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책을 읽으며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을 쓴 이는 영원한 청년작가로 불리우는 소설가 박범신님. 아, 물론 자타공인 독서편식가인 난 문학소설이라고 불리우는 책과는 거리가 멀기에, 박범신 님께서 쓰신 소설들은 대게 「은교」나 「고산자」 처럼 영상화된 것만 봤을 뿐이다. 뭐, 한마디로 박범신 님의 글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는 셈.
그래도 언젠가 읽어봐야지 마음은 먹었었는데, 이번에 딱! 박범신님 산문집 『순례』가 출간되어 딱!! 읽을 수 있었다. 문학소설은 당최 눈이 잘 안가지만, 산문은 그 결이 또 다르기에. 무엇보다 이렇게 유명하신 분(?)의 산문집은 왕왕 읽어보고 그 느낌이 좋았던터라, 꽤나 기대를 품고 박범신님 산문집 『순례』를 읽기 시작했다.
역시나는 역시나였다. 박범신님의 산문집 『순례』는 읽으면 읽을수록 ‘나’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바라는 행복은 무엇인지, 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게 맞는지 등등. 정말 오롯이 ‘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박범신님 산문집 『순례』의 전체적인 틀은 편지형식이다. 박범신님께서 히말라야를 순례하며, 그날 그날 K형에게 쓰는 편지형식의 글이다. 약간 삼천포긴 하지만, 내가 이렇게 깊이 있게 쓰인 편지를 받아본적이 있었나 싶기도 하고, 이렇게 편지를 써본적이 있었나 싶기도 하고. 만약 내가 편지를 쓴다면 이렇게 깊이있는 글을 쓸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정말 이렇게 단어 하나하나에 깊이가 있다고 느낀 책은 오랜만이라고 해야하나?
그도 그럴 것이 요즘 사람들이 주로 보는 글들은 조그만 스마트폰 화면 속에 떠있는 짧은 글들이 많다. 심지어 누군가와 소통을 할 때도 조차도 글을 쓰기보단 단축말이나 이모티콘 등을 주로 이용한다. 깊이 있는 글은 고사하고, 짧은 글조차도 잘 안쓰려는게 요즘 추세라면 추세랄까? 그 뿐인가. 가끔가다 책에 대한 이야기, 누군가가 쓴 문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할 만한 사람이 없다.
만약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하루에, 아니 일주일에 책 1권이라고 읽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면 대다수가 안 읽는다고 말한다. 아니, 바빠서 못읽는다고 한다. 슬프지만 이게 현실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이 문장 너무 멋지다’, ‘이 책 읽어봤어?’ 라고 이야기 하고 싶어도, 들어줄 사람도 없고 공감해줄 사람이 없다. 근데 정말 아이러니하다. 바빠서 책을 못 읽겠다는데, 왜들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 할 시간은 많을까? 그냥 뭐랄까, 이렇게 깊이 있는 글들이 점차 사라지는 현실이 슬프다.
이왕 주절주절거리는 김에, 조금 더 주절거리면.
요즘 나오는 에세이를 보면(심지어 베스트셀러라고 하는 책들), 대게 신변잡기 글이 많다. 내가 알기로는 에세이 역시 산문의 하위호환 영역일텐데, 이상하게 글에 깊이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저 글쓴이의 이름값(?)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느낌이랄까. 그래서 그럴까, 난 ‘에세이’라고 불리는 책들 보다는, 이렇게 ‘산문’으로 불리는 책들을 좋아한다.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산문집’이라는 타이틀을 들고 나온 책들은 언제나 글에 깊이가 있었고, 나를 오래도록 생각하게 하였으니까. 물론 그런 산문집들의 저자는 대게 박범신님 처럼 관록이 있는 분들이 많긴 했지만.
유명인의 에세이, 신변잡기 글을 읽으면 이상하게도 ‘나’ 자신에 대한 생각보다는 그저 눈 앞에 보일듯 보이지 않는 성공에 열을 내거나 혹은 ‘이 사람은 했는데, 난 왜 이렇게 못하지?’ 같은 자기비하에 빠지는 경우가 왕왕 있다. 물론 정말 깊이있고, 오롯이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는 에세이도 많지만 말이다. 뭐,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요즘 핫한 인물이 쓴 에세이, 베스트셀러가 된 에세이라고 해서 다 좋은 글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오히려 난 지금의 20대들에게, 현실에 아파하는 청춘들에게 그런 에세이보다는, 박범신님의 산문집 『순례』를 추천하고 싶다. 그대들이 지금 힘들어하는 게 삶의 전부가 아니라고, 그럴수록 오히려 ‘나’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한다고- 적어도 이 산문집을 읽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비우니 향기롭다
히말라야는 무엇보다 내가 내 집, 내가 속한 사회에서 악을 써가며 지키고자 했던 것, 사악한 전투, 거짓말, 허세, 그리고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이 주었떤 상처들까지, 얼마나 나와 상관없이 주입된 가짜 꿈들에서 비롯된 것인이 분명히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걷는 것뿐입니다. 자동차도 없고 비행기도 없습니다. 오직 내 앞에 놓인 길만이 나를 도울 뿐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은 분산되지 않습니다. 멀리 있으니 오히려 내 나라가 조감도처럼 한눈에 보이고 그곳에서 습관에 의지해 죽을 등 살 등 달려온 나의 지난 삶도 아프게 보입니다. 바로 ‘은혜로운 생음’이 불러온 본원적 세계를 사실적으로 보고 느끼는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p 017
티베트 불교의 성자 밀라레파는 이렇게 읊었습니다. 그가 지닌 것은 배고픔을 잘 견디는 몸뚱이와 누더기 면포와 헤진 방석뿐이었으나, 그는 세계를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감히 밀라레파와 비교할 순 없겠지만 나는 이제 내가 가진 모든 것, 이를테면 좋은 옷, 기민한 휴대전화, 요술 상자 텔레비전, 재빠른 자동차로부터 벗어나도 외롭지 않은 시간의 길로 들어갑니다. 느릿느릿, 걷겠습니다. 그것은 오래전 전근대의 ‘한량’들이 갔던 길이며, 밀란 쿤데라의 표현에 따르면 ‘신의 창’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p028
돌림노래는 길고 따뜻했습니다.
간간이 웃음소리와 잡담이 돌림노래 사이로 섞여 들어왔습니다. 촛불도 켜지 않은 어둠 속에서 손에 손을 잡고 둘러앉아 돌림노래를 부르면서 밤을 보내는 저들에게 ‘가족’은 무엇일까요. 제 눈엔 자꼬, 온 가족이 모여도 서로 마주 앉기보다 일렬로 앉아 현대인의 신이기도 한 텔레비전을 향해 경배드리는 우리네 가정의 밤 풍경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p 052
K형에게 여기에서 다시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행복해지기위해서 이순간 무엇 무엇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내가 가진 것, 더운 밥과 두 평 넓이의 방과 시멘트 욕조와 새로 빤 내의와 삐걱거리는 침대를 갖고 있나요? 지금의 나처럼 모국어에 대한 감동을 혹 갖고 있나요? 그렇다면 형이 가진 그것들로 지금의 나만큼 충만되고 행복한가요?
나는 히말라야에서 보았습니다.
내가 본 것은 속도를 다투지 않은 수많은 길과, 본성을 잃지 않은 사람과, 문명의 비곗덩어리를 가볍게 뚫고 들어와 내장까지 밝혀주는 투명한 햇빛과 자유롭기 한정없는 바람, 만년 빙하를 이고 있어도 결코 허공을 이기지 못하는 거대한 설산들을 보았습니다. 또 감히 고백하자면, 행복하고 충만 되기 위해서 내가 이미 너무도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며, 행복해지는 길이 어디에 있는이 어렴풋하게나마 찾을 수 있었습니다. p 087
비가 오락가락 합니다.
나는 넓은 비닐 주머니를 거꾸로 쓰고 흐느적흐느적 빗속을 겉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내가 사랑했떤 사람도 떠오르지만 내게 상처를 주었떤 사람, 또 내가 상처를 준 사람들도 생각납니다. 오해에 불과한 작은 일로 나를 버린 사람, 아집에 따른 어리석은 고집으로 내가 버린 소중한 사람들도 떠오릅니다. 회한은 많고 갈 길은 멀고, 남은 사랑은 아직도 이렇듯 여일하게 뜨겁습니다. p 103
나는 매 순간 눈물겨웠습니다. 나의 존재가 너무도 가벼워 눈물겨웠고, 죽을 둥 살 둥 일벌레로 살아온 우리네 넓은 날의 초상이 안쓰러워 눈물겨웠고, 동강 난 조국에 살면서 그래도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서겠다는 장한 꿈을 쫓아 오늘도 다리가 찢어져라 내달리고 있는 조국에 대한 연민 때문에 눈물겨웠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p 114
행복해지는 길을 찾지 못한다면 부자가 될 필요도 없습니다. 죽어라 일해 돈을 버는 건 최종적으로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불어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지금 어떤 ‘샹그릴라’를 가슴에 품고 있는지, 과연 행복을 향한 비전은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물론 이런식의 질문이 자본주의적 속성을 쫓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유쾌한 질문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나는 압니다. ‘사는 게 이게 아닌데….’라는 회의는 뒤집힌 압정과 같아서 밟을 때마다 아, 하고 억눌려 있는 본성이 속에서 비명을 지를테니까요. p 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