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코와 함께 한 일본 사찰 순례 - 우리가 미처 몰랐던 불교의 나라 일본 이야기
나카노 요코 지음, 최선일.홍은미 감수 / 종이와나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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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요코와 함께한 일본 사찰 순례」는 2018년에 출간되어, 당시에 읽었던 책이다. 거기다 아주 소오름돋게도 당시에 책을 읽고 리뷰를 남겼던 기록이 이 블로그에 고스란히 남아있다-_-;;; 당시의 리뷰 포스팅을 지금 읽어보니 참 쉽게도 썼다. 때마침 일본여행도 무비자로 풀렸고해서, 이 책을 다시 읽고 리뷰를 남겨보자 한다. 




나는 일년에 2~3회 일본을 갈 정도로 일본 여행을 좋아했다(물론 19년 4월 이후로 지금까지 일본을 못가고 있지만). 이렇게 일본을 가면 내가 주로 방문하는 여행지는, 흔하디 흔한 관광지보다는 주로 한반도와 관련된 유적지(고대부터 근대까지)를 찾아다닌다. 한국에서도 유적지를 찾아다니는데, 일본에서라고 다를까! 거기다 한반도 도래인과 관련된 유적지는 대게 사찰 아니면 신사다보니, 당연히 이 책을 읽을 수 밖에! 겸사겸사 도래인과 관련된 사찰이 아니어도, 일본에도 멋진 사찰이 많기도 하니까.



이 책은 저자의 나라, 교토, 시가 지역 사찰 여행기를 담은 일본 여행책이다. 해당 사찰에 대한 유래와 역사적 사건들, 사찰과 연계해서 가볼만한 곳 등이 이 책에 실려있다. 내 개인적으로는 어디를 가든, 그 곳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어야 더 재밌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곳이 한국이든 외국이든. 하지만 한국인에게 일본 사찰은 그냥 외국 절 또는 관광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경우가 많다. 거기에 일본 사찰 유래라니, 모르는게 당연하달까? 그래도 알고 보면 좀 재미있으니, 아무리 일본에 놀러왔다고 하더라도, 조금은 알고 봤으면 좋겠다. 특히 한반도 도래인과 관련된 유적지는 더더욱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혹시나 일본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그중에서도 교토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나라, 시가 포함) 이 책을 여행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한반도 도래인에 의해 창건되었거나, 도래인과 관련된 사찰들은 일본 곳곳에 산재해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곳이 대표적인 곳이 나라의 아스카데라, 호류지, 도다이지 등이다.


비행기가 없었던 옛날에도 배를 타고 한반도에서 일본을 건너온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도래인이다. 5세기 이후 아스카에서는 한반도를 기원으로 하는 토기나 건물, 온돌 등 도래인의 흔적이 많아졌다고 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도래인 기술자들을 아스카 마을 시마노쇼 부근에 정착시켰다고 한다. 도래인들은 건축, 야철, 방직, 토기, 문서 작성 등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고 일본 문화와 기술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6세기 들어 백제에서 불교도 전래되었다. 지금은 일본에서 불상을 배례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지만 당시에는 큰 충격이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p 017



아스카데라를 발원한 소가씨는 도래인의 후손으로 알려져있으며, 아스카데라를 건축한 기술자들도 도래인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도래인과 관련된 지역에서는 한반도계 유물들이 나오기도 하고, 인근 지명들도 백제(쿠다라), 고구려(코쿠리), 신라(시라기), 가야(카라) 와 관련된 것들이 많이 있다. 지금까지 내가 책으로 읽고, 직접 보고온 것으로 비춰볼 때 대체적으로 나라지역은 백제계 도래인이, 교토지역은 신라계 도래인이, 도쿄는 고구려계 도래인이, 큐슈는 가야계 도래인과 관련된 것들이 많이 보인다. 특히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도래인들은 기존에는 국가간 외교로 넘나들다가, 일본으로 대거 넘어간 시기는 대체로 각 국가들이 멸망했던 시기이다. 특히 백제부흥운동, 백촌강전투 패배를 기점으로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대거 넘어가기도 했다. 



백촌강전투 당시에 일본 천황가는 신료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백제에 대규모 군사지원을 하기도 했다. 왜냐? 다들 들어보았을 것이다. 일본황실에 백제인의 피가 섞여있다는 뭐 그런 이야기. 실제로 교토 히라노신사에서 모시는 네 명의 신이 모두 한반도 신이다. 뭐 걔중에서도 두 명의 신은 백제 근초고왕, 근구수왕 또는 한반도의 조왕신과 부엌의 불신이라고 하는데, 나머지 두 신은 확실하다. 두 신은 간무천황의 모친인 고야신립의 조상신과 백제 성왕이다. 간무천황의 모친인 고야신립은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하며, 백제 성왕이야 우리가 더 잘아니 PASS! ......는 어디까지나 말꼬리가 길어진 TMI. 


(*한반도 도래인 관련 도쿄, 교토 신사 및 사찰에 대한 내용은 일본여행 포스팅 곳곳에 있으니 궁금한 분들은 내 여행기 포스팅을 보면 될듯!)



다시한번 말하지만 이 책은 나라, 교토, 시가지방의 ‘사찰’여행기를 남은 책이다. 이 책에 실린 교토 사찰은 총 14곳인데, 그 중 8곳은 내가 가봤던 사찰이라, 그 사찰들을 위주로 기록을 해보려고 한다. 한마디로, 내 교토여행기 복기인셈! (나라, 시가지역은 여러 역사책으로만 익숙할뿐, 실제로는 아직 못가봤으므로^_T). 다만 아쉬운점은... 교토의 다이토쿠지가 없다는 것이다. 다이토쿠지 진짜 멋진 사찰인데T_T. 




▶ 덴류지(천룡사)


덴류지가 자리잡은 사가노, 아라시야마라고 불리는 이지역은 고대에 도래인 하타씨에 의해 개척된 곳이라고 전한다. 경치가 아름다운 이 지역은 헤이안쿄 천도 이후 천황가의 이궁과 귀족의 별장이 지어진 지역이 되었다. (생략) 임제종 덴류지파 대본산 덴류지는 1339년에 나라, 요시노에서 억울하게 죽은 고다이고 천황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시카가 다카우지 장군이 무소국사를 개산조사로 창건한 것이다. p 152



14세기 중반에 일어난 화재를 비롯하여 8번 대화재의 피해를 입어 소실과 재건을 반복했다. 메이지 시대의 폐불훼석 때 사찰 땅이 메이지 정부에 많이 수용되어 버리고, 현재 사찰 경내지는 원래의 10분의 1정도가 되었다. 현재 경내에 있는 건물 대부분이 메이지 시대에 재건된 것이다. p 154


아라시야마는 교토에 갈때마다 들렸던 것 같다. 아무래도 교토 아라시야마를 개척, 개발한 사람들이 한반도 도래인인 하타씨다보니! 하타씨에 대해 조금 이야기하자면, 하타씨는 가야계 신라인 출신이라는 설이 제일 유력하다. 성씨는 한자로 ‘진(秦)’씨, 일본어로 읽으면 ‘하타’다.



 하타씨의 대한 흔적은 교토 곳곳에 산재해있다. 하타씨는 교토에 터를 잡고 아라시야마를 비롯하여, 교토 곳곳에 뿌리를 내렸다. 교토 아라시야마의 다리, 도월교 라던가 ‘술’ 신사인 마츠오신사는 하타씨 작품이다. 역시나 관광지로 핫한 ‘천개의 도리이’ 후시미이나리 신사도 하타씨의 작품이며, 교토 우즈마사 일대의 누에신사나 고류지, 뱀무덤 모두 하타씨가 시작이다. 하타씨의 부흥기를 일으킨 사람은 ‘진하승(하타노 카와카츠)’라는 사람으로 쇼토쿠 태자의 측근이기도 했다.


 


자, 그럼 ‘진씨’인 그들이 왜 일본에서 ‘하타씨’로 불리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강원도에 위치해있던 고대국가 ‘파단국(파조국)’이다. 신라 지증왕 때, 그 유명한 신라장군 이사부가 실직국(삼척), 파단국(울진), 우산국(울릉도)를 점령하면서 이 땅이 신라에 병합되었는데, 당시 파단국에 있던 사람들이 바다건너 왜로 넘어가면서, 자신들의 이름을 ‘파단’의 일본 발음인 ‘하타’라고 정했다는 뭐 그런이야기다. 파단국이 신라가 되었으니, 결국 신라에서 왜로 넘어간 사람들이 되고, 자연스레 신라계 도래인이 된다고나 할까?




▶ 기요미즈데라(청수사)


도래인의 후손인 사카노우에 다무라마로는 임신한 아내에게 몸에 좋은 것을 먹이려고 기요미즈야마에 들어와 사슴을 사냥했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샘물을 찾아봤더니 오토와노타키 폭포를 찾았고 거기서 겐신을 만났다. 겐신에게 관음의 불살행과 대비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다무라마로는 큰 감동을 받아서 둘이 힘을 합쳐 함께 사찰을 건립하기로 약속했다. 780년에 기요미즈데라는 이렇게 사카노우에 가문의 사찰로 시작했다. p 115


교토의 핫하디 핫한 관광지 기요미즈데라. 교토에 간 한국인이라면 1번 이상은 갔을 것이다. 난 음...기요미즈데라를 세번갔나, 네번갔나. 여튼 자주 갔다. 이유인 즉, 남들처럼 기요미즈데라가 핫하디 핫한 관광지라서라가 아니라, 백제 도래인과 관련된 사찰이기 때문에 갔던 곳이다. 사카노우에 다무라마로는 일본 사서 <속군서류종(續群書類從)>에 따르면 290년에 백제에서 건너온 백제 왕족 ‘아지사주(아치노오미)’의 후손이라고 한다. 뭐,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면 ‘아지사주’는 야마토 아야씨의 조상이기도 하다고...는 역시나 TMI.



 


위 책에서 언급했듯 기요미즈데라를 건립한 사람은 사카노우에 다무라마로라는 사람이다. 헤이안시대 무관이면서 다이나곤 직책을 가졌던 나름 고위급 관리였다. 일본은 예로부터 한 가문에 종속된 신사나 사찰이 대다수였다. 그러한 맥락에서 기요미즈데라 역시 사카노우에 가문 사찰이었다. 실제로 현제 기요미즈데라 전각 중에는 ‘전촌당’이라는 전각이 있는데, 기요미즈데라를 창건한 사카노우에 다무라마로 부부를 모시고 있다. 다만 공개가 안되어서, 볼 수가 없다^_T. 특별한 날에는 공개를 한다고 하는데, 그 날을 잘 몰라서 ㅋㅋㅋㅋ 교토 갈때마다 키요미즈데라를 갔던 것 같다.



아참, 지금 기요미즈데라는 창건당시의 모습은 아니다. 기요미즈데라는 엔라쿠지 승병들의 잦은 습격으로 파괴와 재건이 반복되었고, 교토의 다른 사찰들처럼 오닌의 난때 완전 소실되었다가 에도시대 때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된 것이다.




▶ 뵤도인(평등원)


산으로 둘러싸이고 비와코에서 내려온 우지강의 맑은 강물이 흐르는 풍광명미한 우지는 헤이안 귀족들이 별장을 짓는 곳이기도 했다. 뵤도인 시작도 9세기 중엽에 세워진 별장 우지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로 황실 일족이 소유하던 우지원을 후지와라노 미치나가가 998년에 물려받았다. 그는 이곳을 우지덴이라고 부르고 경승을 즐겼다. 그것을 미치나가의 아들인 요리미치가 물려받았다. 요리미치는 1052년에 본당을 건립했다. 이때부터 우지덴은 뵤도인이라는 사찰로 불리었다. 이것이 뵤도인의 시작이다. p 126


우리나라 수학여행 필수 코스 경주 불국사! 불국사 다보탑은 우리나라 10원 동전에 뒷면에 새겨져있다. 그렇다면 일본은? 일본 역시 수학여행 필수코스가 있는데, 그 필수 코스가 10엔 동전 뒷면에 새겨져있다. 바로 교토부 우지시에 있는 사찰 뵤도인. 다만 이 곳은 한국인 관광객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음, 거의 없다고 하는게 맞으려나. 우리가 아는 교토는 교토부 ‘교토시’에 해당하다보니, 자연스레 교토 외곽인 우지는 한국 사람들이 잘 찾지를 않는다. 완전 멋진 곳인데.....ㅋ




우지라는 곳이 헤이안 시대 귀족들의 별장이 있던 곳이기도 했을뿐더러, 뵤도인은 무려 황실 일족의 별장이 그 시작이었으니 얼마나 화려한지는 두말 하면 잔소리. 뵤도인 인근에는 우지강이 흐르고 있는데, 그곳에 <겐지모노가타리>의 저자 ‘무라사키 시키부’ 동상도 있다. <겐지모노가타리> 자체가 헤이안 시대 고위층 귀족들의 연애(좋게 말하면..ㅋㅋ)를 담은 일본 최초의 고전소설이다. <겐지모노가타리>를 읽은 게 워낙 오래전이라, 그저 히카루 겐지가 여러 궁중의 여자를 후린(-_-;;) 독보적인 바람둥이 정도로 기억...나는데 흠 뭐 여튼! <겐지모노가타리>의 배경이 헤이안시대다보니, 자연스레 교토의 여러 장소가 나온다. 우지도 당연히 소설의 배경으로 나오는데, 그래서 우지강변에 무라사키 시키부의 동상이 있었나...기억이 가물가물. 확실한건 무라사키 시키부 동상을 발견하고 좋다고 사진 찍었다는 뭐 그런 TMI.




▶ 닌나지(인화사)


닌나지가 위치한 이곳은 헤이안 시대 초기부터 경승지로 알려져있고 많은 귀족이 별장을 지었다고 한다. 여기에 886년 고코천황이 사찰을 발원했다. 그러나 이듬해 고코천황이 세상을 떠나자 천황의 아들인 우다 천황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서 888년 사찰을 개창했다. 당시의 연호인 ‘닌나’가 닌나지라는 사찰 이름으로 붙여진 연유다. 우다천황이 897년 31세때 왕위를 아들에게 양위하고 899년에는 출가해서 법황이 되었고 904년 닌나지에 어실을 만들었다. 법황이 거주하는 곳을 오무로 라고 부르는데, ‘닌나지에 있는 오무로’가 ‘오무로가 있는 닌나지’가 되어 이후로는 ‘오무로’가 닌나지 일대의 지명이 되었다. p 098



현재 닌나지 금당이 고토고쇼 시신덴을 옮겨 놓은 것인데 당시의 궁전건축의 특징을 보여주는 건물로 정말 귀중하다. 금당뿐만 아니라 닌나지는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일본미를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갖고 있는데 역사적으로 황실과의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 그 연유라 할 수 있다. p 101

*법황: 출가한 태상황

*오무로: 법황이 거주하는 곳



 


 

오무로 닌나지. 한국인들에게는 조금 생소한 사찰이지만, 교토에서는 벚꽃명소로 엄청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서 피는 벚꽃은 교토에서는 개화가 가장 늦은반면, 아주 큰 왕벚꽃이라 엄청 이쁘다. 특히나 벚꽃 사이에 있는 오중탑을 보면 ‘오오!’ 아. 물론 봄의 닌나지는...난 사진으로만 봤다 ^_^ㅋㅋㅋ


난 가을의 닌나지만 봤을 뿐이다. 헤헤히ㅣㅎ.ㅎ..히히. 모름지기 ‘벚꽃명소=단풍명소’가 아니겠는가? 멋진 단풍을 구경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들렀던 닌나지는, 역시나 어마무시한 단풍들이 내 눈앞에 쫘르르르르.



특히나 닌나지는 ‘오무로’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법황이 있던 곳이라 사찰의 위용이 대단하다. 당시 천황가에서 팍팍 밀어줬으니, 으리으리할 수 밖에! 물론 오닌의 난 때 다른 교토의 사찰들처럼 잿더미가 되어버렸지만, 에도시대에 고토고쇼의 건물 일부를 하사 받았다. 닌나지의 금당이 바로 고토 고쇼의 건물! 황궁의 건물을 사찰로 썼으니 으리으리할 수 밖에 ㅋㅋㅋㅋ




▶ 킨카쿠지(금각사)


킨카쿠지 정식 명칭은 로쿠온지라고 한다. 현재 킨카쿠지가 있는 곳이 원래 무로마치막부 3대 장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별장 기타야마전이 있었다. ‘로쿠온’은 요시미쓰의 법호인 ‘로쿠온인’에 유래된다. 킨카쿠지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이 에도시대에 들어서다. (생략) 1408년에 요시미쓰가 세상을 떠난 후 기타야마전의 대부분이 해체되어 다른 사찰로 옮겨졌다. 유일하게 남은 것이 훗날 킨카쿠지라고 불리는 사리전과 정원이었다. 이 사리전을 중심으로 창건된 사찰이 바로 킨카쿠지다. 1420년 무렵에 덴류지 개산조사인 무소국사를 권청개산으로 기타야마전이 로쿠온지가 되었다고 전한다. p 160



창건 후 큰 전란이나 화재를 겪으며 버텨오고, 살아남은 킨카쿠지였지만, 1950년에 방화로 건물과 안에 있던 문화재 6점이 소실되었다. 범인은 킨카쿠지의 21세 학승이었다. 다행히 메이지 시대에 킨카쿠지를 해체, 수리했을 때의 기록이 남아 있어 이것을 기반으로 1955년에 복원되었다. 또 1987년에 보통 금박보다 5배 두꺼운 금박을 입혔다. p 163

*권청개산: 실제 개산이 아닌 신앙상 과거의 사람을 개산으로 할때, 그 사람을 가리키는 말


교토에서 기요미즈데라 만큼이나 핫한 사찰이 바로 킨카쿠지다. 아주 금빛이 번쩍번쩍해가지고 튀기도 엄청 튄다. 물론 원래 이름은 킨카쿠지가 아닌, ‘로쿠온인’. 그저 금박이 씌어있다보니, 에도시대부터 금각사라고 불렀을 뿐이다.



난 교토 핫한 유적지는 오픈런(ㅋㅋㅋ)을 하곤 한다. 그럼 대체로 사람이 없으니까. 후시미이나리신사가 그랬고, 기요미즈데라가 그랬다. 하지만 금각사는 네버. 오픈런이고 뭐고 걍 사람많다...ㅋㅋㅋㅋㅋㅋ 인파에 밀려 한바퀴 돌고나오면 끝! 근데 참 뭐라고해야할까, 금각사는 삐까뻔쩍하고 눈에 뛰긴하는데, 저게 끝이다보니... 여기 갈때마다 ‘내가 왜 또왔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은각사는 정원이 멋지기라도 하지, 금각사는 음....^^




▶ 긴카쿠지(은각사)


긴카쿠지는 임제종 쇼코쿠지파에 속하는 선종사찰이고 정식 명칭이 긴카쿠지가 아니라 도잔 지쇼지라고 한다. ‘지쇼’는 8대 장군인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법호에서 유래되었다. 1482년에 요시마사가 자신의 은거처로 건립을 시작한 별장인 히가시야마전이 긴카쿠지의 시작이다. 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손자인 요시마사는 8세라는 어린 나이로 8대 장군이 되었다. (생략) 요시마사는 1473년에서야 장군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었고, 1477년 마침대 오닌의 난이 종결되자 젊었을 때 부터 갖고 싶었던 별장 짓기를 시작했다. 그것이 위에서 말한 히가시야마전이다. 요시마사가 1490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유언이 무소국사를 권청개산으로 한 선종 사찰, 바로 오늘날의 도잔 지쇼지-긴카쿠지가 되었다. p 171



긴카쿠라고 하면 원래 은박이 입혀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해서 논의가 있었다. 2007년에 실시된 엑스선 조사 결과, 은박이 입혀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은박을 입힐 계획이었다가 요시마사의 죽음으로 실현되지 않았다라는 주장도 있지만, 원래 긴카쿠라는 명칭은 에도시대의 자료에서 나온 것이지 창건당시의 이름이 아니다. p 172


위의 킨카쿠지에 이어 긴카쿠지도 아시카가 쇼군이 지었다. 정확히 말하면 킨카쿠지는 아시카가 막부 3대 쇼군(할아버지), 긴카쿠지는 8대 쇼군(손자)! 이 손자가 할아버지가 지은 별장인 킨카쿠지처럼 너~~~무나 별장을 짓고 싶었는데, 짓지를 못하다가 쇼군 자리를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고서야 겨우 만든 별장이 바로 긴카쿠지다. 별장으로 짓긴 했는데, 정작 죽기 전에 이 별장을 사찰로 바꿨다는 그런 이야기다. 근데 이것마저도 킨카쿠지와 비슷한 것이, 킨카쿠지와 동일하게 권청개산을 무소국사로 했다는 것. 그러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자기 할아버지가 만든 킨카쿠지를 따랐다는 뭐 그런 이야기.



난 긴카쿠지가 원래는 은박을 씌우려고 했기에, 은각사라고 불리는 건 줄 알았더니만 그건 아니었나보다. 그냥 썰이었던걸로!





▶ 료안지(용안사)


료안지 자리에는 10세기 말에 천황의 발원으로 건립된 사찰이 있었고, 12세기 중반에 후지와라 가문의 귀족이 여기에 산장과 사찰을 지었다.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 장군을 보좌하는 관령직을 맡은 호소카와 가츠모토가 이 땅을 양도받아 1450년에 기텐겐쇼 선사를 개산으로 료안지를 건립했다. 가츠모토는 기텐겐쇼선사에 깊이 귀의했었다. 두 분의 관계는 마치 북송 용안산 도설사의 종열선사와 재상 장상영의 깊은 관계와 비슷하다고 해서 사찰 이름이 료안지가 되었다. 료안지는 1467년에 시작된 교토를 중심으로 벌어진 큰 전란으로 소실되었다. 불행하게도 가츠모토는 그 전란 가운데 중심인물의 하나였다. 가츠모토가 죽은 후 가츠모토 아들이 사찰 재건에 나섰다. 석정은 그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p 164


료안지는 정말 고요한 사찰이다. 인근에 있는 금각사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랄까? 뭐 애초에 대부분의 관광객은 금각사를 가지, 료안지를 찾지는 않는다. 여기 진짜 힐링되는 사찰인데, 큽. 무엇보다 료안지의 정원인 석정(세키테이)는 ‘가레산스이식 정원’의 대표로 각광받는 곳이기도 하다. 대학 전공책에서 석정 사진을 봤을때는 별 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실제로 와서 보니....오오. 너무 힐링되서 나중에 엄마아빠를 모시고 또 왔었는데, 엄마아빠는 아니었나보다ㅋㅋㅋㅋ. 나만 힐링되었던걸로.




 


 

▶ 난젠지(남선사)


난젠지 창건은 13세기 가마쿠라 시대이다. 지금 난젠지 자리에는 원래 가메야마 천황이 지은 이궁이 있었다. 이궁에서는 밤마다 나타나는 요괴에 시달렸다. 그때 법황이 되었던 가메야카가 고승에게 부탁해서 요괴를 없애려고 기도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도호쿠지의 스님에게 기도를 부탁했더니 효과가 있었다. 그후 가메야마 법황이 선사에게 깊의 귀의하여 1291년 이궁을 선종 사찰로 바꾸었다. 처음엔 사찰 이름이 젠린젠지 였다가 중국에서 일본에 전한 선종이 남긴 남종선이어서 난젠지로 바뀌었다. p 174



난젠지에서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주로 삼문, 방장, 난젠인이다. 지온인, 닌나지와 함께 ‘교토 3대문’으로 꼽히는 난젠지 삼문은 높이 약 22미터, 2층 누각으로 훌륭한 문이다.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난젠지 삼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를 중심으로 한 도요토미가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1628년에 건립된 것이다. 일반 방문객은 2층에 올라갈 수 있다. p 175

*방장: 주지가 지내는 방


난젠지는 가을에 가면 정말 멋진 곳이다(인근 에이칸도 포함ㅋ). 단풍이 단풍이 아주 최고다! 거기다 수로각은 알아주는 포토스팟이랄까. 한국 관광객들도 꽤 오는 걸 보면, 어느정도 입소문을 탄 곳이긴 한가보다. 근데 한국 관광객들은 대게...수로각에서 사진만 찍고 가는게 함정ㅋㅋ



개인적으로는 난젠지 방장정원을 추천한다. 물론 유료입장이긴하지만, 단풍철에 방장정원에 들어가면...오!!! 방장정원이 이렇게 멋진 이유는, 역시나 난젠지가 천황가의 이궁이었기 때문에 그런게 한 몫한다. 역시 천황이든 법황이든 황실 출신이 만든 건물 출신 사찰들이 멋지긴 오지게 멋지다.




▶ 그리고 책에는 없는, 교토 다이토쿠지(대덕사)


대덕사는 교토에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찰이다. 정확히는 대규모 사찰단지(...) 라고 해야하나? ‘대덕사’라는 사찰을 중심으로 조그만 사원들이 경내에 옹기종기 포진되어있다. 무엇보다 한국사람들은 잘 모르는 곳이라고 해야하나, 잘 안오는 곳이라고해야나. 뭐 그렇다. 하지만 대덕사는 과거에 조선통신사가 잠시 머물던 곳이기했다는 점^^



다만, 대덕사를 포함해서 경내에 있는 수 많은 사원들을 전부 구경할 수는 없다. 상시개방되어있는 일부 사원만 구경할 수 있다는 것. 내가 갔을 당시만해도 4곳의 사원이 상시공개였다. 근데 그 일부 사원만 구경해도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로 멋지다. 일단 사람없어서 고요하고, 정원이 너무 멋져서 사진찍느라 바쁘고, 가만히 앉아서 정원을 바라보고 있으면 힐링되고!




 

대덕사를 갔을 때 내가 제일 보고 싶은 곳은 ‘고토인(상시공개)’이었는데, 당시에는 내부보강공사중이라 들어갈 수 없었다^_T. 여기에 센노리큐가 소장했었던 조선의 석등이 있다고 했는데(아마도 임진왜란 당시 가져온 걸로 추정..?), 그래서 꼭 보고 싶었는데T_T. 근데 이게 무슨 횡재인지? 비공개 사원 중 하나인 ‘소켄인’이 가을 특별공개로, 한시적 공개가 되었다. ‘소켄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사원인데, 이 안에는 오다 노부나가를 비롯한 오다 일족 묘소도 있다. 진심 완전 ‘개꿀bbb’. 당시 권력자인 도요토미가 건립해서 그런지, 정원도 공을 엄청 들인것 같고. 한마디로 멋졌다는 이야기.



‘소켄인’이 오다를 기리기 위해 도요토미가 건립한거라면, 반대로 오다가 도요토미에게 명해서 건립한 사원인 ‘오바이인’도 경내에 있다. 이곳도 원래 비공개 사원인데 가을 특별공개(개꿀^^)로 볼 수 있었다. 역시 당시 권력자가 건립한 사찰은22222


이 책 덕분에 교토 사찰여행을 복기하니, 다시금 가고 싶어진다. 흑. 이제야 일본여행이 무비자로 풀렸는데!!! 왜 가지를 못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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