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조선 - 시대의 틈에서 ‘나’로 존재했던 52명의 여자들
이숙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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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역사는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다. 기록을 남기고, 기록을 모아서 정리하고, 정리한 기록을 또 다른 기록으로 남긴 사람들은 모두 남자였기 때문이다. 해서 우리가 보아온 역사 속 주인공들은 대체로 남자거나, 혹은 남자에게 유리한, 남자들만의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역사’를 뜻하는 영어 단어도 ‘History’, 즉 ‘그’의 이야기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과거형이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역사가 남자의 이야기라는 전제는 어디까지나 여성과 아동이 사람이 아니었던, 부계중심사회가 시작되었던 고대부터 여성과 아동의 권리가 정립되기 직전인 근대까지다. 현대 사회, 즉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서 역사를 기록하고, 기록을 남기고, 향유하는 주체는 남자, 여자, 어린아이 모두다.


조선에 살았던 여자들 기록은 생각보다 많이 남아있다. 여자들 스스로 직접 남긴 편지 같은 기록물도 꽤 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역사를 향유하는 유학자였던 ‘남자’들이 직접 쓴 기록이었다. 그 기록들은 스스로를 돋보이기 위해, 여자를 매개체로 남긴 기록이 아니었다. 본인이 기록하지 않으면, 살았던 흔적조차 남지 않는 가족을 염려하여, 그녀들이 살았다는 흔적을 남긴 아버지·남동생·아들이 남긴 가족을 향한 마음이었다.



다만 좀 슬픈 사실은 이런 기록들을 읽다보면, 상류층 여성과 그 외 여성의 삶이 극명하게 대비된다는 점이다. 예컨데 영응대군 부인 송씨는 왕실 가족이자 상류층 여성이었다. 물론 상류층이라 할지라도 여성이라는 한계점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씨 부인은 왕실과의 인연을 무기로 재산을 어마무시하게 늘려나갔다. 비슷한 사례로 봉보부인 백씨도 있다. 그녀는 노비였으나 왕실과 연을 맺어 상류층에 편입하게 되었고, 역시나 엄청난 재산과 지위를 갖게 되었다. 물론 그 반대로 왕실여성임에도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된 여성들도 있다. 소현세자빈 강씨라던가, 성종비였던 폐비 윤씨 처럼 말이다. 하지만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을지언정, 그들은 상류사회 일원이었고 그에 따라 역사에 기록되거나 후손들 기억 속에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 책에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고, 후손들 기억속에도 없으며, 분명 살아있었으나 살아있지 않았던 여성들에 대한 내용이 있다. 양반가에서 태어났지만, 어미가 측실이라는 이유로 없는 사람이 된 여자들이다. 아예 천민출신인 여성도 있지만, 일단 이 포스팅에선 ‘적서’ 차별을 받았던 여성들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적서차별은 조선 신분제 사회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사회적인 문제였다. 정실부인이 낳은 자녀는 적자/적녀가 되어 계속해서 정식적인 가족 구성원이되었지만, 측실부인(첩)이 낳은 서자/서녀는 가족 구성원이 아니었다. 그래도 서자는 신분상승 기회가 왕왕 있었지만, 서녀는 그 조차도 없었다. 간혹 좋은 집안 측실로 들어가, 아들(역시나 서자)을 낳고, 그 아들이 역사를 빛낼 공을 세우면 죽어서나마 신분상승을 할 수 있었다. 같은 측실 출생이어도 남자냐 여자냐에 따라서, 신분상승 기회조차 박탈되었던 것이다. 뭐, 여기에 더해 얼자도 있긴 한데 여기까지는 생략!


대표적인 사례가 신사임당의 두 손녀다.


신사임당은 본인부터 학문부터 예능까지 엄청난 재능 소유자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자녀들도 뛰어난 재능을 물려받았다. 주기론을 주창하고 노론의 정신적 지주였던 율곡 이이는 사임당의 학문적 재능을 물려받았고, 사절이라 불리던 옥산 이우는 사임당의 미술적 재능을 물려받았다. 조모에 이어, 아비들도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 딸들 역시 여러방면으로 재능이 뛰어났다. 하지만 율곡의 딸과 옥산의 딸은 서녀였다. 그들의 어미는 측실이었던 것이다.




▶율곡 이이의 서녀

아무리 아비가 망명 높은 대가에다 힘 꽤나 쓰는 가문이라도, 측실 소생 서녀라면 혼처 자리 역시 측실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부친이 저명한 집안이었기에, 측실로 들어간 집안도 꽤나 저명한 집안이라는 점이다. 율곡의 서녀는 김장생의 며느리이자, 당대 최고 학자인 김집의 측실이 되었다. 그리고 와병중인 정실부인을 대신해,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했다. 아들도 낳았다. 하지만 남편이었던 김집은 조상에게 고하는 축문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칠십 노인이 되면 집안일을 자손에게 물려주곤 하지만 저는 후계자가 없고 또 그렇다고 달리 어떻게 하기도 어려워서 그저 슬퍼 탄식만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김집을 서술한 다른 자료에서조차도 “김집은 아들이 없다”라고 말한다. 아비가 율곡이고, 시아비가 김장생이고, 남편이 김집이었고, 아들마저 낳았지만, 그녀는 측실이었다. 측실은 없는 사람과 같았고, 측실이 낳은 아들도 없는 사람이었다.



옥산 이우의 서녀

옥산 이우의 서녀는 벽오 이시발의 측실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사촌인 율곡의 서녀와는 조금 달랐다. 벽오는 그녀를 사랑하고 아꼈다. 심지어 벽오는 정실 부인이 죽었을 때는 그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은 반면, 측실인 옥산의 서녀가 죽었을 때는 제문을 남겼다.


“자네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잠 못 드는 날을 보내기를 반년, 결국 자네 부모의 허락을 얻어냈지. 혼인한 후에 자네의 지행을 보니 그 총명하고 명석한 재능과 단정하고 정숙한 자질이 과연 일반적인 규수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니 자네 부모에게 사랑을 받은 이유가 있었다… (생략). ”


심지어 벽오를 서술한 다른 자료에도 그녀에 대해 “반소처럼 아이를 가르치고 있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래서 그런가? 그녀가 낳고 가르친 아들들은 문, 무과에 급제하고 나라에 공까지 세웠다. 그로 인해 그녀의 아들들은 서자가 아닌, ‘적자’로 신분 상승했다. 이와 함께 그녀는 사후이긴 하나, 벽오 이시발의 정실부인으로써 ‘정경부인’에 제수되었다.


이 둘은 분명 신사임당의 손녀였고, 율곡 이이와 옥산 이우의 서녀였으며,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녀들이 물려받은 재능과 출신은 같았다. 하지만 그녀들을 측실로 맞이한 남편들은 행동은 너무나 달랐다. 김집은 측실과 측실의 자녀를 없는 사람으로 취급한반면, 이시발은 측실과 그 자녀를 사랑과 존중으로 대했다. 현대인 관점으로 보면 후자가 당연하고, 전자가 이상하게 보이지만, 당대 관점으로는 그 반대였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신사임당의 두 손녀 이야기는 여러모로 씁쓸한 사례다.



이번에는 다산 정약용 이야기다. 다산은 남겨진 기록만봐도 엄청난 애처가임을 알 수 있다. 다산이 남긴 수많은 저서에 아내 홍혜완에 대한 내용이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아내와 수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고, 자식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조차도 오로지 아내의 안위를 챙겼다.



다산 정약용의 정실 홍혜완

“우리 이별은 그렇다 치고 너희는 언제 어머니 모시고 고향 집에 돌아갈 것이냐. 되도록 빨리 돌아가도록 하라. 너희 어머니 안색이 위험하니 영양있는 음식으로 보하고 약을 써서 다스리도록 유의하여라.”


“어머니의 마음을 기쁘게 하여라. 그리하여 두 아들은 효자가 되고 두 며느리는 효부가 된다면 나는 이곳에서 그대로 늙는다고 해도 유감이 없을 것이니, 이것을 힘쓰도록 하여라.”


다산과 홍혜완만큼 금슬이 좋은 부부가 조선에 얼마나 있었을까? 심지어 이정도로 남편의 존중을 받는 아내가 얼마나 있었을까? 라고 생각하면 조선에선 거의 없다고 할 만큼, 다산은 조선 제일의 애처가였다. 하지만 다산의 그런 면모는 오로지 정실부인인 홍혜완에게서만 보일 뿐이다. 강진 유배시절 자신을 보필하고 딸 홍임까지 낳은, 홍임 어미에 대한 기록은 단 한줄도 남기지 않았다.




다산 정약용의 측실 홍임어미

그녀는 기나긴 강진 유배시절, 다산의 곁을 지키며 그를 보필하고 딸 홍임을 낳은 여자다. 하지만 홍임어미와 홍임의 존재는 위에서도 언급했듯 다산의 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정실부인 홍혜완이 낳았지만 요절한 아이들에 대한 기록은 절절하게 남긴 다산이었지만, 홍임과 홍임어미는 예외였다. 그렇다고 아예 작정하고 홍임어미와 홍임을 숨겼는가? 그건 또 아니었다.


“묵은 가지가 다 썩어가는 즈음에 갑자기 푸른가지가 나와 꽃을 피웠다”

“묵은 가지 다 썩어 그루터기 되려더니 푸른 가지 뻗더지만 꽃을 활짝 피웠구나.

어디선가 날아든 채색 깃의 어린 새 한 마리만 남아서 하늘가를 떠돌리.”



다산은 시를 쓰며 은근하게 홍임어미와 홍임을 그려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해배된 이후 홍임 어미와 홍임은 다산의 본가로 찾아갔지만, 내쳐졌다. 아마도 다산의 정실부인인 홍혜완에 의해 내쳐진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 다산이 남긴, 아내에 대한 기록으로 추정하면 말이다.


“내 아내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다만 속이 좁은 것이 문제다”


홍혜완 입장에서는 유배간 남편을 대신해 가문을 이끌고, 고생을 해왔는데 남편이라는 작자가 첩을 들였으니 좋게 보였을리 만무하다. 따지고 보면 홍혜완이나 홍임어미 두 여자는 그저 다산이라는 남편을 만난 것 뿐인데 말이다. 애초에 문제의 씨앗을 뿌린건 다산이었다. 다만 다산은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홍혜완에게 떠넘겼을 뿐이다. 이렇게 내쳐진 홍임 어미와 홍임은 어떻게 살았을까? 남겨진 기록은 없으나 《남당사》라는 시로 추정컨데, 이들 모녀의 삶이, 그 끝이 좋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편에게 사랑과 존중을 받았던 홍혜완, 반면 소용이 없어져 남편에게 버려진 홍임어미. 두 사람의 남편은 다산 정약용, 같은 인물이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서자, 서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양반네들 본인들은 첩을 들였지만, 첩은 첩일뿐 사람이 아니었다. 따라서 첩이 낳은 자녀들도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적자에게는 없는 재능을 가진 서자, 서녀라면 더 심각했다. 간혹 아비, 남편이 누구냐에 따라 위에 나온 벽오처럼 측실과 서자들을 사랑하고 존중한 사례도 있긴했지만 흔치 않았다. 그만큼 조선에서 서자, 서녀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하지만 조선 오백년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아니, 이를 사회문제로 인식하지 않았다. 왜? 이런 사회문제와 구조를 만든 건 다름아닌, 권력을 지녔던 양반들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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