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진오의 한국현재사 - 역사학자가 마주한 오늘이라는 순간
주진오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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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현대사책을 읽었다. 엄밀히 따지면 이 책은 한국 현대사이긴 하지만, 저자가 지난 정권부터 현재 정권까지 본인이 썼던 글을 한데 엮어 낸 책이라고 보면 된다. 예컨대 지난 정권에서 문제가 정말 많았던 위안부합의, 국정교과서집필이나, 극우 단체의 건국절 논란, 점점더 악화되는 한일관계등에 대한 저자의 생각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한마디로 역사책이긴 하나, 역사적 사실에 비춰 저자 본인의 생각이 담겨있는 책이다.



많은 역사책이 역사적 사실에 비춰 저자들의 생각이 담겨있는 것들이 많으니, 이런 점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해서 저자의 모든 말을 따르거나 공감하는 건 매우 위험하다. 이 역시 한 사람의 주관적인 의견으로 쓰여진 글이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정통 역사학자이며, 왜곡된 우리 역사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사람이 맞다. 해서 많은 글들이 공감되고,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내 스스로를 반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감상은 어디까지나, 저자의 글을 읽은 내 개인적인 감상이다. 대체적으로 저자의 글의 큰 궤는 공감하지만, 극히 일부분은 ‘나와는 생각이 조금 다르구나’ 싶었던 부분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맞고 내가 틀리거나, 내가 맞고 저자가 틀렸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은, 읽은 사람 스스로에게 달려있으니 말이다.



이승만은 살아남고, 박용만은 잊힌 이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박용만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절친한 동지였고 미국에서 유학한 뒤 독립운동의 지도자 역할을 했지만, 노선의 차이로 완전히 결벌하게 되었습니다. (…생략…) 이승만은 4.19 혁명의 결과 하와이로 쫓겨난 뒤, 비서에게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힘겨웠던 상대는 바로 박용만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p 035



박용만은 1913년 이승만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자 성대한 환영행사를 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이 창간한 <태평양잡지>를 후원했습니다. 그러나 파국은 곧 시작되었습니다. 이승만은 여자 기숙사를 짓겠다며 모금을 시작했으나 여의치 않자, 국민회의 부지를 자신의 이름으로 이전시켜달라는 등 무리한 요구를 했습니다. 그러나 국민회가 이를 수용하지 않자 다음 해에는 하와이 지방총회를 장악하려 했습니다. 그는 국민회를 강하게 공개비판하고 각 지역을 돌며 추종자들을 모아 박용만 지지파에게 테러를 자행하면서 국민회를 장악합니다. p 038


이 책으로 하여금 처음 알게된 이름 ‘박용만’. 


그는 미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에 힘쓰던 지도자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제 손으로 보듬은 이승만에게 배신을 당하고, 결국에는 친일파라는 누명을 쓰고 살해된 사람이었다. 그가 친일행위를 했다는 증거는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으며, 독립운동 노선 차이에 의한 참극으로 보고있다고 한다.



이승만과 박용만의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면,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돌 빼낸다’, ‘검은 짐승은 거두는게 아니다’ 라는 말이 아주 자연스레 떠오른다. 우리가 국사시간에 배웠던, 지금도 배우고 있는 일제강점기 당시 미주지역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이승만. 그 자리는 원래 독립운동가 박용만의 자리였던 것이다. 



그 후 1918년 회계감사에서 이승만의 부정이 드러나자 유혈사태로까지 발전했고 이승만은 자신에게 문제제기를 하는 인사들을 폭동죄 및 살인미수 혐의로 고발했습니다. 이승만은 법정에서 그들이 ‘박용만 패당이며 미국 영토에 한국인 군대를 만들어 위험한 반ㅇ리 행동을 하고 일본 함선을 파괴하려는 무리’라고 증언헀습니다. 그러나 결국 모두 모함이라는 것이 판명되고 (…생략…) 결국 참다못한 박용만은 1918년 이승만의 독선과 야욕을 비판하며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하와이 한인사회는 양분되고 말았습니다. p 040



이승만은 3.1운동 이후 각지에서 임시정부 수립안이 나오자, 이를 수렴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을 자임하였고, 이를 승인하도록 밀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국채발행권을 고집하면서 구미위원부를 만들어 상하이에서의 집무를 거부했습니다. 그가 상하이에 나타난 것은 1920년 12월부터 1921년 5월까지에 불과했으며 그나마 위임통치 건의에 대한 비판에 직면하여 갈등만 벌이고 몰래 돌아갔습니다. 이승만은 궁지에 몰리자 자신이 배신했던 박용만에게 편지를 보내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강심장의 소유자였습니다. p 041



이승만은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측에 한인 군사부대 창설을 제안합니다. 박용만이 오래전부터 주장해 1910년대부터 준비했지만 이승만에 의해 뿌리가 뽑힌 노선이었습니다. 이승만의 방해와 파괴공작이 없었다면 박용만이 양성했던 조선인 군사력은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여 훌륭히 제 역할을 해낼 것이었습니다. 또한 해방 이후 승전국의 대우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p 042


어떤 사람이든 공,과가 함께 있다. 해서 그 사람에 대해 평가할때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평가를 해야한다. 공이 많다고 과를 희석해도 안되고, 과가 많다고 공을 없애서도 안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어떠한가? 그에겐 공, 과가 얼마나 있을까. 적어도 난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하던 청년기는 충분히 공으로 일컬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초대 대통령 재임 후는 누가봐도 과였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가 독립운동을 하던 청년기 조차도 정말 ‘공’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게 맞는지 의심이 든다.



물론 미주로 건너갔던 청년 이승만과 박용만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배우는 국사책에는 없다.


서재필은 독립운동을 대표할 수 있는가?


학교 국사시간에 꼭 배우는 내용중 하나,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독립문, 그리고 서재필이다. 내가 학교에서 ‘독립문’에 대해서 배울때, 당시 국사 선생님은 명확하게 알려주셨다. 독립문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세운 것이 아니라, ‘청나라’에 ‘독립’했다는 의미로 세워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물론 당시 선생님은 독립협회가 이완용을 비롯한 관료들이 만들었다거나, 이완용이 독립협회의 2대 회장이었다는 사실은 알려주지 않았다. 당시에 우리가 배웠던 독립협회 조선의 자주독립과 민중계몽을 위한 단체였는데, 이런 단체를 조직한 사람중 하나가 매국노인 이완용이고, 심지어 그 이완용이 회장을 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기엔 아마도 기존의 역사교육관과는 너무 달랐을테니 말이다. 근데 왠지 지금도 이런 사실은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을 것 같다.



우리의 역사교육은 유독 빛에 대한 찬양을 중시하고, 그림자에 대한 반성은 축소하니 말이다. 한마디로 징비가 안된다는 것.


첫째, 독립협회는 서재필이 조직한 단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서재필이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지만, 독립협회를 조직한 것은 이완용을 비롯한 관료들입니다. 특히 이완용은 당시 자신이 대신으로 있던 외부에서 독립협회의 창립 총화를 거행했고 건립위원장을 맡았습니다. 그 후 이완용은 2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완용이 왜 나중에 친일파로 돌아섰는지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지, 있었던 역사마저 지워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 독립협회가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한 것이 아닙니다. 영은문은 중국의 사신이 서울로 들어올 때 맞는 문으로서 속방외교의 상징이었는데, 이미 청일전쟁으로 서울에 침입한 일본군이 헐어버려 독립문 건립 당시에는 아래 기둥만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독립협회는 영은문이 ‘헐린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것입니다.


p 049


심지어 독립문을 세웠을 시기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갔을 시기다. 일본이라는 모리배가 너무 무서우니, 내 뒤에있는 강한 형아 집에 들어간것이다. 이 무슨 얼어죽을 자주독립국인가? 심지어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갔을 그 무렵, 아주 자유로운 삶을 사셨다.





셋째, 독립문의 건립목적은 조선이 여러 열강과 같은 자주독립국임을 선포하기 위해서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독립문 건립이 발기되던 1896년 7월,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해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독립문의 건립은 어디까지나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한다’는 취지였습니다. 이는 일본의 논리에 말려들어간 것이기도 했습니다. 조선은 ‘이미’ 독립국이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청으로부터 독립시켜주었다고 선전했지만, 실은 청을 몰아낸 후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다가 아관파천으로 좌절되었던 것입니다.



넷째, <독립신문>과 관련된 서재필의 업적이 과대평가되고 있습니다. <독립신문>발행은 갑오개혁 시기에 정부가 추진한 사업으로 일본의 방해를 막기 위해 미국인 서재필에게 진행을 맡긴 것이었습니다. 서재필은 당시 미국인 필립 제이슨, 한국명 ‘피제손’으로 활동했습니다. 정부가 모든 비용을 부담했음에도 그는 <독립신문>을 자신의 소유로 등록했고 1898년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일본에 팔려고 했던 것은 비판받아야 마땅합니다. p 050



아! 잠시 삼천포로 흘러갔지만, 독립협회, 독립신문 등을 배우면서 중요하게 배우는 인물 서재필에 대해서도 우리는 다시금 생각을 해봐야한다. 서재필은 조선에서 한국인 서재필이 아닌, 미국인 피제손으로 살았다. 미국인으로 살고자 했고, 계속해서 미국인으로 살았으며, 미국인으로 생을 마치고 싶어했던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국사시간에 서재필에 대한 찬양아닌 찬양을 하는 것일까. 이건 흡사 고종의 밀명을 받은 헤이그 특사가 작금의 조선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연설하는데 있어서, 조선 정부와 고종을 비판한 내용을 가르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역사의 법정에는 시효도, 사면도 없다.


얼마전에 전 대통령 노태우씨가 죽었다. 근데 뉴스를 듣고 있노라니 너무나 이상했다. 나는 분명 전두환씨, 노태우씨가 대통령 예우가 박탈당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전두환 씨, 노태우 씨라고 불러야 한다고 배웠다. 전직 대통령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면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 전직 노태우씨, 이렇게 말이다.



만약 전두환 전대통령, 노태우 전대통령, 이런식으로 부른다면 이건 대통령 예우가 박탈당한 사람을 부르는게 아니라, 말그대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하며 부르는 말이다. 헌데!!!!! 대다수의 뉴스에서 노씨의 죽음에 대해, 노태우 전 대통령이라고 칭하는 것을 보고 참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당시에는 광주에서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줄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보도지침에 따라 언론 검열이 시행되어, 보도되지 않거나 폭도들의 난동이라고 매도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Voice of Korea>라는 미국의 단파방송을 통해, 광주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생략…) 다시 개교된 후 학교로 돌아온 많은 학생들의 얼굴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부끄러움을 보았습니다. 역사공부를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군대를 지원해 다녀왔던 복학생이, 다시 역사학자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했던 결정적 계기는 바로 광주민주화운동이었습니다. p 062



전두환은 분명히 내란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제대로 된 반성과 사죄도 하지 않았던 그를 쉽게 사면해주고 말았습니다. 역사의 심판을 어정쩡하게 하고 넘어가니, 이런 역사의 죄인들이 국민들을 우습게 알고 망언을 함부로 떠들고 있는 것 아닐까요? 전두환은 자신이 광주 시민들을 향한 발포명령을 내린적이 없다고 계속 억지를 늘어놓고 있습니다. 권한만 무제한 행사하고, 책임은 지지않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p 063



그런데 지금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습니다. 도대체 한열이에게 직격탄을 쏜 사람은 누구일까요? 분명히 발사수칙은 45도 각도로 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격탄을 쏘았기 때문에 그런 사고가 난 것입니다. (…생략…) 이제와서 그런 것을 따져 무엇하느냐고 할지 몰라도 당시에는 왜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남습니다. 연세대 교정에서는 이한열 추모비를 다시 세우는 제막식이 열리고 있습니다. 벌써 30여 년 전의 일이지만, 그다지 폭력적이지도 않았던 시외에 가담한 대학생을 죽이는 살인정권에 대한 분노는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p 074



광주 민주화운동, 6월항쟁 과정에서 정말 많은 국민들이 죽었다. 국민들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람은 분명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씨다. 하지만 그 뒤에는 2인자 노태우씨가 있었다. 이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해서 6월 항쟁 당시 사람들은 전두환, 노태우 모두를 끌어내리길 원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노태우씨가 ‘대통령 직선제’를 발표했다는 이유로(물론 다른이유도 있지만), 국민들이 그렇게 끌어내리고 싶어 하던 노태우씨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정말 지금까지도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당최 이해가 안간다. 어떻게 내 부모, 형제, 친구들을 죽인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을 수 있었는지? 진짜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물론 노씨는 전씨와 다르게 그 자녀가 수시로 민주항쟁 유가족들에게 사과를 해왔다. 이 부분에선 분명 전씨와는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박탈되었던 대통령의 예우를 받는 것이 맞는것인가? 심지어 정부에서 나서서 노씨의 국가장까지 치뤄주었으니, 참 경악할 노릇이다. 아무리 그가 전두환씨와 다르다고 한들, 결국은 노씨 자신의 직접적인 사과라던가, 학살에 대한 배후를 끝까지 밝히지 않은채 죽었다. 자녀들의 사과와는 별개로 그 자신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는 이야기다.



정부에서는 국민통합이다 어쩐다, 별별 미사여구를 다 붙여서, 국가장을 시행한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놓았다지면, 결국 정부는 수많은 국민들을 학살했던 주범 중 한명을,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으나, 전직 대통령이었단 이유로, 그 자녀들이 유가족들에게 사과를 해왔다는 이유로 국가장을 결정했다. 이런 선례를 만들었으니, 아주 나중에 전두환씨나 탄핵된 박근혜씨 역시, 노씨처럼 여러 이유를 늘여붙여서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받게 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든다. 우리는 이렇게까지 우리 스스로의 잘못된 역사를 풀어낼 생각조차 안하고 있는데, 계속해서 일본에게 사죄를 요구할 수 있는가? 비단 광주민주화운동이나 6월 항쟁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군부독재 과정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피해자들이 나왔지만, 여전히 우리는 알지 못하고, 정부는 알면서도 눈을 돌린다. 심지어는 구속되었던 전씨나 노씨를 사면해주었다. 그런 우리나라다. 



일제가 죽인 우리 국민들은 눈앞에 보이고, 우리 정부가 죽인 우리 국민들은 눈앞에 보이지 않는, 이런 선별적인 역사 해결방법이 과연 정당한게 맞는걸까? 뭐, 그런 생각이 든다.



대한제국과 고종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나는 정말 이번 정권 초기에 대한제국과 고종을 치켜세우는 것을 보면서 실망을 금치 못했더랬다. 대체 어디를 봐야 고종을 개혁군주로 볼 수 있고, 자주 독립을 위해 애쓴 군주로 볼 수 있는지 말이다.


이태진 교수의 ‘고종이 정조를 계승해 민국이념으로 통치했다’는 주장은 인정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왕권유지를 위한 레토릭일 뿐이며, 그 자체를 근대국가를 지향하는 군주의 이념적 기반으로 내세우기도 어렵습니다. 대한제국이 수행했던 개혁사업의 결과가 민에 대한 수탈 강화로 나타났다는 점도 분명히 지적되어야 합니다. p 105



1873년 20세에 친정에 나서서 30여 년을 다스렸던 군주가 아무런 사상적 발전을 거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1876년부터 이루어진 문호 개방의 과정에서 고종은 대체로 개방론의 입장에 손을 들어주고 있었습니다.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한 조선 사람들이 고종과 김옥균, 박영효 정도밖에 없다’고 파악한 1882년 일본의 자료는 어떻게 볼것입니까? (…생략…) 물론 고종의 한계와 대한제국의 개혁사업에 나타난 문제점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을 반드시 고종 자신에게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간 당시 개화파 관료들의 문제도 함께 지적해야합니다. p 109



고종이 정말 개혁군주였다면 자신의 인척과 본인의 부패에 눈을 감지 말았어야했다. 자기 아비의 정책을 전부 돌릴게 아니라, 취할건 취하고, 문제가 있는 건 버렸어야 했다. 무엇보다 자기 안위를 위해 여러 강국에 매달려서는 안되었고, 자기 안위를 위해 자기 백성들에게 총구를 들이밀어선 안되었다.



하지만 고종은 그 모든 것을 했다. 본인도 부패했고, 본인의 인척들도 부패하여 백성들이 살기 힘들다고 일어나니, 그 백성들을 향하여 개틀링건을 발사했다. 심지어 그 백성들을 짓밟기 위해 외국세력을 불러들였다. 대외적인 눈이 너무 어두워, 서양국가가 근대국가로 나아가고 민국으로 나아갈때, 그는 되려 황제국가를 부르짖었다.





본인 아비의 패착인 경복궁 중건을 보고 무언갈 배웠어야했는데, 고종은 더했다. 저 위에 새 궁궐을 짓고, 멀쩡한 전각들을 수시로 개보수했다. 칭제를 기념하기 위해 나랏돈을 쏟아부어 잔치를 준비했다. 그런 돈을 준비하기 위해 저 나라에 이걸 팔고, 이 나라에 요걸 팔고, 하나둘 팔아가며 본인 안위를 위해 살았다.



고종이 외척과 측근세력들을 통해 정치를 했다는 것은 분명히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특히 대한제국 시기에 개혁주도세력, 이데올로그가 누군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고 황제가 정부 관료를 믿지 못하고 있었던 점은 분명 국정의 난맥상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정부 관료들이나 망명자들의 행태를 보면 고종이 그런 방식으로 운영해나갈 수 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따라서 고종에게 근대 국민국가 수립의 실패 책임을 묻는 것은 가능하나, 전적으로 그에게만 몰아가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p 111



그런 의미에서 난 저자와 달리 고종에게 모든 죄를 묻고 싶다. 엄밀히 그는 한 나라의 왕이었고, 좋은 정치를 위해 인재를 뽑아 관료를 적재적소에 배치해야할 의무가 있다. 측근들이 부패하다면 물갈이를 해서라도, 바른 정치를 펼쳤어야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근대 국민국가 수립 실패 책임을 묻는 것을 떠나서, 그는 앞서 나라를 환란으로 몰았던, 백성들을 죽음앞으로 내몰았던 선조와 인조, 그 두 왕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전 왕조인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될 당시 분명 나라의 기본은 ‘백성’이었을텐데 말이다. 조선왕조 5백년간 정말 백성을 위해 온 힘을 다했던 왕은 얼마나 있었을까?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위하여


역사교과서 왜곡이 단순히 역사교육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우선 한국 정부가 곧 발표될 일본의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 시급히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또다시 안이하게 대처하다가 뒤늦게 여론에 밀려 강경 대응을 하고서는 슬그머니 후퇴하는 일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p150



이러한 한일문제의 본질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데서 기인합니다. 일본 극우세력은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국에 패배한 것일뿐, 식민지배에 대해 반성할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식민지에 시혜를 베푼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역사교과서의 왜곡을 자행하고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고 군사 대국화를 지향하는 여러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은 바로 그 같은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p 152


얼마전에 이런 뉴스를 들었다. 일본 국정교과서에서 ‘종군위안부’ 명칭을 그냥 ‘위안부’로, ‘강제징용’은 그냥 ‘징용’으로 바꾸었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그저 ‘유감’을 표명했을 뿐이다. 일본에서 유네스코로 지정된 군함도도 그렇다. 일본이 군함도 역사를 왜곡하는 것도 그저 ‘유감’으로 대처할 뿐이다.



저자는 몇년 전 ‘또다시 안이하게 대처하다가 뒤늦게 여론에 밀려 강경 대응을 하고서는 슬그머니 후퇴하는 일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했는데, 결국 또 반복되었다. 우리정부는 언제나 유감으로만 무장할뿐, 이렇다할 대응이 없다. 오히려 민간에서 나서서 대응을 하고 있다. 이를 보면 임진왜란 당시 도망간 선조와 들고 일어난 의병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중국이나 미국등에게는 ‘일본의 전쟁범죄’라는 표현이 적절하겠지만 식민지배를 당했던 우리에게는 맞지 않는 표현이라는 점을 확인해 둡니다. 참고로 일본 정부는 중국과 미국에 대해서는 전쟁의 패배자로서, 전쟁의 책임을 인정했고 전범재판을 받았으며 공식적으로 사과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와 강제 동원에 대해서는 사과를 한 적이 없습니다. p 155



“한일관계 갈등의 책임은 한국에 있다”는 로버트 샤피로 전 미국 사무부 차관의 발언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일본의 전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스스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미국인들을 통해서 자신들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게 함으로써 미국 내의 여론을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방향으로 돌리려는 것입니다. 마치 과거 1904년 제 1차 한일협약의 결과, 미국인 스티븐슨을 외교고문으로 채용하게 한 것과 같은 수법입니다. 고문을 독식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고 나아가 미국도 일본을 지지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한 것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가해자가 오히려 피해자를 나무라는 적반하장이 계속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대통령과 정부는 어떤 대책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p 156



일본이 꾸준히 역사를 왜곡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그중 몇가지를 꼽자면 역시나 뒤에 있는 미국형님들이 아닐까. 그나마 트럼프 정부때는 트럼프가 일본을 꾸준히 무시해서 조금 통괘한면도 있었으나, 다시 일본에 우호적인 바이든이 집권했고 말이다. 바이든 집권 후 우리정부는 트럼프때와는 달리 일본과 우호관계를 도모하고자 하는 모습도 보이는게 사실이다. 미국의 은근한 압박도 있고 말이다. 



물론 외교를 위해서라도 인접국가인 일본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이렇게 역사왜곡 급행열차를 타고 가는 일본을 상대하면서, 변함이 없는 정부의 모습을 보면 참 뭐라고해야할까. 한일협정을 맺어서 모든 배상의 기회를 날린 박정희 전 대통령만을 욕하기엔, 그 이후의 대한민국 전 대통령들이 잘한게 뭐가 있나 싶다. 결국 저자의 말처럼 계속 같은 모습이 반복되고 있으니 말이다.



일본은 역사왜곡을 위해 미국을 비롯한 여러 서양국가에 많은 돈을 뿌려가며, 자신들을 위한 외국학자들을 키워내고 있다. 한국에 있는 극우세력도 동일하다. 역사왜곡을 위해 온갖 정성을 들여가며, 타국에 있는 학자들의 입을 빌려서 역사왜곡을 기정사실화하고자 한다. 이는 일본이 끊임없이 역사왜곡을 하는 동력이며, 우리가 일본의 역사왜곡에 힘을 못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쯤되면 역사왜곡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이 바뀌어도 진작에 바뀌었야했는데, 지금까지도 그저 ‘유감’으로만 대처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정말 ‘유감’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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