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역사 1 - 소인배와 대인들 땅의 역사 1
박종인 지음 / 상상출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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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 기자님의 『땅의 역사』, 딱 2년만이다.




우리 집에는 책이 워낙 많다. 읽은 책도 많고, 아직 못 읽은 책도 많다. 이쯤되면 나는 ‘독서’를 좋아해서 책을 사는게 아니라, 책을 ‘모으는’ 행위를 좋아해서 책을 사는 느낌이랄까? 아니 뭐, 어느쪽이든 결과적으로 난 사놓은 책을 읽게 되니, 좋은게 좋은거겠지만. 여튼! 책을 자주 사서 읽어야 할 새 책들이 많다. 그러다보니 뭐랄까? 한번 읽은 책은 다시 안읽고, 새로운 책을 계속 읽게 되는 독서루틴이 생겨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준으로 정말 좋은 책은 다시 읽기도 하는데, 그게 바로 박종인 기자님의 『땅의 역사』다.




이 책은 사실 기자님이 조선일보에서 연재중인 기사 「땅의 역사」이기도 하고, TV조선에서 방영하는 「땅의 역사」이기도 하다. 




2년 전 나는 tv조선에서 방영하는 「땅의 역사」를 통해 박종인 기자님을 알게되었고, 본방/재방/삼방까지 보는 열렬한 시청자가 되었다. 방송이 종영된 뒤에는 출간된 이 책 『땅의 역사』를 읽으며 기자님의 팬이 되었고, 기자님이 쓴 책들을 모조리 섭렵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일보에서 매주 한 편씩 올라오는 연재되는 기사 「땅의 역사」도 읽기 시작했다(연재기사는 지금도 ing). 



물론 나는 이 책을  처음 읽기 전까지 기자님이 「땅의 역사」를 기사로 연재하고 있는지 1도 몰랐었다.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생각을 한다. 기자님이 연재하는 기사 「땅의 역사」를  ‘조금 더 빨리 알았더라면 좋았을껄’ 하는(「땅의역사」 연재기사를 안본 사람 없게 해쥬세욥).



조선일보라는 신문사 자체에 혐오감을 가진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나역시도 그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종인 기자님의 기사만큼은 많은 이들이 혐오하는 그런 기사들과는 백프로 다르다. 단언할 수 있다.




이 책은 내가 생각하던, 역사를 어떻게 바라봐야하는지에 대한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얼마전 회사 동료에게 이 책을 빌려준 적이 있다. 그 동료는 우리나라 역사에도 꽤나 관심이 있으신 분이었기에, 이 책도 흥미롭게 읽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왠걸? 사분의 일도 읽지 못한채 나에게 책을 돌려주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읽으면 읽을 수록 열불이 터져서 읽을 수가 없다고. 그도 그럴 것이, 『땅의 역사』 1권의 주제는 “소인배와 대인배”였다. 



나라를 망하게 하고, 그럼에도 잘먹고 잘 산 소인배. 반면에 나라를 살리기 위해 모든 걸 희생했지만, 돌아오는 건 죽음뿐이었던 대인배. 읽으면 읽을 수록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어찌 열불이 안날 수 있겠는가. 나라 판 놈은 죽을때까지 잘살고, 나라를 지킨 사람은 나라 판놈같은 나쁜놈들에게 죽고. 나 역시도 읽을 때마다 답답하고 분통이 터지고, 때론 눈물이 찔끔나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아무리 화가나는 역사라도 우리의 역사이며, 잊지말아야 할 역사이다. 



《시경》에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해서


후에 환란이 없도록 조심한다’라는 말이 있으니,


이야말로《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이다.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 서문이다. 우리가 빛나는 역사가 아닌, 이토록 분통이 터지고 아픈 역사를 왜 기억해야하고, 알아야만 하는지 바로 그 이유다.




임진왜란에서 대승을 거둔 이순신 장군, 빛나는 역사다. 이순신 장군이 바다에서 왜군을 물리치는 전투는 거의 모두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명 배워야하고, 잊지말아야하는 빛나는 역사가 맞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단편적인 역사일 뿐이다. 임진왜란을 통틀어보면, 열불이 나도 이렇게 열불나는 역사가 없다. 일본에 다녀온 서인 황윤길과 동인 김성일이 선조에게 서로 다른 보고를 해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아니 그렇지 않다. 이미 그전부터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거라는 이야기가 조선에 파다했다. 하다못해 당시 바다건너 또다른 섬나라 류큐에서조차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국의 왕이라는 자가 보고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었다.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자 나라를 버렸다. 그 뿐인가? 자신이 버린 나라를 지키려는 의병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자신이 버린 나라를 지키려는 이순신 장군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 모든게 분명히 기록된 역사임에도, 우리는 이런 내용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였다. 혹시나 열성적인 국사선생님을 만나 배웠다고 하더라도, 그저 스쳐지나가는 내용이었을 뿐이다. 우리에게 임진왜란은 한반도를 유린한 일본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빛나는 이순신 장군의 역사, 왕이 버린 나라를 지킨 의병장들의 역사였다.



다음 날 광해군이 공식 왕세자로 지명됐다. 그리고 선조가 선언했다. “마땅히 도망가지 않고 경들과 더불어 목숨을 바치겠노라” 다음 날 새벽 어영대장 윤두수가 끄는 가마를 타고 선조는 대궐을 떠났다. 다음날 선조 일행은 널문리(판문리)에서 점심을 먹고 평양으로 향했다. p 046



쇄환사를 통해 귀국한 피로인은 1607년 1400여 명, 1617년 321명, 1624년 146명이다. 합쳐서 사명당이 데려온 3000명에 못미친다. 돌아가면 천민으로 천대받거나, 북쪽 국경으로 가서 군역을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10만 피로인 대부분이 귀국을 거부했다. 비겁한 군주가, 명분에 집착해, 하늘이어야 할 민(民)을 짚신짝 취급한 탓이다. p 051



그래서 류성룡이 쓴  『징비록(懲毖錄)』이 중요하다. 이 책은 당대에 임진/정유재란을 겪은 사람이, 그 시대를 직접 기록한 책이다. 본인이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일을 기록한 책이기에 생동감마저 있는 책이다. 하지만 너무 생동감있어서, 그만큼 징비록을 읽으면 읽을수록 정말 고구마를 오백만개 먹은 기분이 들 정도로 답답하고 분통이 터진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정치를 하는 작자들이 얼마나 썩어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적군이 쳐들어왔는데, 대적하기는 커녕 계속 도망가고, 도망가고, 심지어 왕까지 도망가는 난리통이 그려진다. 일본을 상대로 첫 승을 거두었던 장군을, 참형시키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조선이 일본을 상대로 얼마나 빌빌거렸는지, 조선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최악이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책을 쓴 류성룡 조차도, 당시 조선 정부에서 정치를 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책을 집필하였다. 따지고 보면 이 책은 류성룡 본인을 비롯하여, 당대 집권자들의 치부를 들추는 것인데 말이다. 『징비록(懲毖錄)』이 제 치부를 들추는 일이라는 것을 류성룡이 몰랐을리가 없다. 



류성룡은 본인을 비롯한 위정자들의 잘못을 알았기에, 미래의 후손들이 이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징비록을 저술한 것이다. 잘못된 역사일 수록 끊임없이 배우고, 또 배워서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이라는 나라는 제 치부를 들추는 이 징비록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여 읽히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을 유린했던 일본에서 징비록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징비하지 못했던 조선은 결국 잘못된 역사를 수차례 반복한다. 그리고 그 반복되는 시간동안 고통을 겪었던 건 지금 우리와 같은 서민들, 백성이었다.



청은 조선의 실상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청 태종이 소역을 통해 이렇게 전했다. “내가 큰길로 곧장 한양으로 향해도 산성에서 나를 막을 것인가? 너희들의 붓대로 우리 군대를 물리칠 것인가?” 군사력 열세를 빤히 알고 있는 군부는 화전을 주장했고 대명의라는 명분을 내세운 문신들은 전쟁을 주장했다. 목소리 큰 문신 세력이 승리했다. p  064



5월 26일 인조가 교서를 내렸다. “우리 국토가 수천 리인데 어찌 움츠리고만 있을 것인가.” 6월 17일 또 내렸다. “우리는 명의 동쪽 신하국으로, 명이 땅을 잃었다고 다른 마음을 품지 않으리라.” p 073



설날이 되었다. 인조는 명나라 수도 북경을 향해 예를 올렸다. 망궐례라고 한다. 망궐례 격식을 두고 관료들끼리 난상토론을 벌인 뒤 임금과 세자 부자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청 태종은 산성 동쪽 벌봉에서 대포를 겨누고 누런우산 아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p 075



1592년~1598년까지 지독하디 지독한 임진/정유년 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1627년에 정묘호란이 터졌고 뒤이어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일본과 전쟁이 끝난 지 고작 30년만에 청나라와 전쟁이 시작했다. 정말 슬프게도 이 전쟁 역시 징비하지 못한 조선의 위정자들의 잘못이 컸다. 일본과의 전쟁이 끝난지 고작 30년 흘렀을 뿐인데, 다를게 하나 없었다. 전이나, 후나 조선의 위정자들은 머리속에는 자신들의 안위만 있었다. 물론 나라를 지키기 위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보통 이런 사람들은 힘(권력)이 없었다.



진령군과 이유인은 왕과 왕비에게 ‘금강산 일만 이천 봉에 쌀 한섬과 돈 10냥씩 바치면 나라가 평안하다’고 계시를 내렸다. 왕(고종)은 그리 시행하였다. p 093



민영휘는 당장 서울에 와 있던 청나라 장수 원세개를 찾아가 원병을 청했다. 그리고 궁궐에 들어가 고종에게 “원세개가 허락했으니 청나라 군사를 부르시라”고 청했다. 고종은 “여러 대신들 논의 역시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마땅하니, 청관조회의 발송을 재촉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p 100



그로부터 이백여년이 지났다. 역시나 조선의 위정자들은 징비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때보다도 더욱 썩어들어갔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시한폭탄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다시 한번, 이번에는 7년이 아닌 35년이라는 길고 긴 세월동안 일본에게 유린당했다.



이렇게 아픈 역사를 반복한 대한민국이, 어째서 무엇때문에 아직까지도 빛나는 역사만 고집하는 걸까? 



징비하지 못하여 한반도는 오랜시간 고통받았다. 일제강점기 이후 미군정과 격동의 근현대사를 지나오면서도 똑같았다. 징비하지 않았기에 해방 이후에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았다. 징비하지 않았기에 친일경찰들이 독립운동가를 붙잡아 빨갱이 딱지를 붙여가며 고문을 하는 모순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모순은 눈에 비치는 상황만 조금 달라졌을 뿐, 지금까지도 반복되고 있다.



징비하지 못했던 조선과 지금의 대한민국. 왕정에서 공화정이 된 것 말고는 달라진 점이 무엇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위정자들은 징비는 커녕 제 뱃속 챙기기에 급급하고, 매번 알맹이 없는 정책만 꺼내놓기 바쁘다. 여야할꺼없이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그렇다. ‘이 사람만큼은 조금 다를거야’라는 생각을 하며 내 한 표 행사하게 한 정치인들 조차도 똑같았다. 조선이 징비하지 못하여 백성에게 그 아픔을 떠넘겼듯이, 대한민국 정치인들도 징비하지 못하여 국민들에게 그 아픔을 떠넘긴다. 물론 이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이쯤되면 박열을 비롯한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아나키즘을 따라갔는지, 이해가 된다. 심지어 공감하게된다.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것은 결국 징비하지 못한 정치인들이며, 징비하지 못하여 그들의 잘못을 눈감은 우리들의 잘못이기도 하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먼저 징비해야, 정치인들의 그릇됨을 지적할 수 있으며, 바른길로 가도록 명령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그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국민이다.



그렇기에 난 박종인 기자님이 쓴 책 『땅의 역사』(동명의 연재기사 포함)가 널리 읽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야말로 현대판 징비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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