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만색 역사공작단 - '역알못'부터 '역덕'까지, 만인을 위한 고퀄리티 한국사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 미디어팀 지음 / 서해문집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역사교양서적 또는 전문서적을 고를 땐, 생각없이 아무 출판사의 책을 보진 않는다. 어떤 출판사는 정말 알아야 할 역사적 사실을 알기 쉽게 알려주는 곳도 있는 반면, 또 어떤 출판사는 역사를 왜곡한 글을 서스름없이 출판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관련 책을 고를 때는, 다른 장르의 책들보다도 더 엄격한 눈(!!)으로 선택한다. 하지만!! 몇몇 출판사의 역사책은 진짜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바로 사들고 온다. 서해출판에서 출간된 책 역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구입하는 책 중 하나다. 믿고보는 출판사중 한 곳이랄까?




그래서 이번에 읽은 「만인만색역사공작단」도 서해출판에서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내용도 확인안하고 바로 구매했더랬다. 책을 받고 나서 벽돌만한 두께에 압도되었다는 건 나중 이야기.



정말 엄청난 두께에 압도되어서 바로 읽지는 못하다가, 이제사 한 장 한 장 읽기 시작했는데, 헐!!!! 이건 더 두꺼웠어야 했던 책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 책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다보니, 이 책을 집필한 사람이 한 명이 아니라는 사실에 놀랐고, 이 책이 실은 팟캐스트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에 두번 놀랐다. 팟캐스트나 유튜브랑은 별로 친하지 않은 나에게는 좀 생소한 뭐... 그런 너낌적인 너낌이랄까? 거기다 내가 제대로 알지 못한 사실이 참 많았다는 사실에 세번 놀랐고, 지금까지 난 무엇을 공부했는가 하는 자괴감까지..흐엉뮤.뮤..ㅠ



각설하고! 이 책의 내용은 정말 방대하다. 고대부터 근대까지,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실상은 제대로 모르는, 학교에서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던 내용들이 눈 앞에 펼쳐진다. 특히나 각각의 내용은 모두 해당 분야에 대한 전공자가 썼다는 것. 그렇게 많은 양의 내용을 담다보니 책이 벽돌만한 두께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아니 근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페이지가 훌쩍 넘어가는 것이, 책이 더 두꺼웠어도 되지 않았을까싶고. 2권도 나오면 어떨까 싶고. 이정도로 전문적인 내용들이면, 팟캐스트도 들을만한 매체인건가 싶고. 뭐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 책은 내 맘에 쏙 들었다는 이야기!



정말 책의 모든 내용을 다 옮겨적고 싶은게 내 마음이지만, 이런 책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독자의 1인으로써, 절대 그러면 안되니..ㅋㅋㅋㅋㅋ


내 주요 관심분야인 고대부분에 대한 내용만 옮겨와 이야기해볼까 한다. 



아 근데, 진짜 이렇게 역사를 보는 관점을 뒤집어주고, 기존에 통용되던 사실이 실제는 허구라는 점을 파고드는 이런 책은 정말 많이 읽혀야 하는데...




교과서와 상식 너머 이야기, 가야


분명 존재했던 고대국가이지만, 동시대에 존재했던 다른 국가들에 비해 존재감이 낮은 나라 가야. 낮은 존재감으로 인해 학교에서조차도, 가야에 대해 가르치는 부분은 정말 한정되어 있다. 수로왕이라던가, 아유타국에서 온 허왕옥, 철의 나라, 중앙집권국가로 변하지 못해 결국은 백제와 신라에 흡수된 연맹국가 가야. 더 나아가서 신라에 흡수된 금관가야 왕실의 후손이 김유신(구형왕의 증손)이라는 것. 진짜 딱 여기까지다.


역사교과서를 펴보면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에 비해 가야에 대한 내용은 아주 적고, 그나마도 시험에 잘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밀려나 잊히고 있다. 이렇게 보면 가야란 나라가 겪는 설움은 잊힌 나라의 그것, 다시 말해 또 다른 망국의 설움일지도 모른다. p 019



여기서 내가 아는 가야를 조금 더 보탠다면, 일본 규슈지역 곳곳에는 가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들의 흔적이 꽤 많이 남아있다거나, 가야의 공주가 일본 야마타이국의 히미코 여왕일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다거나 뭐 그런 정도랄까? 하지만 가야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도, 관련된 내용이 별로 없어서 알래야 알 수 없는 나라이다. 


이런 와중에 여러 가야 연맹이 있었던 지역들이, 서로 나서서 관광유치 명목으로 ‘ㅇㅇ가야’를 들먹이기 시작했는데, 정말 놀랍게도, 각 도시들이 말하는 ‘ㅇㅇ가야’를 세어보면, 그동안 배워왔던 6가야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난 언제가 떠날 <가야역사여행>을 위해, 가야연맹이 있었던 지역들 및 고분군들을 아주 대략적으로 조사해봤는데, 와. 가야가 6개가 아니라니.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는거지? 싶었다.


6가야 연맹설이 흘러간 옛이야기가 돼버린 이유는 그 학설이 가지는 여러 가지 모순 때문이었다. 애초에 <본조사략>의 내용은 고려의 태조가 5가야의 이름을 고쳤다는 것이므로 설령 6가야 연맹설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대가야국이 맹주이던 시기 6가야 연맹의 모습을 알려주는 것이 될 수 없었다. 또한 <삼국유사>에만 등장하는 소가야는 지금의 경남 고성에 있었고 <본조사략>에만 등장하는 비화가야는 지금의 경남 창녕에 있으므로, 두 가야는 다른 나라였다. 그렇다면 이 기록들에 등장하는 가야난 6가야가 아니라 7가야가 된다. p 025



날 충격에 빠트린 6가야의 실체는, 결국 7가야였다. 아니 근데, 암만 7가야라고 하더라도, 뭐랄까? 내가 생각하던 남해안에 위치한 가야와는 사뭇 다른 위치에 있는 가야들까지 나오니 이거 참,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대체 어찌된 일인가 싶었다.


알다시피 신라 말에는 궁예와 견훤이 각각 고구려와 백제의 부활을 선언하는 등 반 신라적인 관념이 한반도 전체를 휩쓸었다. 자연스럽게 옛 가야 지역에서도 신라에서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을 것이고 이 지방의 유력자들은 스스로를 옛 가야의 후예라고 말하며 자신의 근거지를 ‘ㅇㅇ가야’라고 부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어쩌면 고구려나 백제와는 별다른 연고를 찾을 수 없었던 지방의 유력자들이 신라 말 고려 초의 혼란기에 그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자리매김하기 위해 ‘가야’라는 역사 속의 이름을 소환했을지도 모르겠다. p 027


왜 생뚱맞은 지역까지 ‘ㅇㅇ가야’라는 이름을 쓰는가!에 대한 내 궁금증을 아주 시원하게 날려주는 대목이었다. 후고구려를 표방한 궁예나, 후백제를 표방한 견훤만 봐도 쉽게 추론할 수 있었는데. 사람의 편견이라는게 이렇게나 무섭다. 가야는 그저 백제와 신라 사이에 낑겨있는 연맹국가라고만 생각했던 편견, 그 편견이 내 시야를 막고 있었던 거다.



궁예나 견훤이 그러했듯, 다른 지역에서도 ‘ㅇㅇ가야’의 후예라며 들고 일어났을 거라는 가능성을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 시대는 정말 전국에서 내노라하는 영웅들이 들고 일어났는 시기였는데 말이다. 이럴때 보면 난 참, 남의 나라 전국시대 명장들은 하나하나 기억하면서, 왜 우리나라 전국시대 명장들에게는 소홀했는지. 하, 반성!



앞서 확인한 6가야 가운데 금관가야와 대가야를 제외한 다른 가야의 이름을 가야금 12곡의 나라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이 흥미로운데, 실제로 가야 지역에는 6가야 말고도 수많은 나라가 백제도 아니면서 신라도 아닌 작은 나라로서 자국의 정체성을 지키며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대표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김해와 고령의 가아였으므로, 그 나라들과 그들이 존재했던 지역이 가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을 것이라는 추정을 해본다. p 035


가야금 12곡이 가야 연맹체를 나타낸다고 했던 내용을 어딘가에서 읽었던 기억이 있었는데, 때 마침 이 책에서 그 내용이 나왔다. 그럼 결국 가야연맹은 6가야도 아니고, 7가야도 아니고, 우리가 모르는 ‘ㅇㅇ가야’ 소국들까지 포함하면 진짜 12가야가 있었던 것일까? 생각해보면 백제와 신라는 처음부터 중앙집권 국가가 아니었다. 우리가 아는 백제는 마한의 여러 소국에서 시작했고, 신라도 진한의 여러 소국에서 시작했다. 가야연맹체 역시 변한의 여러 소국들이 모여서 시작된걸테고. 아, 그러고보니 변한은 12개의 소국가가 있었는데, 가야금 12곡과 변한의 12국가. 음..? 가야도 진짜 12개인걸까?


정말!!!! 왜 가야에 대한 기록은 이렇게나 없는 것인가..ㅜㅜ


<삼국사기>에 기록돼 전해지는 가야 관련 기록들은 가야를 멸망시키고 지배층을 받아들인 신라의 입장에서 정리된 것이다. 이 때문에 이 사료에는 가야 여러 나라의 이름이 거의 전하지 않고 단지 가야라는 하나의 집단이 신라와 경쟁하다가 패배해 흡수된 것처럼 적혀있다. 그것도 가야사의 파편에 불과한 적은 분량이다. 가야 관련 기록은 오히려 <일본서기>에 더 풍부하게 남아있다. 따라서 문헌기록을 통해 가야사를 공부하려면 <일본서기>를 반드시 이용해야 한다. <일본서기>에 가야사 관련 기록이 많은 까닭은 그 역사서의 편찬에 이른바 ‘백제3서’가 한반도 관련 주요 자료로 이용됐기 때문이다. ‘백제3서’란 백제가 멸망한 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유민들에 의해 만들어져서 제출됐다고 상각되는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를 말한다. p 040


결국 가야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백제의 역사처럼 국내가 아닌,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를 참고해야한다는 사실이 참 슬플따름이다. <일본서기>에 대한 요약, 정리된 책은 몇번 읽어봤지만, 아무래도 완역본이 아니다보니. 완역본을 사야되나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심지어 내 관심사가 ‘한일관계사’라는 점에서, 더더욱 <일본서기> 완역본에 대한 간절함이....! 아니, 근데 또 생각해보면 완역본이 시중에 나와있어서 주문만 하면 되는데, 난 대체 뭘 망설이고 있는 것인지. 다 읽을 자신이 없어서 구매를 망설이는 걸까. 대체 뭐지..허허.


가야는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를 갖추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안’한 것일 수도 있다. p 042


지금까지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 낑겨서, 힘을 쓰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화합이 안되서 중앙집권국가로 나아가지 못했기때문에, 결국 힘쎈 국가에 흡수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편견이었다. 정말 말 그대로 가야는 중앙집권국가에 대한 필요성을 못느껴서, 연맹국가로 남아있었을 거란 생각을 왜 못했을까? 신라가 삼국통일 후 한반도 북쪽의 국경을 대동강 이남으로 한 것도, 어디까지나 대동강 이북 땅에 대한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말이다. 



편견에 치우치지 않는 관점의 다각화, 발상의 전환. 말만 하지말고 실천을 좀 해야지. 일해라 뇌야!!!




역적인가 영웅인가, 시대의 문제아 연개소문


내가 학교에서 연개소문을 배울땐, 분명 대당 강경파로 배웠다. 심지어 KBS 사극에서 나왔던 연개소문도 대당 강경파였던걸로 기억한다. 거기다 자기 상관이었던 고구려 왕까지 시해하고, 권력을 붙잡은 사람. 나에게 연개소문은 딱 그랬다. 왕까지 죽여가며 쥔 권력을 국내에서도 휘둘렀지만, 어디까지나 선을 과하게 넘지 않았고, 대당 정책에 있어서는 언제나 강하게 나갔던 뭐 그런 인물로 기억한다. 심지어는 한반도 일제강점기 때 구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던 사람이이고 했다.


연개소문을 대당 강경론자라고 간단히 규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연개소문은 집권 이후 수차례 당에 외교적 유화책을 시도했다. 굳이 당과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구상은 서쪽으로는 당과의 관계를 현상 유지하는 대신 남쪽 신라 전선에서 성과를 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것이었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신라가 이미 당과 긴밀하게 연계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구려의 신라 공격은 그 자체로 당이 군사 개입을 할 수 있는 명분이 됐다. 당태종이 연개소문을 천인공노할 역적으로 규졍하며 전쟁을 시작한 이상, 연개소문은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대당 강경론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시대의 상황이 연개소문에게 대당 강경론자로서의 역할을 강요한 것이다. p 063


그런데....! 연개소문은 대당 강경파가 아니었다는, 뒷통수 제대로 후려치는 이야기T_T. 아니 생각해보면 그렇다. 자기의 왕을 죽이고 권력을 잡은 연개소문 입장에서는, 최대한 당의 심기를 거스리지 않는게 중요했을 것이다. 고려를 없애고 조선을 세웠던 이성계도, 반정을 일으켰던 인조도 전부 자기네들이 앞선 왕을 끌어내리고, 왕이 된 명분을 이해시키기 위해 명나라, 청나라에 각각 사신을 보내는데 주력했으니 말이다. 왕을 죽이고 이제 막 권력을 잡은 연개소문 입장에서는 자기 권력을 안정화시켜야하고, 그러려면  굳이 당을 자극하면서까지 전쟁을 초래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실제로 연개소문은 당태종에게 도교 수입을 요청하며, 도사를 보내달라고 하는 등의 대당 유화정책까지 펼치기도 했고. 와. 다시 한번 학교에서 배웠던 역사의 편견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인가 싶다.



남생은 급히 고구려 옛 수도인 국내성으로 달아나 세를 규합했다. 그러니 이미 중앙 권력을 장악한 동생들에게 맞서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신변 안전을 고민하던 남생은 결국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당나라에 망명하고 말았다. p 069


연개소문 사후 연개소문의 자식들이 서로 분열하여, 고구려 멸망 급행열차를 탔다는 건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다. 특히 장남이었던 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하여, 몸소 고구려를 물리치는 선봉장으로 나서기도 했고. 아니 근데! 이 안에도 스토리가 있었다. 연개소문은 살아생전부터 후계자를 장남 연남생을 지목했로, 연남생은 차근차근 후계자 수업을 받았으며, 연개소문 사후에는 아비의 뒤를 이었다. 연남생의 동생들도, 당연히 자기 형이 아비의 후계자라고 생각했고, 잘 따랐던것 같다. 그럼 대체 왜 연남생 3형제가 갈라졌는가? 이유는 이간질을 하던 간신들이었다.



연남생 3형제 사이를 이간질하던 간신들이 있었고, 서로간의 믿음이 있었던 3형제지만, 의심이 한번 시작되니, 그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국 동생들이 형을 치게되는 상황, 연남생의 당나라 망명은 나름대로의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이 배경을 보니 문득 떠오르는 상황이 있었다.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한것처럼, 백제도 나다연합군에게 멸망했는데, 백제의 멸망과정에는 신라의 이간질이 있었다. 정확히는 백제 내부를 혼란에 빠트릴 사람, 백제 내부에서 이간질을 할 사람, 신라는 그런 사람들을 백제로 보냈었다.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 해동증자라는 명칭에 호까지 의자(義慈)라고 붙었던 백제의 마지막왕. 그가 훗날 폭군의 대명사가 된 것도 어디까지나 신라 사람들 손에 의해서였다. 백제가 멸망한 이유는 의자왕때문이라는 명분을 만들기 위한, 오로지 승자 신라의 기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백제 멸망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신라의 이간책이 있었다. 



당시 신라는 백제 의자왕의 2충(성충, 윤충)을 제거하기 위해 간자들을 여럿 보낸다. 뿐만 아니라 의자왕의 눈을 가릴 여자도 백제로 보낸다. 뭐, 여자에 눈이 먼 의자왕도 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렇든 저렇든 신라의 이간책에 백제가 넘어갔다. 대망의 백제 멸망 당일, 아주 갑작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백제 장군 예식진이 의자왕을 나포하여, 성문을 열고 당나라로 투항한 것이다. 예식진이 신라쪽(혹은 당) 이간책에 넘어간 사람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뭐. 고구려 멸망 전 연남생 형제의 난 배경이나, 백제 멸망 전 히스토리가 겹쳐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백두산정계비 대소동, 그리고 간도의 정체는?


학교에서 배운 내용중, 이 책을 읽으며 제일 뒤통수가 얼얼했던 부분이 바로 간도였다. 나에겐 독도가 우리땅인 것 처럼, 간도도 당연히 우리땅이었는데 일본의 간도협약으로 빼앗긴 땅이라 생각했으니까.



뭐.. 생각해보면 예전에 대마도도 우리땅이라 생각했는데, 조선전기 관리할 여력이 없다는 이유로 한반도 땅에 대마도를 편입시키지 않은 게, 다름아닌 조선 정부라는 사실을 알고서 이렇게 뒤통수가 얼얼했었다. 그런데 믿고 있던 간도 땅마저, 아니 이건 우리땅이 아니란걸 떠나서, 일본이 독도가 지네 땅이라고 외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에 뒤통수가 아프다 못해 없어진 기분. 하..


중국이 ‘우리 땅’인 백두산을 ‘중국 땅’으로 빼앗아 가려 한다는 개념은 애초부터 성립할 수 없다. 백두산 전체 면적의 4분의 3 정도 그리고 백두산 천지의 절반 정도는 원래부터 중국 영토이기 때문이다. 백두산은 지리적으로 어느 한 나라에만 속한 산이 아니라, 중국과 북한 영토에 걸쳐있는 산이다. (생략) 지리산은 행정구역상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전라북도에 걸쳐 있는 산이다. 지리산을 경상남도만의 산이라거나 전라남도 혹은 전라북도만의 산이라는 식으로 개념화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백두산 역시 마찬가지다. p 080



앞서 <산해경>의 불함산이 숙신씨의 땅에 있다고 한 기록, <신당서>의 태백산이 속말말갈이 사는 곳이라 한 기록을 살펴봤는데, 그 기록에 등장하는 숙신과 말갈이 바로 여진족의 전신이다. 백두산은 여진족이 대대로 살던 곳이었고, 그들에게는 신성한 장소이자 숭배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연원을 감안한다면 중국 측에서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르고 표기하는 것을 역사 왜곡이라 문제 삼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다. 백두산과 장백산 모두 충분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지명이며, 어느 한쪽이 우위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 p 085



나는 당연히 백두산은 우리 땅이고, 중국이 우리 땅을 빼앗아 가는거라 생각했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뭐만 뜨면 죄다 지네나라꺼라고 우기니까, 백두산 같이 민족의 영산이라 생각하는 건 더더욱 뺴앗아 가는거라고. 진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중국이 백두산을 ‘장백산’이라고 부르는 것도 참 마음에 안들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와, 내 뒤통수 누가좀....치료해줘요. 너무 아파 죽겠네...



심지어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백두산이라는 표현보다 ‘장백산’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더 많았다. 애초에 장백산도 백두산의 또다른 이름이었는데. 왜 우리는 그렇게 그 이름을 혐오했나.



1711년(숙종37) 양국 국경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청의 강희제는 관리를 파견해 해당 사건의 실상을 조사하도록 명하는 한편, 이 참에 양국 국경선에 대해서도 정확히 파악해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p 087



백두산정계비와 관련해 지금까지 논란이 되는 부분은 “서쪽은 압록이 되고 동쪽은 토문이 된다”라는 구절이다. 서쪽으로 압록강이 국경선이 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지만, ‘동쪽 토문강’의실체가 문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토문강이 송화강 지류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는 간도 영유권 문제와도 밀접하게 관련돼 있는데, 백두산정계비에서 언급하는 ‘토문’이 송화강 지류가 돼야만 그 남쪽 지역에 해당하는 간도 전역이 우리나라 영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숙종실록> 내용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이 주장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조선에서는 시종일관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생각한 것이 분명하며, 이 입장을 관철하는 것을 목표로 청과의 정계작업에 임했다. p 097



백두산정계비와 청과의 국경선 문제는 19세기 말에 이르러 다시 불거졌다. 청은 자신들의 발상지인 만주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봉금령을 내려 오랫동안 이 곳에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다가 1880년 무렵 봉금령을 해제했는데, 이때 만주의 행정체제를 정비하던 청 정부는 여진족이 오랫동안 땅을 비워놓고 있는 사이에 수많은 조선 사람이 두만강을 건너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때 조선인이 정착해 살고 있던 곳이 바로 간도라고 부르는 지역이다. p 098



두 나라의 국경선이 압록강-두만강이라는 것까지는 합의가 됐지만, 국경의 기준이 되는 두만강 상류의 지류가 무엇인지를 두고 논란이 발생했다. (조선) 이중하는 두만강 상류의 주요한 세 지류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홍토수가 기준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고, 청 측은 가장 남쪽에 위치한 홍단수를 기준으로 하자고 했다. 하지만 홍단수 북쪽 지역에는 이미 100여 년간 살고 있던 조선인의 거주지가 존재했다. 결국 청 측은 홍토수와 홍단수 사이 중간에 위치한 석을수로 안을 바꾸었다. 하지만 이중하의 입장은 강경했다. p 100


조선 숙종 시절, 그 유명한 백두산정계비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청나라와 국경문제를 협의하는 과정을 보면 더 충격이다. 지금 우리가 줄창 주장하는 ‘토문강’이 송화강 지류라는 내용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 지류인 토문강’이 국경 기준이 돼야 한다는 주장은 <숙종실록>등 당대 조선의 여러 자료를 보더라도 명확히 사실이 아니다. 1887년 제2차 조,중 감계회담 단계에서 조선측도 이미 포기한 주장이었다. p 104


그러니까 우리는, 현재 우리의 잣대로, 간도 땅을 우리 땅이라 하기 위해 ‘땅내놔라!’하고 도적질을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니 진짜, 이러면 정말 독도를 탐내는 일본과 다른게 하나도 없잖아? 



이 후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바뀌며, 1903년 대한제국은 이범윤을 간도 관리사로 파견하는 등 간도 지역에 대한 실력 행사와 행정통제를 시도했다. (중략) 초기에는 일본도 대한제국의 기존 주장을 수용해 청나라와 대립했다. 하지만 1909년 결국 일본은 청과 간도협약을 맺으며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푸순 탄광 채굴권을 확보하는 대가로 간도 영유권에 대한 청 측 추장을 모두 수용하기로 했다. p 101


한마디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지멋대로 간도협약을 맺어 간도땅을 청에게 준것이므로, 일제강점기에 맺은 이 협약은 그 자체가 무효이며, 따라서 간도땅은 우리땅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간도에 간도관리사를 파견한 것부터가, 조선정부가 남의 땅을 내 땅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 밖에 안되니까. 아 또 속에서 천불이.....



일본을 상대로 할때마다 언제나 우리나라가 피해국가였다보니, 무슨 일만 있으면 다 우리가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한게 문제였나보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를 상대로 가해국에 위치해 있는 경우가 꽤 있는데 말이다. 필리핀의 코피노 문제라던가,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라던가. 이쯤에서 떠오르는 한 단어, 내로남불. 휴.........



백두산정계비는 천지에서 동남쪽으로 4킬로미터가량 떨어진 산 중턱에 세워졌기 때문에 이에 따르면 천지는 무조건 중국 영토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중국이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여 천지를 절반이나 양보한 것이다. 이처럼 중국이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여 천지를 절반이나 양보한 것이다. 이처럼 중국 측이 기존에 확보하고 있던 영토를 크게 내어준 조약이었기 때문에 당시 중국 내부에서도 협상 대표였던 저우언라이 총리가 북한에 지나치게 양보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p 103



게다가 1960년대 북한과 중국 사이에 맺어진 국경 조약은 양국의 특수한 동지적 관계를 바탕으로 북한에 유리한 형태로 체결되었다는 점을 이해해야한다. p 105


분명 난 중국을 싫어한다. 오히려 ‘착한 짱*는 죽은 짱*뿐’ 이라는 말을 믿는 사람 중 하나다. 언제나 주변국에 민폐만 끼치고, 그 주변국을 야금야금 집어삼키려고 하는 나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백두산은 우리나라 산, 간도 땅도 우리나라 땅 이라고 우기기엔 너무 일본스러운 느낌이 되어버린 이 상황. 에잇, 이럴 줄 알았으면 이 부분은 읽지나 말껄. 이제 더이상 간도는 우리(만의) 땅, 백두산도 우리(만의) 산이라는 말을 내뱉을 수 없게 되었다.




흉노의 왼팔을 잘라라! 첫 왕조의 마지막 순간


이 책을 읽을때마다 자꾸 학교에서 배웠던 지식들이 하나씩 제거되는 느낌이 드는건 왤까T-T. 이번엔 고조선이다.


요컨데 ‘고조선’은 본래 <삼국유사>에서 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섰던 말로, 이성계의 조선과 구분하기 이전부터 사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조선사를 세 시기로 나누어 이해하는 <제왕운기>의 관점이 현재 우리의 고조선 인식의 출발점이 됐다. 현재는 세 조선을 모두 합쳐서 고조선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삼국유사>의 관점에 따라 고조선과 위만조선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후자의 입장이 우세한 경향을 보인다. p 185


당시 내가 학교에서 배웠던 ‘고조선’의 명칭은, 태조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옛 고(古)’짜를 붙여서 고조선이라 부른다는 거였다. 당시에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등에 대해선 배웠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뭐 언젠가 배웠으니 이 세 조선에 대한 내용도 내 머릿속에 있는 거겠지? 뭐 여튼. 태조 이성계의 조선과 구분하기 위한, ‘고조선’이라면, 그 용어의 사용은 조선시대부터 사용되어야 하는게 맞는데, 실상은 고려 때 쓴 <삼국유사>에서부터 사용한 용어였다. 고로 태조 이성계의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말 자체가 허구!!!!!! 아 진짜 나한테 왜이러는거야 ㅠㅠ



뭐 기자조선, 기자동래설이야 현재는 허용되지 않는 내용, 한나라 이후 후대 사람들에게 덧붙여진 허구라는 것은 알고 있던 내용이라 다행이랄까.


고조선은 스스로 남긴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기:조선열전>과 같은 이웃 국가의 옛 기록을 참고할 수 밖에 업사. 물론 <사기:조선열전>은 그 구체성과 당대성이라는 점에서 신뢰도는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사료를 독해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사기:조선열전>이 위만조선 이전의 역사보다 위만조선의 멸망 과정을 구체적으로 전달하는 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는 점을 눈치채야한다. p 187



한나라의 위만조선 침략 이유였던 ‘외신 의무 불이행’이란 명분은 껍데기였고, 알맹이는 사실 한나라 건국 초기부터 너무 견디기 버거웠던 흉노와, 그 흉노의 동쪽에서 서역에 준하는 영향력을 발휘한 위만조선의 관계를 끊기 위한 것이었다. 그저 양자가 밀접한 것만으로도 한나라는 대단히 신경쓰였을 텐데 앞서 살펴봤듯, 위만조선은 진번을 비롯한 주변국들을 복속시켜 규모도 커지고, 한나라에서 도망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인구까지 늘려 나가며 무서운 속도로 국세를 키우고 있으니, 앞서 진무라는 사람이 언급했듯, 얼른 먼저 제압해서 후환을 남기지 말아야 할 존재로 인식했을 것이다.  p 201


고조선(위만조선)이 한나라에 멸망했다는, 아주 간단한 부분만 알고 있었을 뿐, <사기>에 어떻게 기록되어있는지는 1도 관심이 없었던 나를 반성한다. <사기>는 분명 당대의 기록물이자, 당시 상황을 추론할 수 있는 역사서지만, 어디까지나 한나라의 입장에서, 한나라의 시선에서 작성된 기록물이라는 점을 명확히 인지해야한다. 고로 <사기>에 쓰여있는 고조선(위만조선)의 침략행위는, 어디까지나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이유를 합리화시키는 내용인 것이다. 예컨데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후, 백제 의자왕을 폭군으로 비하했던 것 처럼.


차츰 조선의 내부에서 투항 세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결국 조선의 왕 우거를 죽이고 한나라에 투항해버렸다. 그런데 조선의 왕이 살해된 다음인데도 수도는 함락되지 않았고, 우거의 신하였던 성기가 다시 맹렬히 한나라를 공격하는 등 마지막까지 있는 힘을 다해 싸웠고, 이에 한나라는 마지막 방책으로, 투항한 조선인들을 회유해 장군 성기를 죽이도록 시켰다. 마지막 전사 성기가 죽음으로써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이 끝나게 됐고, 바로 이것이 첫 왕조의 마지막 순간이 됐다. p 203



한반도 역사상 첫 왕조, 고조선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보니 새삼 씁쓸하다. 그저 ‘한나라에 멸망했다’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그 내용을 찬찬히 뜯어보고나니, 결국 한나라의 손아귀에 놀아난 꼴이아닌가. 내부에서 치고박고 싸우는 것도 마음에 안들지만, 외부의 이간책에 휘말려 자국을 흔드는 꼬라지도 참 마음에 들지가 않는다. 근데 참 슬프게도, 외부의 이간책에 휘말려 망한 나라가 많다는 것.


아니 근데, 난 한무제 드라마도 봤는데... 왜 동시대였던 고조선에 대해선 1도 생각이 없었을까. 하 이래서 무지가 죄인가. 아니, 무지가 죄일리가 없다. 알려주는 사람이 없는데, 알수 없는게 당연한거니까. 죄는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는 게 죄라고나 할까. 후, 반성..




정말 모처럼만에 아주 제대로된 역사교양서를 읽어서, 이런 책은 널리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니 그나저나, 요즘 학교에선 국사시간에 어떤 내용을 가르칠까? 좀 궁금하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