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만에 내가 즐겨 읽는 분야의 역사책을 읽었다. 다름아닌 일본 고대사 역사책.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제일 관심있는 분야는 한일고대사 역사책이긴 하다. 고대 한일관계는 현재의 한일관계는 많이 달랐으니까.
보통 문명의 발달은 (구/신)석기시대 - 청동기 - 철기로 진행된다. 어떤 문명이든 그랬고, 한반도 역사도 이렇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꽤 오랜기간 석기시대를 유지하다가 급격하게 청동기+철기 혼용 시대로 점프했다. 왜? 바로 한반도 도래인 덕분에!
일본은 지형상 바다로 가로막힌 고립된 섬이다. 요즘에야 교통이 발달하여 비행기, 배만 타면 어디든 갈 수 있다지만 고대는 달랐다. 서로 대륙을 오가며 문명과 물자를 교류한 나라들은 점진적으로 문명이 발달했지만, 일본은 그게 불가능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다가 한반도에서 일부 사람들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들은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는 매우 선진적인 청동+철기 문명을 전파했다. 그래서일까. 본격적으로 청동기+철기문화로 점프하며 최초 통일왕조가 성립된 4세기 야마토 정권의 시작은 한반도 도래인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다.
위에서도 말했듯 한일고대사를 워낙 좋아하는 지라 관련 책을 꽤 많이 읽었고, 일반인보다는 관련 지식을 꽤 많이 알고 있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일본 여행을 가도 도래인 유적지 답사도 자주했었고. 다만 내가 알고 있는 지식들은 토대부터 착착 다져진 지식이라기보단, 과정을 뺀 ‘결과’에 대해서만 아는 경우가 많았다. 뿐만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지식들은 대체로 한반도 역사와 관련된 부분이 많았다(특히 백제나 가야, 그외 고대국가 전승).
예컨데 5세기 야마토 정권을 좌지우지 한 소가씨가 도래인 출신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소가씨 씨족의 시작이 어땠는지는 몰랐다. 소가씨가 씨사로 ‘아스카데라(호코지)’를 조영할 만큼 권력을 좌지우지 한 도래인 일족이라는 건 알았으나, 그들이 권력을 잡은 방법이 ‘외척’을 활용한 방법이었다는 건 몰랐다. 소가씨를 비롯한 여러 도래인 일족들이 야마토 정권 하에 등용되었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그들이 대대로 태자(차기 천황)의 스승을 했다는 사실은 몰랐다. 아야씨가 도래인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천황가 조차도 섣불리 손댈 수 없는 무가, 즉 일종의 해결사 집단이라는 사실은 몰랐다. 왕인 박사 후손들이 대대로 황궁 문서업무(행정 등)에 종사했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그들뿐만 아니라 백제인 왕진이 같은 다른 도래인 씨족들도 같이 문서업무에 종사했다는 사실은 몰랐다. 이런 모든 내용을 「소가씨 4대」를 통해 확인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일본 고대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꽤 있었다면, 「왜 5왕」에 대한 내용은 약간 내 머리속에 물음표가 다분한 내용이라, 읽는 내내 흥미로웠다. 그도 그럴것이 일본 사서 『일본서기』, 『고사기』 (일명 기기전승/기기사관)등에는 중국 사서에 실려 있는 왜 5왕에 대한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 사서(『송서』)에서 말하는 왜국왕 5명은 ‘찬, 진, 제, 흥, 무’를 말한다. 이들은 송나라에서 안동장군이라는 작위를 제수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도 짤막하게나마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의 기록은 일본 기기전승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뭐, 생각해보면 그렇다. 중국 사서에는 5세기 왜국5왕 뿐만 아니라, 3세기 야마타이국 히미코 여왕에 대한 기사도 있다. 하지만 히미코 여왕 역시 기기전승에는 그 이름이 없다. 여기서부터 이미 일본 기기전승은 역사서로써 과장과 왜곡이 꽤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것이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 『고사기』는 중국사서보다도 한참 뒤, 8세기에 ‘왕권강화(천황가 정당성)’를 위해 쓰여진 역사서이기 때문이다. 왜곡과 과장 및 윤색이 많이 들어가있다. 특히 연대가 그렇다.
기기전승에 왜곡과 과장이 많다고는 하지만, 아주 다행스럽게도 중국사서나 우리나라 사서와 교차 검증할 수 있는 사실도 있다. 그 덕분에 기기전승에서 부풀린 연대를 역산한결과, 대충 120년의 오차가 있다는게 현재 통설이다(특히 백제사 기록과 교차검증).
기기전승에서는 중국 사서에 있는 3세기 히미코 여왕을, 진구천황과 동일시 하고 있다. 하지만 연대 검증결과 적어도 진구천황 재위 시절에 쓰여진 기사는 4세기로 확인된다. 즉, 8세기 당시 『고사기』, 『일본서기』 집필 과정에서 이미 쓰여진 중국 사서에 나와있는 히미코여왕을 그대로 차용하면서 연대를 위로 끌어올려버린 것이다. 그렇게 연대를 끌어올리다보니, 그 과정에서 기기전승에만 남은 소위 백년 넘개 살았던 허구의 천황들이 탄생했다. 또 그렇게 허구의 천황들을 만들어내고 보니, 히미코 여왕 이후 중국 사서에 실려있는 왜 5왕에 대해 끼워맞추기가 어려워진 상태가 되었달까?
근/현대에 이르러 학계에서는 중국 사서에 실린 왜 5왕를 천황가 계보에 따라 리추, 한제이, 인교이, 안코, 유라쿠 등으로 추정했고, 이로 인해 ‘기마민족정복왕조설’과 ‘왕조교체설’등이 대두되는 등 만세일계 형통이라는 천황가의 계보도 예전만큼의 힘은 없다.
일단 『송서』 「왜국전」의 기록을 통해 보면 찬이 왜국에서 정통성이 있는 왕으로 인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438년 왜왕 진이 송으로부터 ‘안동장군 왜국왕’의 칭호를 받았던 것을 참고하면 찬도 ‘안동장군 왜국왕’의 칭호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고구려나 백제보다는 서열이 낮은 작호였다. p 015
원래 『송서』의 왜5왕보다 앞선 시대인 3세기경 일본열도의 상황이 중국 사료에 등장한다. 그것이 잘 알려져 있는 야마타이국이다. 야마타이국이란 중국의 진수가 쓴 『삼국지』의 「동이전」 왜인조에서 3세기 초반의 왜인국을 아울렀다는 여왕국을 말한다. 『삼국지』에 따르면 왜인의 나라는 30여 개의 소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여왕 히미코의 야마타이국이 가장 강성한 국가로, 특히 히미코가 3세기 초에 중국의 위나라에 조공을 하여 ‘친위왜왕’이라는 칭호까지 받은 사실에 대해 적고 있다. p 039
정작 일본의 사서에는 히미코라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일본서기』를 기술한 편찬자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진구 황후를 히미코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진구 황후라는 인물은 사실 일본 고대사 수수께끼 가운데 한 인물이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나오는 진구는 남편인 주아이 천황이 죽은 이후, 천황에 버금갈 정도의 섭정을 하였다고 전하는 황후다. 특히 우리에게는 ‘진구의 삼한정벌’로 알려진 인물이다. p 040
『일본서기』의 연대에 따르면 진구는 서기 201년부터 269년까지 재위했던 것으로 나온다. 이렇게 진구를 3세기의 인물로 위치시키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이 바로 중국의 사서였다. 『일본서기』에서는 진구의 재위 기간 중간 중간에 “「위지」에서 말하였다”는 표현을 빌어가며 240년 위나라 제왕이 조서를 갖고 왜국에 갔따든지, 243년 왜왕이 사신을 보내 헌상했다든지 하는 「위지」의 기록을 직접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p 040
일본 학계에서는 일찍이 소가씨 자체가 도래인이라는 점이 제창되었다. 이 학설에서는 『일본서기』에 오진 천황 25년에 도래했다고 하는 백제의 고관 목만치와 소가씨가 자신들의 선조로 주장하고 있는 소가마지를 동일인물로 생각하는 것이다. 소가씨 도래인설은 그 후에도 유력한 연구자에 의해 계승되었고 현재에도 일반에 소가씨 도래인이라는 이해가 널리 유포되고 있다. p 015
소가씨는 문자를 읽고 쓰는 기술, 철 생산 기술, 대규모 관개수로 공사의 기술, 건전, 스에키, 견직물 등 대륙의 새로운 문화와 기술을 전한 도래인 집단을 지배하에 두고 조직하여 왜왕권의 실무를 관장함으로써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따. 이나메 이전부터 소가씨가 한반도 정책, 도래인, 창고 관리와 같은 왕권의 정치조직의 몇 부문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의견도 있으나 오히려 가쓰라기 지방의 호족 가운데 그러한 직장을 담당하고 있던 가쓰라기 집단의 중추적인 집단이 중심이 되어 소가씨로 독립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p 028
‘소가’라는 씨족명에 대해서는 거주지 주변에 서식하는 식물 ‘스가(골풀)’에서 유래한다는 설도 있다. 좀더 주목되는 점은 소가씨의 거주지인 소가 지역에 ‘구다라가와(百濟川)’ 즉 ‘백제천’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소가씨와 백제의 관련성을 시사한다. 한편 소가씨 가문의 계보 중 마지(滿知), 가라코(韓子), 고마(高麗) 등 한반도와 관련된 이름이 보이고 있다는 점, 소가씨가 그 아래에 아야 씨, 후네 씨 등과 같은 백제계 도래씨족을 다수 거느리고 있는 점, 소가씨 가문이 주도적으로 추진한 대외정책에 있어서 친백제 정책을 견지하고 있는 점, 목만치와 마지가 동일인물로 추정되며 백제 목 씨의 후예로 볼 수 있다는 점 등에서 소가씨 집안을 한반도 백제에서 건너간 도래계 씨족으로 보아도 큰잘못은 없을 것이다. p 029
이나메와 도래인의 관계를 살펴보면, 한반도 특히 백제에서 왜국으로 건너 온 도래인들은 전문 관료, 테크노크라트 및 외교 사절로서 활약하고 율령 및 각종 사서편찬에도 직접 관여한 사실들이 주목된다. (…) 국내의 지배체제 확립에 꼭 필요한 문서행정, 문필 담당자 또한 도래계 씨족과 그 후예들이었다. (…) 이후 국가 차원의 문서담당 전문집단인 사부집단의 성립으로 이어진다. 왕인박사의 후예인 가와치노후미노오비토 씨 및 왕진이 후예씨족인 후네노후히토 씨, 야마노아야 씨 일족인 야마토노후미 씨 등이 그 중실을 이루고 있었다. 요컨데 고대 일본의 문서행정에 꼭 필요한 문필업은 도래계 씨족과 그 후예들이 담당 주체였던 것이다. p 061
소가씨의 강제력 즉 무력, 군사력은 주로 도래계씨족인 야마토아야 씨에 기초하고 있다. 그 단적인 사례가 스슌 천황의 암살에 야마토노아야노아타이 고마가 직접 관여한 사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야마토아야씨야말로 왜국(소가씨)의 흑막적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야마토노아야씨는 소가씨 정권 하에서 이른바 해결사로서 각종 청부 일을 도맡았다. 그런 만큼 당시에 있어서 야마토노아야씨 일족이 무시 못할 세력을 보유했음을 말해준다. 그 단적인 증거가 다음에 보이는 야마토노아야노타이 씨 등에게 내려진 덴무 천황의 「조서」다. p 0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