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것들의 인문학
조이엘 지음 / 섬타임즈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문학책은 내가 즐겨 읽는 장르 중 하나다. 아니 제일 좋아하는 장르다. 따지고보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역사책도 인문학의 하위 분야니까. 다만 요즘 말하는 인문학은 좀 다르다. 인문학 하위에 있는 사회, 역사, 문화, 철학, 고전 각각의 분야를 모두 아우르는 책들을 인문학책이라고 하니까. 각설하고!


오늘 읽은 인문학책 『사소한 것들의 인문학』을 소개해볼까 한다. 책 제목과 표지만 봤을 땐, 약간 젊은 독자층을 타겟으로 한 책으로 보였다. 예컨데 톡톡튀는 20대, 이제 갓 사회에 발을 담근 30대를 타겟으로 한 느낌이랄까? 고로 표지와 제목만 봤을 땐 오케이! 흥미를 끄는데 충분했다. 그렇게 표지를 넘기고 프롤로그를 읽었다. 

으음? 뭐지? 보통 프롤로그를 읽으면, 대충 짐작이 되는데 이 책은 짐작이 안된다. 그래서 바로 목차로 넘어갔다.

목차만 언뜻 보니 내가 즐겨 읽는 역사가 담뿍 버무려진 책 같았다. 근데 뭔가 이상하다. 성학십도 다음이 국가 비상사태다. 16세기 소크라테스가 나오더니 갑자기 서울 건천동이다. 심지어 한남더힐과 압구정 현대아파트까지 나온다. 문명 목차만 봤을 땐 정약용도 나오고, 이괄도 나오고, 매화를 이야기하는거보니 퇴계도 나오는 것 같고, 허엽 집안 이야기도 나오는 것 같고, 칠서의변에 임진왜란까지 나오는 걸 보면 조선사를 버무린 인문학책 같긴 한데. 목차 중간중간에 자꾸 21세기가 튀어나온다. 조선 역사를 암시하는 목차에 하버드 대학교는 왠말이고, 댓글부대는 또 무엇이며, 부루마블은 왠말인지! 머리속에 물음표가 왕창 떠다니기 시작했다.

분명 인문학책이라고 했는데? 표지를 내용을 해체해봤을 땐 대충 역사 속에서 답을 찾는 느낌이었는데?! 이쯤되니 제목부터 대놓고 ‘인문학책’이라고 한, 이 책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기 시작했다. 


읽고 나서, 한줄 평
“작가 천재 아니야???”



퇴계가 은퇴하고 낙향하며 만났던 선비들은, 16세기 선비가 아니다. 21세기 고등학생이다. 16세기 선비들은 상위 1% 퇴계를 보며 그저 부러워하고, 본인들도 그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부단히 과거시험 준비를 해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 고등학생들은 다르다. 그들에게 퇴계는 상위 1% 위치에 있는 특권층, 고위 공무원이다. 상위 1% 고위 공무원인 당신은 나머지 99%를 위해 무엇을 했냐며 묻는다. 

정약용이 아들에게 남긴 말을 요즘 말로 풀이하니, 놀랍게도 21세기 아들을 둔 아버지와 오버랩 된다. 허균을 개돼지라고 하며, 다른 힘센 간신들은 비호하고 꼬르자르기 한 광해군. 국민을 개돼지라고 한 21세기 모 정치인이 떠오르고, 입시비리 의혹에서 당당힌 모 정치인이 떠오른다. 부모에게 당연하게 물려받은 물질적 지원과 문화자본은 무시한채, 유명대 입학이 입시생간 공정한 경쟁이라며, 저소득층 지원은 ‘역차별’이라며 지속적으로 ‘공정’을 외쳤던 어떤 정치인도 떠오른다.

옛말을 요즘말로 바꿔놓으니 조선과 내가 살고 있는 21세기가 구분이 안된다. 여기가 조선인지, 저기가 조선인지. 여기가 21세기인지, 저기가 21세기인지. 퇴계가 나오고, 정약용이 말하고, 허균이 망나니질을 하는거보면 분명 조선인데, 자꾸 내가 살고 있는 21세기가 오버랩된다. 참 이상하다.

내가 여러 역사책, 인문학책 리뷰를 하면서, 자주 썼던 말이 이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근데 반복되는 역사가 인재로 생겨난 대형 참사, 예방했으면 없었을 국민들의 희생같은 굵직한 사건사고만이 아니다. 매일 반복되는 정치인 비리문제, 내 자식 앞길이 달린 입시문제, 무슨 일만 있으면 니편내편 이분법으로 갈라치는 정치인과 언론 등등. 항상 내 옆에서 자리하던 크고 작은 모든 일들마저, 역사속에서 계속 반복된다. 


아래는 이 책 내용 일부를 발췌하였다.



정약용은 서울이 좋았다. 서울에 살면서도 아웃 서울이 꿈이었던 퇴계와 달리 정약용에게 인 서울은 일종의 신앙이었다.
   상류층 아이들은 애써 공부팔 필요 없다.
   아빠 찬스, 아빠 친구 찬스가 촘촘하니까.
   그러니 마작, 골패 등 보드게임만 즐긴다.
   나라 꼴이 가관이다.
   생각하면 화만 오르니 그냥 술이나 마시자.

정약용이 쓴 <여름날 술을 마시다> 일부다. 정약용이 대단한 건, 한탄에만 머물지 않고 이론을 제시했다. 불공정한 사회를 ‘경자유전’으로 개혁하고자 했다. 이승만 대통령*보다 150년 앞선 주장이다. 하지만 애비로서는 다른 모습이다.
* 이승만 정부 농지개혁은, 당시 전직 공산주의자 였던 조봉암을 1대 농림부 장관으로 앉혀서 실행. 농지개혁의 모티브가 된건 위에서 말한 ‘경자유전(농사 짓는 사람만 농지 소유 가능)’이다.

   얘들아, 무조건 서울에서 살아야 해.
   벼슬에 오르면 지옥고라도 무조건 서울에서 살아라.
   벼슬이 끊어져도 최대한 서울 가까이에 살아라.
   무조건 서울에 집을 사야해.
   돈이 모자라면 서울 근교에 과일을 심고 생활하다가
   재산이 조금 불어나면 바로 ‘인 서울’ 하거라.
   명심해라. 한 번 서울에서 멀어지면 영원히 들어갈 수 없단다.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
세속적이고 빤하다. 하지만 누가 아비 정약용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p 065~066




퇴계가 학생들에게 기대한 답변은 ‘헛된 명예와 탐욕을 버리고 분수대로 사는 삶’ 정도였다. 이규보도 <지지헌기>를 그런 식으로 마무리했다. 하지만 학생들 대답이 엉뚱 발랄 기발하면서 날카롭다.

   “용꿈 꾸는 이무기는 탐욕스러운건가요?”
   “멈출 곳을 정하는 건 누구예요?”
   “이무기가 늪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이무기랑 사람이랑 같이 살면 안 돼요?”

한 학생이 일어나 또박또박 묻는다.
   “통계로만 따지면 여기 모인 친구들 중 1%만 용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머지 99%는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이무기, 뱀, 미꾸라지 혹은 지렁이로 살아가야 하죠. 우리 사회는 ‘나머지 99%’로 살아도 행복한 사회인가요?”
  “퇴계 할아버지, 이건 다른 얘긴데요. 고진감래라고 하잖아요? 진짜 고생 끝에 낙이 와요?”
퇴계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p 079~080


  “퇴계 선생님은 고위 공무원으로서, 정치인으로서, 지식인으로서 우리 사회 1%로 살아오셨는데, 우리 같은 평범한 ‘나머지 99%’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나요?” p 081



한 사람은 본능, 감정, 지성, 의지, 성격, 혈액형, 팔다리, 옷, 신발, 주식, 대출금, 가족, 친구, 직업, 명예, 종교, 취미 등 제 것이라 부를 수 있는 모든 것의 총합, 그 이상이다. 이 복잡다난한 생명체를 단 두 개(좌파 아니면 우파, 진보 아니면 보수)로 나누어 갈라치는 것은 그 사람 영혼에 가하는 폭력이다. 스스로든 타인에 의해서든.

일부를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허깨비를 만들어 공격하는 허수바이 공격의 오류

그래서 ‘저쪽의 위선과 불공정을 생생하게 보면서 반대쪽으로 돌아섰다’는 유명인들의 발언에 진저리를 치게 된다. 위선과 불공정은 이쪽이나 저쪽이나, 남이나 내게나 있다. 회색지대를 인정하지 않는 극단적 흑백주의는 싸우지 않아도 될 사람들까지 전부 적으로 만들어 우리 사회에 혐오와 증오 총량만 들린다. p 095



위 책 내용에 조금 보태본다. 왜 사람을 이분법적으로 보면 안되는지를!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조선통신사로 간 사람들이 있다. 서인 황윤길과 동인 김성일. 이 두 사람의 서로 다른 보고는 지금도 국사시간에 배우는 대표적인 내용이다. 서인 황윤길은 일본이 쳐들어온다고 했고, 동인 김성일은 일본은 그럴 깜냥이 안된다고 한것 말이다. 이건 이들의 의견이기도 했지만, 서인과 동인 집단에서 선택한 당론이기도 했다. 

여기서 우리가 잘 모르는 내용이 숨어있다. 당시 저 둘과 함께 서기 역할로 조선통신사 일행에 포함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동인 허성. 놀랍게도 허성은 동인 당론을 무시하고, 서인 황윤길과 의견을 같이했다. 일본이 곧 쳐들어올것이라고! 동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않고, 당론을 거스른 것이다. 이런 허성의 모습은 그야말로 참된 충신이자, 나라를 생각하는 관리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하지만! 여기서 반전이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전쟁 발발 후 동인 김성일은 자신이 잘못된 보고를 했다고 자책하며, 오히려 의병으로 나서서 전쟁에 앞장섰다. 반면에 전쟁이 일어날거라고, 당론을 거스르면서까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동인 허성은 도망갔다. 심지어 백성들을 수탈하는 탐관오리였다. 거기다 그는 이름 난 문신 초당 허엽의 아들이고, 허균과 허초희(허난설헌)의 형이자 오라비다.

사람을 이분법적으로 보면 안되는 이유, 이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1610년(광해2년) 10월 22일 실시된 과거시험은 개판, 난장판, 아사리판이었다. 합격자 명단 일부다.
박자흥 - 시험관 이이첨 사위
이창후 - 이이첨 사위 아비, 즉 이이첨 사돈
정준 - 이이첨 옆집 사람
허보 - 시험관 허균 조카
박홍도 - 허균 조카 사위
조길 - 시험관 조탁 동생
변현 - 응시 자격 없는 전직 승려

사람들은 합격자 명단을 자서제질사돈방이라 조롱했다. 합격자 명단이 아니라 아들, 사위, 동생, 조카, 사돈 명단이라는 뜻이다. 여론이 폭발하자 광해군이 조치를 취하는데, 희한하다.

감독관 중 허균만 처벌
합격자 중 허보와 변헌만 합격 취소

누가 봐도 비리 몸통은 최고 권력자 이이첨이었고, 법무부 장관까지 불법을 저질렀지만 그냥 넘어갔다. 허균이 제일 만만해서 그랬다. 400년 후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똑같이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권력자 세 명이 비슷하게 자식 입시에 부당하게 개입하는데, 한 명만 혹독하게 처벌받고 두 명은 의혹 수준에서 슬그머니 뭉개진다. 그 한 명이 제일 만만해서 그랬다. p 128~129



어릴 때 부터 확립된 독서 습관
다양하고 세련된 어휘력과 문해력
자신을 표현하는 기술
음악, 연극, 오페라 등 문화 취향
예술 작품에 대한 이해도
사교술, 처신, 에티켓, 예의, 사회성
감정 제어, 성실
이런 것들을 문화자본 이라 한다. 입시에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이지만 학교나 사교육, 유튜브에선 배울 수 없다. 왜 그럴까? 문화자본은 문화자본을 지닌 부모가 가정에서 대화나 삶을 통해, 조언이나 모법을 통해 오랜시간 부지불식간에 전해주는 능력이라 그렇다. SKY 학생들이 나는 내 노력‘만’으로 정당하게 진학했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한가? p 140~141


금융 자본이나 부동산 자본을 상속할 때 세금을 낸다. 문화 자본과 사회 자본은 세금이 없다. 아무 제한 없이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다. 그래서 이딴 소리 나온다.
   “능력 없으면 네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국정농단 사건시 비선실세 딸이 한 말)”
문화 자본과 사회 자본을 충분히 누리는 사람들은, 그것을 상속이라 생각하지 않고 온전히 제 능력이라 믿는다. p 144


또 첨언해본다. 2000년을 전후해서 ‘할아버지 재력, 엄마 정보력, 아빠 무관심’이 입시 성공 필수세트였다. 요즘엔 ‘부모 재력’과 ‘아빠 학력’이 입시 성공 필수 요소다. 오죽하면 이를 풍자하는 드라마도 연이어 나왔겠는가. 거기다 2018년 서울대에서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아버지 학력이 높으면 자녀 성적도 높다’라고 한다. 그런데 이게 끝일까? 아니다. 여기에 추가로 필요한게 바로 문화자본이다. 

문화자본이 대체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그 어떤 걱정 없이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고액 학원을 다닐 수 있고, 원하는 만큼 공부할 시간이 제공되는 환경, 티켓 가격 걱정없이 음악회, 뮤지컬, 오페라 등을 문화 예술 관람을 할 수 있는 환경, 흔히 말하는 고소득 전문직들을 언제든지 보고 대화할 수 있는 환경등을 말한다. 이런 문화자본이라는 특혜가 바탕이 되었기에, 아무 걱정 없이 공부에 매진하여 높은 성적을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아니 꽤 많은 이들이 ‘문화자본’이 특혜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자신들은 공정하게 공부해서, 당당하게 유명대학에 입학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저소득계층에 대한 지원은 공정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과거 박근혜 키즈라고 불렸던, 현 엘리트 출신 정치인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비단 그 뿐만이랴? 수많은 특권층 자녀들이 자신의 SNS에 싸질렀던 글들, 기사화되었던 글들을 떠올려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