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New 다이제스트 100 시리즈 5
정토웅 지음 / 가람기획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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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는 전쟁사 책이다. 세계 전쟁사는 이전에도 책을 수차례 읽어본 적이 있고, 무엇보다 임용한 교수님의 《토크멘터리 전쟁사》 열혈 시청자(!!) 였던 나인지라 전쟁사는 내게 익숙한 분야다. 다만, 여기에 함정이 있으니! 언제봐도 동양 전쟁사는 이해가 잘되고, ‘아?’ 하면 ‘맞아맞아!’ 하고 바로 넘어가는 반면 서양 전쟁사는 매번 처음 보는 기분이랄까T_T. 하. 이건 내가 동양인이라서 그런건가? 그냥 영어로 이루어진 전쟁 이름이 싫은건가. 후....




정작 아이러니한 사실은 동, 서양 전쟁사를 비교했을 때 전반적으로 내용이 풍부하고 자세한건 서양 전쟁사라는 점이다. 예컨데 고대 전쟁사를 보자. ‘트로이 전쟁’, ‘마라톤 전쟁’, ‘살라미스 해전’, ‘펠로폰네소스 전쟁’ 등 우리에게도 꽤나 유명한 전쟁들이고, 지금도 많은 정보가 아주 디테일하게 남아있는 전쟁이다. 무엇보다 이 전쟁들은 ‘서양’에서 일어난 전쟁들이다. 



반면 우리 고대사 속 전쟁은 어떤가? 이 땅에서 여러 나라가 생기고 사라지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전쟁 또는 전투가 빈번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시국가(연맹국가)시절의 기록은 없다고 봐야하고, 그나마 나오는 기록이라고는 삼국시대 기록인데, 이 기록들마저도 ‘A국가가 B국가로 쳐들어갔다’, 내지는 ‘~점령했다’ 혹은 아예 기록 없을 무. 



우리는 세계전쟁사가 대부분 서양 위주로 기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자료는 비교적 풍부하고 상세한 기록을 담고 있는 데 반해, 동양자료는 빈약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동양 자료는 전쟁기록은 많지만 ‘싸움이 있었다’는 식으로 간단히 기록되어 있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싸웠는가에 대하여 생략된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것이 한계다. 더구나 동양문화는 서양문화와 달리 각 나라와의 활발한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각국의 전쟁사는 자국 아닌 다른 국가 사람들의 관심까지 크게 끌지 못했다. 그 결과 충분한 실증과 토론을 거치지 못한 동양 전쟁사는 별로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는 편이다. p 038



기원전 4세기 인물인 알렉산드로스 동방원정에서 몇 명의 군인을 동원했고, 어떤 전법을 이용했고, 어떤 루트로 진격을 했는지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과는 확연하게 비교가 된다.



어라? 그래서 그런가? 내가 서양전쟁사를 어려워하는 이유가! 동양 전쟁사와는 달리 전쟁사적으로 너무 디테일한 정보가 많아서?! 아 왠지 설득력 있는 추측이다. 하ㅏ하ㅏ...





사담이 길었다..


본격적으로 이 세계사책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100」을 소개해보자면, 이 책은 동/서양을 아울러 전 세계에서 일어난 전쟁(또는 전투)를 100개 시대순으로 정리한 책이다. 목차도 어디까지나 동,서양을 합친 시대순! 







목차에서 서양 전쟁(또는 전투가)이 많은 이유는, 위에서 언급했던 정보의 불균형 때문이랄까? 뭐 이건 어쩔 수 없는 듯. 참고로 이 책에는 부록형식(?)으로 세계 전쟁사 연표가 실려있으니, 전쟁사를 한 눈에 보기에도 좋을 듯. 





아래는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로알게 된 사실이라던가, 디테일한 전쟁정보가 신기하다던가, 동/서양 전쟁 기록이 눈에 띄게 비교가 되어 체크해둔 부분을 옮긴 내용이다.


서양


아마존 전설(BC16~12세기)


그리스 신화와 전설 가운데는 아마조노마키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이 그리스어는 여전사들로 구성된 아마존 족에서 유래한 말로서, 그리스 남자들로 구성된 전사들과 침략한 아마존 족 간에 벌어진 전투를 의미한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싸움 잘하는 아마존 족의 침략을 남자전사들이 나서서 격퇴시킴으로써 그리스를 지켰다는 내용을 주레로 삼고 있다. 말하자면 성 대결적인 전투에서 남자들이 승리하고 남자의 자존심을 지켰으며, 그 후 그리스 역사는 남자들이 주역을 담당하여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아마존 족의 존재와, 아마조노마키는 역사적 사실이었을까? p 011



1950년대에 우크라이나 남부지방에서는 사르마트 족 전사들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기원전 4세기로 추정되는 그 무덤들의 약 20%가 여전사들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젊은 여자 두개골과 그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활과 화살, 화살통, 단검, 갑옷 등이 나오고, 두개골이 크게 상처받은 형태나 뼛속에 박혀 있는 청동제 화살촉 등이 발견된 것은 사르마트 족 가운데 여자전사들이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은 아마존 전설에서 여전사들이 활동한 지역 중 하나로 이미 알려진 곳이었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사르마트 족은 그리스의 젊은 청년들과 아마존 족의 일시적 결혼에 의해 생긴 후손들이었다. p 012



아마존 전설은 문자기록이 없던 선사시대에 사람들은 모계중심 사회를 구성하고 여존남비의 사상이 지배적이었을 가능성이 높았으며, 또 그 당시 전쟁에서는 여자들이 두드러진 확약을 했을 가능성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p 014


아마존 전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딱 ‘전설’일 뿐이었다. 헌데 아마존 여전사 이야기가 완전히 허구가 아니라. 심지어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까지 있다니!!!!! 문득 떠오르는 책이 있었다. 책 제목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그 내용은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기억이 난다. 다름아닌 전 세계 고대 역사에서 발견되는 여성숭배, 이른바 여성숭배에 대한 ‘문화의 보편성’.



동, 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역사(문명)에서 발견되는게 바로 나체 여신상이다. 수렵, 채집을 하는 석기시대는 모계사회 및 여성숭배가 일반적이었다. 여성은 수렵과 채집을 위한 노동력을 생산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동기/철기 문화가 발달하고 잉여재산이 발생하기 시작하자 노동력이 남아돌았고, 이른바 부족들 간의 땅따먹기가 시작된다. 당연히 무기를 휘두르는 강한 힘을 가진 남자들이 권력을 쥘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 이게 딱 아마존 여전사들 이야기와 맞아떨어지지 않은가!!



한마디로 ’아마존 전설(아마존 여자전사)’ 이야기는 당대 그리스 사회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거기에 더해서 부계사회에 대한 정당성도 한 스푼 추가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과 페르시아 정복(BC 4세기)


알렉산드로스가 그의 짧은 생애 동안 이룬 업적은 하나의 전설과 같다. 특히 전쟁사에서 그가 보여준 능력과 업적은 실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추앙받고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약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장군들도 약점을 보이게 마련이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군사 분야에 있어서 그야말로 오나벽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필리포스의 단순한 계승자 차원을 넘어서 전략 전술에서 페르시아/그리스/마케도니아 세계의 어떤 선구자보다 앞서는 개념과 실천력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p 050



왕으로 취암한 2년 후인 기원전 33년 알렉산드로스는 세계 최고의 군대인 보병 32,000명과 기병 5,100명을 거느리고 아시아 원정에 나섰다. (…) 알렉산드로스는 단지 180척의 군함밖에 없는 데 비해 페르시아 함대는 400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가 1차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4년이 소요되었다. p 051



기원전 334년 그라니코스 싸움, 기원전 333년 이수스 싸움, 기원전 332년 티로스 싸움에서 알렉산드로스 군대는 비록 숫자는 많지만 여러 면에서 뒤떨어져 있던 페르시아 군대를 모두 물리치고 승리했다. 페르시아 군의 가장 큰 약점은 기병과 보병 간 협조체제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반면 마케도니아 군은 필리포스가 개발한, 보병과 기병의 협동을 기초로 하는 ‘망치와 모루’ 전법에 숙달되어 있었다. 마케도니아 군은 먼저 보병 지원을 받지 못하는 페르시아 기병을 공격하고, 그 다음에는 기병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보병을 공격함으로써 적을 조직적으로 격파했다. p 052


카르타고 군대와 한니발(BC 3세기)


제 2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완전한 역전을 이루게 되는데, 이는 전적으로 걸출한 명창 한니발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니발은 도저히 통합이 어렵다고 여겨지던 카르타고 군의 이질적 요소들을 오히려 한데 모아 더 큰 힘을 발휘하도록 하고, 병사들을 고무시키고 자기를 따르게 하는 비범한 통솔력을 가졌으며, 적의 약점을 최대로 활용하는 혜안을 소유한 군사적 천재였다. p 061



이후 로마는 전장에서 한니발을 피하고, 그 대신 로마 지도자 파비우스의 주장에 따라 지연전을 전개하여 한니발을 지치게 하는 전략을 택했다. 이후 사람들은 전쟁에서 이용되는 지연전 위주의 전략을 ‘파비우스 전략’이라고 불렀다. p 062



(칸나에 전투)기원전 216년 로마에서는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와 테렌티우스 바로 두 통령이 선출됨으로써 파비우스 전략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공격적이고 자존심 강한 로마인들이 그런 소극적인 전략에 만족할 리 없었다. (…) 다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한니발로서는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니었다. p 063



칸나에의 섬멸전은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를 거둔 한니발의 창의력과 주도면밀한 양익포위전술, 그리고 탁월한 통솔력 및 추진력으로 이루어진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생각하면 한니발과 같은 명장이 나온 것은 바로와 같은 우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전쟁사에서 승리는 패배한 측의 과오와 우둔함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흔하다. p 066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한니발은 워낙 유명하지만, 굳이 내용을 옮긴 이유는 이들이 활약한 시기와 그들이 남긴 기록때문이다. 이들이 할약한 시기는 기원 전 3~4세. 우리나라로 치면 고구려, 동예, 옥저, 삼한 등 초기 연맹 국가가 있었던 시기다. 기록이 없어도 이상하지 않을 까마득한 옛날인데, 놀랍게도 이들의 전쟁(전투)기록은 놀라울 정도로 세세하다. 몇 명의 군사가 참전했고 어떤 전법을 사용했고, 어떻게 적을 격파했는지 등 빠짐없이 기록되어있기 때문이다. 반면 당대 한반도에 있었던 연맹국가 기록들은...음. 국사를 배웠다면 알 것이다. 이렇게 세세한 전투기록은 1도 없다는 사실을. 너무 비교되는거 아닌가..ㅜㅜ



제정로마시대의 군대(BC 27년~)


기원전 27년 카이사르의 조카 손자 옥타비아누스가 로마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에 대해 사람들이 ‘제1시민’이라고 불러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그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와 함께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사실상 그는 황제의 지위를 누리고 제정로마 시대의 테이프를 끊었다. (…) 그는 공화정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가운데 약 60개의 로마 군단을 28개로 줄이는 개편작업을 벌였다. 과거 장군들이 제멋대로 임시 군대를 모집하는, 비경제적이면서 정치적으로도 위험했던 관행을 중단시켰다. 어떠한 군인도 자신이 아닌 다른 장군에게 충성하는 일을 제도적으로 막았다. 직업적 상비군 제도를 도입하고 자신이 직접 관장하는 국가재정으로 군인들에게 보수를 지급했다. p 077



아우구스투스 후계자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을 그대로 유지시키고 큰 전쟁 없이 국경지역을 성공적으로 방호했다. 제13대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더 이상 제국의 영토를 확장시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기존의 경계선을 영구적으로 요새화하는 작업을 실시했다. 로마군은 대대적인 장성을 쌓고 완전히 요새수비에만 의존하는 군대로 변했다. 이제 군대는 전사들의 전통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마치 경찰처럼 변질되었으며, 활발한 이동보다는 주로 한 곳에 주둔하고, 군사적 업무보다는 엉뚱한 데 관심을 쏟아 점차 무기력해져갔다. p 078




심지어 기원전 1세기 인물인 옥타비아누스는 국방 및 군사제도를 개혁했는데, 이 모습이 현재 군인들 모습과도 흡사해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비교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 역사 속 군사제도를 생각해보면 하하.하ㅏㅎ. 하지만! 옥타비아누스가 길을 잘 닦았다고 해서, 그게 대대손손 이어졌느냐! 그건 또 아니다. 후세들이 평화로운 현실에 안주하기 시작했다. 현실에 안주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 균열이 시작되는 건 당연지사!



동양


춘추전국시대의 전쟁(BC 770~)


춘추시대 전쟁방법은 거의 같은 시대의 서양에서 유행하던 방법과 유사했다. 주로 제후나 장수들이 전투용 마차를 타고 들판에서 싸웠으며, 전차 1량에 30인의 보병이 붙었지만 그들의 역할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는 청동기 시대로서, 제한된 구리 생산량 때문에 장수들만 장검을 휴대하고 싸웠다. 이때 전투는 일반적으로 짧은 시간 내에 끝나고, 결과에 따라 제후국들 간의 합병이 잇따랐다. 전국시대에 7강국(진/초/연/제/한/위/조) 간 전쟁은 보다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p 039



철이 생산되었을 때 초기에는 주로 농기구로 이용했으나 차츰 무기로 사용했다. 보병들은 철로 만든 장창과 방패를 휴대하고 철제 화살촉을 이용했다. (…) 동서양은 문화수준에 큰 차이가 나는 만큼 전법에서도 차이가 컸다. 서양에서 주 공격무기는 창이었으나 동양에서는 활이었다. p 040



《손자》의 저자는 춘추시대 제나라 태생의 손무였다. 오나라 제후 합려와 그의 아들 부차 밑에서 유명한 장수로 활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제나라 사람이었던 손무가 오나라로 국적을 옮기게 된 데는 제나라 정치가 극도로 어지럽고 정변이 자주 발생하자 오나라에 망명을 간 것이라 한다. (…) 그 결과 약소국 오나라는 일약 강국으로 등장하고, 초나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인접국인 제/진/월나라 등에 대해 위협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p 044



동양 전쟁사의 시작! 치열하게 땅따먹기가 진행되었던 춘추전국시대(중국). 정말 많은 전쟁과 전투들이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그 기록은 위 알렉산드로스, 한니발과 비교했을 때 정보가 너무 빈약하다. 뭐 어쩌겠는가. 전쟁 기록에 대한 중요도가 서양보다 낮았던 동양을 탓할 뿐. 씁쓸하구만.



진시황제와 만리장성(BC 214년)


현재의 만리장성은 17세기 초 명나라 때에 쌓은 성이며, 이는 기원전 3세기에 진나라 시황제가 쌓은 만리장성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축성을 하는 데 100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는 진시황제 때의 만리장성과는 다르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의 만리장성을 진나라 시대의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에서는 자국의 영토를 지키고 적국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국경을 따라 성벽을 쌓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p 067



시황제는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옜 장성을 보수, 연결시키고 새 장성을 쌓아서 대장성을 만들었는데, 그 장대함으로 ‘만리장성’이라 불렀다. 이 성의 실제 길이는 서쪽 감숙지방으로 부터 동쪽 요동지방까지 2,400km에 달했다. 이보다 남쪽에 위치한 현재의 만리장성의 총 길이는 5,000km다. 이 장성이 현재의 규모로 된 것은 명나라 때로서,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p 068



이건 조금 놀랐다(아마존 전설만큼은 아니지만). 지금의 만리장성이 진시황제 때 만리장성이 아닌, 명나라 때 축성된 장성이라니!! 뭐 중국 입장으로 볼 때, 관광명소 홍보에 있어서, 중세인 명나라보다는 고대인 진나라가 훨씬 홍보효과가 있을테니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한/초 전쟁, 유방과 항우의 대결(BC 206년)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은 기원전 206년 부터 거의 4년에 걸쳐 전쟁을 했다. 전쟁터에서 유방은 자주 패했으나, 진나라 수도였던 함양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달아나오기만 하면 또다시 군대를 일으키곤 했다. 그것은 마치 전국시대 진나라가 본거지를 전략적 요충인 함양에 두고 부대를 잘 운용했던 것과 같다. 주, 진, 한, 당 등 중국 역대의 대왕조가 모두 함양에 도읍을 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p 071



유방의 장수 한신은 북방 제국들을 차례로 공략하며 한나라 세력을 점차 확대해나갔다. 한신은 북방지역을 공략할 때 상식에 벗어나는 이른바 ‘배수진’의 방법으로 병력을 배치하고 대승을 거둔 바 있는데, 이후 ‘배수진’의 아이디어는 전투상황에 따라 자주 사용되어왔다. p 071



항우에게도 한신 만한 장수로 범증이란 자가 있었지만, 항우가 그를 의심하는 바람에 초나라를 떠나버림으로써 그들의 관계는 유방, 한신의 관계와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p 072


적벽대전(AD 208년)


유럽이 하나의 대제국을 형성하고 로마의 통치를 받던 시절, 중국은 천하 통일과 군웅할거가 반복되는 가운데 잦은 왕조 교체를 보이고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중국의 전쟁에 관한 기록은 유럽에 비하면 너무 조잡하고 트깋 군대의 특성과 전술의 발달을 이해하기에는 어려우며, 다만 유명한 장군들의 무용과 지략에 관한 이야기로 만족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p 081



동란시절 군웅들이 즐비하게 나타나 각축전을 벌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두각을 나타낸 자들은 조조, 유비, 손권 등이었다. 중원의 패자가 된 조조는 중국 북부를 완전히 통일하고 이제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남부로 진격했다. 이에 유비는 그가 삼고지례를 다하여 맞아들인 제갈공명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으며 손권과 손을 잡고 조조의 군대에 대항하게 되었다. (…) 적의 약점을 간파한 연합군은 화공작전을 쓰기로 했다. 화공을 하려면 일정한 조건을 갖춰야 하는데, 조조의 군대는 밀집부대를 이루고 있고 바람이 동남풍이 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p 082



연합군은 조조의 남방 재패의 야심을 분쇄했으며, 이 싸움을 계기로 조조의 세력은 위축되고 유비와 손권의 세력이 확장되었다. 결국 3자는 천하를 삼분하여 조조의 위나라, 유비의 촉나라, 손권의 오나라가 문자 그대로 솥발처럼 정립하는 삼국시대를 열었으며, 다시 그들끼리 크고 작은 싸움을 벌이다가 280년 위나라의 사마염에 의해 진나라로 통일을 이루었다. p 083



전체적으로 중국(동양) 전쟁사는 전략, 전술보다는 덕장이냐, 용장이냐, 맹장이냐 등 ‘인물’에 중심을 두고 기록하는 경향이 보인다. 그래서 그런가? 초, 한나라 전쟁을 두고 소설 「초한지(초한연의)」가 탄생했고, 삼국시대를 두고 소설 「삼국지(삼국지연의)」가 탄생했다. 어디까지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유명 소설 탄생이다(오래도록 사랑받는 스테디셀러!). 얼마나 인물에 중점을 두었는지는 소설 「삼국지(삼국지연의)」를 보면 알 수 있다. 왜? 소설 「삼국지」 주인공은 다름아닌 유비. 심지어 삼국지 속 전쟁 장면을 보면, 전쟁이 메인이 아니라 전쟁을 지휘하는 등장인물들이 메인이다. 



더 아이러니한 건 소설 「삼국지」에서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해서 매력적으로 만든 캐릭터들은 작중에서 대부분 하늘의 별★이 되었다는 이야기. 실제 역사 속 삼국지 최후의 승자는 갑툭튀(!) 사마염이다. 유비나 조조나 죽써서 개준거지, 뭐.



고구려/수나라 전쟁, 살수대첩 (AD 612년)


우리나라 역사에서 고조선은 대동강 유역에서부터 흥기하여 한반도뿐만 아니라 북으로 오늘날 중국 땅 상당히 깊숙한 곳까지 세력을 뻗쳐나감으로써 자연히 중국과 국경을 이룬 요하 주위 지역에서 전투가 자주 발생했다. 고조선 이후 삼국시대 고구려는 한민족의 대를 이어 강국으로 등장하고, 북방지역의 유목민인 선비족을 몰아내면서 국경지역을 안정시켰다. (…) 그러나 581년 중국 천하를 통일한 수나라는 한나라 이래 최대 제국을 건설하고 동방의 강대국 고구려 땅을 넘보게 되었다. p 097



적이 압록강을 건어오기 직전에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은 항복을 가장하고 적진을 방문했다. 적정을 탐지하기 위해서였다. 을지문덕을 보내고 난 후에야 우중문과 우문술은 고구려의 항복을 의심하게 되었고, 게다가 두 사람은 사사건건 의견을 달리하며 지휘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을지문덕은 추격해오는 우문술의 군대를 더욱 지치게 하기 위해 접전할 때마다 의도적으로 패주, 살수 이남으로 깊숙이 유인했다. p 099




그대의 신기한 책략은 천문을 꿰뚫고


기묘한 계산은 지리를 통달했소


싸움에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이제 그만두기 바라오




우문술은 을지문덕의 제의를 진실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이제 평양성 공략은 무모하다는 것을 깨닫고 총 퇴각을 결심했다. 우문술 부대가 철수하기 시작하자 드디어 을지문덕 국은 습격을 시작했다. 적 병력이 살수에서 약 절반쯤 도하했을 때 고구려군은 후위부대를 엄습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수나라 군대는 일시에 무너지고 일부 도주병들은 일주일 동안에 압록강까지 약 180km를 내달렸다. 30만 명의 별동대 가운데 요동성으로 살아 돌아온 자는 2,700명에 불과했다. 고구려는 원정군의 약점을 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거점방어식 청야입보와 같은 훌륭한 전법을 일찍이 개발하여 수적으로 우세한 수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동북아 강대국의 자리를 확고히 지켰다. p 100



그래도 동양 전쟁사인데, 우리나라 역사가 빠지면 섭하다. 책 읽으면서도 점점 섭섭해질 무렵(!) 우리나라 전쟁사가 첫 등장했으니, 바로 중국과 한판붙어서 대승을 거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다. 심지어 병력 수와 전법까지 있다. 하 감개무량해T_T.



고구려/당나라 전쟁, 안시성 전투(AD 645년)


당 태종은 수 양제와 마찬가지로 평양성 점령을 최종 목표로, 육군은 요동반도를 통과하고 수군은 바다를 건너는 수륙 양면작전 전개를 계획했다. 그러나 양제가 범한 과오를 분석하고 대병력보다는 소수의 정예부대 위주로 육군 6만, 수군 4만 등 총 10만 명의 원정군을 편성했다. p 102



6월 안시성을 공략할 무렵 고구려는 고연수, 고혜진 두 장수가 후방에서부터 15만 구원부대를 이끌고 왔지만 야지에서 격파되고 말았다. 태종은 항복한 고연수를 안시성 아래로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그러나 성내 고구려군은 성주를 중심으로 굳게 단합하고 결사적 항전을 벌였다. (…) 당 태종은 안시성 동남쪽에 높은 토산을 쌓기 시작하고, 공성장비로 매일 6~7회씩 공격을 퍼부었다. 고구려군은 적의 토산 건설에 대해 성벽을 더 높이 쌓고, 파괴던 성벽을 보수하면서 적의 성내 진입을 막는 한편, 야간에는 특공대를 편성하여 적을 기습했다. p 103



당나라 군은 60여 일만에 연 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토성을 완성했다. 그러나 토산 일부가 무너지며 성벽을 엎친 사고가 발생하자 이 기회를 이용, 고구려군은 도리어 토산을 점령하고 그것을 수비진지로 만들어버렸다. (…) 당 태종이 훌륭한 전략가로서 수 양제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노력헀지만 거의 그대로 답습한 결과에 이르고 만 것은 고구려의 청야입보 전술과 고구려인의 결사적인 저항을 극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인접한 성들이 도미노처럼 차례로 무너지는 판에 안시성을 끝까지 사수한 성주의 용기와 공로는 당나라의 계획을 무력화시킨 결정적 요인이었다. 성주의 이름은 우리나라 정사에는 기록이 없으나, 야사를 통해 양만춘으로 전해지고 있다. p 104



중국을 상대로 두번째 대승을 거둔 안시성 전투. 우리나라에서는 조인성 주연인 영화도 개봉했더랬다. 여기서 함정 하나! 우리가 알고 있는 안시성 전투에는 ‘허’와 ‘실’이 있다. 다름아닌 안시성 전투의 주역, 성주 ‘양만춘’에 대한 것.



실제로 안시성 전투가 기록된 중국 정사와 우리나라 정사 「삼국사기」에는 안시성 성주의 이름이 없다. 그렇다면 ‘양만춘’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온 것인가? 안시성 성주 이름이 ‘양만춘’이라는 기록이 최초로 쓰여진 건, 안시성 전투 이후 약 1백년이 지난 명나라 때 쓰여진 「당서연의(1553년)」라는 소설이다. 이 영향으로 조선 중, 후기 문신들의 기록에서는 안시성 성주 이름이 ‘양만춘’이라고 쓰기 시작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동양 전쟁사는 서양 전쟁사 대비 기록이 부실하다. 고대는 더더욱. 그래도 중세를 지나갈 쯤엔 나름대로 전쟁에 대한 디테일이 붙기 시작한다. 점점더 읽을만하다는 이야기! 무엇보다 대다수의 전쟁사책이 서양 전쟁사에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면, 이 책은 사료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기록에 남아있는 동양 전쟁사를 최대한 비중있게 다뤘다. 전쟁사 초기 입문서로도 더할나위 없는 세계사책이니만큼,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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