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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답게 쓰는 날들 - 어느 에세이스트의 기록: 애정, 글, 시간, 힘을 쓰다
유수진 지음 / 상상출판 / 2022년 4월
평점 :
근래에 읽은 에세이들은 대부분 여행을 주제로 한 것이 많았다. 여행에세이에 질려가는 와중에, 간만에 잔잔하게 흘러가는 에세이를 읽었다. 얼마전에 출간된 에세이 『나답게 쓰는 날들』 이다. 저자 스스로도 본인을 ‘에세이스트’라 칭하는, 이 책에 실려있는 글들은 그야말로 ‘에세이’라는 말에 딱 들어맞는 글이었다.
살면서 눈 앞에 펼쳐지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일상이 저자에겐 글을 쓰는데 있어서 특별한 주제나 다름 없었다. 나역시도 문득, 내 일상을 글로 써내려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진 않았지만, 나 따위가 무슨 글을 쓰겠냐는 생각이 들어 얼른 접었더랬다. 헌데 저자의 글을 읽다보니, 굳이 남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나를 위해 나만의 글을 쓰는 정도라면... 지금이라도 한 편씩 써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의 ‘이미지’라는 건, 사실 연예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자아가 있고, 그 가운데에서도 조금 더 두드러졌으면 하는 모습과 덜 두드러졌으면 하는 모습이 있기 마련이니까. 문제는 이 이미지라는 게 주로 우리 스스로에 의해 씌워진다는 것이다. p 036
사람마다 가질 수 있는 캐릭터가 여러 개임을 인정하면, 우리의 일상은 조금 더 편안해지지 않을까. 나는 여전히 강한 사람을 지향하지만, 원래 강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약하디 약한 사람일 수 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p 038
가끔 주변에서 ‘너 답지 않아’ 라는 소리를 들으면, 스스로에게 물어보곤 한다. ‘나 다운게 대체 뭐지?’ 나는 3n년을 살면서도 지금까지 나 다운게 무엇인지, 나라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지 정의를 하지 못했다. 나 스스로도 나를 모르는데, 왜 주변사람들은 끊임없이 나를 보고 ‘나 답지 않다’고 하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생판 남인 그들은 나를 그렇게 잘 안단말인가? 하지만 실상은, 그들 역시 나를 잘 모른다. 그저 그들은 나를 보면서, 본인들이 보고 싶은 ‘이미지’에 나를 끼워맞추고 있을 뿐이다. 본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사람에겐 단 한가지의 모습만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이 로봇이 아닌이상에야, 이런 모습도 있는가 하면, 저런 모습도 있다. 하지만 꼭 사람들은 어떠한 성향에 자신을, 또는 타인을 맞추려고 한다. 그에 부응하기 위해 mbti같은 각종 성향테스트가 유행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런 성향테스트가 정말 정확했다면, 우리가 인간관계를 이렇게까지 고민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저 한 사람에 대해, 본인이 정한 틀에 맞추지 말고, 이 사람에겐 이런 면모가 있구나, 저 사람에겐 저런 면모가 있구나- 하고 인정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정도까지만 해도 세상사는데 조금은 편해지지 않을까 싶다.
최근 디지털 기기에 익숙해진 청소년들이 긴 글을 읽지 못하고, 어휘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뉴스를 봤다. 나는 이러한 이야기가 비단 청소년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주로 짧게 편집된 영상들을 자주 보다 보니, 계속 해서 짧은 콘텐츠만 소비하고 있음을 느낀다. 문해력은 단순히 긴 글을 잘 읽고 못 읽고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정보에 대해 스스로 가치 판단하는 역량과 자신의 생각을 기반으로 비판할 수 있는 역량 등 무수히 많은 문제를 포함한다. 문해력은 곧 나의 삶을 살아가는 능력이다. 나는 그래서 청소년들이 꼭 글을 쓰면 좋겠다. p 090
내가 이 에세이를 읽기 전에 읽고 있던 책이 있었다. 조만간 리뷰 예정인, EBS에서 출간한 『당신의 문해력』 이란 책이다. 그 책을 읽으며, 요즘 학생들이, 아니 학생을 포함하여 2030 젊은 세대들의 문해력이 계속해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놀랐던지. 젊은 세대들의 문해력이 떨어졌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까지 심각한 수준이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다.
뭐, 잘 생각해보면 내 블로그에도 간혹 문해력이 떨어지는, 아니 문해력이 없는 사람들의 덧글이 보이기도 하니 말이다. 내 포스팅에 아주 분명하고 자세하게 내용을 적어놨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내용을 물어보는 댓글을 다는 핑프들이 종종 나타났다. 그러니까, 이 핑프들은 긴 글은 읽기 싫으니, 덧글로 한줄 요약해달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블로그 포스팅 글이 길면 얼마나 길다고, 그것조차 읽기 싫어하는 것을 보면 참- 심지어 이런 핑프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요즘 세대들이 사회생활을 어떻게 할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문해력에 대해선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추후 관련 포스팅을 할 예정이므로 이쯤에서 멈춰야겠다.
취업 준비생 시절에 돈이 들지 않으면서도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취미로 찾은 게 독서였다. 그게 습관이 되어 지금까지 책은 항상 내 곁에 머물러 있고, 직장인이 된 후로 돈이 드는 취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면서도 독서를 멈출 수 없었다. 독서의 진짜 매력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p 126
취미는 그저 시간을 때우거나 즐겁기만 한 일이 아니다. 일주일에 단 한 시간만이라도 무엇인가에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푹 빠질 수 있다는 건, 작가 사사기 쓰네오의 말처럼 ‘어떠한 일의 무게를 알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취미를 갖는다는 건, 점점 더 깊은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 p 128
저자의 말처럼 ‘독서’는 돈이 들지 않으면서도,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취미이다. 더 나아가서, 독서는 위에서 언급한 ‘문해력’을 기르는데 최적의 방법이기도 하다. 아이고, 또다시 문해력 이야기!..........는 여기서 패스하고!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취미를 찾아내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인터넷에서 ‘ㅇㅇ키트’ 같이 손쉽게 즐길 수 있는 취미생활(?)을 구매하는 경우가 월등히 많아졌다. 뭐, 그런 키트조차도 스스로 구입한거니, 직접 찾아낸 취미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 솔직히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보통 저렇게 손쉽게 취미생활을 구매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취미생활을 하고싶다는 이유로 여러 장르의 취미생활을 구입하곤 한다. 그게 과연 취미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걸까? 아니면.. 시간이 흐르면서 ‘취미생활’이라는 정의가 바뀌었는데, 내가 모르는 것일까.
나도 분명 나이대로 보면 요즘 젊은세대라 할 수 있는데, 참 이상하게도...... 내가 아닌 또래나, 어린 사람들을 보면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코로나가 하루빨리 끝나 다시 가까워지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나는 우리가 다시 가까워지기 전에 우려되는 것들이 있다.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일이다.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굳이 남의 몸을 세게 밀치며 접촉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몸이 밀려나 분해도 ‘사람이 많으면 그럴 수도 있는거 아니에요?’ 라고 한다면 나는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 몸을 밀치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 저 사람의 몸과 닿지 않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그전에도 부딪히지 않았을 거란 얘기다. p 137
난 개인적으로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꽤 반겼던 사람이다. 워낙에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다보니, 더더욱 그랬다. 실제로 보면 코로나 이전에는 정말 필요 이상으로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본인이 가까워지고 싶다면, 가까워지고픈 그 사람에게 진솔하게 이야기하거나, 양해를 구해야하는데 그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없었다. 그들이 굳이 가까워지려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하나다. ‘그러고 싶으니까’. 이런 모습들을 보면 어른들이라는 사람들이, 아이들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사라진 지금, 저런 몰상식한 어른들이 다시 나올까 두렵다.
요즘 아이들이 읽는 책 중에는 사람간의 적당한 거리(경계선)에 대한 동화책도 많다고 한다. 이런 경계선 동화책은 아이들이 아니라, 머리만 커버린 요즘 어른들이 읽어야 하지 않을까.
서른이 넘어가고 사회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자 알고 지낸 사람들이 꽤 많이 쌓였다. 그러면서 때로는 내가 가진 명함이나 전화번호의 수가 열심히 살았다는 징표 같기도 했다. 그러다 언젠가 친구 목록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관계의 총량이 가득찼다는 생각이 들었다. p 141
이 구절을 읽고, 내 카카오톡 친구 목록을 살펴보았다. 우와, 사람 참 많다. 근데 태반이 회사 또는 거래처 사람이다. 정말 지우고 싶은 사람들이지만, 회사생활을 하는 한 지울수 없기 때문에 계속 가지고 가는 친구목록인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좁은 인간관계를 지향한다. 친구라고 칭하는 사람도 진짜 소수의 인원밖에 없다. 이름만 아는 사람은 친구라 생각하지 않기에, 주기적으로 연락처에서 지우곤 한다. 가족에 대해서도 예외 없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라, 가족들에게 연락하는 것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난 내 엄마아빠에게도 그런데, 다른 친척들에게는 어떻겠는가. 심지어 누군가가 내 연락처를 남에게 함부로 알려주는게 싫다. 그게 가족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즉,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관계의 총량은 정말 좁다. 많이 쳐줘봐야 서른명 내외?
1n년간 회사생활을 해왔지만, 퇴사를 한다면 1순위로 해야할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서른명 내외의 사람들에게만 내 번호를 알려주는 것! 다만 언제쯤 이뤄질지는....잘........^_T.....
내가 항상 움직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된 것은 취업 준비생 시절부터였다. 1일 1이력서를 제출해야 내일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잠들 수 있기 때문에 1일 1이력서는 내 나름의 규칙이었다. 채용공고를 찾지 못한 날이면 심한 우울감을 느꼈고, 이런 상황에서도 계속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 게으름이라는 벌레에 물릴까 봐 쉬지 않고 계속 움직인 덕분에, 결국 취직도 하고 많은 프로젝트를 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때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바람조차 내려놓고 공활한 가을 하늘을 즐길 줄 아는 여유도 필요하다. p 207
항상 움직여야한다는 강박관념이 나에게도 있었다. 다만 저자랑 이유는 조금 다르다. 그저 학교 졸업후 운 좋게 나름 대기업인 지금의 회사에 입사하여 쉼없이 1n년간 달려오면서, 그 1n년간 학습된 강박관념이었다. 남들은 청춘이라는 20대 초반부터 난 이 회사에 얽매였고, 30대가 된 지금까지도 얽매여있다. 물론 이 사실이 싫다는 건 아니다. 덕분에 또래보다 내집마련도 월등히 빨랐고, 내가 원하는 삶을 더 빠르게 살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지금까지 계속 쉼없이 달려오다보니, 여유를 즐기는 방법을 잊었다. 뭐.. 잊은건지, 처음부터 몰랐던 건지는 알수 없지만.
회사에서 휴직을 한 후, 난생 처음으로 길고 긴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휴직 전까지만해도 빨리 휴직 당일이 되길 바랐것만, 막상 쉬기 시작하니- 집에서 난 무엇을 해야하는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내 생체리듬은 오랜기간 회사생활로 인해 새벽같이 눈을 뜨는데, 그때부터 잠잘때까지 난 무엇을 해야할지 막막하기 그지 없었다. 약간의 우울감(?)까지 왔고, 그렇게 한달을 버티고 나서야, 그때서야 온전히 ‘쉼’과 ‘여유’를 받아들였다.
굳이 아무것도 안해도, 내가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시간은 흘러간다. 그저 가만히 있고, 주위 환경을 둘러보고, 창 밖 하늘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한달이라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나서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