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내게 낡은 일기장을 내미셨다. 처음보는 일기장이었다. 한번 읽어 보라고 주신 그 속에는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할머니의 젊은 시절이 담겨 있었다. 첫 아이를 낳은 젊은 엄마의 모습이었다. 일기 속 두 분의 중국 생활에는 국사 교과서에서 본 낯익은 이름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그분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동지였고, 이웃이었고, 가족이었다.

나는 읽기를 읽으며 그분들의 이야기를, 대가족 식솔처럼 의로애락을 함께했던 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의 삶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었다.

일기 속에 담겨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임시정부 요인분들의 생생한 삶의 이야기가 내 인생을 참 많이 바꿔 놓았다. 다음 세대를 위해 본인들의 삶을 희생했던 그분들의 삶이 참 가슴에 와닿앗다. 오늘을 살면서도 오늘이 아닌 내일을 생각하고 이를 위해 행동하는 비전에 감탄했다. 나는 일기를 읽으며 그분들의 이야기를, 대가족 식솔처럼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임시 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의 삶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었다. 그때 그곳에서 내일을 알 수 없는 삶 속에서 함께 희망을 만들며 살아 나간 그분들의 삶의 이야기를 출판하기로 했다. - P11

1938년 7월 4일, 중국 호남성 장사.

내 조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나는 내 딸을 가슴에 안았다. ‘상해’에서 시작된 임시정부는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점차 정세가 중국에 불리해지자 중국 정부가 자리하던 남경 근처의 ‘진강’으로, 얼마 후 다시 지금의 ‘장사’로 자리를 옮겼다. (중략) 아기의 이름은 ‘제시’라고 지었다. 집안의 돌림자가 ‘제’자인데 ‘제시’라는 이름이 생각났다. 영어 이름이다. 조국을 떠나 중국에서 태어난 아기. 그 아이가 자랐을 때는 우리나라가 세계 속에 당당하게 제 몫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아기 또한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 사이에서 능력있는 한국인으로 활약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지었다. 세상에 나온 걸 축하한다. 우리 제시! - P34

1938년 7월 22일, 광동성 광주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몰리고 있다 (중략) 제시가 태어났던 ‘장사’. 이른 새벽잠에서 아직 깨지 않은 ‘장사’를 뒤로하고, 모든 임정 식구들은 중국 대륙 동남쪽에 위치한 광동성 광주행 월한철로 전차를 탔다. (중략) 그렇게 기차를 타고 가던 중에는 갑작스런 일본기의 공습도 만났다. 공습이 오자 기차가 멈추었고, 사람들은 기차에서 내려와 주변의 수풀 속에 숨어 적기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 P37

1938년 10월 11일, 광동성 불산

철 없는 제시지만, 백일맞이라 해서 그런지 경쾌한 태도로 아주 기분 좋게 잘 놀고 있다. 그런 제시의 기분과 달리 바깥의 분위기는 스산하다. 매일 아침마다 포탄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고 있다. 적이 가까이 다가온 모양이었다. 오후엔 일본군이 광동, 담수 등의 지방에 상륙하여 물밀 듯 쳐들어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불산 거리에는 짐을 옮기는 황황한 모습이 보이고 있다. - P44

1938년 12월 5일, 유주

아침 열 시쯤 되어 공습경보가 났다. (중략) 후에 안 소식으로 우리가 피신했던 5호 동굴 좌우 쪽, 기타 여러 동굴이 폭탄 투하로 매몰되어 버렸단다. 그곳에 사람이 가득 차 있지 않았던들 우리는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1938년 12월 5일, 이날의 왜놈의 잔인한 행동은 인류 역사가 생긴 후, 세계 처음으로 꼽히는 참사였다고 한다. 동굴이 오히려 위험하다고 산 주위 숲속, 나무 밑에 은신하고 있던 피난민들은 왜놈의 저공비행으로 기관총을 난사당하여 거의 다 죽었다고 한다. 민간인들을 그렇게도 많이, 의도적으로 죽였던 일본의 잔혹한 행동은 훗날 역사가들에 의해 평가되리라. - P57

1939년 2월 8일, 유주

제시의 부모로서의 역할이 차츰 익숙해지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마치 거울이 되는 것과 같다. 자식들의 모습을 미추는 거울, 부모를 통해 아이들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거울이 깨지면 그 속에 비춰진 모습도 흉하게 일그러진다. 아이들은 거울을 통해 자신에 대해 눈뜨게 된다.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현재의 모습을 확인하고 미래를 그려본다. 이제 나는 한 아이의 거울이 되어 그 아이의 참 모습을 보여주고, 또 깨닫게 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 P65

1940년 1월 29일, 사천성 기강

갈수록 제시는 사람들의 세상살이를 따라하며 배워가고 있다. 그건 좋은 일이기도 하고, 나쁜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취하는 행동들이 제시에겐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두려워진다. 혹 내가 취하는 행동에 모자람이 있지는 않은지. 주변 사람들의 모습에서 못난 모습이 눈에 뜨이는 건 아닌지. - P104

1941년 1월 4일, 사천성 중경

이제 이 아이가 세상에서 가지고 싶어하는 것은 얼마나 많아질까? 생후 세 돌이 못 된 아이에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욕심이 생겨난다. 내 것이란 이름으로 가지고 싶은 마음. 사물이나 사람이나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고 함께 보고 나눌 수는 없는 것인가. 세상의 갈등과 괴로움을 단지 소유욕으로 단정 지을 만큼 간단한 일은 아니겠지만, 오늘 우리가 갖는 많은 절망과 어둠이 욕심에서 비롯되는게 아닌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 P148

1942년 6월 1일, 사천성 중경

마마는 제시의 교육 문제로 걱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혼자 몸으로 살림을 하시느라 아직 제시의 공부에 적극적으로 착수를 못하셨다. 때로 창가나 가르치고 가정 교육에 그치고 있다. 둘째 제니는 아직 서서 걸어다닐 생각은 않는 양으로 앉아서 놀고 있지만, 눈치와 말귀는 장족의 진보를 하고 있다. 제니는 침착하며 퍽 능한 편이다. - P186

1942년 8월 4일, 사천성 중경

한 배속에서 난 아이들의 아래위가 서로 다른 성격과 모습을 보여주듯이, 한 아이는 여리고 상냥하고 잘 챙겨주는 모습을, 또 한 아니는 자기 고집이 세고 직선적이며 도전적인 모습을. 두 아이가 어울려 만나는 이 세상은 틀림없이 다른 모습일 것이다. 같은 강줄기에 우리가 만나는 일기가 다르듯이 부모가 지켜보게 될 두 아이의 세상살이 또한 다른 모습일 수 밖에. - P190

1943년 3월 22일, 사천성 중경

저녁 식사 후, 저 멀리 산보를 몇 시간 하고 돌아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두 어린애들은 오래간만에 나가 다니매 좋다고 한다. 어떻게 가버렸는 지 모르게 가 버린 인생의 푸르른 시간들이다. 심한 역경 속에서도 천진하게 자라고 있는 이 어린애들이 어른들에게는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다시금 느낀다. 우리의 결합이 만들어낸 결실이다.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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