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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으로 만나는 역사 신라왕릉 - 한 권으로 읽은 신라왕릉
김희태 지음 / 휴앤스토리 / 2022년 8월
평점 :
얼마전에 블로그 이웃이신 김희태님의 신간이 나왔다. 책 주제는 무려 ‘신라왕릉’. 희태님 블로그에서 신라왕릉에 대한 답사 이야기를 봐왔고, 작년 이맘때 경주 신라왕릉 답사 당시 희태님의 신라왕릉 답사기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고로 이 책의 완성도는 어마무시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는 역시나였다. 심지어 신라왕릉 답사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배웠던 당대의 역사와 학교에서는 잘 가르치지 않는 역사, 신라왕릉과 관련한 또 다른 역사 유적지까지 아우르고 있었다. 주제는 어디까지나 #신라왕릉 이지만, 책 자체로 보면 신라 천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명실상부한 신라 역사책이다. 우리 뿡뿡이가 책을 읽을 나이가 되면, 신라역사에 대한 첫번째 역사책은 이 책 『왕릉으로 만나는 역사: 신라왕릉』으로 결정했다고나 할까?
학교 수학여행 이런 것을 제외하고, 내 스스로 경주 여행을 간 것은 두 번(2015년, 2021년)이다. 그리고 그 두 번의 경주여행에서 나는 꽤 많은 신라왕릉 및 고분을 보고왔다. 워낙 역사를 좋아하고, 어디를 가든 역사유적지를 위주로 찾아다니는 나였기에(특히 무덤투어를 사랑함), 신라왕릉 및 고분군을 찾아다닌건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만 2015년 당시에 보았던 신라왕릉과 2021년에 보았던 신라왕릉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정확히는 신라왕릉을 바라보던 내 시선의 차이였다. 2015년에는 ‘아, 여기가 ○○왕릉이구나’ 였다면, 2021년에는 ‘여긴 전칭왕릉이군, 저긴 확실한 왕릉이군’ 이라는 점일까?
앞선 두 번의 신라왕릉 답사에서 내 시선의 차이가 달라진 이유는 아무래도 박종인 기자님 영향이 컸다. 박종인 기자님 덕분에 조선 후기 양반들의 무분별한 족보찾기 열풍으로 정확한 근거 없이 신라왕릉이 비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이 책의 저자이신 희태님의 신라왕릉 답사기를 보면서, 피장자가 확실한 신라왕릉 여부와 그 이유, 피장자가 불확실한 이유등에 대해 알게되었다.
>>내가 보고 온 신라왕릉: 오릉(1대 혁거세-알영부인, 2대 남해, 3대 유리, 5대 파사), 탈해왕릉(4대), 지마왕릉(6대), 미추왕릉(13대), 선덕여왕릉(27대, 확실), 무열왕릉(29대, 확실), 문무대왕릉(30대, 확실), 신문왕릉(31대), 원성왕릉(38대, 확실), 정강왕릉(50대), 경순왕릉(56대, 확실/연천 소재)
>>내가 보고 온 신라고분/묘: 대릉원(천마총, 황남대총), 서악동고분군, 인왕동고분군, 김유신묘, 김인문묘, 김양묘, 노동동고분군, 노서동고분군(봉황대, 서봉총, 금관총)
와, 이렇게보니 나도 경주에서 꽤 많은 무덤투어를 했나보다(연천에 있는 경순왕릉 제외ㅋ). 피장자가 확실하거나 불확실한 것을 떠나서, 신라왕 56명의 왕릉중 14기를 보고 왔으니 오우!.....였는데 이제보니 25%밖에 못봤다(고분제외). 하하하하. 그래도 앞으로 경주를 세네번만 더 가면 신라왕릉 답사 올클 가능할 듯 하다
#신라왕계보
(박)혁거세거서간 → (박)남해차차웅 → (박)유리이사금 - (석)탈해이사금 - (박)파사이사금 - (박)지마이사금 - (박)일성이사금 - (박)아달라이사금 - (석)벌휴이사금 - (석)내해이사금 - (석)조분이사금 - (석)첨해이사금 - (김)미추이사금 - (석)유례이사금 - (석)기림이사금 - (석)흘해이사금 → (김)내물마립간 - 실성마립간 - 눌지마립간 - 자비마립간 - 소지마립간 - 지증왕 - 법흥왕 - 진흥왕 - 진지왕 - 진평왕 - 선덕여왕 - 진덕여왕 → 무열왕 - 문무왕 - 신문왕 - 효소왕 - 성덕왕 - 효성왕 - 경덕왕 - 혜공왕 - 선덕왕 - 원성왕 - 소성왕 - 애장왕 - 헌덕왕 - 흥덕왕 - 희강왕 - 민애왕 - 신무왕 - 문성왕 - 헌인왕 - 경문왕 - 헌강왕 - 정강왕 - 진성여왕 - 효공왕 - (박)신덕왕 - (박)경명왕 - (박)경애왕 - (김)경순왕
#신라왕 호칭변화
※거서간: 진한 말로 임금 또는 존귀한 사람을 칭함. ‘간’자는 우두머리를 뜻하는 유목민족의 ‘칸’과 관련이 있다는 설도 있음
※차차웅: 『삼국사기』에 따르면 차차웅은 무당을 부르는 신라의 방언이며, 거서간과 동격의 의미라고 함. 신라가 제정일치 사회라는 것을 보여줌
※이사금: 이가 많이 난 사람 혹은 연장자
※마립간: 『삼국사기』에 따르면 마립은 ‘말뚝’ 즉 궐로서 함조를 뜻하며, 함조는 자리를 정한다는 뜻. 즉 왕궐의 주인인 왕을 말함.
※왕: 중국식 왕 호칭
신라왕은 조선이나, 고려 등의 한반도에 있던 다른 국가와는 좀 다른 면이 있다. 대표적인게 바로 성씨. 무려 세개의 성씨가 돌아가면서 왕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뭐, 세개의 성씨가 돌아가면서 왕을 했다고는 하지만 결국 내물왕때부터 경주 김씨가 신라왕위를 세습했다(초대왕은 박씨인데?!). 뿐만 아니라 신라는 왕을 지칭하는 호칭도 조금 달랐다. 지증왕이 중국식 왕호인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전까지는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 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뭐, 거서간이나 마립간은 초원의 유목민족의 리더를 ‘칸’이라고 부르니 이해가 가는데(신라 출토유물은 유목민족 유물과 궤를 같이함), 차차웅과 이사금은 아직까지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니 ‘아 그렇구나!’하는 것 뿐.
여튼 이렇게 신라왕에 대한 기본적인 배경지식은 알고, 책을 읽어보자!
▶신라왕릉 이야기
현재까지 알려진 신라왕릉은 총 37기로, 연천에 위치한 경순왕릉을 제외하면 36기가 경주에 있다. 이 가운데 비석의 이수와 비편 등의 금석문을 통해 무열왕릉, 흥덕왕릉은 무덤주인이 명확한 왕릉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문헌에 기록된 장지 기록과 신라왕릉의 발전과정등의 교차분석을 통해 확인된 선덕여왕릉, 문무왕릉, 성덕왕릉, 원성왕릉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밖에 다른 왕릉들은 근거가 명확하지 않거나 전칭왕릉의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다. 이유는 신라가 망한 뒤 관리의 부재 속에 사실상 방치되다가, 자연스럽게 실전되는 수순을 밟았기 때문이다. p 048
조선 후기에 접어들수록 신라왕릉의 비정이 늘어나는 현상에 대해 이근직은 ‘족보 문화의 성행과 종중으로 대표되는 동족집단의 등장이 영향을 미쳤으며, 그 결과 능묘에 대한 무리한 비정으로 나타났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당시에도 왕릉 비정에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화계 유의건은 「나릉진안설」을 통해 ‘왕릉의 위치를 비정하는 데 문자 기록에 근거하지 않고, 무지한 촌노인의 말에 의존했다’며 비판했다. 경주를 찾았던 김정희 역시 「신라진흥왕릉고」를 통해 ‘진흥왕릉은 선도산 고분군이 아닌 서악동 고분군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p 049
오릉은 조선 초기만 해도 혁거세의 능으로 인식된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는 4명의 왕과 1명의 왕비가 묻힌 것으로 알려져 시기마다 오릉을 바라보는 인식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남해차차웅, 유리이사금, 파사이사금의 공통된 장지 사릉원을 혁거세의 장지 사릉과 같은 장소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승과는 별개로 오릉이 누구의 무덤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이근직은 오릉을 적석목곽분으로 추정했다. 적석목곽분이 맞을 경우, 해당 시기의 무덤 양식인 목관묘와는 차이가 있기에 진위와 관련한 논란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이 부분은 오릉의 무덤양식과 출토 유물 분석을 통해 보다 명확한 진위여부가 밝혀질 것으로 판단된다. p 074
탈해왕릉은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 산17번지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장지 기록에는 성의 북쪽 양정 언덕이라고 적혀있다. 반면 『삼국유사』에는 문무왕의 꿈에 탈해이사금이 나타나 자신의 왕릉을 파내, 뼈로 소상을 만들 것을 이야기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소상을 토함산에 두라는 말에, 문무왕이 소천구에 있던 탈해왕릉을 파내어 뼈를 모아 만든 소상을 토함산 사당에 모셨다는 것이 핵심이다. 실제 토함산에서 탈해의 사당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확인되기도 했기에, 탈해왕릉은 이미 오래전 사라졌다고 보는것이 옳다. p 078
현재 전 황복사지 동편에 있는 폐고분지는 임시로 정비되어 있는데, 출토된 갑석과 지대석, 탱석과 면석, 미완성 석재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폐고분지를 효성왕의 가릉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신라왕릉의 십이지신상 비교를 통해 현 경덕왕릉보다 앞선 시기의 왕릉으로 보고 있고, 미완성 석재를 통해 최초 왕릉을 조성하던 중 어떠한 이유로 인해 공사가 중단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경우 효성왕일 가능성이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효성왕은 742년 5월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 시신을 법류사 남쪽에서 화장한 뒤 동해바다에 산골한 것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p 176
역대 신라왕은 56명인데, 알려진 신라왕릉이 37기라고 해서 조금 놀랐다. 조선후기 족보찾기 열풍으로 양반네들이 무분별하게 ○○왕릉이라고 지정했으니, 당연히 모든 왕릉을 다 지정했을거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신기하군. 그나저나 조금 놀랐던 사실은, 몇몇 신라왕들은 죽은 뒤에 화장을 한 것이었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화장을 한 왕들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것이다. 거기다 왕릉을 조성하다가 중간에 중단된 폐고분지까지 남아있을 줄이야. 경주여행을 하기 전, 나름대로 사전조사를 하고 갔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초면인 문화재가 이렇게 많으니 원. 이렇게도 경주에는 아직도 내가 알지 못하는 유적/사적지가 많다. 경주를 얼마나 많이가야, 대충이라도 다 보고 왔다고 할 수 있을까^_T.
다시금 이야기하는 조선후기 족보찾기 열풍. 이는 후대에, 그러니까 바로 지금! 신라왕릉에 대한 인식에 대해 생각보다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경주 김씨, 석씨, 박씨 종친들이 땅을 겟챠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신라왕릉을 비정한게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니 말이다. 예컨데 현재 탈해왕릉으로 알려진 무덤의 묘제는 신라 후기 묘제인 석실분이다. 하지만 탈해왕이 재위하던 초기 신라의 묘제는 목관다. 묘제부터 이미 탈해왕릉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선인들이 탈해왕릉이라고 했으니, 지금까지 그게 쭉 이어져와서 지금까지도 그곳은 탈해왕릉이다. 거기다 탈해는 경주 석씨의 시조인지라, 시조를 중요시하는 유교국가 조선에서는 석씨 시조 탈해를 기리는 사당 숭신전까지 건립했다.
분명 대부분의 신라왕릉들의 묘제가, 현재 명명된 ○○왕이 살던 시기의 묘제와는 확연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문헌에 기록된 기록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조선후기 족보찾기 열풍의 영향은 아주 무서울따름이다. 역시 뿌리를 중요시하는 (어긋나버린)유교국가 답달까.
▶신라왕릉에서 만나는 신라사
실크로드를 따라 여러 이국적인 유물이 신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황금보검 이외에도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봉수형 유리병과 유리잔이 주목된다. 재미있는 것은 카자흐스탄 카라아가치지역에서 출토된 유리잔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리잔이 거의 같다는 것이다. 이는 실크로드를 통해 유리잔이 들어왔음을 의미한다. 원성왕릉의 호인상처럼 서역인을 닮은 토용과 터번을 쓴 형태의 토우가 발견되는 등, 이국적인 유물을 통해 실크로드로 세계와 교류했던 신라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p 188~189
839년, 왕위에 오른 그 해에 신무왕은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성왕은 장보고의 딸을 두 번째 왕비로 삼고자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에 그 뜻을 접어야 했다. 이후 신라 조정과 장보고 간의 갈등이 표면화 된 것으로 보이는데, 846년 장보고가 청해진에서 반란을 일으킨 기록이 그 증거이다. (중략) 청해진이 있었던 장도에는 토성의 흔적과 건물지, 당시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책의 흔적이 잘 남아있다. p 200
『삼국유사』에는 더 상세한 기록이 확인되는데, 헌강왕이 순행했던 장소가 개운포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으로 놀러 왔던 헌강왕이 갑작스럽게 낀 구름과 안개 때문에 길을 잃었다고 한다. 이 현상이 동해용의 조화라는 이야기를 들은 헌강왕은 용을 위해 절을 지을 것을 명했는데, 이 절이 바로 망해사다. 그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고 하여 개운포라 불리게 되었다. 이 때 사찰을 지어준 헌강왕을 위해 동해의 용이 일곱 아들을 데리고 나와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는데, 그 아들 중 하나가 바로 처용이다. p 312
이 책을 읽기 전, 제목만 봤을 때는, 신라 역사도 있겠지만 말그대로 신라왕릉 답사기가 주가 될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게 왠걸? 책을 읽고보니 이 책은 신라왕릉으로 신라의 역사를 풀어내고 있었다. 내물왕릉 편에는 충신 박제상의 이야기와 박제상과 관련된 사적지가, 법흥왕릉편에는 이차돈의 순교와 불교 공인 그리고 그와 관련된 이차돈 무덤 추정지와 사당터 등이, 진흥왕릉편에는 백제와의 전투 및 가야정복, 가야금으로 유명한 우륵의 귀순 등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원성왕릉의 호인상에 주목하며, 경주 도로공사 중 발견된 황금보검과 함께 신라가 실크로드를 통해 바다건너 국가와도 교역을 했던 글로벌 국가였다던지, 신무왕과 문성왕 때 해상왕 장보고가 어떻게 신라 조정에 들어가게 되고, 어떻게 죽었는지라던가 말이다.
진심 이 책은 우리가 알아야 할 신라의 역사를 아우르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하지만 역덕들이라면 한 번 쯤은 들어보았거나, 혹은 다큐로 보았던 신라의 숨겨진 이야기도 다룬다.
▶신라의 숨겨진 이야기
신라는 진한에서 시작되었다. 한원에 인용된 『괄지지』에 따르면 신라는 금성(서라벌)을 도읍으로 하는데, 본래 삼한의 옛 땅이라고 했다. 당시 경주에는 사로국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조선의 유민들이 육부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중략) 『삼국유사』에는 신모가 혁거세의 어머니로 등장하는데, 김부식이 송나라를 방문했을 때 우신관에 있던 신모의 상을 봤다고 한다. 당시 관반학사 왕보가 말하기를, ‘신모는 중국 황제의 딸로 진한으로 건너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해동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해동의 시조는 혁거세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p 053~054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성모사가 서악의 선도산에 있다고 했다. 성모는 혁거세의 어머니로 사소 혹은 신모등으로 불렸다. 현 선도산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 옆에 자리한 성모사는 사소의 사당으로, 뒤쪽 바위에는 성모구기 각자가 새겨져있다. 이 밖에 성모사에서 350m 떨어진 봉우리에 성모유허지가 있는데, 관련 장소임을 알리는 비석이 있다. p 063
웅진성으로 피신한 의자왕은 웅진방령 예식의 배반과 함께 붙잡혀 항복했고, 8월 2일에는 나당군사동맹의 승전 주연에서 술을 따르는 모욕을 감내해야했다.(중략) 한편 백제의 멸망을 지켜본 무열왕은 661년 6월에 세상을 떠났고 뒤를 이어 태자인 법민이 왕위에 오르게된다. 이가 바로 문무왕이다. 문무왕은 무열왕에게 태종의 묘호를 올렸다. p 142
문무왕릉비는 신라 김씨의 기원을 투후에서 찾고 있어 주목된다. 투후를 언급한 금석문은 「대당고김씨부인묘지명」에서도 확인되는데, 비문에서 언급된 투후는 흉노족 출신의 김일제를 뜻한다. 또한 비문에는 태조 성한왕이 등장하는데, 투후와 성한왕 사이에는 ‘투후제천지윤전칠엽’이 새겨져 있다. 유득공은 ‘투후제천지윤전칠엽’을 세차를 서술한 것으로 인식했다. 이 경우 투후로부터 7대를 전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에 비문의 문맥을 고려하면 신라 김씨의 기원은 투후가 기준점이 된다. 그랬기에 앞선 김정희의 『해동비고』와 유득공의 『고운당필기』에서 신라 김씨가 김일제에서 시작한 것인지 의문을 표시한 것이다. (중략) 금석문의 기록처럼 신라 김씨가 실제 흉노족의 후예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으나, 다른 관점에서의 해석도 가능하다. 예컨데 강인욱은 ‘신라 김씨가 흉노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언급한 것은 지배 구조의 확립에 따른 관점에서 시조를 윤색한 측면’이라고 강조한다. 즉,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에서 출자한 지배 구조가 있는 반면, 신라 김씨의 경우 지배 구조가 확립되지 않았기에 새로운 의미의 선민의식을 확립하기 위한것으로 보고 있다. p 157~158
난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나, 육촌장 그 중에서도 최소벌도리공 손에 길러졌다고 배웠다(그리고 지금도 학교에선 그렇게 가르치고 있을듯). 이렇게 배운게 당연한거였기에, 한치의 의심도 없었다. 물론 설화적인 요소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같은 느낌이었달까? 뭐 그렇게 나는 컸고, 이 책 저 책을 읽어보던 어느날 한국의 여신들에 대한 책을 읽다가, 신라의 여신인 성도산성모의 설화를 읽게 되었다. 어라, 이게 왠걸? 성도산성모가 박혁거세의 어머니란다. 비슷한 설화로 가야의 김수로왕을 낳았다는 정견모주 설화도 있다.
뭐 여튼 이런 이야기는 조금 마이너한 부분이다보니 학교에서는 당연히 가르쳐주지 않고, 일반적인 역사 교양서에도 다루지 않는다. 따라서 관심이 있지 않는 이상 평생 알지못할 수도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까지도 이 책에 담겨있다. 뿐만인가? 과거 KBS에서 유인촌의 역사스페셜을 시작으로 한창 역사다큐를 방영해주었을때 나왔던, 역시나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는 이야기들도 이 책에 담겨있었다.
(과거 KBS 역사다큐 시리즈: 유인촌 역사스페셜 - 고두심 역사스페셜 - 한국사전 - 역사추적 - 한상권 역사스페셜)
난 유인촌 역사스페셜부터 한상권 아나운서의 역사스페셜까지, KBS 역사다큐 시리즈는 쭉 시청했던 사람이다(영상파일도 전부 보관중♡). 당시 몇몇 방송들은 나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었다. 예컨데 의자왕이 내부의 배신으로 인해 당나라로 끌려갔다던가, 문무왕릉비에 흉노족을 시조로 서술했다던가, 대마도로 끌려갔던 조선의 공주가 있던 이야기들 말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내용들은 당연히 학교에서는 배우지 못했으니, 궁금해도 더 알수가 없는 노릇이었었다. 다 크고 나서야 다른 역사책들을 보면서 ‘아! 이런 내용이 더 있구나!’ 하며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달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 책은 그런 부분들까지도 전부 언급하고 있다. 어째서 저런 이야기가 나왔는지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까지 말이다. 이 책을 한 15년만 빨리 읽었어도................내가 여러 책들을 전전할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하는 너낌적인 너낌. 허허허허.허허허.
정말 장점 수두룩한 이 책에서 또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바로 주석이다. 희태님은 머릿말에서 최대한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다루고자 했고, 부정확한 오류를 담지 않기 위해 각종 문화재와 문헌자료, 연구자들의 학술자료들을 참고했다고 했다. 그 흔적들이 바로 저 주석들이다. 난 책을 읽을 때 주석이 달려있으면, 하나하나 다 읽어보는 편인데, 와. 희태님이 이 책을 쓰면서 얼마나 고심하고 또 고심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책 한권 들고, 경주 답사를 다시가야겠네?! 아.. 근데 뿡뿡이가 어느정도 클때까진 힘든가...........하 ㅠㅠ 뿡뿡아 빨리 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