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역사 6 - 흔적 : 보잘것없되 있어야 할 땅의 역사 6
박종인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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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 !!!!!!!!!!!!!!!


박종인 기자님의 『땅의 역사』 6권이 나왔다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정말로 얼마나 기다린 『땅의 역사』 시리즈인가?!!! 정말 진짜 이대로 완전 장기연재 가주세요, 기자님...흐어어허엏엏






자타공인 역사더쿠인 내가 다음 권을 기다리는 역사책인 박종인 기자님의 『땅의 역사』. 물론 기자님이 매주 올리시는 신문기사를 봐도 되고, 기자이 진행하는 땅의 역사 유튜브를 봐도 되지만... 내 습성과 환경상(?) 그게 잘 안된다. 역시 (회사에서ㅋㅋㅋ)책으로 봐야 제맛인듯!!



흠흠.




우리가 사는 이 땅에는 오랜 역사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있다. 우리는 그 역사를 학교에서 배우고, 매체를 통해서 배운다. 헌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배웠던 역사는 생각보다 단조로웠다. 언제나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역사라던가, 뭔가 치욕스럽고 오점이 될 역사 같은데 이상하게 정신승리해서 결국 좋은 식으로 이야기한 역사였다. 뚜렷한 ‘공/과’가 있는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서는 주로 ‘공’에 대해서만 배웠다. 



아주 유명한 역사적 인물의 뚜렷한 ‘과’를 이야기 하거나, 우리에게 치욕스런 역사에 대해 돌직구로 말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우리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매국노로 취급받는다. 물론 요즘은 과거에 비하면 이런 분위기가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런 분위기가 남아있다. 이처럼 매번 좋은 말만 이야기하는데, 이보다 단조로운 역사교육이 또 있을까 싶다. 이러니 매번 나라가 위기를 맞이해도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그걸 계속 반복하는게 아닌가.



이런식으로 영광스런 역사, 정신승리하는 역사만 배웠을 때 사회적으로 어떤 부작용이 일어났는지는, 우리 역사만 돌아봐도 알 수 있다. 우리가 제일 많이 알고, 제일 많이 배우는 6백년의 기간. 그러니까 조선까지의 역사적 사건만 역으로 나열해보자.




▶광복 이후 군부독재 시절 → 일제강점기 → 조선 후기 서구열강의 침입 → 조선 병자호란 → 조선 임진왜란 등등.




위 역사들은 우리 역사에서 꽤나 굵직한 사건들이고, 우리도 학창시절 분명하게 배웠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는게 맞을까? 적어도 내가 학교에서 배웠을 땐 저런 치욕스런 사건들이 일어난 대부분의 이유를 ‘외부’에서 찾았다. 이 땅을 침입한 놈들이 나쁜놈이고, 독재를 한 인간들은 시대상황에 따라 어쩔수 없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근데 정말 과연 그럴까? 모든 이유는 외부에만 있었던 걸까?



조선 전기 내 평화에만 찌들어 외세 침입에 대한 대비는 등한시 했던 조선 정부. 일본보다 더 빠른 시점에 조총이 국내에 들어왔음에도, 그걸 개발하기는 커녕 외려 녹여서 사찰의 동종을 제조한 조선 정부. 거기다 일본이 쳐들어올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음에도 무시했던 조선 정부. 일본이 쳐들어오자 누구보다 먼저, 발 빠르게 도망간 조선의 왕!! 그것도 목적지는 조선 땅이 아닌, 조선을 벗어난 명나라. 모르긴 몰라도, 명나라에서 입국거부만 하지 않았어도, 조선은 임진왜란 중에 명나라의 속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뭐 이건 시작일 뿐이고, 임진왜란/정유재란 기간 내내 조선 정부의 문제는 너무 많아서 각설.



그렇게 일본과의 전쟁이 끝나고 30년도 채 안되서 일어난 정묘호란/병자호란은 또 어떤가. 임진왜란의 문제를 외부에서만 찾는게 아닌, ‘내부’에서 찾은 서애 류성룡이 《징비록》. 하지만 조선의 위정자들은 징비록을 외면했다. 그 결과, 조선 정부는 임진왜란 발발 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아주 문제적 상황에 있었고, 결국 정묘/병자호란이 터졌다. 더 슬픈 건 그 이후에도 변하지않았고 계속해서 치욕스런 역사는 반복되었다. 그 어떤 반성 하나 없이, 지금까지 말이다. 



치욕스런 역사에 대한 반성이 없었기에, 우리 근대사를 비롯해 현대사도 문제가 많았고, 지금도 문제가 많다. 말그대로 현재진행형! 이게 얼마나 심각하냐면, 고종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전제하에 수많은 미디어 매체가 나왔고(덕혜옹주도 그렇고), 정부기관에서도 이에 동조했다. 관련 관광산업까지 꾸려가면서 말이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을 뿐.



그나마 다행인건! 그 누군가가 나서서 치욕스런 역사를 아무리 미화하고 정신승리를 한다고 해도, 절대 바꿀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흔적들이 아직 이 땅에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흔적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라져가고, 사람들 기억속에서도 잊혀지고 있지만.



새삼 정말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박종인 기자님처럼 역사의 진실이 담겨있는 흔적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았다는게T_T.



조선의 국립대학총장과 서울시장 평균 재임 기간은 3개월?!


오늘 날로 치면 국립대학총장에 준하는 성균관대사성과 서울시장에 준하는 한성판윤. 매우 중요한 직책이자, 권력이 있던 자리이며, 유능한 사람들은 한 번씩 거쳐갔던 직책이다. 헌데 정말 놀랍게도 조선 오백년간 그들의 평균 재임기간은 고작 3개월이었다. 3개월이면 요즘 말로 수습기간아닌가? 과연 일은 제대로 할 수나 있었을까? 조선 오백년간 성균관은 어떻게 운영되었고, 수도였던 한성(서울)은 어떻게 굴러갔을까?



조선을 함께 설계한 정도전은 그 설계도인 ‘조선경국전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학교는 교화의 근본이다. 여기에서 인륜을 밝히고 여기에서 인재를 양성한다.’

땅의역사 6권 p 076



1) 오늘날의 국립대학총장, 성균관대사성


유학의 나라 조선. 조선이 건국되면서 유학을 가르치는 성균관도 당연히 존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균관은 유학이 들어온 고려말부터 존재했다. 역사가 깊은 교육기관인 것이다. 성균관은 공자를 포함한 역대 중국 성인을 배향한 대성전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명륜당으로 구성되어있으며. 가르치는 과목은 당연히 유학, 즉 성리학! 지금도 성균관 명륜당 건물이 서울 한복판에 남아있고, 성균관 이름을 딴 대학교가 있을정도로 ‘성균관’ 이라는 이름은 조선을 대표하는 ‘국립교육기관’ 이었다.




대학 운영 전반에 걸친 최고 책임자가 대학총장이듯이, 성균관의 최고 책임자는 성균관 대사성이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탱하는 유학자들을 양성하는 만큼, 조선 정부에서도 성균관을 향한 지원은 대단했다. 성균관 출신들이 정부 요직을 차지하는 것은 기본이기도 하고. 여튼 그렇게 중요한 성균관이고, 그런 성균관의 최고 책임자가 성균관대사성이니, 그 임무가 얼마나 막중했겠는가.



대사성은 성균관을 책임지는 기관장이요 지금으로 치면 국립대 총장이다. 품계는 정3품으로 여섯 판서보다 낮지만 성리학 교육 수장으로서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1392년 조선왕조가 건국된 이래 1910년 이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518년 동안 이 명예와 책임을 입은 대사성은 몇이나 될까. ‘2,101명’이다, 이백 명이 아니다. 이천백한 명이다. 평균 재임기간은 ‘3개월’이다. 3년이 아니라 석 달이다. 세종 때 최고 27.9개월이었던 대사성 재임기간은 갈수록 줄어들어서 ‘학문을 사랑한 군주’ 정조 때는 1.2개월로 급감했다. 고종 때는 1.3개월이었다. p 075



태조부터 연산군까지 1,425개월 동안 모두 96명이 대사성으로 근무했다. 평균 재직 기간은 14.8개월, 즉 1년 3개월이었다. 충분히 명예와 무게를 견디고 책임을 수행할 만한 기간이었다. 그런데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중종 때 대사성 평균 재임기간이 7.5개월로 급감한다. 중종 472개월 동안 대사성이 63명이나 바뀌었다는 뜻이다. 연산군까지 평균 14.8개월이던 대사성 재임 기간은 중종 이후 순종 때까지 2.5개월로 추락했다. 중종~순종 4,987개월 동안 대사성 숫자는 무려 2,005명 이었다. p 078



막중한 임무와 책임을 가진 성균관대사성의 평균 재임기간이 3개월이란다. 3년도 아닌 3개월. 요즘 회사 신입사원도 입사후 3개월? 신입 티도 못 벗고 업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런데 성균관대사성 평균 재임기간이 3개월!!!!!





실록을 비롯한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망나니 연산군때까지만 해도 평균 재임기간이 1년이 넘었었다. 그런데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 때부터 성균관 대사성 평균 재임기간이 폭락한다. 성균관대사성 자리는 아주 수시로 교체되었다. 조금 아이러니하다. 중종반정을 주도한 세력은 다름아닌 성리학을 맹신하는 사림세력이 아닌가. 성리학 교육을 대폭적으로 늘리고 지지해도 이상하지 않을판인데, 대체 왜 대사성 평균 재임기간이 뚝 떨어졌는가.



사림은 연산군 때 ‘도의’를 외치다 각종 사화로 절멸된 뒤 초야에 묻혀 있던 세력이다. 그 사림 눈에 정부가 주도하는 관학인 성균관은 가치가 없었다. 철학과 고담준론과 명분을 가르쳐야 할 성균관이 공무원 입시 학원과 같은 경서 암기 학교로 전락해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종 때는 성균관에 등교하는 학생이 없고 과거시험장에만 나타난다는 보고가 있기도 했다. 무늬만 학교인 그 성균관이 연산군 때는 기생파티장으로 추락하더니 중종 때는 마침내 텅 빈 교정이 소를 잡아먹는 도살장으로 변해버렸다. 사림은 이를 세력을 확대할 명분으로 삼았다. “성균관이 도살장으로 변했다”는 보고는 국가가 망쳐놓은 성리학 교율을 자기들이 하겠다는 암시였다. p 080



사림이 만들었던 서원은 당쟁소굴이 됐다. 서원 철폐령이 수시로 떨어지더니 흥선대원군은 아예 400개가 넘는 서원을 40여 개로 정리해버렸다. 대사성 권이 또한 자유 낙하했다. 왕권이 강력하던 숙종 때는 567개월 동안 208명이 갈려나갔다. ‘학문을 숭상하고’ 자칭 ‘만천명월주인옹’이었던 정조 때는 최악이었다. 300개월 동안 대사성이 된 사람은 251명으로 평균 임기는 1.2개월에 불과했다. 심지어 정조 때는 하루에 대사성이 세 번 갈리기도 했다. p 081



알고보니 사림세력은 성균관을 버린 것이었다. 교육기관으로서는 더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 성균관은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림세력이 선택한 것이 바로 ‘서원’.



사림은 지방 곳곳에 서원을 만들고, 일명 ‘사액’을 받아서 그 힘을 키웠다. 그 시작은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웠던 백운동 서원을 ‘소수서원’으로 사액한 것. 그렇게 지방 곳곳의 서원들이 조선의 유학자 양성을 도맡게 되었다. 그럼 성균관은? 이름만 남은 허수아비일뿐. 



자, 그렇다면.. 지방 곳곳에 설립된 사액서원들은 제대로 굴러갔을까? 성리학교육을 제대로 했을까? 일단 그들이 교육한 성리학은, 엄밀히 따지만 ‘주자학’이었다. 주자학의 병폐야 뭐 말해 뭐해. 몸집이 커져버린 서원들은 수많은 폐단을 일으켰다. 그 결과가 훗날 일어나는 서원철폐! 무엇보다 이런 서원에서 교육받은 사림세력들, 조선후기 정권을 잡은 그들은 조선을 갉아먹고 또 갉아먹었다.



고종시대 533개월에는 한 달 아흐레에 한 번씩 자그마치 398명이 대사성 벼슬을 달고 나갔다. 세도정치 주역 가문인 안동 김씨 대사성, 풍양 조씨가 배출한 대사성은 각각 74.1%, 68.3%가 세도정치시대와 고종시대에 몰려 있다. 고총 외척 여흥 민씨는 모두 31명이다. 조선왕조 전체를 통들어 여흥 민씨 대사성 50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고종 때 사람들이었다. 거기에 소년 대사성 민영익 또한 이름을 올린 것이다. p 083



수시로 교체되는 성균관 대사성에는 무려 만 18세 소년도 있었다. 그의 이름은 민영익. 바로 민비의 조카다. 민영익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춘계시험 삼일제를 치루고, 왕과 왕비의 빽으로 중간 시험은 모두 생략(^^)하고, 바로 마지막 시험인 전시를 통과한 인물이다. 그렇게 등과한 만 18세 소년 민영익은 최연소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만 18세가 서울대학교 총장이 되었다는 뭐 그런 이야기.



“1395년 임명된 초대 서울시장(판한성부사)부터 

1907년 대한제국 마지막 서울시장(경성부윤)까지

512년 동안 서울 시장은 모두 2,012명이었다. 

각 시장 평균 재직 기간은 3개월이었다.” 

땅의 역사 6권 p 085




2) 오늘날의 서울 시장, 한성판윤



그렇다면 오늘날의 서울시장격인 조선시대 한성판윤은 어땠을까? 정말 놀랍게도 조선의 서울시장 평균 재임기간도 3개월이었다. 짜고치는 고스톱도 아니고 어쩜 이럴수가 있는지! 


‘조선시대 한성부 판윤으로서 유명한 인물은 주로 조선 전기에 많았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적, 학문적 업적은 많이 알려져 있으나 한성부 판윤으로서의 행정 실적은 별로 기록된 내용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박경룡, 『한성부연구』 국학자료원, 2000)’



‘(조선 후기) 한성판윤은 사회가 혼란하고 정치가 안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단적인 예다. (류시원, 『조선시대 서울시장은 어떤 일을 하였을까』 한국문원, 1997)’



한성판윤은 품계가 종2품으로 장관급 고위직이다. 한 나라 수도 행정을 책임지는 최고위 공직자다. 그런데 전기에는 행정실적 기록이 없고 후기에는 불안정한 사회와 정치의 상징이라고 한다. 왜 이런 평가가 나올까. p 085



자타공인 기록의 나라 조선이다. 임금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인물들이 업적이 기록으로 증명된다. 그런데 어찌하여 수도 한성을 책임지는, 한성판윤의 업무 기록은 없는걸까? 놀랍게도 그 이유는 《경국대전》이 규정한 한성판윤의 업무에 있었다.


※『경국대전』이 규정한 한성판윤 업무※

1. 호적, 시장, 가옥, 전답, 임야, 도로, 교량, 하천, 세금 등에 관한 세무

2. 민간 빚 문제(부채), 폭력(투구), 살인사건 검시권을 가짐

3. 어전회의 출석 및 대중국 외교관



1번 항목은 행정가가 당연이 해야할 업무이다. 2번 업무는 지금이야 사법부가 분리되었으나, 조선에선 수령의 업무였다. 문제는 3번!!! 한성판윤은 수시로 개최되는 어전회의 참석자 중 하나였고, 빈번하게 들락날락하는 대중국 외교관이었다. 



막중하고 폭넓은 업무를 역대 한성판균은 제대로 수행했을까? 못했다. 왜? ‘서울 실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이직을 거듭했으니까’. 게다가 한성부 공식 업무는 ‘판윤이 좌기(출근해 업무를 시작함)한 뒤라야’ 하급 관리들이 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한성판윤은 수시로 어전회의에 출석해 국정을 논하고 중국 사신이 오면 의전을 맡아 자리를 비웠다. 그러니 조선국 한성판윤은 시정 장악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직책이었다. 그나마 석달밖에 근무하지 않고 전근을 가곤 하는 시장. p 087



무엇보다 조선왕국 사대부들은 소위 ‘9경’ 경력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다. 9경은 정2품 의정부 좌우참찬, 육조판서와 한성판윤이다. 하지만 경력 관리 차원에서 한성판윤을 받아들였을 뿐, 실질적인 서울 행정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뜻이다. 이런 명목상 시장이 주는 행정 공백을 막기 위해 조선 정부는 장기 근무를 원칙으로 하는 ‘구임관’을 두었다. 한성판윤 자리가 수시로 바뀐다는 전제를 깔고 마련한 정규직이다. p 088



1864년 고종 등극 이듬해부터 1907년 고종 퇴위 직전까지 한성판윤은 모두 429명이었다. 43년 사이 한 해 열 명이 넘는 시장이 한성 행정을 책임졌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1890년에는 한 해 동안 모두 29명이 한성판윤 사무실에 짐을 풀고 짐을 쌌다. 그해 판윤 평균 재직 날수는 12.3일이었다. p 090



어전회의 참석과 대중국외교관. 이 두 가지만으로도 한성판윤은 본래 자신의 업무인 한성의 행정업무를 할 수가 없었던 거다. 한성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교량은 몇개인지, 인구는 몇이나 되는지 알아볼 시간조차 없었던 거다. 문제는 한성의 최고책임자가 매번 자리를 비우니, 한성의 하급 관리들도 당연히 행정업무를 할 수가 없었다. 한성의 하급 관리들은 ‘판윤이 출근해야’ 업무를 할 수 있었으니까. 



결국 한성판윤도 성균관대사성 처럼 허울뿐인 자리였다. 



헌종 때는 1848년 11월 30일 형조판서 이돈영이 1618대 한성판윤에 임명됐다. 그런데 그날 마침 이돈영이 지방에 출장 중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러자 헌종은 즉시 한 해 전 판윤을 지냈던 김영순을 판윤으로 임명했다. 이돈영은 하루살이 판윤이 됐다. 1799년 9월 27일 1293대 판윤에 임명된 서유대는 다음 날 무관직인 금위대장으로 전보되고 판윤은 이의필로 교체됐다. 이유는 불명이다. 이렇게 하루 혹은 하룻밤 만에 시장직에서 내려앉은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니다. 역대 판윤 2,012명 가운데 153명이 열흘 만에 자리에서 나갔다. 


세도정치시대엔 헌종과 철종 때 한성판율을 지낸 이가우 별명은 ‘판윤대감’이었다. 이가우는 10년 동안 모두 열 번 판율을 지냈다. 그런데 그가 판윤직을 수행한 기간은 총 1년 3개월에 불과했다. p 088



한성을 제외한 지방관을 보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지방관은 『경국대전』과 『대전통편』에 임기가 정해져있다. 관찰사는 360일, 중급 수령은 900일, 하급수령은 1,800일이다. 하지만 이 임기를 제대로 채운 수령은 단 한명도 없었다. 1746년 제정된 『속대전』의 변방 수령은 1년으로 임기가 짧았다. 1506~1894년 부산 동래 각급 수령 인사를 기록한 「동래관안」에 따르면 388년 동안 임기를 만료하고 교체된 수령은 전체 280명 가운데 25명 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동래관안」에는 교체 이유도 명백하게 기록돼 있지 않은 인사도 7%나 됐다. p 089



수도 한성이 그러할진데 다른 지방들은 어땠을까? 조선이 망하지 않고 오백년을 굴러간게 놀라울 정도다. 진작에 망해도 이상하지 않았으나, 백성들의 힘으로나마 허울뿐인 조선이 유지될 수 있었던거다.



그렇게 허울뿐인 책임자 자리를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갔다.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니, 그저 자리만 오고갔으면 좋으련만, 때마다 의전행사가 진행되었다. 옛 사람 보내고, 새 사람 반기고. 그때마다 세금이 낭비되고, 노동력이 동원되었다. 위민하는 책임자는 일절 보이지 않았다. 이게 조선 5백년의 속살이다.



정체는 숨겼지만, 이건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사료다?


우리나라 곳곳을 다니다보면 역사적인 흔적을 알리는 표석이 정말 많이 알려져있다. 근데 그 표석들을 잘 보면, 이상하게 자랑스러운 역사만 새겨져 있거나, 알고보니 만들어진 역사가 새겨져 있는 곳도 많았다. 예컨데 북촌한옥마을. 현재 우리가 아는 북촌 한옥마을은 고관대작이 살기는 개뿔, 조선시대만해도 바위산이었던 곳이다. 구한말기에 독립운동가 정세권님이 일제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조선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그걸 조선의 고관대작이 살았던 곳이라고 서울시는 몇년째 홍보하고 있다.



또 다른 사례22 로는 역시나 서울 인사동에 있는 경인미술관. 지금은 겁나 감성돋는 카페로 유명하지만, 실상은 민씨 척족이자 거부 친일파 민영휘의 저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은 내가 갔을 때만해도,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아마도 지금도 없을듯? 참고로 그 자손들은 나미나라공화국(일명 남이섬^^)으로 많은 돈을 쓸어 모으는 중. 



또 다른 사례 333 으로는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곳곳에 세워졌던 신사의 흔적들이 있다. 내 특성상(?) 어두운 역사가 남아있는 장소를 자주 찾아다니는데, 그중 한 곳이 바로 일제 신사(사찰) 터다. 대부분 눈에 띄는 흔적은 사라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배의 흔적인 계단이나 석물들이 남아있는 경우가 꽤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언제부터, 왜, 이곳에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 단 한곳, 광주광역시의 광주공원빼고. 광주시는 광주공원은 일제 신사의 흔적에 대해 정확하게 안내하고, 일제의 잔재라는 것 또한 안내하고 있었다. 반대로 포항이나 목포, 경주는 그런 안내는 커녕 오히려 관광지 홍보용으로, 한마디로 치욕적인 역사는 없애고 홍보하고 있었다. 아예 일언반구 없던 지자체도 있었고. 뭐 지금은 달라졌을지 모르겠지만?



여튼 뭐 이런 식이다. 어두운 역사는 뒤로 숨기고, 빛나는 역사만 조명하거나 혹은 빛나는 것처럼 역사를 만들어서 광고하거나. 이 책에서 소개하는 정독도서관 부지 내에 있는 ‘역사적 사료’라고 하는, 커다란 돌덩이도 그렇다.


서울 화동 2번지 정독도서관 본관 건물 뒤편, 정독독서실 건물 앞 철책 속에 커다란 돌덩이가 있다. 돌에는 한자 24글자가 새겨져 있다. 뜻은 이러하다.


‘둥근 우물돌이다. 아마 고려 때 것 같은데 샘은 매립돼 흔적이 없고 돌만 우뚝하다. 광무4년(1900년) 겨울 평재(平齋)가 적다.’


옆에 안내판이 있는데 이렇게 적혀있다.


‘이 우물에 새겨진 명문을 해석한 결과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료라 여겨져 현재와 같이 관리하게 되었다. 2000년 8월 1일 정독도서관장’


앞 글을 적은 사람 ‘평재’는 1905년 대한제국 외부대신 자격으로 을사조약에 도장을 찍었던 평재 박제순이다. 우물돌이 남아 있는 바로 이 자리는 박제순이 살던 집터다. p 181



그렇다. 정독도서관은 부지 내에 있는 커다란 돌덩이가 있는데, 이게 ‘역사적의로 의미있는 사료’라고 판단하여 보존한다는 것이다.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는지, 단 한마디도 없이. 하지만 정독도서관이 말하는 역사적 의미, 한자를 읽고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면 바로 캐치할 수 있다. 왜? 정독도서관이 보존한다는 그 돌덩이에, 대놓고 한자로 쓰여있으니까. 심지어 그 한자를 세긴 이가 누구인지도. 



그는 다름아닌 바로 평재 박제순. 을사오적이다. 아주 대표적인 친일파 거물이다.




 



즉, 아주아주 넓은 정독도서관 부지 중에서 저 돌덩이가 있는 저 곳은 을사오적 박제순이 살던 집 터 였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현재 정독도서관 부지는 친일파 박제순을 포함하여 조선 말 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꽤 많은 역사를 담고 있다.



1884년 양력 12월 4일 김옥균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만 46신 만에 실패로 끝났다. 주모자들은 망명하고, 망명하지 못한 자들은 거리에서 죽었다. 가족은 연좌해 처형되거나 자살했다. 그리고 재산은 파가저택, 집을 부수고 못을 만들어 흔적을 없애버렸다. 1894년 3월 28일 고종 정권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 의해 청나라 상해에서 암살된 김옥균은 4월 14일 한성 양화진에서 ‘조선왕조 최후의’ 사후 능지처참이자 부관참시를 당했다. 5월 31일 고종은 역적 처형을 축하하는 대사면령을 발표했다. 그런데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며 조선에 갑오개혁 정부가 서자 고종은 이듬해 1월 22일 김옥균의 관작 회복 칙령을 내렸다. p 183



1884년 갑신정변 주모자였던 김옥균의 저택도 그 곳에 있었다. 김옥균 옆집에는 갑신정변을 같이 주도했던 서재필도 살고 있었다. 역시나 현재 ‘정독도서관’ 부지에 속해있다. 하지만 갑신정변 실패, 주모자들의 처형 및 망명 등으로 인해 갑신정변 주도자들의 집과 땅은 헐리고 팔리고 그렇게 사라졌다. 갑신정변 주모자들에 대한 고종의 분노는 끈질기고 집요했다는건 안비밀. 뭐, 이에 대해서 할말은 많으나, 생략하고!



1899년 개혁을 원했던 그들이 살던 그 땅에 관립중학교가 개교했다. 그 한 켠에 거부 친일파 평재 박제순의 집이 있었다. 이후 1910년 한일병탄조약으로 나라는 사라졌고, 관립중학교는 ‘경성고등보통학교’로 바뀌었다. 박제순이 죽은 뒤, 박제순 저택이 있는 부지까지 ‘경성고등보통학교’에 편입되었다. 





갑신정변 주모자 김옥균과 서재필. 그리고 을사오적 친일파 박제순. 현재 정독도서관 부지가 담고 있는 역사다. 하지만 정독도서관은 이 모든 내용중에서 일부만 선별하여, 나머지는 숨겼다. 그리하여 친일파 박제순은 사라지고 위에서 언급했던 ‘역사적 사료’라는 우물돌이 남았다. 김옥균의 집터를 알리는 비석이 있지만, 서재필의 집터를 알리는 비석은 없다. 




고종, 나라가 사라졌지만 나는 사랑을 하련다.


조선 역대 왕 중에서 나라와 백성를 버리고 도망간 왕이 셋 있다. 이미 모두에게도 유명한 선조와 인조, 그리고 고종이다. 선조와 인조의 몽진은 정말 유명한데, 고종의 몽진은 생각보다 인식하는 사람이 적다. 참으로 이상하다. 우리는 분명 고종의 ‘아관파천’을 배웠는데 말이다. 분명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도망갔는데, 그 누구도 이걸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인식하지 않는다. 아마도... 최근 20년간 일어난, 그것도 지자체와 각종 미디어에서 주도한 고종 미화(예컨데 독립운동 지원이라는 개소리)에 대한 부작용이 아닐까 싶다.



제 기득권과 권력,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팔아넘긴, 고작 무당 한 명에게 의지하여 수많은 재산을 갖다받친, 못 살겠다고 들고 일어난 동학농민군을 개틀링건으로 쏴죽인, 바로 그 사람 고종을 말이다.



‘갑신정변 주역인 김옥균과 박영효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냈던 고종은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낸 적이 없었다. 을사조약과 합방으로 을사오적이 호의호식하는 것보다 더 황실은 편안한 일상을 보냈다. 식민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분명하다. 고종이 뛰어난 지략가로 외세를 잘 이용하고 나라의 근대화를 위해 절치부심하고 굶주리는 백성을 위해 눈물로 베갯잇을 적셨다고 해도 그 책임은 면할 수 없다.’



2004년 김윤희, 이욱, 홍준화라는 세 역사학자가 쓴 『조선의 최후』에 나오는 글이다. (…) 일본은 40년 넘도록 그 나라를 이끌었던 이 황제를 죽이거나 신분을 떨어뜨려 모멸감을 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일본은 고종과 그 가족을 천황 황명으로 조선왕과 조선공에 책봉해 식민시대 내내 우대했다. p 238



고종은 갑신정변 주모자들을 증오했다. 자객을 보낼정도로. 부관참시를 할 정도로. 왜 그정도로 증오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갑신정변은 근대국가로 가기 위한 개혁이었고, 이는 즉 전제왕권의 몰락이었다. 왕권을 매우 중요시한 고종에게는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세계가 공화국으로 가고 있을때도, 이 작은 땅 한반도에서 왕을 하던 고종은 시대에 역행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던 인물이다. 대한제국 헌법만 봐도 전부 ‘대황제께옵서~’로 시작한다. 일제가 조선 침략을 위해 여러 조약을 맺을 때도, 참 이상하리만치 조선 왕족의 처우만은 유지했다. 심지어 일본의 황족에 준하게. 뭐 이정도면 말 다한거 아닌가.





그런 고종이다.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는 사람이니 일제가 우리 백성들을 어떻게 희생시키던, 신경조차 안썼을 위인이다. 그러니 계속 후궁이 늘어났겠지?


1897년 10월 20일 상궁 엄씨가 아들을 낳았다. 제국을 선포하고 일주일이 지난 날이었다. 이 아들이 영친왕 이은이다. 아들이 태어나고 이틀 뒤 고종은 엄 상궁을 후궁인 귀인으로 승격시켰다. 3년 뒤인 1900년 8월 3일 고종은 또 다른 후궁 귀빈 이씨를 정2품 후궁 소의로 봉했다. 소의 이씨 또한 일찍 딸을 낳았는데 요절했다. p 242



‘고종이 전 상궁 엄씨를 불러 계비로 입궁시켰다. 민 왕후가 생존해 있을 때는 고종이 두려워하여 감히 그와 만나지 못하였다. 10년 전 고종은 우연히 엄씨와 정을 맺었는데, 민후가 크게 노하여 죽이려 했지만 고종의 간곡한 만류로 목숨을 부지하여 밖으로 쫓겨났다가 이때 그를 부른 것이다. 시해 사건이 발생한 지 겨우 5일 째 되던 날이었다.’ (황현, 『매천야록』)


넉 달 뒤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달아난 ‘아관파천’도 엄상궁이 주도한 일이었고,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8개월 뒤 영친왕이 태어났으니 이은은 그 러시아공사관에서 잉태된 아들이었다. 을사조약 직전인 1905년 10월 5일 황제 고종은 황귀비 엄씨에게 서봉대수훈장을 수여했다. 서봉장은 1904년 3월 신설한 여자 전용 훈장이며 황귀비는 그 첫 수훈자였다. p 243



조선의 마지막 옹주, 고종의 막내딸이라는 덕혜옹주. 과연 고종의 자식은 덕혜가 끝이었나? 땡. 답은 아니다. 덕혜가 막내딸은 맞으나, 그 뒤로도 고종의 자식이 둘 이나 더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죽었지만.



1911년 7월 20일, 식민화 이후 ‘황귀비’에서 ‘태왕비’로 명칭이 바뀐 엄씨가 죽었다. 장례는 8월 20일 치러졌다. 1912년 고종에게 딸이 태어났다. 이 딸이 고종이 아꼈던 외동딸 덕혜옹주다. 어머니는 궁녀 양춘기였다. 덕혜옹주가 태어난 날은 양력 5월 25일이었다. 열 달 회임 기간을 역산하면, 엄비 장례 기간에 덕혜가 잉태된 것이다. 1852년생인 고종은 그해 환갑을 넘겼고 양씨는 서른 살이었다. 창덕궁에 살던 고종의 맏아들 순종은 38세였다. p 244



덕혜가 고종에게 막내딸은 맞지만 막내 자식은 아니었다. 덕혜가 태어나고 2년이 지난 1914년 7월 3일 밤 고종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아들을 낳은 여자는 궁녀 이완덕이었다. 나이 열 셋세 세수간 궁녀로 입궐했던 이씨는 스물여덟살에 승은을 입고 이듬애 아들을 낳고 광화당이라는 당호를 받았다. 고종은 예순두 살이었다. (…) 한 해가 지난 1915년 8월 20일 예순셋 먹은 고종에게 또 아들이 태어났다. 친모는 서른세 살 먹은 궁녀 정씨였다. 정씨는 보현당이라는 당호를 받고 후궁이 되었다. (…) 고종은 또 김옥기라는 또 다른 궁녀를 후궁으로 들였는데 자식을 낳지 못해 후궁지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훗날 순종이 그녀에게 삼축당이라는 당호를 내렸다. 이들 후궁은 모두 고종 생전부터 급료를 받았다. p 246 ~ 247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도망갔던 그 때 엄상궁을 품에 안고, 엄상궁은 영친왕 이은을 임신했다. 엄황귀비가 된 엄상궁. 1911년 엄황귀비가 죽었다. 이때는 이미 조선이라는 나라가 사라진뒤다. 조선은 사라졌지만, 조선왕족은 호의호식하던 그 때다. 뭐 여튼. 고종은 엄황귀비 장례기간에 양씨 궁녀를 품에 안았고, 양씨는 덕혜를 임신했다. 덕혜가 태어나고 2년뒤, 이번에 고종은 이씨 궁녀를 안았고 역시나 아들을 임신했다. 또 2년 뒤 고종은 정씨 궁녀를 안았고, 아들을 임신했다. 그리고 또 김씨 궁녀를 안았다. 



요약하자면 일제의 침략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는 사라졌고, 조선의 백성들은 일제의 수탈로 수십, 수백, 수천이 죽어나갔다. 또 누군가는 독립운동을 하는 힘든 삶을 선택했다. 그런 상황에서 고종을 비롯한 조선왕족은 일본 황족에 준하는 위치를 보장받고, 호의호식하며, 매해 새로운 후궁을 들였다. 이 후궁들은 당연히 급료를 받았다. 조선왕족들에게 지급되는 급료는 당연히 조선 백성들의 고혈로 이루어진 세금이었다.



진짜 제발 고종, 순종, 덕혜옹주 기타 등등 독립운동을 했다더라,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더라, 하는 거짓뉴스좀 그만하자. 뭐, 조선왕족의 피를 이는 누군가는 독립운동 지원을 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저들은 하지않았다. 심지어 망해가는 나라의 마지막 왕족이라고 동정도 필요없다. 뭐 덕혜야 동정을 안할래야 안할수 없긴 한데, 적어도 고종이나 순종은 동정 조차도 필요 없지 않나? 



적어도 고종은 아버지에게 권력을 빼앗은 시점부터, 민비와 그 척족들에게 온갖 뇌물을 받으며, 백성들의 피눈물에는 꿈쩍않던 사람이니.



대구시가 말하는 시대상황에 굴하지 않는 민족정신은 대체 무엇인가


이번엔 위에서 말한, 일본 황족에 준하는 위치를 보장받는 조선 왕족 순종의 이야기. 


1907년 7월 20일 헤이그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아무제 고종을 퇴위시킨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바로 그해 12월 고종과 엄귀비 사이 아들 영친왕 이은을 도쿄로 보낸다. 영친왕은 순종에 이어 조선 왕위를 물려받을 왕세자였다. 그리고 히로부미는 갓 황제가 된 순종을 통감 자격으로 배종해 1909년 1월과 2월 두 차례에 걸려 북쪽과 남쪽으로 순행시켰다. 


왕세자 영친왕 유학은 명목상 권력자인 전주 이씨 왕실을 식민체제에 정신세계부터 길들이려는 조치였다. 이왕 순행은 조선왕조 내내 대중이 한 번도 보지못한 군주를 대면시켜 식민 조선인에게 자발적은 복종을 유도하려는 계획이었다. 천황 메이지를 일본 전국에 여행시켜 ‘근대화 방법을 놓고 분열돼있던 여론을 집켤시키고 중앙정부 중심의 정치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던’ 메이지유신 경험을 그대로 써먹은 작업이었다. 


1909년 1월 4일 융희제 순종이 이렇게 선언했다.


“임금 자리에 오른 뒤 도탄에 빠진 백성 생활을 구원할 일념뿐이었다. 하여 직접 지방 형편을 시찰하고 그 고통을 알아보려고 한다. 통감인 공작 이토 히로부미에게 특별히 배종할 것을 명한다.” (『순종실록』) p 251



일본으로서는 대한제국 황실의 위엄을 빌어 민심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통감부는 관보를 통해 구체적인 일정을 공개했다. 사진가 2명을 따로 고용해 전 일정을 모두 사진으로 남겼다. 남순행과 서순행 전 일정에 거쳐 통감부와 일본에 거칠게 저항하는 민심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구시대 권위를 상징하던 황제를 앞세운 선전극은 성공적이었다. p 252



순종이 일제의 허수아비였는 사실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순종이 행한 모든 일은 일제의 계획하에 일어난 일이니 말이다. 그런데!! 아주 놀랍게도 일제와 순종의 행보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세금 74억원을 투입한 지자체가 있다. 바로. 대구광역시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후 7년이 지났다. (…) 5월 15일 열차 편으로 서울로 복귀한 순종은 6월 8일 다시 열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일본 도쿄로 향했다.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죽었을 때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도쿄 참배를 주장한 적이 있었는데, 마침내 그 동상 계획이 구체화된 것이다. 모든 일정은 총독부가 일본 궁내성과 함께 기획했고, 순종은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순종은 일본 육군대장 정장을 입었고, 가는 곳마다 황족에 준하는 예포 21발로 환영받았다. p 253



9일 순종 일행은 부산에서 황족 깃발을 게양한 일본 군함 히젠함을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효고현 마이코에서는 방직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조선 여공 120명이 나와 환영했다. 나고야에서는 동생 영친왕을 만났다. 6월 13일 도쿄에 도착한 순종은 다음날 오전 천황 다이쇼를 만났다. 배석했던 곤도 시로스케에 따르면 ‘덕담이 오가고 이왕 전화는 다시 절을 하고 물러났다.’ 옛 황제의 권위와 식민 권력의 권위를 중첩시켜 식민 조선 백성들에게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내려는 거대하고 정교한 이벤트였다. p 254



2017년 4월 대구 중구청은 순종이 걸었던 달성공원 앞 도로를 ‘순종황제 남순행로’로 조성하고 순종 동상을 세웠다. 국비 35억 원 포함해 74억 원이 투입됐다. 동상 앞에는 ‘시대상황에 굴하지 않는 민족정신’이라고 적혀있다. p 255



A부터 Z까지 일제의 계획 하에 진행된 순종의 남순행. 이토 히로부미와 모든 일정을 같이한 남순행. 거기다 아주 많은 기록이 남아있는 남순행. 



대구광역시는 이런 순종의 남순행을 ‘시대상황에 굴하지 않는 민족정신’이라고 드높이고, 세금 74억원을 들여 순종의 동상을 조성했다. 대구시가 말하는 ‘민족정신’이 대체 무엇인지, 누가 나한테 좀 알려줬으면 좋겠네? 세금 74억원을 들일만큼 위대한 민족정신이 대체 뭔지 정말 궁금하네. 아 너무 궁금하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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