 무속신에 들어가있는 여신도 있고, 자연신이면서 무속신에 들어가있는 여신도 있고 뭐 그렇지만 거기까지난 각설하고!



건국신화 대표여신으로는 위에서 말한 웅녀를 포함하여 하백의 딸 유화(주몽 모), 박혁거세 부인 알영이 있다. 산신/자연신은 정견모주(가야산신), 용녀(왕건 조모) 등이 있다. 마고신으로는 노고할미, 설문대할망 등이 있고, 마을신으로는 삼신할매, 조왕할미, 측신 등이 있다.




 


이 책 『한국의 할매신을 만나다』 는 저자가 이 땅에 살아있는 할미신을 찾는 여행에세이 혹은 답사책이라 할 수 있다. 내용도 그리 어렵지 않다. 한국 신화 초심자에게 더할나위 없이 친절한 책이다. 다만 한국 신화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이 꽤 심심할지도 모르겠다. 나만해도 책 속 내용이 대체로 다 아는 부분이다보니 썩 흥미롭지는 않았다. 초심자라면 더 궁금할 내용이 있을법한 부분도 스무스하게 지나간다. 



확실한 건 이 책은 한국 신화에 대한 교양서적이 아니라, 저자가 여신 설화가 구전되는 장소를 찾아다니는 여행에세이 또는 답사기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여신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을 원한다면, 차라리 한국 신화 교양서를 찾아 읽는게 낫다. 반면에 신화가 얽힌 장소를 여행 또는 답사를 하고 싶다면 이 책이 꽤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근데 여기서 이제 또 함정이 있는게, 뭐랄까 이 책은 ‘여신’에 중점을 맞췄다기 보다는 ‘여성’에 중점을 맞춘 느낌이랄까?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다. 내가 TMI를 빙자하여 서론이랍시고 구구절절히 쓴 저런 이야기도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없다. 신화에 있어서 기본적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자궁 이야기를 해볼까? 나는 솔직히 내 자궁에 대해서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14세부터 무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엄청난 생리통과 여러 몹쓸 증후군을 안겨준 것이 나의 자궁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 요즘 나는 자궁에 대해 좀 다른 생각이 든다. p 048



자궁을 가진 여성들은 시나브로 나이가 들고 어느 시기가 되면 할머니가 된다. 그러니 여성이 없었더라면, 혹은 할머니가 없었더라면 인류는 존재하지 못했을 거라는 이야기가 되겠다. 여성의 현신인 어머니들과 할머니들의 존재를 사랑하고 그녀들이 하는 일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 나아가 남성들이 그 일에 당연히 동참하는 것은 이 시대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박힌 혐오를 깨고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 아닐까. p 049



그러니 가믄장아기가 될 수 없는 ‘당당하지도 혹은 솔직하지도 못한’ 여성들은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 현실에 타협하고 순응하는 것, 인형과 같은 삶을 사는 것, 잘난 체 하고 자신의 이익만 취하려 든다면 이러한 업의 대가로 가믄장아기 이야기 속의 우매한 여성들처럼 청지네와 말똥버섯의 몸으로 환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p 094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할매신’ 이 아닌 ‘여성’ 이었다. 보통 책 제목을 보면 어떤식으로 내용이 흘러가는지 예상이 되곤 한다. 이 책 제목은 ‘한국의 할매신을 만나다’이고, 부제가 ‘여성, 나 자신을 찾아서’다. 역시 어느정도 예상은 했었는데, 이건 뭐. 주객전도였다. 제목이 부제로 가고, 부제가 제목으로 가야 이 책과 맞지 않을까 싶은?



저자는 순수하게 ‘할매신’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여성혐오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이 책을 집필한게 느껴졌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실제로 여신들의 권위가 떨어지고, 하위신으로 밀려나게 된 건 남성중심사회가 되면서였으니까. 따라서 여신을 이야기할 때 이런 내용은 필수불가결이다. 하지만 이 책은 거기서 더 나아간 듯 보인다. 어쩌면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한 승부수였을지도. 하지만 순수하게 한국 신화를 좋아하는 독자 입장에서는 썩 좋지 않았다. 내 지적 탐구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기도 했고.


 



마고는 어떤 의미일까? 마고할미 신화는 한국 민간에서 구비전승되어온 거인 여신의 창세신화다. 마고할미는 마고의 한자표기가 대륙 신화에서 천지를 창조했다고 하는 반고와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한자가 다르듯 그 의미도 전혀 다르다. 한국에서 마고는 단순히 ‘노파’라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제주에서 ‘묻혀 죽은 노파’라는 뜻에서 ‘매고할망’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즉 우리나라 토착신앙인 셈이다. p 057



마고할미 설화가 궁금하다면 한반도 여러 곳에서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마고할미가 쌓았다고 하여 ‘마고산성’이라 부르는 성만해도 전국에 수없이 많다. 경기도 양주 노고산성(마고성), 충주의 마고산성, 거제의 마고산성, 양산의 마고산성 등이 있으며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되어 전해지는 마고할미 이갸기들은 수없이 많다. 마고할미가 만들었다거나 그녀의 집으로 불리는 고인돌만 해도 그렇다. 강화도뿐 아니라 전남 화순의 고인돌 유적에서도 마고할미 전설을 만날 수 있다. 이 지역 주민들에게 대대로 ‘핑매바위’로 불려온 바위다. 핑매바위에 전해지는 전설 역시 마고할미가 주인공이다. p 064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한국 신화 초심자가 읽기에 이 책은 썩 나쁜 선택은 아니다. 쉽고 간결하니까. 뿐만아니라 여신 설화 전승지 답사 안내서로도 그리 나쁘지 않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 책은 신화 교양서가 아닌, 에세이다. 에세이. 전문적인 내용을 원하는 사람들에겐 추천하고 싶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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