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한국현대사 책을 읽었다. 뭐 따지고 보면 현대사에서 중요한 일부 사건들을 다루는 책들은 종종 읽긴 했지만, 이렇게 시간대별로 진행되는 현대사를 통으로 다루는 건 오랜만이다. 무엇보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내 가치관과 이토록 부합하는 현대사책을 읽은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나는 역사책 집필자(또는 교육자)은 전문가 여부를 떠나서 우선 보수나 진보, 한 쪽으로 치우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역사책을 집필하는 사람이 보수나 진보,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한 사건에 대한 ‘공, 과’를 이야기 함에 있어서 의도적으로 ‘공’만 다루거나, 반대로 ‘과’만 다루면서 본인과 같은 성향의 사람들에게 유리한 내용만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불리한 내용은 생략하기 때문이다. 이는 명백한 역사왜곡이다.
그리고 역사책 집필자(또는 교육자)는 기본적으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판적 시각이 없는 사람들은 대체로 겉으로 들어난 역사적 사건만 보고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그 사건의 이면에 있는 시대적 상황이라던가, 그로 인해 희생해야했던 사람들, 혹은 의도적으로 숨겨진 사건들을 직시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읽은 수많은 역사책을 돌아보고 있노라면, 일부 역사책은 내 가치관과 100% 어긋나는 역사책들도 있었다. 예컨대 유사사학자라던가, 이념 또는 사상에 치우쳐서 한 쪽만 바라보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특히 한국현대사 부분은 더 심각하다. 해방 이후 우리 현대사는 유독 이념/사상 갈등으로 인하여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문제는 이념/사상 갈등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놈의 진보와 보수 진영을 나눠서, 옳든 싫든 반대를 위한 반대를 외치는 한국현대사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이렇게 역사책에 대한 내 생각을 길게 써내린 이유는 단 하나다. 이 역사책 『한국현대사 다이제스트100』 에 실려있는 모든 내용은 진보나 보수 어느 한 쪽에 치우쳐있지 않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성향을 가지고 있던 대통령이건, 보수성향을 가지고 있던 대통령이건, 잘한건 잘했고 못한건 못한거라고 아주 따끔하게 이야기 한다.
다만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의 업적을 보면, 초대 대통령 이승만부터 12대 대통령 전두환까지 억압과 폭력, 반칙과 독재가 대다수인지라, 솔직히 책 읽는 내내 고구마 오백만개 먹은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폭력적인 독재를 하는 동안에 잘한 것도 분명히 있었다. 독재자인 그들이 국민을 생각해서 잘했다기 보다는, 본인들이 이득을 위해서, 또는 미국(또는 전 세계)의 눈치를 보느라 그런 경우가 대다수였지만. 이유야 어쨌든 국민에게는 이득으로 돌아온 업적도 있다는 점은 눈 여겨볼만 하다.
반대로 오롯이 국민들이 직접 뽑은 13대 대통령 노태우부터 19대 대통령 박근혜까지 재임기간에도 고구마 오백만게 먹은 듯한 행태가 계속해서 나온건 역사의 모순이라면 모순일까. 아니면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에 그렇게 되는 것일까. 뭐 여튼 그들에게도 ‘공’과 ‘과’가 모두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 역시 그들이 의도한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은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고 있는, 한국사에 대한 체계를 잡고 있는 청소년들에게도 너무나 추천하고 싶다.
지금도 인터넷 곳곳에는 이념/사상에 사로잡혀 온갖 근거없는 소문과 끊임없는 날조로 한국 현대사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이들의 사탕발림에 현혹되어, 우리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기 전에, 이 책으로 하여금 제대로 된 현대사를 알려주었으면 한다.
아래는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새롭게 알게 된 사실, 그리고 과거의 일임에도 현재까지 그 영향이 지속되고 있는 내용들이다.
미군정
해방을 맞은 한국인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당연히 정부를 구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시도가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였다.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가 여운형에게 행정권 인수를 제안했고 여운형이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 조선총독부가 정권을 인계할 대상으로 여운형을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우선 여운형은 당시 조선인들 사이에서 가장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은 난립하며 격렬하게 갈등하고 있던 당시의 이념적 흐름 속에서도 좌익과 우익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모두와 협업했던 실용적인 중도파로서 뛰어난 소통능력과 중재능력을 그가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p 016
해방 이후 미군정이 들어오기 전까지 약 20여일간, 조선총독부에게 직접 행정권을 이양 받아서 한반도의 행정과 치안등을 도맡아서 관리하며 그 어떤 공백이나 혼란을 피할 수 있게 해준 사람이 건국준비위원회의 여운형이었다는 사실을 난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았다. 왜? 내가 학교에서 한국근현대사를 배울 땐 이런 내용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내가 그 때 배웠던 내용은 ‘해방 이후 미군정이 들어왔고, 미군정은 해외에 있던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임시정부 요인들을 개인자격으로 입국하게 했다’,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우리나라 독립에 대해 대비하고 있었다’ 이 정도였다.
놀랍게도 여운형이 조직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전국적인 네트워크가 있었고, 일본이 빠져나가고 미군정이 들어오기 전까지의 20여일간 충분히 국가 체계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여 건준위에게 이양되었던 행정권을 미군정이 가지고 왔다. 자기들이 남한을 관리하겠다며.
하지만 우리가 모두 다 아는 사실은 미군정 치하의 남한 사람들에겐 일제강점기와 다름 없는 지옥이었었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요직을 차지하던 친일파들은, 미군정에서도 요직을 차지했고, 공출도 지속되었으니까. 그 여파로 곳곳에서 여러 항쟁이 일어났고, 제주4.3도 일련의 과정에서 일어난 항쟁이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경제문제에 대한 무능력이었다. 전쟁 말기 일본이 마구잡이로 발행한 막대한 통화량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심화된 상황에서 기업들을 움직이던 일본인 경영자와 기술자들이 귀환하고, 일본제국의 전체 영역으로 이어져있던 원료공급망과 소비망이 38도선 이남 지역으로 축소되어버리면서 산업 전반이 마히상태에 이른 것이 해방 직후의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하지만 미군정은 기업들을 재가동하거나 수요와 공급이 모두 급격히 축소된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p 019
물론 군정 당국도 좀더 나은 행정적 성과를 거두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을 수는 없었고, 그래서 한국인들과 소통을 위한 시도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영어를 할 줄 아는 한국인들’을 찾아서 자문을 구하고 역할을 맡기는 쉬운 방식이었고, 친일적인 지식인들의 입장에 기울어진 관점과 인식을 가지게 되는 문제로 연결되었다. 식민통치 기간에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이 모두 친일파였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들이 조선총독부의 통치에 대해 덜 비판적이고 대중의 문노와 요구에 대해서는 덜 민감했던 것이 당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미군 인력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각 지역의 치안유지를 위해 일본 순사 출신들을 그대로 채용해 경찰로 활용한 것은 그런 과정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으며, 가장 큰 대중의 반감을 산 요인이 되기도 했다. p 020
제대로 통치를 하지 못할거였으면, 다시 건준위에게 행정권을 넘겼으면 좋았을것을. 미군정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사람이 남한을 통치하면 좋겠다는 욕심을 내려놓지 못했기에, 그 욕심으로 인한 피해는 남한의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모스크바 3상 회의 합의 내용이 국내로 전해진 것은 회의가 끝난 다음 날인 12월 27일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내용은 사실과 미묘하게 달랐는데, ‘미국은 한국의 즉시 독립을 주장했지만, 소련이 반대하고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몇 년 간 꾸준히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도 미국이고 신탁통치 기간이 상대적으로 길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미국이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반대로 보도된 셈이기도 했다. 또한 신탁통치가 이미 실시되고 있던 군정통치보다 억압적이거나 더 지속적인 것이라고 볼 이유도 없었고, 그것이 독립과 대비되는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미국은 독립,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한다고 전해진 이상 ‘즉시 독립’에 찬성하고, ‘신탁통치’에반대하는 것이 대충의 일반적인 정서일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동시에 ‘소련 반대’로까지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p 023
며칠 뒤인 1946년 1월 2일에 회의의 결과에 대해 보다 자세한 정보를 접한 좌익 계열이 ‘모스크바 3상 회의 지지’로 돌아서자 상황이 급변했다. 미군정의 눈치를 보면서 입장표명에 소극적이던 이승만이 오히려 ‘반탁’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좌익과의 대립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김구와 이승만이 한 목소리를 외친 ‘반탁’은 대중을 격동시켰고, 분노한 군중은 ‘3상회의 결정 지지’를 표명한 정치인들에게 테러 공격을 가하거나 그런 논조를 보인 언론사 건물을 파괴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분위기에서 자초지종을 따지는 것은 불가능했고, ‘반탁’을 외쳐야만 애국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p 024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또 다른 사실 하나 더, 바로 ‘모스크바 3상 회의’다.
뭐 정확히 말하자면 학교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에 대해 당연히 배웠고, 미국이 독립을 이야기했으며 그에 따라 우익진영은 반탁을 주장했다는 것도 당연히 배웠다. 그런데 그건 결과만 배운 것이었을뿐, 알맹이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실제로 신탁통치를 오랫동안 주장한 건 미국이었다는 것과, 모스크바 3상 회의에 대한 내용이 한반도에 전달되는 과정에서 왜곡이 있었다는 것. 무엇보다 신탁통치라고 해서 일제강점기마냥 폭력적인것도 아니었다는 것. 내가 배웠던 학교 근현대사 교육에선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생략되어 있던 것이다.
다시금 느낀다. 역사를 교육하는 사람이나 교육받는 사람은 항상 역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그래야만 크나큰 역사적 사건에 숨겨져 있던, 또 다른 역사적 사실을 드러난다는 것을.
이승만 정권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노덕술 등 경찰 실력자들의 힘이 필요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다섯 차례에 걸쳐 반민특위 활동을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했고, 이승만 일파에 의해 동원된 군중들은 ‘빨갱이 반민특위를 해체하라’고 연일 데모를 벌였다. 그리고 이에 힘을 얻은 경찰은 마침내 1949년 6월 6일 서울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의 지휘로 80명의 무장한 경찰을 동원해 반민특위를 습격해 조사관들을 폭행하고 (…) 미군정이 치안 유지를 위해 건국준비위원회의 보안대를 해산하고 대신 일본 경찰조직에서 일해온 한국인들을 다시 기용한 이래 경찰은 식민지기 순사로서 활동했던 이들이 완전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반민특위는 직접적인 위협이었으며, 대통령의 뜻을 확인한 순간부터 과감하게 실력행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p 039
이승만이 마지막으로 의존할 수 있는 것은 국군 특무대와 경찰의 힘이었다. 전쟁은 군과 경찰의 힘을 키우는 배경이 됐고, 이승만은 그들을 자신의 수족으로 부리는 데 비상한 능력을 발휘했다. 이승만은 원외 세력인 자유당 조직과 정치깡패들까지 동원해 국회해산을 요구하는 관제데모와 소요사태를 벌였고, 지리산 빨치산이 임시 수도 부산까지 잠임했다는 거짓 정보를 근거로 부산과 경남지역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리고 개헌투표가 이로어지기로 되어있던 1952년 5월 26일 주로 이승만에 반대하던 국회의원 50여 명이 타고 있던 통근버스를 통째로 헌병대로 연행한 다음 그 중 10명에게 ‘국제공산당 관련자’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시켜버리는 폭거를 저질렸다. (부산정치파동) p 055
이승만 정권은 전쟁이 터지자 전국의 형무소에 수용되어있던 정치범들과 보도연맹에 가입시켜 관리하던 좌익 활동 전력자들을 조직적으로 살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북한의 편에 설 것을 우려워했기 때문이지만, 그 강도가 강해지고 범위가 넓어지면서 학살행위는 단순한 보복이거나 분풀이, 혹은 정권의 실정 은폐를 위한 수단으로 남용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무능함과 비겁함과 잔혹함에 대해 이승만과 그 정부는 단 한 번도 반성을 하거나 사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전쟁과 그로 인해 고착회된 분단체제를 핑계 삼아 자신에게 도전하는 이들을 ‘간첩’으로 몰아세워 핍박하는 일을 반복했다. 심지어 그의 정부에서 장관으로 함께 일했던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서 죽이고 진보당을 해산해버린 1956년의 일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이승만이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갔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p 053
이승만은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부터 별다른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고, 늘 민심 이반이라는 현실에 마주하면서도 전쟁과 냉전, 그리고 그것을 활용한 반공주의와 친일경찰과 정치깡패와 부패한 정치인들을 활용하는 노회한 용인술과 그들을 통한 과감한 폭력의 활용을 통해 정권을 연장해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매 순간 숨죽이고 굴복하며 그의 폭거를 용인하는 것처럼 보였던 국민의 불만은 차근차근 누적되어왔고, 그것이 폭발한 시점이 바로 1960년 4월 19일이었던 것이다. p 077
초대 대통령 이승만 정권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하, 고구마 오백만개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이 되기 위해, 이승만이 저지른 수많은 불법과 반칙, 폭력과 살인을 저질렀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불법과 반칙, 폭력과 살인은 계속되었다. 권력 강화를 위해 반민특위를 강제로 해산시켰고, 조봉암을 죽이고 진보당을 해산시켰으며, 한국전쟁 전후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그럼에도 그가 오랜기간 독재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타고난 ‘운’과 ‘타이밍’.
그가 이룬 제일 큰 업적,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제일 큰 업적은 바로 ‘빨갱이/간첩’이 아닐까?
자신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죄다 ‘빨갱이’, ‘간첩’으로 몰아붙여서 죽이기 시작한 사람이 바로 이승만이다. 권력을 얻기 위해선 군/경찰 요직의 힘이 필요했는데, 그곳엔 친일매국노 출신의 군/경찰 간부들이 즐비했다. 따라서 이승만은 그들과 결탁하면서 친일매국노들을 우익, 친미로 묶어서 흔히 말하는 ‘내 편’으로 만들었다. 자기를 비롯하여, 친일매국노 출신인 내 편을 건드리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빨갱이’가 되어버린 것. 반민특위 해체가 바로 이같은 배경에서 시작되었다. 이로인해 끝끝내 우리는 친일청산을 하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우리는 친일청산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흔히들 ‘보수당’이라고 일컫는 지금의 정치가들이, 자신들을 반대하는 세력을 향해 ‘빨갱이’라고 지적질한다. 이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만들어낸 아주 뿌리 깊은 전통이다(놀랍게도 보수당에는 탈북민 출신 국회의원이 있음^^). 이거보다 더 큰 이승만의 업적이 있을까?
과거지만 현재를 관통하는 한국현대사
이 책을 읽다보면, 분명 지금으로부터 길게는 60년 짧게는 2~30년 전에 일어난 사건들임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그 영향이 이어지고 있는 것들이 꽤 있다. 아니, 생각보다 많다.
반민특위의 실패는 ‘친일청산’의 요구가 빈번이 ‘반공’이라는 프레임에 막히게 되는, 숱하게 반복되어온 한국사의 도돌이표가 시작된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사건을 통해 결정적으로 친일파들에 대한 실질적인 처벌은 좌절되었지만, 그 이후 여러가지 방식으로 되풀이된 상징적 저벌과 심판과 역사적 평가의 시도조차 늘 ‘용공세력의 음해’라거나 ‘반공의 전열을 흐트러뜨리는 시대착오적 명분론’ 등의 궤변에 가로막히곤 했다. 그것은 물론 2020년대에 이르기까지도 거의 변화가 없는 현재진행형의 상황이기도 하다. p 040
위에서도 언급했던, 반민특위 실패로 인한 친일파 청산 실패와 빨갱이 공격. 흔히 말하는 북풍의 시작. 지금이야 조금은 북풍의 영향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북풍을 부르짖는 자칭 보수들이 무수히 많다.
한일국교정상화를 통해 당시 한국과 일본, 미국 정부는 각자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한국은 경제개발자금을 얻었고 일본은 한국 시장 개척을 시작할 수 있었으며 미국은 냉전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동아시아 안보 거점을 마련했다. 하지만 여전히 식민통치의 기억을 생생하게 가지고 있떤 당대의 한국인들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고, 특히 징용과 징병, 종군위안부 등으로 직접적 피해를 입었던 이들과 유족들은 애매하게 마무리된 청구권 협상으로 인해 일본 정부로부터 직접적인 사과와 보상을 받을 길을 잃었다. 독도를 비롯한 영토와 영해, 그리고 어업권 관련 분쟁의 씨앗을 남긴것도 문제였다. p 108
오늘날까지도 한국에서 ‘철거’란 가장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가장 폭력적인 사회적 압력으로 인식되며 여러 영화와 드라마, 만화 등을 통해 재현되기도 한다. 그런 역사의 출발점에 와우아파트와 광주대단지사건이라는 대안이 최악의 방식으로 실패한 역사와, 그 이후 손을 놓다시피한 정부의 무책임이 있다. 또한 광주대단지사건은 조직되지 못한 분노가 사회적인 악영향을 가져온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정책의 시행 과정에서 드러난 폭력적이고 졸속한 면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저항을 전개함으로써 그것을 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보다 나은 정책으로의 전환이 아닌 ‘무대책’으로의 전환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내고 말았기 때문이다. p 133
8.3사채동결조치의 효과는 경제성장률이 1972년 7.2%에서 73년 14.8%로 늘어남으로써 나타났다. 하지만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어 기업들의 빚을 탕감해준 그 조치의 정당성에 대한 이견은 묵살되면서 서민들은 무력감을 다시 한 번 곱씹었고, 기업인들은 ‘벌여놓으면 언젠가 정부가 해결해준다’는 그릇된 믿음을 가지기 시작했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많은 대기업들이 그 시점을 계기로 자리를 잡았으며, 한국 고도산업화의 주요 병폐로 꼽히는 대부분의 문제점들이 심화되기 시작한 것 역시 그 무렵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설계하고 주도한 산업화와 경제성장 과정에서 여러가지 공과 과를 찾을 수 있겠지만, 8.3조치는 그것이 의도되고 작동되고 누군가의 희생을 가용해돈 과정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p 140
박정희 정권 때 있었던 한일국교 정상화, 이른바 한일기본조약은 한일관계에 있어서 우리에게 엄청난 족쇄를 채웠다. 뭐 이건 두 말하면 입아프다. 박근혜 정권 때도 제 2의 한일기본조약 비스므리하게 위안부 밀실협상을 하기도 했었다. 문재인 정권 때 협상을 파기하였으나, 일본은 이를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외에도 징용, 징병문제도 동일하다.
과거 ‘경제살리기’를 위해 한일기본조약을 맺었던 박정희 정권과 ‘미래’라는 명분으로 일본에 낮은자세로 다가서는 윤석열 정부.
박정희 정권은 경제를 완벽히 살렸다. 대신 대일관계에 있어서 대한민국에 커다란 족쇄를 채웠다. 미래를 선택한 윤석열 정부의 선택은, 과연 미래의 대한민국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 지금의 선택이 정말 미래의 대한민국을 위한 선택일지는, 아직은 알 수 없다.
이 외에도 ‘철거’가 가진 폭력적인 모습이나, 대기업들이 고도성장의 과정에 있었던 정권의 강압과 수많은 국민들의 희생. 이 역시도 우리가 꼭 배워야 할 현대사다. 생략할 역사가 아니라.
야권을 대표하는 두 후보인 김영삼은 부산과 경남, 김대중은 호남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고 공주 출신인 김종필은 충청권에서, 그리고 대구 출신인 노태우는 대구와 경북권에서 맣은 지지를 받았다. 따라서 각 후보들이 자신의 지지기반에서 벌이는 유세에는 경쟁적으로 수십만의 인파가 몰려 열광적인 반응을 보냈지만, 다른 후보의 유세때는 종종 돌멩이가 날아들어 아수라장으로 변하곤 했다. 이 선거에서 노출되었던 그런 지역간 충돌 양상은 이후 한동한 한국 정치에서 지역 변수가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p 212
3당 합당을 통해 새로 만들어진 당의 이름은 민주자유당이 되었으며, 노태우 대통령이 당 총재를 밭고 대표최고위원은 김영삼이, 최고위원은 김종필과 박태준기 각각 맡았다. 합당에 참여한 3당의 의석수는 220석에 가까웠기 때문에 언제든지 개헌을 할 수 있었고 조만간 내각제로 개헌하기로 합의한 뒤 각서를 작성하기도 했지만, 결국 대통령으로서 정권을 장악하기 원했던 김영삼에 의해 그 합의는 무산되게 되었다. (…) 3당 합당은 1990년대부터 최소한 2000년대까지 한국 정치의 기본적인 구도를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 사건 이후 호남의 야당과 비호남의 여당이라는 구도가 자리 잡았고, 그런 왜곡된 구도 위에 거대 여당과 소규모 야당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 3당 합당의 결과물민 민주자유당은 합당과 재창당, 당명변경 등의 과정을 거치며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으로 간판을 바꿔달았고, 2023년 현재 국민의 힘으로 이어지고 있다. p 236~238
지금의 지역갈등과 현재의 여당/야당이 자리잡은 계기도 전두환 정권에서 만들어졌다. 따지고보면 이승만 정권까지 거슬러 갔을 때 국민의 힘이나 민주당이나, 그 뿌리는 거의 같다고 볼 수 있긴 한데, 뭐 여튼. 하지만 이쪽이나 저쪽이나 그게 그놈이고, 매번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며, 내로남불 오지는건 똑같으니, 내 눈엔 다 같은 놈들이라는 생각만 든다.
국민을 위한 진정한 국회의원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듯. 특히 이름 난 정치인들은 더더욱.
그럼에도 불구하고 7.4남북공동성명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 한국 보수주의와 반공주의의 상징적 인물인 박정희에 의해 주도되고 공언된 원칙인만큼 ‘자주적 평화통일’은 누구도 부정하거나 후퇴시킬 수 없는 고정된 원칙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고, 더 이상 무력통일을 주장하는 의미 있는 세력이 등장할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p 137
예나 지금이나 학교에서도 꼭 배우는 내용 중 하나인 7.4남북공동성명. 이 이후로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이유로 남한과 북한에서 기나긴 독재가 시작되었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뭐 결과야 어찌되었든, 보수의 상징이라는 박정희 정권에서 나온 7.4남북공동성명은 진보, 보수 그 어느 쪽에서도 흠집을 낼 수 없는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은 군사정변을 통해 등장한 군인들을 제외하면, 역대 대통령 중 갖아 대중에게 덜 알려진 인물이었다. 대부분의 이력은 대중의 관심사와 동떨어진 검찰 조직 내에서 쌓았고, 국정감사장에서 했던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라는 발언을 통해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이후 불과 10년이 되기 전에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그는 국회의원 선거를 비롯한 어떤 선거에도 나선 적이 없었고, 따라서 대중과 여론의 검증대에 선 경험도 없었다.
그래서 대중은 그의 ‘이미지’, 그리고 그의 반대편에 있던 민주당 정권에 대한 반감을 기반으로 선택했고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취임 직후부터 그에 대한 실망감이 표출된 배경이었는데, 애초에 국민들은 윤석열이라는 인물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잘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당선은 한국 정치가 가진 몇 가지 긍정적인 측면을 드러냈다고도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경우에 따라 정치 신인도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유동성이 작용하고 있으며, 대중의 판단도 이념적으로 고착회되어있기 보다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판단하는 유동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997년에야 헌정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통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었던 한국 정치는 30년 도 채 지나기 전에 ‘어떤 정치 세력도 안심할 수 없는’ 치열한 정치적 경쟁의 무대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p 413~414
역대 모든 정권에는 ‘공’과 ‘과’가 있었다. 물론 아주 탁월하게 ‘과’가 많은 정권도 있었지만. 지금 정권부터는 모쪼록 ‘과’보다는 ‘공’이 훨씬 많은 업적을 이뤄냈으면 좋겠다. 이 나라는, 장차 내 딸이 살아갈 터전이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