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AK커뮤니케이션즈에서 출판된 서브컬쳐 라인의 세계사책 「세계의 악녀 이야기」를 읽었다. 내 성향상 동/서양을 막론하여 역사책을 자주 읽다보니, 이런식으로 악녀를 주제로 한 책이나 혹은 범죄자를 주제로 한 책 등 하나의 테마를 주제로 한 세계사책도 꽤 많이 읽은 편이다. 고로 이번에 읽은 「세계의 악녀 이야기」책도 그리 생소한 편은 아니었다. 실제로 내 책장에는 세계사적으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여성들에 대한 책이나, 이번 책처럼 ‘악녀’를 테마로 한 책도 여러 권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은 이유는, 이 책의 저자는 어떤 관점으로 ‘악녀’를 골랐고, 어떤 관점으로 책을 썼는가 궁금해서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간과했던 사실이 있었다. 이 책의 저자가 일본인 남성이라는 것, 이 책이 쓰여진 시기가 1964년라는 점이다. 이 두 가지를 염두하고 읽었어야 했는데, 난 그러지 못했다. 이 두 사실을 간과하고 그저 이 책을 역사책으로 인지하고 읽었기에, 책에서 오는 위화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책을 읽다보면 집필방식은 차지하고서라도, 지금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진 내용도 너무 뚜렷하게 사실인냥 쓰여있고, 저자의 편향된 역사관이 너무 대놓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역사더쿠로서 얼마나 당황했던지!!
저자 시부사와가 생각했던 ‘악녀’의 의미는 ‘문고판 후기’의 내용이나 작품 속에서 간혹 나오는 내용을 통해 막연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예컨데 시부사와는 악녀의 정의에 대해 연연할 필요는 없다고 하면서도 ‘미모와 권력을 가지고 악의 극한 까지 간 여성, 혹은 애욕과 범죄로 스스로를 망가뜨린 여성’을 악녀로 이해하면 된다고, 어느정도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고 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을 본다면 작가도 ‘악녀’가 무엇인지, 명확한 기준을 세워두고 구체적인 선정 작업에 임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통상적인 선과 악의 개념에 바탕을 두었다기 보다는 강렬한 임팩트와 농밀함, 특이함이나 비극성 따위가 압도적일 경우 별점이 진하게 채워진 느낌이 든다.
서점에 진열된 수많은 책들 중 고맙게도 이 책을 선택해주신 독자분들에게 각별한 인연을 느끼며, 역자로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 첫째, 이 책의 제목은 『세계의 악녀 이야기』지만, 결코 권선징악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악녀의 최후가 이렇게 비참하니 부디 그렇게 살지 말라는 고리타분한 훈계도 없으며, 선이 악을 이기는 구도도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동서양의 실존 인물들의 삶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에세이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하고 밋밋한 역사서와는 결이 다른 작품이다. 초판이 나온 때가 1964년이었던 만큼, 최근에 이미 정정되었거나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역사적 사실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 위화감을 느끼거나 시시비비에 골몰하기 보다는, 역사적 테마를 다루는 ‘시부사와 스타일’을 만끽하는 편이 좀 더 생산적이라고 여겨진다. 시부사와는 매력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결고 흥미 본위에 머무르지 않고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는 유미주의적 관점에서 약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이다고 느껴졌다. p 221~223 (번역자 후기)
다 읽고 나서야 이 책이 1960년대에, 그것도 일본남성의 손에 쓰여진 글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뭐, 1960년대와 저자가 일본인 남성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뭐. 이 책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그저 미리 인지하지 못하고 읽었던 내 잘못일 뿐. 하다못해, 이 책의 제일 마지막에 실려있는 번역가 김수희님의 후기라도 먼저 읽어봤더라면, 이 책을 이해하는데 한결 수월하지 않았을까 싶은 그런 마음이랄까.
때마침!!! 이 책 뒷편에 실려 있는 번역가 김수희님의 번역 후기글이 내가 느낀 위화감이 무엇인지와, 이 책을 읽기 전에 염두해야할 부분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짚어주었다.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이 책의 중쇄부터는 번역자의 후기를 이 책의 앞 장에 실어주었으면 한다. 그럼 적어도 나처럼 이 책을 역사서로 인지하고 읽는 사람은 없을테니^_T.
뭐, 한마디로 이 책은 역사적인 관점으로 읽을 세계사책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을 역사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한 ‘2차 창작물’ 또는 ‘설정집(자료집)’이라고 하면 그 이야기는 달라진다. 역사책이 아닌, ‘2차장작물’ 또는 ‘설정집(자료집)’으로써는 추천할 수 있다는 이야기!
이 책을 2차 창작물이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예컨데 이런 느낌이다. 역사서인 진수의 『삼국지』와 어디까지나 ‘소설’인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같달까? 『삼국지연의』가 아무리 재미있다 한들, 그 누구도 『삼국지연의』를 역사서로는 보지 않으니까(아! 생각해보니 삼국지연의를 정사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긴 있었구나^^). 거기다 이 책의 집필 방식도 역사책 보다는, 에세이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책 속에 짙게 깔린 저자(일본인) 특유의 심미관과 정신사적 관점까지 더해져서, 누가뭐래도 이 책은 역사서보다는 2차 창작물이라는 색채가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중세시대 여성에 대한 2차 창작물을 집필함에 있어서도, 배경습득이나 캐릭터 모티브를 얻기 위한 설정집 또는 자료집으로 봐도 나쁘지 않은 책이다. 이 책을 역사서로 볼 때는 커다란 단점 중 하나였던, 저자의 ‘악녀’의 기준이 ‘2차 창작물 설정집(자료집)’으로 볼 때는 매우 큰 장점이 때문이다. 저자가 고른 악녀 기준은 명확한 선과 악이 아니라, 번역자의 말대로 ‘특이성’에 있다. 이 ‘특이성’이야 말로 2차 창작물의 주인공으로서 손색이 없다.
저자가 악녀로 선택한 기준인 ‘특이성’을 기준으로 이 책에 실린 여성들의 면면을 보자면, 일부는 역사적으로 꽤 유명한 인물인데 반해(정치사적으로 보았을 때), 일부는 생각보다 알려지지 않는 여성들도 있다. 이렇게 잘 알려지지 않은 중세의 여성들을 주인공 또는 모티브 삼아 2차 창작물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요즘 유행하는 웹소설을 보면 ‘로맨스판타지’ 장르가 유행하니, 이런 장르와 엮으면 필력에 따라 대작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무엇보다 내가 이 책을 흥미롭게 읽었던 이유는, 이 책 속에는 나에게 초면인 여성들이 여럿 있다는 점이다. 내가 지금까지 역사서에서 만난 여성들은 대체적으로 ‘정치사’ 또는 ‘여성인권’에 있어서 어떠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이었는데, 이런 여성들은 저자의 악녀 선정기준에는 아주 현저하게 못미치는(?) 인물들이 대다수였나보다. 그 덕분에 ‘브랭빌리에 후작 부인’ 이라던가, ‘프레디군트와 브룬힐트’ 같이 지극히 초면인 여성들을 이 책 속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
저자가 이 책을 쓰는데 있어서, 정말 선과 악의 기준이 아닌, 본인의 개인적인 이유로 ‘악녀’를 선정했던 것이 나에게는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한마디로 개이득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서^^. 역사적 사실여부는 따로 확인해봐야지. 하하.ㅏㅎ하ㅏ하하.하하.
★이 책의 총평★
이 책은 로맨스판타지 장르의 2차 창작물을 쓰고자 하는 예비 작가님들에게 추천하는 세계사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