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하는 철학자
헤르만 폰 카이저링 지음, 홍문우 옮김 / 파람북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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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출신 철학자가 쓴 여행에세이 「방랑하는 철학자」. 이 책을 받는 순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게.....벼..벽돌책이잖아? 철학자가 세계여행을 하며 쓴 책이라고 하길래, 당연히 여행에세이라고 생각했는데. 으하하하하. 정말 반전도 이런 반전이 있을 줄이야. 내가 살면서 읽은 벽돌책이라고는 「코스모스」나 「사피엔스」 정도인데, 이 책은 앞 두 책보다 페이지가 더 많다. 무려 800페이지!! 


‘철학자의 세계여행 기록’이라고 하길래 당연히 뒤에 있는 단어 ‘세계여행’이 메인이라 생각했는데ㅋㅋㅋㅋ으하하하. 앞 단어 ‘철학자’가 메인이었다. 정말 진짜 와. 철학책은 읽어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보니, 와. 순간 당황했지만, 읽었다. 다 읽고야 말았다. 벽돌책에다가 철학책이라서 솔직히 조금 겁났다. 어려울까봐. 웬걸? 의외로 술술 읽혔다. 뭐, 간혹 흐름이 끊겨서 위험한 순간도 있긴 했지만, 완독 성공!  이렇게 내 책장엔 벽돌책이 또 하나가 늘어난건가. 하하하.

나는 오래전부터 혼자 지질학을 공부했다. 그러다 만난 사람들의 개성을 파고들면서 그들에 관한 이야기가 차곡차곡 담긴 책을 읽어도 보았다. 그러나 흥미진진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지금이야말로 세계를 한 바퀴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더욱 안달이 났다. 분명 호기심 때문은 아니다. 나는 ‘볼 만한 재미’가 있다는 곳은 싫다. 절실히 원하는 곳이 아니니까 별로 내키지 않는다. 내 기질에 맞거나 근본적으로 진지하게 접근할 만한 특별한 문제도 없다.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수도원에 들어가는 많은 사람이 그랬겠지만 나 자신부터 알고 싶다. p 017

저자는 지금의 에스토니아 땅인 러시아 제국령 리보니아에서 태어난 독일의 철학자 헤르판 폰 카이저링. 무려 금수저출신이다. 원래 전공은 지질학. 지질학 박사학위를 딴 사람인데, 갑자기 철학자가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 저자가 왜(!) 바로 철학을 공부안하고, 지질학을 먼저 공부했는지 이해가 안될정도로, 정말 철학계에 딱 맞는 인간상이랄까. 아 물론 내가 철학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왠지 그런 생각이 든달까? 


저자의 세계여행 시작은 ‘실론’이다. 실론이 대체 어디지? 내가 아는 실론은 ‘실론티’ 밖에 없는데… 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실론티의 그 실론이었다. 실론의 현재 이름은 ‘스리랑카’. 

저자가 세계여행을 시작한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던 시기였다. 당시 실론은 영국 자치령이었고, 저자는 유럽권에 위치한 독일의 철학자였다. 저자 입장에서 동쪽으로 떠나는 첫 세계여행이니, 아예 모르는 나라보다는 유럽 국가 식민지를 가는 것이 쉬웠을테다.


욕망과 성취! 이 둘이 제대로 어울린다고 모든 문제가 풀릴까? 어째서 위인들은 기후가 혹독하지 않은 지역에서 등장했을까? 모든 것이 나타난 곳에서는 더 찾을 것이 없다. 탐구자가 아닌 한 누구도 궁극의 진실을 찾지 않는다. 의지는 모든 것을 갖춰 아쉬울 것 없는 곳에서 솟구치지 않는다. 영웅적 행위는 한가한 데에서 나오지 않는다. 모든 가능성이 실현되는 곳에서 어떤 이상적 관념도 살아남지 않는다. p 052

열대의 독특함은 너무 낯설다. 열대에서는 상상력도 다른 것들처럼 식물처럼 움직인다. 사실, 열대에서 경이로운 꽃이 핀다. 마치 신들과 얽힌 민중 신화처럼, 시인의 가슴에서 무르익은 서정처럼, 야성의 환상을 보여주며 향기롭게 타오른다. 그러나 제아무리 아름다워도 ‘자연계’ 속에서만 벌어지는 창조다. 영적 ‘깊이’라는 독특한 원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정신으로 재창조되지 않는다. 제아무리 화려해도 저절로 높아지는 영성 같은 것은 없다. 주어진 틀을 과감하게 뛰어넘는 인간만 거기에 이른다. 하지만 열대 사람은 이렇게 노력할 기회가 없다. 모든 것이 자연발생적이라 그렇다. 불가능한 것을 탐내는 동기와 추진력이 부족하다. 그 의식은 무척 빈곤할 수밖에 없다. 의식이란 자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모든 것이 자연스레 저절로 벌어지는 곳에서 그럴 필요가 있을까? 열대사람들이 과연 사랑을 알기나 할까? 이들은 서양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을 상상에만 기댄다. 욕망이 쾌락보다 우선이고 관념이 현실을 앞지른다. 이런 곳이라 경이로운 생장은 욕망과 성취의 거리도 없어질 만큼 풍성하고 따뜻하며 아름답다. p 052

당시 세계는 서구 우월주의로 만연했다. 그들에게 아시아는 미개한 지역이었다. 이 책의 저자 헤르만 폰 카이저링도 그랬다. 그는 철학자이기 전에 유럽사람이었다. 

스리랑카는 유럽과는 달리 뜨거운 열대 지역이다. 저자는 이런 열대기후와 날씨 등을 토대로 서구와 비교하면서, 열대지역의 문명 발달이나 그들의 가치관을 분석했다. 어찌보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이 책의 저자는 유발 하라리와는 달랐다. 헤르만 폰 카이저링은 세계여행 기록 곳곳에서 서구 우월주의를 내비쳤다. 어쩔수 없는 시대적 한계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을 땐 이런 한계를 잠시 내려놔야 한다. 그러면 보인다. 

이 책이 서구인의 눈으로 본 동양의 이색적인 풍경이 아니라, 철학자의 눈으로 본 동양의 정신세계를 고찰한 책이란 것을.

붓다의 현상학은 분명한 진리다. 붓다의 연상학은 그 어느 시대의 식물론보다 정확하다. 식물의 삶이 모든 삶을 대표하는 만큼 붓다는 인간에 대해서도 진리를 말했다. 내용도 풍부하다. 모든 기본 문제가 인간의 가장 고상한 문제와 마찬가지로 식물 속에서 완벽하게 벌어지고 풀이된다. 아무튼 식물을 통해 인간을 정의하니 조금 거북하다. 그렇게 하면 인간을 왜곡하지는 않지만 고유의 안간성을 설명하지도 않는다. 원칙적으로 식물과 비슷함을 보여주면서도 어떻게 다른지 따지지 않는다. 붓다의 이론을 들여다보면 그가 인간을 종종 식물로 바꾸고 싶어 하지 않을까 싶다. 정말 그는 그렇게 했다. 붓다의 이론은 모든 생명체의 공통점을 속속들이 모방했다. 그 추종자들은 이런 생명 공동체의 방향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불교의 수동성은 식물과 비슷하다. p 055

불교 승려들의 수준은 매우 높다. 지성의 수준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수준이 높다. 인품도 기독교도보다 낫다. 인자하며 지식에 관련된 것에 호방하다. 사람들을 반긴다. 기독교 사제도 그만하다고 주장하기 어려울 만큼 초연하다. 이는 불교가 신도들에게 완전히 무사무욕을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해 사는 것보다 타인을 위해 사는 것이 이론적으로야 훌륭하다. 하지만 실제로 적극적 이웃 사랑은 수준 높은 정신에 이르지는 못했다. 되레 야박해지기나 했다. 타인에게 닦달이나 했지 지배욕을 버린 사람은 극히 드물다. 사람들을 향상시키고 싶다는 사람들이 막상 얼마나 요령부득이던가! 선교사들은 얼마나 가리는 것이 많고! 선교사들의 심리는 단순하다. ‘자기 관점을 타인에게 씌운다.’ 사실상 제한된 행동을 한다. 이렇게 계속 직무에 따라 움직이다 보면 어느덧 편협해 진다. p 061

이곳 사찰의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든다. 이렇듯 편한 곳을 어디에서 다시 찾을까. 그런데 지금 어느 때보다도 불교는 유럽 사람들에게 쉽게 통할 종교가 아니다. 실론 사람들 틈에서 그들만큼 적극 실천하려면 유럽 사람과 완전히 다른 정신이 필요하다. 유럽 사람들은 ‘현상’을 절대시하면서 개인의 구원만 바라는 생활에만 투자하다 보니 금세 비루한 이기주의에 빠졌다. 온정은 야생동물 보호 조치 비슷하게 싱거워졌다. 유럽 사람들은 열반을 동경하면서 각성은 고사하고 쓸데없이 부실해지기나 했다. p 063

기독교는 원래 빈민의 종교였다. 기본 원리부터 특권층과 대립했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 편에 선 입장에서 행복한 사람들에게 원한이 많은 사람들 편에 섰다. 그뿐만 아니라 어느 쪽을 지향하든 불화의 씨를 품고 있었다. 평화에 가장 탁월한 종교가 가장 불화를 키웠다는 사실이야말로 매우 의미심장하다. 예수의 정신이 아무리 뛰어났떠라도 그것으로 세속의 문제를 지배하지 못했다. p 066

저자는 동양 불교를 마주하고, 분석한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서구 문명의 가치관인 기독교를 떠올린다. 분명 두 종교의 커다란 지향점은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기독교가 그렇게 타락했는지를 분석한다. 이게 이 책의 묘미다. 분명 이 책을 읽다보면 서구 우월주의가 자주 나타나는데, 진짜 딱 그만큼 서구문명도 비판한다. 

이런 이유일 것이다. 헤르만 폰 카이저링이 자신이 속한 유럽권에서도 비판받은 이유가.


이렇게 볼 때 낙원에 대한 관념은 진실하다. 만약 우리가 나쁜 의도로 행동하지만 않는다면 나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유럽 사람은 어떤 낙원도 만들 수 없다. 우리는 사랑의 미덕을 확신하면서도 동물적 본능이 너무 강하다. 그러나 불교와 힌두교의 세계에는 여러 면에서 낙원의 분위기가 살아 있다. 종교가 사람들에게 동물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금하니까 동물도 사람에게 적개심을 보이지 않는다. 동물은 인간을 존중한다. 어떤 인종이 다른 인종을 존중하듯 모두를 위한 자리가 있다고 가르친다. p 102

안내자는 타밀족 출신이라 내가 입장하는 사원마다 들어가지 못했다. 입장 허가를 받지 못했다. 그는 기독교도인 데다가 최하층민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첫눈에 그의 신분을 알아본다. 힌두교도는 누구든 얼마나 능란한 거짓말을 하든 위장하든 아니든 사람의 계급을 즉시 알아내는 특이한 능력이 있다. (…) 서로 다른 계층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누구와 왕래하고 누구와 함께 식사할 것인지가 매우 중요하다. 나쁜 사람과 사귀는 것은 세균만큼 감염의 위험이 크다. 정신도 감염된다. 심리는 놀랄 만큼 쉽게 오염된다. p 138

난처한 일이다. 우선 끝없이 자기자신을 타인과 차별화하면서 가벼운 병에도 죽어버린다. 인도에서 차별화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계급 제도는 극히 복잡해졌다. 인도 주민들은 늘 걱정하며 살아간다. 매번 편견이 길을 가로막는다.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끝없는 걱정도 낳았다. 유럽에서는 페스트가 만연하던 시대에서나 볼 법한 엄격한 처방과 규제를 항상 염려해야 한다. 

편견을 뿌리 뽑기란 어렵지 않다. 겪어보거나 조금 더 이해하면 금세 사라진다. 유럽에선 천 년 이상 일상에 자리 잡았던 대부분의 편견도 단 한 세기 만에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영혼이 우세한 인도 같은 나라에서는 모든 현실이 상상력에 좌우된다. 인도에서 일상화한 완고한 계급 제도도 편견만 사라진다면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너무 해묵은 편견이라 온실 속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 최근까지 인도를 떠난 모든 브라만 계급은 해외에서 자기 계급을 잃었다. p139

책을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눈으로 본 불교와 힌두교의 모습은 어떻게 그려졌을까. 그저 유토피아로만 봤을까? 그 안에 있는 계급 불평등은 큰 문제는 아니었을까? 아니면 저자 스스로 언급한 ‘인도 같은 나라에서는 모든 현실이 상상력에 좌우’되기 때문에, 그 ‘상상력’으로 인해 생겨난 계급 불평등이니, 이는 그저 서구보다 못한 아시아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을까?

생애 첫 철학책(?)이라 그런가, 지금까지 읽어본 최고의 벽돌책(?)이라 그런가 읽는 내내 온갖 생각들이 머리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 책 자체가 철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라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내가 읽고 있는 이 책이 여행에세이인가 철학책인가, 아니면 두 종류를 짬뽕한 책인가! 이 책의 정체성에 대한 고찰은 덤이다. 뭐, 이 책의 저자는 세계여행을 하기 전부터 에세이스트로도 조금 유명했다고 하니, 여행에세이가 맞...맞겠지? 확실한 건 이 책은 지금까지 읽었던 여행에세이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점이다. 철학자가 세계여행을 하며 쓴 책이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 책을 읽으면 알게 될 것이다. 여행을 함에 있어서, 장소를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이 이토록 다양할 수도 있구나! 라는 사실을. 플러스로 서구우월주의가 만연한 그 때, 동양과 동양 종교를 이토록 폭넓게 이해한 유럽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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