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간 클래식 - 나는 클래식을 들으러 미술관에 간다 일상과 예술의 지평선 4
박소현 지음 / 믹스커피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책장에는 미술관련책이 여러권 있다. 『혼자보는 미술관』, 『방구석 미술관 1,2』, 『기묘한 미술관』 등. 처음에는 화가가 그린 그림에 대한 비하인드가 궁금해서 보았고, 그 명화를 대중은 어떻게 해석하는지 궁금해서 보았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위 책들에는 중복되는 명화&그림들이 워낙 많아서, 어느 순간부터는 미술관련 책들을 읽어도 새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자연스레 미술관련책들도 잘 안읽게 되었달까. 





그런 내가 정말 오랜만에 미술관련 책을 읽었다. 왜? 새로웠으니까!


나에게 새로움을 준 이 책의 제목은 『미술관에 간 클래식』.


이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큐레이트한 명화를 보다보면, 정말 신기하게도 귓 가에서 클래식♬이 들려온다. 





이 책의 저자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비올리스트, 클래식 강연가. 한마디로 음악가다. 헌데 미술관을 정말 좋아한단다. 음악이나 미술, 전부 ‘예술’에 속하는 장르여서, 음악예술가인 저자가 미술예술가인 화가들을 좋아하고 그들이 그린 그림을 좋아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음악과 미술은 같은 예술이어도, 예술 문외한인 내가 봐도 확실히 그 결이 다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그토록 다른 음악과 미술이 어쩌면 비슷한 친구(?)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저자가 그렇게 귀뜸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저자는 총 30개의 챕터로 이 책을 구성하였고, 그 안에서 30점의 미술작품과 30점의 음악을 연결하였다. 여기서 꼭 말하고 넘어가야하는게, 위에서 말한 귓가에 ‘클래식이 들린다’ 라는 것이 환청이 아니라 진짜라는 사실. 정말로 이 책은 읽다보면 클래식이 들린다. 왜? 매 챕터마다 큐알코드가 있는데, 그 큐알코드를 찍으면 저자가 선정한 클래식이 들려오기 때문이다. 



또 하나 이야기 하고 싶은 것. 이 책에는 일반인에게 조금은 생소한(?) 미술작품들도 대거 실려있다. 클래식이야 두 말하면 입 아프고.



지금까지 내가 읽어본 미술관련 책에서 소개하는 명화들은 중복되는 것이 너무 많았다. 뭐, 화가 또는 그림이 워낙 유명해서 중복정도는 어쩔수 없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중복되는 그림이 너무 많아서 자연스레 미술관련 책을 멀리하게 된 것도 있다. 솔직히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중복되는 명화들은 감안하고 보자!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건 뭐. 나에게는 정말 생소한 그림들이 너무 많았다. 물론 여러 미술관련 책에서 언급하는 그림들과 중복되는 게 없는 건 아니지만, 눈에 띌 만큼 있는건 아니다. 외려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작품들이 훨씬 많다. 특히 유명한 서양화가 즐비한 상황에서, 우리가 국사책에서나 배웠던 고구려 벽화가 한 챕터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박수치고 싶은 느낌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큐레이팅한 고구려벽화 <강서대묘 사신도>와 작곡가 윤이상의 <영상> 챕터를 소개해본다. 



정말이지 나는 뼛속깊이까지 한국인인지, 아니면 역사더쿠 마인드가 내 뇌를 장악해서 그런지, 유독 이 챕터가 내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는 건 안 비밀!



고구려 벽화를 재현하는 음악 : <강서대묘 사신도> vs 윤이상 <영상>


고려 문신 김부식이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사기』, 고려 승려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 등의 역사서로 당시 고구려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중국 지린성에 가면 볼 수 있는 무용총을 비롯해 북한에 위치한 수렵총, 수산리 고분 등의 고구려 고분에 그려진 벽화들은 당시 고구려인의 복식, 악기와 사냥 도구나 방식, 풍습을 잘 알수 있는 뛰어난 미술 자료다. 특히 북한 평안남도 강서군에 있는 <강서대묘 사신도>는 고구려의 강건한 성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p 095



사신은 동양에서 동서남북을 수호하고 사계절을 주관하는 네 마리의 환상 동물을 뜻한다. 동방은 청룡, 서방은 백호, 남방은 주작, 북방은 현무, 중앙은 호아룡이 수호하고 있다. 강서대표의 널방은 남쪽에서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동쪽 벽에는 청룡도, 서쪽 벽에는 백호도, 북쪽 벽에는 현무도, 입구 좌우의 좁은 벽에는 주작이 한 마리식 그려져 있다. 천장에는 황룡이 그려져 있었으나 침수로 사라졌다. p 095


고구려 벽화 <강서대묘 사신도>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된 자랑스런 우리 유산이자, ‘미술작품’이다. 솔직히 말하면 <강서대묘 사신도>는 ‘고구려’ 벽화로써만 배우다보니, ‘미술작품’보다는 ‘역사문화재’ 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래서 그런지, 이렇게 ‘미술작품’으로써 대접하는 책이 있다는게 새롭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무엇보다 <강서대묘 사신도>에게 잊혀졌던 ‘미술작품’이라는 정체성을 찾게 해준듯 하여 고맙기도 했다.



각설하고.



한창 전세계적으로 냉전시대였던 그 때, 남한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가 한창이던 그때 <강서대묘 사신도> 라는 작품에 반했던,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작곡가가 있다. 그는 자신의 음악에 <강서대묘 사신도>를 마주하고 느낀 감정과, 그 속에서 찾은 한국의 사상을 담아내어 그 어떤 찬사로도 부족한 음악 <영상>을 작곡하였다. 그의 고향은 대한민국 통영, 즉 자랑스런 우리 국민이었다. 그 작곡가의 이름은 바로 ‘윤이상’.



작곡가 윤이상은 <강서대묘 사신도>를 직접 보고, 대작 <영상>을 작곡한 뒤 죽을 때 까지 자신의 고향인 대한민국에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강서대묘 사신도>가 북한에 있기 때문에.



공교롭게도 이 벽화를 직접 보기 위해 북한으로 향했다가 살아생전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위대한 작곡가가 있다. p 097



전 세계적으로 찬사를 받은 윤이상은,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는 등 현대음악 작곡가로서 매우 중요한 입지에 선다. (…) 어린시절 서당에서 배운 도교 사상을 음악에 넣으려 했다고 직접 밝히기도 했는데, 음약오행과도 연결되어 있다. 윤이상은 한국 정신의 실체를 만나기 위해서는 고구려 벽화를 직접 봐야한다는 생각을 키웠고, 오랜 시간 만나지 못한 친구도 만날 겸 북한에 방문해 <강서대묘 사신도>와 마주한다. p 098



그러나 1967년, 윤이상은 간첩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한국으로 불법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받는다. 194명의 유학생과 교민들이 간첩으로 몰려 납치당하고 고문당한 ‘동백림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p 098



이후 다시는 남한 땅을 밟지 못한 윤이상은 1979년부터 김일성의 초대로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하며 윤이상음악연구소와 관현악단을 지도했다. 사후에도 간첩이라는 오해로 명예가 더렵혀졌던 위대한 작곡가. 남북을 가르는 게 아니라 그저 조국을 방문했을 뿐이었다는 사실이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려졌다. p 099


윤이상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항일운동을 하며 수감생활을 했던 사람이다. 광복 이후에는 프랑스로 음악 유학을 갔고, 독일에서는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하여 대 성공한 명실공히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하지만 그는 박정희 정권에서 조작한 간접사건 ‘동백림 사건(동베를린 사건)’으로 인해, 죽을 때 까지 고향인 대한민국에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작곡가 윤이상이 연루되었던, 조작된 간첩사건 ‘동백림 사건’에 대해 부연설명 하자면..



동백림 사건은, 독일(당시에는 동독)에 체류중이던 수많은 한국인들이 어느날 갑자기 납치되어, 한국으로 끌려와 간첩으로 몰리고 잔혹한 고문을 당한 사건이다. 작곡가 윤이상,현대화가 고암 이응로를 포함하여, 독일에 체류 중이던 수많은 유학생과 교민들이 연루된 사건이다.



당시는 한국전쟁이 휴전된 직후였다. 남한은 경제적으로 곤궁했고, 북한은 남한보다 조금 더 경제력이 나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상황이 그러하다보니, 여러나라에 있는 북한 대사관에서 남한 유학생들에게 밥 한끼를 먹여주는 것이 매우 일상적인 상황이었다. 마침 독일, 그러니까 당시 동독에도 북한대사관이 있었는데, 우리 교민들이 북한대사관을 자주 찾아가 밥을 얻어먹고는 했다. 



남한의 박정희 정권은 이를 좌시 하지 않았다. 독재로 인해 내부의 불만이 쌓인 상황이다보니,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는게 시급했다.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는 제일 좋은 방법은 다름 아닌 ‘간첩사건’. 그렇게 동독에 체류하던 남한 교민들은 전부 빨갱이가 되었고,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작곡가 윤이상은 <강서대묘 사신도>를 보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던 것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윤이상은 물고문을 받으며 죽기 직전까지 갔고, 결국 ‘북한에 봉사하는 공산주의자’라는 거짓 자백을 했다. 이렇게 동백림 사건에 연루된 많은 교민들이 죽기 직전까지 고문을 받고, 거짓자백을 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거다. 당시 윤이상은 그냥 작곡가가 아니라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곡가라는 점이다. 독일 정부는 윤이상이 무리하게 끌려가 수사를 받았다며 특별 사면을 요구했다. 당시 세계적인 음악가인 스트라빈스키, 카라얀 등을 포함한 전 세계 음악인 200여 명도 한국 정부에 공통 탄원서를 보내며 박정희 정권에 항의했다. 전 세계적으로 남한을 주시하자, 궁지에 몰린 박정희 정권은 결국 1969년 2월 25일에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윤이상을 풀어줬고, 독일로 추방시켰다. 이후 윤이상은 살아생전에 고국인 남한에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 죽은 지 23년이 흘러서야, 윤이상은 고국으로 돌아왔다. 윤이상의 유해는 고향 통영에 안장되었다.



윤이상은 차가운 감옥에서 생사의 기로에 서 있던 1968년, <강서대묘 사신도>를 토대로 한 작품 플루트, 오보에,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영상>을 완성한다.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나무의 속성을 지닌 동쪽에는 목관악기, 쇠의 속성을 지닌 서쪽에는 쇠붙이가 재료가 된 악기, 불과 붉은 빛을 상징하는 남쪽에는 현악기, 북쪽에는 타악기를 배치해야 한다. 윤이상은 동방청룡은 오보에, 남방주작은 바이올린을 배치한다. 앙상블을 생각해 서방백호는 첼로, 북방현무는 플루트를 배치한다. 오보에와 바이올린은 양, 첼로와 플루트는 음의 역할로 나눠 악보 위에서 힘차게 날아오르도록 했다. 


국악기의 소리나 주법을 서양악기로 구현하려고 했던 윤이상의 시도는 이 작품에서도 잘 느낄 수 있는데, 오보에는 피리가, 플루트는 대금이, 해금은 바이올린이, 아쟁은 첼로가 음색을 모방하고 있다. p 099~100



윤이상 음악의 본질을 알기 위해선 <강서대묘 사신도>를 봐야 한다는 말처럼 통영의 윤이상기념관 입구에는 사신도가 자리 잡고 있다. 상처받은 용, 윤이상이 미술적 상상력을 악보 위에 펼쳐낸 작품이 <영상>이다. p 100


전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작곡가 윤이상은 갑작스레 ‘빨갱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조국으로 끌려와 잔혹한 고문을 받고, 감옥에서 당장 내일이라도 죽을지도 모르는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상황이에도, 그는 작곡에 매진했다. 자신이 그토록 보고싶어했고 결국엔 보고야 말았던 <강서대묘 사신도>를 오선지 위에 옮겼다. 그렇게 탄생한 곡이 바로 <영상>이다.



책 속의 큐알코드를 찍고 윤이상의 <영상>을 듣고 있으면, 분명 서양의 악기로 연주된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익숙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분명 뼈대는 서양음악인데, 그 안에서 풍기는 느낌은 동양의 그것. 정말이지 신기한 기분이랄까?



내가 수많은 명화와 음악을 소개한 챕터 중에서 굳이 이 챕터를 소개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유명한 서양그림, 서양음악 전부 좋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동/서양의 문화차이가 괜히 있는게 아니니까. 헌데, 윤이상이 작곡한 <영상>은 분명 서양음악인데, 동양이 느껴진다. 주작이 날아오르고, 청룡의 울부짖음이 느껴진다. 윤이상이 괜히 <강서대묘 사신도>를 보고 온게 아니구나 싶고, 이런 감정이야말로 내가 한국인이기에 느낄 수 있는게 아닐까 싶다.




미술과 음악을 한데 엮어서 본다는 건 단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는데, 이 책 『미술관에 간 클래식』 덕분에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은 박수받아 마땅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