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선생이 작고한지도 벌써 1년이 되었다. 이제와 말하지만, 난 이어령 선생의 부고 기사가 올라오기 전까지만해도 이 분이 누군지 몰랐다. 부끄럽긴하지만, 부고기사로 인해 이어령이라는 이름을 알았고, 이 분이 문단계에서도 정말 유명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심지어 저서도, 쓰신 글도 어마무시하게 많았는데, 그럼에도 내가 이어령이라는 사람을 몰랐던 이유는 역시나....내 독서 편식이 한 몫 했기 때문일것이다. 지금이야 여러 장르의 책을 두루두루 보려고 노력하는 편이긴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독서 편식이 남아있는데, 과거에는 독서편식이 더욱 심했으니 말 다했다.



이 책 「별의 지도」를 읽기 전까진, 이어령 선생의 저서를 읽어본 적도 없고, 그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어서 위키를 비롯하여 여기저기서 정보를 훑어보았다.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인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 전 문화부장관 등등. 그를 이야기하는 수식어가 정말 많았지만, 대체적으로 한국의 ‘지성’ 이라는 키워드가 많이 보였다. 그와 함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도 많이 보였다. 다만 생전에 언행이나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비판도 많았던 것 같다. 뭐, 이 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생전 행보에 대해선 내가 왈가왈부 할 건 아니고. 



그저 이번에 읽은 이어령 선생의 책 「별의 지도」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자면, 이 분은 유일무이한 대한민국의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쁜 의미가 아닌, 좋은 의미로써의 이야기꾼 말이다. 좀 식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책에 쓰여진 한 줄, 한 줄이 주옥같다고 해야할까? 허투루 쓰인 글이 하나도 없었다. 그의 글에는 역사와 철학, 윤리, 인문학적 사고 등 모든 것이 조화롭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본디 인문학이란 ‘인간과 관련된 근원적인 문제나, 사상, 문화 등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 연장선에서 보면 동양의 사상이나 문화는 공자, 맹자, 순자, 노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서양은 기본적으로 성서, 기독교가 바탕이다. 이렇게 동, 서양의 사상에서 시작하여 중세를 지내 근세, 근대로 넘어오면서 수많은 문화가 생겨나고, 사라지고, 향유했다. 이렇게 방대한 인문학이라는 학문으로 책을 집필한다면, 적어도 그에 상응하는 인문학적 지식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요즘 나오는 인문학 책들은 읽어보면, 그냥 무늬만 인문학이 많아서 실망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추천하는 인문학책이란게 이런건가? 싶은 생각도 들면서, ‘사람들이 숱하게 말하는 인문학책들은 이제 그만 읽어야겠다’라는 생각까지도 했었다. 



헌데 왠걸? 이 책, 이어령 선생의 「별의 지도」를 읽고나서야, 진정한 인문학 책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이어령 선생의 인문학적 지식이 얼마나 방대하고 대단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동양의 정신세계의 바탕이 된 공자, 맹자, 순자, 노자를 비롯하여, 서양의 성서, 서양의 고전문화, 동양의 고전문화등에 대해서 해박하지 않다면, 절대 집필하지 못할 인문학책이다. 다름아닌, 바로 이런 책이 인문학책이다. 이런 인문학 책이라면, 나는 군말없이 인정할 것이며, 이런 책이 인문학 도서라면 수십 권도 읽을 생각이 있다. 이런 인문학책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할 수 있는 인문학책이 아닐런지!



이 책에는 정말 수많은 내용이 있었다. 인문학적 사고, 삶의 태도 등 배울 점도 정말 많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책 속의 키워드는 다름아닌 ‘윤동주’였다. 책의 시작부터, 끝을 장식한 이야기도 시인 ‘윤동주’였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윤동주’라는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 속의 키워드로 ‘윤동주’를 꼽는 이유는 하나다. 이어령 선생의 시선으로 본 윤동주는, 내가 알고 있던 윤동주와는 달랐다. 내가 학교에서 배웠던, 일제강점기에 시로써 일제에 저항한 ‘저항시인’ 윤동주가 아니라, 별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시인’ 윤동주 였다.




 



덕분에 책장에 꽂혀있던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다시 꺼내어 읽어보았다. 저항시인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읽었을 때는 몰랐던 윤동주 시인의 시가 새로이 보였다. 



이어령 선생이 말하는 시인 윤동주. 그에 대한 내용만 발췌하였다.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읽으려 한다면, 이 책을 읽거나, 이 포스팅을 읽은 후에 읽었으면 좋겠다. 그럼 ‘저항시인’ 윤동주가 아닌, 별을 노래하는 ‘시인’ 윤동주가 보일테니.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



눈을 들어 밤하늘을 보면 수많은 별이 있습니다. 한국인은 ‘별’하면 먼저 윤동주 시인을 떠올리게 되지요. 지상에서 마주한 얼굴이 하늘로 올라가 하늘의 얼굴, 하늘의 눈동자가 되면 윤동주의 시에 가장 가까운 이야기가 됩니다. (…) 첫 행과 둘째 행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은 맹자의 어록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어린 시절 윤동주는 《맹자》와 《성경》을 배웠다고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선약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가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다고 하지요?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위치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란 하늘을 뜻합니다. 


윤동주가 《맹자》와 《성경》에서 영향을 받았으리라 여겨지지만 <서시>는 동양적인 문맥의 ‘천天’의 개념, ‘앙불괴어천’ 사상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어요. 옛날 한국인들은 오늘의 우리보다 훨씬 더 사물로부터 많은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사물 속에 숨겨져 있는 본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본성은 하늘이 주는 것이라 여겼어요. 인간은 그 무수한 사물의 본성을 통해 물질의 만족이 아니라 정신의 행복을 찾으려는 존재요. 여기서 본성이란 쉽게 말해 적자의 마음, 즉 아이의 마음입니다. 그 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을 맹자는 ‘대인’이라 불렀는데, 몸뚱이가 큰 사람이 아니라 정신적 행복을 느끼고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p 015~017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책에 줄을 긋고 칠하면서 배운 시가 윤동주의 <서시>입니다. ‘윤동주’, ‘저항시인’,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하며 줄줄줄 외웠죠. 윤동주 저항시? 윤동주가 저항하는 거 봤어요? 다 선생님에게 들은 얘기지요. 이 시를 읽기도 전에 선생님이 알려준거에요. “윤동주는 저항 시인이다. 이 시는 일제에 저항한 시다”라고 말한 뒤 시 읽기를 시작하지요. (…) 윤동주 선생이 저항시인이 아니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저항시인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이 시를 보면 이 시의 진짜 값어치를 모르게 돼요. 다 일제에 저항하는 시로만 읽으니까, 이 시의 장치나 비유도 딱 그렇게 한정짓게 되니까요. p 096



저항시라는 말도 모르고 윤동주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길을 걷는데 그냥 <서시>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기에 주워 읽었다 칩시다. 그런 마음으로 솔직하게 그냥 읽어보세요. 이 시만 읽어서 ‘아, 이분이 후쿠오카 감옥에서 생체실험 희생자로 돌아가시고, 그 집안도 다 기독교인데다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지’ 하고 느껴질까요? 그런데 저항시인이라는 프레임을 제거하고, 시대상황도 배제하고 이 시를 읽으면 ‘모든 죽어가는 것들’에 예외가 있습니까? 일본 사람, 한국 사람의 구별이 있어요? 공자님이 말씀하신 대로 ‘나라’를 빼고, 이 시에서는 ‘노자’까지 나갔어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이니까 ‘사람’까지 뺐잖아요. (…) 태어나면서 사형선고를 받는 것이 사람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죽을 줄 알면서도 버티고 싸우지요. 윤동주는 그 안에서 버티는 것이 아니라 하늘까지 올라갔어요. 하늘에 올라가면 별이 있습니다. 땅을 노래하는 마음이 아니라 별을 노래하는 거니까 벌써 그 안에 역사를 내재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역사를 포함하고 점점 위로 올라가면 땅이 보이고 지구가 보이고, 거기서 쭈욱 올라가서 별을 노래하는 겁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는거죠. 그러니까 하늘까지 못 올라간 사람, 별을 모르는 사람은 풀잎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리가 없어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라는 말은 ‘현재 나 자신은 부끄러울 것이 전혀 없다, 나는 결백하다’, 이런 의미라기 보다는 ‘나는 그런 뜻을 가지고 있다’며 스스로에게 맹세하는 말이에요. 그렇게 살고 싶다고 소원하는 거죠. p 099



<서시>를 일제에 대한 저항시라고 했을 때는 이 시를 정치적 레벨에서 읽은 것입니다. 국가 간의 정치 속에서 이 시를 읽을 수 있어요. 국가의 개념을 털어내고 인간의 레벨의 문제로만 읽었을 때는 휴머니즘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종교적, 초월적 하늘의 레벨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해서 <서시>는 저항시(정치), 인간주의시(휴머니즘), 종교시 이렇게 3개 층위로 읽을 수 있지만 전체적인 뜻은 천지인입니다.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애, 인간애, 우주애 말이죠. 이처럼 하늘, 땅, 사람으로 나눠놓으면 놀랍게도 이 시가 금세 보입니다. p 116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는 마음의 기저에는 ‘나-하늘’이 직접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연결된 지상의 인간들은 사랑을 해도 뭘 해도 다 죽지만 별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했을 때, 내 마음속 심리적인 부끄러움이나 괴로움을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극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시인의 마음이죠. 정치인이나 종교인의 마음이 아니라 시인이니까 윤동주는 하늘의 별을 노래하지 스스로 하늘의 별이 되지는 않았어요. 그러니까 다시 천지인으로 돌아옵니다. 제일 높은 곳에 ‘별’이 있고, 가장 아래에 ‘잎새’가 있고 그 사이에 ‘내(사람)’가 있습니다. 위를 보고, 아래를 보고, 다시 시인으로 돌아오는 것이지요. p 117



인간의 마음속에는 땅의 마음만이 아니라 하늘의 마음이 있고 인간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하죠.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냐. 너도 사람이냐?”고 할 때는 ‘그 말을 듣는 너라는 상대가 짐승보다 못하다’는 비난입니다. 그러데 “나도 사람이야” 할 때는 실수할 수 있고 완벽할 수는 없는, 신이 아닌 인간이라는 뜻이에요. 신처럼 완벽할 수는 없지만 짐승은 아니지요. 지금 ‘사람’은 신과 짐승 사이에 있습니다. p 120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기 때문에 하늘을 볼 때는 신을 향하고 땅을 볼 때는 짐승을 향합니다. 그래서 그 사이에 있는 인간의 눈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윤동주의 눈이 그래서 아름다워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기를 맹세하는 사람이니까 사랑해야지, 영원히 미래를 향해서 사랑해야지,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가 이렇게 아름다운 겁니다. p 122



이 시에서 바람이 두 번 나옵니다. 처음에는 ‘잎새에 이는 바람인데, 그 바람이 지금은 ‘하늘의 별에 스치고’ 있어요. 모든 것을 시들게 하고 죽게하는 바람은 시간이죠. 그 시간이 별에 스치면 영원까지 갑니다. 그러니 윤동주가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고 말할 때의 그 길은 풀잎에서부터 별까지 가는 것이지요. 바람을 따라서, 잎새에 이는 땅의 바람에, 저 허공에 부는 바람까지 뻗쳐서 별까지 가는 그 과정의 길입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길이지요. p 123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하고 서술어 대신 말줄임표 (….)를 썼어요. 이건 읽는 사람이 서술부의 시제를 무엇으로 넣어 읽느냐에 따라 이 문장을 과거로도 현재로도 미래로도 읽을 수 있다는 거지요. 한 번 해볼까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맹세했다’라고 읽으면 과거에 맹세한 것이지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맹세한다’라고 읽으면 지금 현재에 내가 맹세하고 있는 것이에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맹세할 것이다’라고 읽으면 미래에 그리 맹세할 것이라는 다짐이 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다는 이야기예요. 부끄럽지 않게 살았고, 살고 있고, 살 것이라는 말이지요. p 130



그런데 윤동주가 시인이 아니라 군자라면 어떻게 될까요. 군자는 이미 초월한 사람입니다. 땅에 사는 보통의 사람이 아니에요. 맹자는 《맹자》 <진심편>에서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부모님과 형제가 모두 무사하면 첫번째 즐거움이고, 둘째는 위로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아래로는 사람을 대함에 있어 부끄럽지 않을 때가 두 번째 즐거움이며, 셋째는 천하의 영재를 얻더 교육을 함이 세 번째 즐거움이라 하였습니다. 윤동주의 시는 이 두 번째 즐거움에서 나옵니다. ‘앙불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 윤동주의 <서시>를 전부 과거형으로 고치면 윤동주는 시인이 아니라 군자가 됩니다. 과거형으로 바꾸어버린 시에는 망설임과 노력하려는 마음과 현실에서의 부딪침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요. 그런 것들이 시인의 마음인데요, 남에게 말하는 것은 시가 아니라 자랑이에요. 과거형으로 바꾼 <서시>에서 윤동주는 시인이 아니라 군자가 되었습니다. p 136



<서시> 원문을 보면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어요. 이루어진 것은 보통 과거형, 완료된 문장으로 서술되는데 이 시에서 과거형으로 쓴 것은 ‘괴로워했다’ 단 하나예요. 그러니까 괴고워한 것만은 사실이고 현실이지요. 나머지 서술부의 시제를 보면 ‘사랑해야지’ ‘걸어가야겠다’ 하는 미래의 다짐, 미래의 원망遠望과 의지만이 나타납니다. 일종의 자기 자신에 대한 맹세지요. p 137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이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윤동주 <자화상>



윤동주가 만약 별이 되었다면, 별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별 그 자체가 되었다면, 땅을 내려다보면서 어떤 시를 썼을까요. 윤동주의 다른 시 <자화상>에서는 이미 시인을 초월해서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p 177



이 시를 보면 윤동주는 이미 땅 위의 인간, 시인을 초월했어요. 우물 속을 들여다보니까 제 얼굴이 있을 텐데 그것을 ‘낯선, 이상한 사람’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사람은 이미 위에서 자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윤동주가 우물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는 행위는 일종의 ‘반성적 사고’ 입니다. ‘참 자기찾기’인 것이죠. 그런 점에서 현실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아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일종의 격려 혹은 박수치는 행위와 다름이 없지요. 그러니 우물을 내려다보고 자신과 마주하며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겁니다. p 180



우리는 윤동주를 일제강점기 역사 속에서 사람의 마음을 울린 저항시인으로 알고 있지만, 만약 윤동주가 역사적 차원에서 저항시로만 <서시>를 썼다면 광복 후에도 우리의 가슴을 울리지는 않았겠지요. 윤동주의 시는 우리 생각의 틀을 한 번 더 깨주고 더 큰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만들어주었던 것입니다. 앞으로 한국인이 할 일은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일, 하늘에서 한국을 내려다보는 별이 되는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 역사 속에서 천지인의 천天을 가지는 일입니다. 윤동주는 하늘로 올라가는 그 길이 아름다운 포물선임을 가르쳐준 시인입니다. p 18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