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혁신 - 혁신을 원한다면 반역자가 되라
이주희 지음 / EBS BOOKS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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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책을 즐겨 읽는다. 아마 꽤 어렸을 때부터 역사책을 즐겨 읽었던 것 같다. 처음 역사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눈 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것만 같았다. 역사책 속에는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무궁무진했으니까.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있기 전에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었고, 그 전에는 고려가 있었고, 이 땅에 많은 나라가 세워졌다가 사라진 것이 신기했다. 그러다보니 정말 장르를 불문하고 많은 역사를 테마로 하는 책은 거의 다 읽었던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한반도 역사의 흐름을 조금이나마 알게되었고, 유적지 답사도 즐겨하게 되고, 역사속에 있던 굵직굵직한 사건들도 누군가 물어보면 즉답할 정도가 된 시점부터 역사책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역사책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나침반이 되어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땅에서 일어난 ‘빛나거나 찬란한’ 역사를 좋아한다. 하지만, 역사가 삶의 ‘나침반’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찬란한 역사보다는 ‘치욕적이거나, 발칙하거나, 실패한’ 역사를 돌아봐야한다. 왜? 우리가 알고 있는, 빛나거나 찬란했던 역사가 생길 수 있었던 바탕에는 그 전에 있었던 ‘치욕적이거나 발칙하고, 실패한’ 역사가 밑거름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실패라는 밑거름으로 인해 무언가가 변화되었고, 그 변화로 인해 우리가 아는 찬란한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만약 실패한 역사는 보지못하고, 찬란한 역사만 보고 그 속에서 안주하게 되면 그 끝은 다시 치욕적이고 실패한 역사를 마주하게 된다.



오늘 포스팅하는 이 책 『강제혁신』은 역사의 실패 속에서 위기의식을 느끼고, 찬란한 역사를 되찾았던 사례와 되찾은 찬란한 역사에 안주하여 다시 실패하고만 역사를 조명한다. ‘화약혁명’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우리는 국사시간에 19세기는 ‘서세동점’의 시기라고 배운다. ‘서세동점’ 서쪽의 세력이 점점 동쪽으로 밀려와 동쪽을 지배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서구세력이 동아시아로 넘어와서, 그 세력권을 넓힌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19세기에 이르러 청나라는 영국에게 속된말로 쥐어터졌다. 일본은 미국에게, 조선은 프랑스와 미국에게 얻어맞았다. 어째서 19세기 동아시아는 서구세력에세 손 쓸 힘도 없이 밀려날 수 밖에 없었을까?



이 책의 저자는 그 이유를 바로 ‘화약혁명’에서 찾는다.



서세동점으로부터 불과 3백여년 전만해도 ‘화약’ 사용에 있어서 서양이나 동양이나 비슷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아니, 오히려 동양이 더 앞질러 있었다. 처음 화약을 발명한 곳은 다름아닌 중국이었고, 화약무기를 처음 만든 곳도 중국이었으니까. 조금 더 들어가면 1405년 명나라 환관 정화의 대원정에서는 정화가 탄 배에 이미 화약무기인 대포가 14개나 있었다. 전국시대로 인해 난세였던 16세기 일본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화승총을 보유한 국가였으며, 임진/정유재란 당시 조선의 이순신 장군은 여러 해전에서 화약무기인 화포를 주력무기로 사용했다.



이토록 동아시아에서도 화약 혁명이 활발하게 일어났었는데, 왜 불과 2~3백 년만에 화약 혁명이 사그라들게 되었을까? 저자는 이 책에서 이렇게 물묻는다.




동아시아에서는 왜 화약혁명이 정체되었는가?

동양의 권력자들은 왜 화약혁명을 지속하지 않았는가?

- 강제혁신 p 166




1. 동아시아, 위기의식을 느끼다 : 화약혁명의 시작


<일본>


1943년, 때는 다이묘들끼리 치고받던 중이던 전국시대. 다네가시마에 중국인들이 탄 배가 표류했다. 그 배안에는 조총이 있었고, 포르투갈인도 있었다. 그렇게 일본에 처음으로 조총이 들어왔다. 일본 대장장이들은 조총을 분해하여 부속품을 본 뜨며, 복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조총 생산의 시작이었다. 이 조총에 눈독을 들이는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그 유명한 ‘3인의 천하인’ 중 첫 타자 ‘오다 노부나가’다. 



당시 다이묘들은 본인들의 토지 안에 사는 농민들을 군인으로 동원했다. 물론 무상으로. 무엇보다 ‘농민=군인’ 이다보니 전쟁은 언제나 농한기에만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농번기에는 농사를 지어야 한 해 동안 먹을 식량을 비축해야하니까. 이건 당시의 상식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달랐다. 그는 일반적인 다이묘들과 다르게(!) 월급을 주는 군대를 운영하고 있었다. 덕분에 농번기/농한기 가릴 것 없이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 월급을 받는 군인들은 당연히 농사에서 자유로웠다. 결과적으로 오다와 싸우는 다이묘들은 이기든 지든 한 해 농사를 망쳤고, 그로 인한 보릿고개를 비롯한 여러 부작용이 극심했다. 행여나 오다와 전투에서 이겼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엄청난 손실을 감내해야했던 것이다.



기존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오다는 매우 비겁해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득권의 관점이다.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는 오다에게 기득권의 상식은 쓰레기일 뿐이다. 오다는 자신에게 이득이 되거나, 혹은 효율적이라 생각하는 것들은 스스럼없이 자기것으로 만들었다. 조총도 그 중 하나다. 자신의 군대를 조금 더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 그렇게 오다는 대규모 조총부대를 꾸려나갔다.



발사 속도가 느린 초창기 화승총에 약점을 보완하려면 대규모로 부대를 운용해야 효과가 있다. 그런 점에서 노부나가가 대규모 조총 부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일본도 본격적인 화약혁며으이 단계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부대가 실력을 발휘할 기회는 난세이니만큼 곧 찾아왔다. 일본 동부 지역의 최대 세력이었던 다케다 가문과의 결전, 나가시노 전투다. p 181



노부나가는 일본에서는 볼 수 없던 대규모 조총 부대를 전투에 동원했다. 기록에 따라 차이를 보이지만 최소한 3,000명 이상의 조총병이 집단으로 사격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전투에서 패한 다케다 가문의 기록에도 이 부분은 분명히 언급되는데, 전투 이후 다케다 가문은 보병인 ‘아시가루’에게 장창이 아닌 조총을 훈련시키라는 지침을 잇달아 내리고 있다. (…) 일본의 다이묘들도 조총의 위력과 조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눈으로 확인하자, 조총 토입에 그야말로 사활을 걸게 되었다. 일본 열도에 ‘조총이냐 파멸이냐’라는 위기의식이 번지기 시작했다. p 185




 




<조선>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군은 놀랍게도 기병이 전투의 주력이었다. 하지만 그리 놀라울 일도 아니다. 조선 전기에 조선이 제일 많이 싸웠던 적은, 북방의 유목민(당시에는 여진족)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의 기병은 그 위력이 상당했다. 1583년 여진족 ‘이탕개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신립이 500여의 기병과 함께 적진으로 돌진해 여진족을 물리치기도 했다. 조선의 기병은 가히 고구려 철기병이 후예라 할 만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도 신립은 같은 방식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상대가 여진족이든 왜적이든 그동안 조선군이 항상 승리해오던 방식이기 때문이다. 전쟁 발발과 함께 방어군을 이끌고 남하한 신립은 잘 알려진 대로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일본군과 대결한다. 조령에서 유리한 지형을 기반으로 일본군을 상대하지 않고, 탄금대라는 평야를 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다. 하지만 어쩌면 신립으로서는 너무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국가의 운명을 건 전투에서 가장 잘하는 전투방식을 택했을 뿐이니까. 문제는 이번 적군은 지금까지 상대하던 여진족 군대나 노략질이 목적인 왜구들이 아니었다. 오랜 전란에 단련된 정규군인데다 화약 무기인 조총까지 갖춘 군대였다. p 189



신립과 조선군은 마치 나가시노 전투의 다케다군처럼 총격 앞에 장렬하게 전멸하고 만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선군이 이런 방식을 고수하다 패배한 것은 탄금대 전투만이 아니었다. 이 전투 이후에도 조선군은 임진강 전투에서, 또 혜정창 전투에서 기병 돌격을 거듭하다 결국 몰살당하고는 했다. 자기가 가장 잘하는 방식을 포기하는 것은 이처럼 어려운 법이다. p 190





조선은 수차례 조총으로 인한 참혹한 패배를 거듭하고 나서야 비로소 전투방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때마침 조선으로 귀화한 항왜들이 조총 제작 및 사용법을 전수해주며 이를 도왔다. 대표적인 항왜가 바로 모하당 김충선. 뭐, 임란 이후에 조선정부가 항왜를 어떻게 내쳤는지를 생각해보면 벌써부터 화딱지가 나긴 하지만,  항왜들이 미래를 알리 없으니 뭐. 여튼 그들 덕분에 조선군은 명실공히 화약군대로 다시 태어났다.


조선시대 충청도 속오군의 병적기록부를 보면 1600년대 충청도 병사 중 76.5퍼센트가 조총이 주특기라고 적혀있을 정도로 조총 무장비율이 높았다. 또 순조 초기의 기록을 통해서도 지방군인 속오군을 제외하고 중앙군인 오군영의 조총만 따져도 4만 5,000자루에 탄환도 575만 개에 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심지어 조선군의 조총 실력은 곧 동아시아 최고 수준을 자랑하게 되었다. 원래 발사 무기인 화을 주력으로 사용하던 전통 덕분인지 도입 반세기만에 발사 속도나 정확도에서 주변국을 압도하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명나라나 청나라가 조선에 파병을 요청할 경우 항상 조총병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조선군의 명중률이 명군이나 청군에 비해 몇 배나 높았기 때문이다. p 194




<중국>


전쟁의 위기 속에 화약을 받아들인 것은 중국도 동일했다. 때는 지는 해 명나라와 뜨는 해 후금의 40년 전쟁 중에 시작되었다. 후금의 누르하치는 명나라군을 보이는 족족 섬멸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고전했던 전투가 있었으니, 바로 명나라 장수 원승환이 방어하던 영원성 전투다. 원승환은 화약무기인 홍이포라는 대포를 사용하여 누르하치의 기세를 꺾어버렸다. 3일동안 누르하치가 직접 출전하여 싸웠지만, 영원성을 함락할 수 없었다. 결국 후금은 후퇴했고, 이후 누르하치는 사망했다.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후금의 칸이 된 홍타이지는 명나라가 사용한 화약무기의 가치를 알았다. 하여 박해하던 한족(명나라 백성)들을 우대하며 화약기술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화약무기로 중무장하게 된 후금은, 훗날 조선으로 쳐들어오니 바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다.




2. 동아시아의 화약혁명, 길을 잃어버리다.


<일본>


오랜 전국시대가 끝나고, 최후의 천하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를 평정했다. 이후 도쿠가와는 여러 제도를 반포했다. ‘무가제법도’와 ‘일국일령성’, ‘쇄국령’ 등. 목적은 다이묘에 대한 막부의 통제력을 높이고, 다이묘들의 군사력을 축소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다이묘들의 하극상을 금한 것이다. 쇄국령도 같은 맥락이다. 해외 교류가 빈번하게 되면 새로운 사상이 들어오게 되고, 새로운 사상은 기존 질서를 흔들고 이는 다시금 하극상을 불러일으킨다는 의미다. 뿐만 아니라 화약무기도 금지되었다. 아무리 무서운 무사 계급이라도 농민이 총알 한 방만 쏘면 끝장나는, 이 역시 하극상이기 때문이다.


화약무기가 처음 일본에 들어왔을 때는 센고쿠시대라는 무한 경쟁의 시기였기에 무사들도 혐오감을 접고 적극적으로 조총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제 경쟁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되었으니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조총은 당연히 금지해야 할 혐오스러운 물건이 되었다. 일본에서 조총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p 213



<중국>


청나라가 대륙을 장악한 후, 강희-옹정-건륭 연간 오랜 평화가 찾아왔다. 그렇게 그들은 평화에 안주했다. 임진왜란 발발전의 조선 전기처럼.


청나라 조정은 일본의 막부처럼 공식적으로 화약 무기의 사용을 금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삼번의 난이 진압된 이후 이른바 강희, 옹정, 건륭 연간의 오랜 평화가 찾아오자 화약 무기의 필요성은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간혹 청의 패권에 도전하는 유목민들이 있기는 했지만, 대청제국에 이들을 토벌하는 일은 황제의 영광을 보여주는 화려한 퍼포먼스에 불과했다. p 218



심지어 청나라는 앞선 명나라보다도 안보상의 위협이 적었다. 명나라는 그나마 북로남왜라고 해서 북방의 유목민족과 남방의 왜구가 항상 중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리장성 너머의 유목지대에서 출발한 청나라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지적한 대로 만리장성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북방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마침 일본도 안정적인 에도 막부의 시대였던지라 왜구에 대한 걱정도 없었다. 한마디로 어떤 안보상의 위협도 없는 완벽한 평화가 100년 넘게 이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청나라의 지배계급이 유목 전사의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화약 무기에 매달릴 이유는 전혀 없었다. p 220




< 조선>


임진/정유재란 이후 연이어 정묘/병자호란이 터졌다. 큰 전쟁을 연이어 맞닥드렸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의 국방력은 더 후퇴한다. 그리고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에 사대하는데 모든 힘을 쏟는다. 화약혁명? 화약은 커녕 오로지 ‘주자학’만 부르짖으며, 여러 방면으로 조선의 발전은 멈춰버렸다. 그야말로 흑역사가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3. 멈춰버린 동아시아의 화약혁명, 그리고 서세동점의 시작


모든 전쟁이 멈추고, 오랜기간 평화가 찾아오면서 동아시아의 화약혁명은 그렇게 멈췄다. 반면에 서양의 화약혁명은 지속해서 발전되어갔다. 서양은 여러나라가 국경을 접하고 있다보니 세력 넓히기를 비롯하여 왕위 다툼 등 전투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서양의 화약무기는 유례없을 정도로 발전했다.


 


결과적으로 17세기 이후 동아시아에서 화약 무기는 잊히거나 정체되어갔다. 당연히 홍이포나 조총의 뒤를 잇는 신무기 개발은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 되었다. 신무기는커녕 가지고 있던 홍이포나 조총조차 창고에서 녹이 슬어갔다. 급기야 19세기 일본 근해에서의 침몰 사고로 일본 땅에 상륙한 미국 선원은 일본성에 실제 대포는 없고 대포를 그린 큰 걸개그림만이 걸려있는 것을 목격할 지경이었다. 생존경쟁이 사라지고, 위기의식이 사라지자 화약혁명도 함께 사라진 것이다.



17세기 이후의 군사혁신이 동아시아에서 중단되고, 유럽에서 계속된 원인은 결국 위기의식의 차이다. 독약을 항상 목에 걸고 다녀야 할 정도로 절박한 위기 의식 속에 살아가는 자(프로이센 프리드리히 2세)와 전쟁을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 정도로 여겨도 되는 자(청나라 건륭제)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생존경쟁의 치열한 정도가 결국 위기의식의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유럽과 같이 비슷한 규모와 실력을 갖춘 국가들이 경쟁하는 곳에서는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강제력이 존재했다. 이웃나라가 언제 공격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군사적 혁신을 거부하는 것은 곧바로 파멸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생존경쟁이 위기의식을 낳고 위기의식이 혁신을 강제한 것이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청나라의 패권은 압도적이었고, 조선이나 일본도 자국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오랜 평화를 누렸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권력의 이익에 반하는 혁신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혁신이라는 수레바퀴는 생존경쟁과 위기의식이라는 강제력 없이는 앞으로 굴러갈 수 없기 때문이다. p 222



서양보다 시작이 앞섰던 동양의 화약혁명. 하지만 위기의식이 사라지면서 혁명의 불씨도 사라졌다. 그렇게 2~300년이 흐른 후 우리가 배운 서세동점이 시작되었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것은 다름아닌 ‘위기의식’ 이다. 이는 비단 역사의 흐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잊지 말아야한다. ‘위기의식’을 갖고 살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앞으로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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