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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근대사 100장면 1 : 몰락의 시대 - 진실을 밝혀내는 박종인의 역사 전쟁 ㅣ 사라진 근대사 100장면 1
박종인 지음 / 와이즈맵 / 2024년 9월
평점 :
박종인 기자님의 역사책이 나왔다. 예전 같았으면 책 오자마자 바로 읽고 리뷰쓰고 그랬겠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한 워킹맘이다보니 책 읽는 것도 한 나절, 포스팅도 한 나절이다. 일단 1권 다 읽었으므로! 1권만 빠르게 리뷰하자면, 아니 근데 이 책을 빠르게 리뷰하는게 맞나 싶다. 이 책은 한 번 읽고, 두 번 읽고, 곱씹어서 읽어야 하는 역사책인데! 대신 교과 공부하는 학생들이나, 공무원 시험을 앞둔 수험자들은 당장 이 책을 읽으면 안된다. 왜? 이 책은 기자님 말마따나 불온한 역사서니까.
이 책 제목은 ‘사라진 근대사 100장면’이다. 부제는 ‘이거 보고 공부하면 시험 다 떨어지는’ 근대사 강좌다. 그런데 대학 합격, 공무원 수험 시험에 합격한 다음에는 꼭 읽어라. 그래야 똑바른 대학생이 되고 나라를 생각하는 경찰과 공무원으로 살 수 있다. 그때는 시험에 붙으려고 외웠던 교과서 속 역사는 다 잊어버려도 좋다. 아니 잊어버려라.p 005 서문 中
서문에서 훅 들어온 경고! 당장 대학이나 공무원 시험을 앞둔 사람들은 절대 읽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다. 혹자는 역사를 왜곡했나? 하는 우려를 할 수도 있겠으나, 대답은 NO다. 오히려 이 역사책은 왜곡과는 동 떨어진, 진실만은 이야기하는 책이니까. 고로 수험생들이 보는 교과서에 있는 진실도 분명히 이 책 속에 있다. 다만, 교과서에 없는 진실‘도’ 담겨 있다는게 문제다. 교과서에서 삭제된 역사, 하지만 실제 있었던 이야기. 아니? 왜곡도 아니고 분명한 사실인데 왜 교과서에는 없다는 말인가? 아래 내용을 보자.
1. ‘세종이 한글을 만들었다’는 있는데 ‘최초의 국한문 혼용 신문을 만든 사람은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라는 말은 없다.
2. ‘문예부흥을 일으킨 위대한 군주 정조’라고 적혀 있는데, 그 정조라는 인물이 ‘성리학 이외 학문은 철저하게 탄압하고 사상 검열을 한 지식 독재자였다’는 사실은 없다.
3. 청일전쟁 때 “철수하겠다”는 일본군을 고종이 소매를 붙잡고 가지 말라고 애원했다는 사실은 적혀있지 않다.
4. ‘명성왕후를 간악한 일본인이 잔혹하게 죽였다’는 있고 ‘동시대 많은 조선인들이 민비 암사를 시도했다’는 없다.
5. ‘고종이 헤이그밀사를 파견했다’는 있는데 이보다 10년 전 고종이 민영환을 러시아에 보내서 ‘조선은 러시아 보호국이 되기를 원한다’고 애원한 사실은 없다.
6. ‘을사조약을 고종이 결사반대했다’라고 적혀 있는데, ‘을사조약 직전 고종이 일본 공사 하야시로부터 뇌물 수수’라는 사실은 없다.
7. ‘고종이 조약체결을 두고 이토 히로부미와 담판을 벌였다’라고는 적혀 있는데, 정작 조약 체결 뒤 ‘고종이 “절대 돌아가지 말고 나를 위해 일해달라”고 이토 히로부미 소매를 붙들고 늘어진 사실’은 적혀 있지 않다.
위 문장들은 전부 진실이다. 다만 각 문장의 앞 내용은 국사책에서 많이 본 내용이고, 뒷 내용은 초면일 것이다. 왜? 우리는 언제나 모든 문장의 앞 내용만 배웠기 때문이다. 왜? 문장의 앞 내용만 공부하면 한글을 창제하고 문예를 부흥했던 찬란한 조선을 간악무도한 일본이 침략했다라는 역사를 배울 수 있다. 하지만 문장의 뒷 내용까지 같이 공부하면 배움이 달라진다. 어떻게 달라지는가?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임진왜란이다.
임진왜란은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이 무자비하게 쳐들어오며 시작된 전쟁이다. 사실이다. 하지만 배우지 못한 사실이 있다. 임란이 일어나기 전 명종때 조선에 이미 조총이 들어왔다. 심지어 대마도인은 원하면 조총기술을 전수하겠다고 했다. 거기다 대마도와 류큐에서 일본이 조선으로 쳐들어올것 같다는 보고를 올렸다. 하지만 이백년 평화에 찌든 조선과 위정자들은 이를 무시했다. 그 결과 임진왜란-정유재란 7년 전쟁. 하지만 우리는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이 쳐들어왔다는 것만 배웠을 뿐, 뒷 내용은 배우지 못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임진/정유재란 7년 전쟁은 오로지 간악한 일본인 탓이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뒷 내용까지 배우게 되면 여기에 무능력한 조선 위정자들의 책임도 들어간다. 찬란한 선비의 나라 조선에 오점이 생기는 것이다.
이 외에도 많다. 조선은 사실 세계와 교류하고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있었다는 사실이다. 첫번째 병자호란 이후 청에 끌려갔던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들어왔을 때, 두번째 하멜이 제주도에 들어왔을 때, 세 번째 천주교(서학)이 퍼졌을 때, 네번째 제너럴 셔먼호가 강화도에 도착했을 때. 이렇게 조선은 세계와 교류하고, 자발적인 근대화를 할 수 있는 여러차례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기회는 매번 조선의 왕과 양반들이 반기지 않았다. 반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나라 문을 꽁꽁 걸어 잠궜다.
만약 이 네 번의 기회 중 한번이라도 조선의 왕이, 양반들이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면, 백성들을 생각했다면, 우리 근대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라는 암흑기도 없었을 것이며, 당연히 이념논쟁과 한국전쟁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슬픈 가정이지만.
이제 『사라진 근대사 100장면1 - 몰락의 시대』를 살펴보자. 1권은 영정조 시대부터 고종시대까지를 다룬다. 리뷰에선 조선의 르네상스라 일컬어지는 영조, 정조시대. 정말 ‘르네상스’ 였는지, 그 속살만 살짝 벗겨보고자 한다.
숙종이 망하고 사라진 명나라를 위해 제사를 지냈다. 숙종의 아들 영조는 여기에서 더 나아갔다. 중원 문화가 오랑캐에 의해 파괴되었으니, 중원을 조선이 계승한다고 선언했다. 그 날이 1749년 5월 9일이다. 이때부터 조선은 명나라 계승국, 소위 황제국이 되었다. 그리고 1776년 4월 22일, 영조가 죽자 정조가 즉위했다. 어떻게? 청나라 황제에게 허가 칙령을 받아서.
술을 금하고 사치를 금함으로써 영조시대 50년은 마진을 남길 상품 생산이 금지되고 더 높은 부가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고급 생산기술 개발 작업도 정지돼버렸습니다. 영조는 왕실 비단 생산을 금지시킵니다. 금실로 수놓은 비단 옷감도 금지됐습니다. 왕실에서 비단을 생산하는 기계 문직기를 아예 폐기해버립니다. 무늬비단 제조 기술은 조선이 망할 때 까지 복원되지 못합니다. 여자들은 화려한 가체를 버리고 족두리를 써야했습니다. 가체 금지령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조치였는지 결국 7년 뒤에 해제합니다. (…) 값비싼 청화안료를 쓰는 청화백자를 금지하고 질 낮은 철화백자만 생산하라고 명합니다. 금주령도 강화합니다. 앞으로 제사상에 술대신 예주를 올리라 합니다. 예주는 식혜입니다. (…) 영조는 국정지표 이행 여부를 점검하다가 스트레스가 쌓인 날이면 신하들과 차를 마시며 신세를 한탄했습니다. 차 이름은 ‘송절차’ 입니다. 그런데 이 차를 마시면 영조는 늘 취해버렸다고 합니다. 이름만 차 였고 실제로는 술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p 028~029
각종 산업을 막고, 경제행위조차 막아버린 결과 조선은 가난해졌다. 얼마나 가난해졌는가? 어사 박문수가 청나라 밀수 어선 단속을 위한 군함을 조성한다고 하니 돈 없다고 짤렸다. 가까웠던 과거에 호란이 있었고, 조금 더 거슬러올라가면 왜란이 있었던 나라에서 말이다. 가난해지기만 했느냐? 아니다. 지성도 없었다. 조선은 서점이 없었다.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선 책을 읽어야 했는데, 책을 파는 가게가 없었다. 그럼 어떻게 책을 구했는가? ‘책쾌’라는 책장사치를 통해서 구했다. 영조는 책쾌 금지령을 내렸다. 가난한 것도 서러운데, 새로운 지식까지 얻을 수 없게 막아버렸다.
비단 영조만 그랬는가? 아니다. 정조도 그랬다. 아니, 정조는 영조와 조금 달랐다. 새로운 지식을 들여오돼, 정조 본인이 독점했다. 독점한 지식을 꽁꽁 숨겼다가, 필요한 범위에 한해서 신하들에게 찔끔찔끔 알려주었다.
정조는 4품 이하 당하관에게만 호박 갓끈을 일체 금해버립니다. 그렇습니다. 조선이라는 공동체에서 사치 풍조가 만연했다고 하는 계층은 ‘신분이 낮은’ 계층에 한정돼 있습니다. 당상고나 이상에게는 이 ‘사치’라는 개념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 그런데 여자들은 사치를 명목으로 한 겹 더 심한 차별과 규제에 얽매입니다. 재질이 뭐가 됐든 남자들은 갓끈을 맬 권리를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가체가 아예 금지되고, 아무런 장식 없이 허연 족두리만으로 미모를 자랑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p 071~072
지도자가 권력과 지식을 독점했다. 백성에게는 사치를 규제하다는 미명하에 모든 경제활동을 막아버렸다. 여기서 함정이 있다면, 영조의 금주령에는 본인은 제외였고, 정조가 말하는 사치 규제는 신분이 낮은 계층과 조선 여자 전원에게만 해당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게 바로 우리가 말하는 조선 르네상스의 속살이다.
이렇게 조선을 빈국이 되어가고 있을 때, 바다건너 영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영국에선 아이작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비롯하여 관성, 가속도, 작용과 반작용의 원칙을 발견했다. 영국은 과학이 발전하고 있었고, 과학이 발전하자 자연스레 상업도 발전하며 결국엔 증기기관차를 만들어냈다. 그 옆나라 프랑스는 어땠는가?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다. 시민 동의 없는 세금 징수는 불가하다며, 시민들이 혁명을 일으켰다. 조선에서는 생각치도 못할 일이다. 왜? 출판, 인쇄, 독서의 자유가 보장된 유럽과 달리 조선에선 그 모든게 불법이었으니까. 어쩌다 책쾌에게 책을 사서 읽다가 걸리면 바로 사형이었으므로.
8년 전 《북학의》에 부국강병책을 쏟아부었던 검서관 박제가가 기회를 놓칠리가 없었습니다. 박제가가 올린 병오소회는 이러합니다.
‘지금 나라의 큰 폐단은 가난이다. 다른 나라는 사치로 인하여 망한다지만 우리나라는 반드시 검소함으로 인하여 쇠퇴할 것이다. 비단옷을 입지 않으니 비단 짜는 기계가 없다. 여인들은 일이 끊겼다. 물이 새는 배를 타고 목욕시키지 않은 말을 타고 찌그러진 그릇에 담긴 밥을 먹고 진흙더미 집에서 지내니 온갖 제조업이 끊겼다. ‘세상이 나빠져서 백성이 가난하다’고 하는데, 이는 나라가 스스로를 속이는 짓이다.’ p 062
정조가 아끼던(?) 북학파에선 여러 개혁안을 올렸다. 위 내용은 북학파로 유명한 박제가가 쓴 개혁안 중 일부다. 북학파가 올린 개혁안은 대체로 중국과 통상하고, 서양인에게 기술을 받고, 상업을 장려하자 였다. 하지만 정조는 이런 개혁안들을 모두 거절했다. 외려 북학파와 다른 개혁안들을 채택했다. 중국인과 왕래금지, 이단 서적 수입 금지 같은 폐쇄적인 개혁안을. 그와 함께 당시 들어오던 서학(천주교)를 핍박&학살하고, 성리학 외의 학문은 모조리 이단으로 간주하였다. 이른바 조선판 분서갱유, 문체반정이다.
조선의 르네상스의 속살이다. 슬프게도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정조가 직접 선택한 며느리는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이다. 심지어 정조는 김조순을 순조 옆에 찰싹 붙여놓고 죽었다. 조선 백성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안좋아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더 안좋다 못해 나락으로 떨어진다. 김조순을 필두로 한 세도정치 시작이다. 백성들이 죽지 못해 살던 세도정치가 끝났다 싶었더니, 이번엔 여흥 민씨들이 세도정치 때보다 더한 패악질을 시작한다. 서글프게도 이게 바로 우리나라 근대사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