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독서 - 개인주의자 문유석의 유쾌한 책 읽기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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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북클릭 도서를 고르던 중, 눈에 딱 띄던 책 「쾌락독서」. 


연이어 무거운 책만 읽다보니, 가벼운 에세이를 읽고 싶었던 시기였다. ‘독서’가 무엇인지, 내가 왜 책을 읽는지에 대해 생각하던 때였다. 세상 최적의 타이밍이랄까?



나는 읽을 책이 떨어지면 불안 초조해져서 집 구석구석을 뒤진 끝에 전혀 관심도 없는 불교책, 한자투성이 옛날 책, 심지어 요리백과사전까지 읽었다. 재래식 화장실에 앉아서는 벽에 붙어 나풀거리는 찢어진 신문지의 광고와 부고까지 읽었다. 말 그대로 활자중독이었다. p 027




어려서부터 워낙 책을 자주 읽었기에, 나는 내가 책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면서 관광지에 세워진 안내판이나, 혹은 동영상 광고를 보면서 새삼 깨닫게 된 사실이 있었으니, “아, 나는 텍스트 읽는 행위를 좋아하는구나!” 였다. 유적지 앞에 세워진 안내판이나, 박물관에 쓰여진 안내문 등은 정말 한 글자도 빼먹지 않고 다 읽는다. 반면에 동영상으로 만들어진 안내영상은, 정말 이상하게도 눈에 안들어온다. 진득히 보려고 하다가도 그냥 일어나서, 텍스트로 쓰여진 안내문을 다시 읽는다고나 할까?



정말 처음엔 ‘난 책을 좋아하는구나!’ 싶었는데, 뭐랄까 나에게 느낀 묘한 배신감. 거기다 책에 대한 호불호도 이렇게 극명한지 몰랐었기에, 나에게 2차 배신감. 텍스트를 읽는 행위 자체는 엄청 좋아하는데, 그게 이 텍스트를 읽는 것에도 장르에 대한 어마무시한 편식이라니! 하, 대체 이런 편식하는 습관은 왜 만들어졌나..ㅠㅠㅠ



늘 읽을 책을 찾아 헤매던 어린 시절과 달리 요즘은 책이 너무 많아서 외려 읽을 책이 없는 아이러니에 빠질 때가 많다. 아직 못 본 책들도 무수한데 매일 신간이 쏟아져 나온다. 상 받았다는 책은 왜 이리 많으며, 여기 저기서 추천하는 책은 또 왜이리 많은지. 베스트셀러 코너에 꽂혀 있다해서 꼭 재미있는 것도 아니고, 유명한 사람이 썼다고 꼭 볼만한 것도 아니더라. ‘내 취향의 책’을 찾는 노하우가 필요한 시대이다. p 052



장르 편식은 ‘책’을 고르는 데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지금이야 에세이, 경영서, 여행서 할 것 없이 나름 두루두루 읽는 편이지만, 진짜 한 3년전만해도 오로지 ‘역사’(아 물론 만화책 빼고^^ㅋㅋ). 진짜 책장 꽂혀있는 책들이라곤 죄다 역사역사역사역사. 그나마 다행인건 역사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는 크게 편식을 하지 않는점이랄까? 역사도 세계사, 한국사, 동양사 장르가 다양하고, 여기서도 고대, 중세, 근대 시대별로 또 다양하고, 관점에 따라 여성사, 독립사, 전쟁사 등등등 막 카테고리가 어마무시하게 나뉘는데 말이다. 난 그냥 역사라면 다 좋았나봐. 오죽하면 그 어린나이에 배경지식도 별로 없으면서 대중서적이 아닌, 전문서적까지 사서 읽고 있었으니. 진짜 내 취향이 왜 이런식으로 굳어졌나,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봤었는데. 그 이유도 역시 책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초등학교를 다니던 그 시절, 한창 판타지 소설에 빠져있던 그 시절. 우연히 책방에서 집은 책 한권이 내 취향을 이렇게 바꿔놨다. 그 이름하야 이우혁님의 『퇴마록』. 하 진심 퇴마록은 지금봐도 이런 대작은 다시는 없을 것 같달까? 처음 국내편을 볼때만해도 그저 그런 판타지 소설 중 하나인 줄 알았는데. 연이어 이어지는 세계편, 혼세편, 말세편을 보며 그 세계관과, 정말 왠만큼 공부하지 않고서는 감히 써먹지 못할 각종 옛 이야기. 정말 그저그런 판타지 소설과 만화책을 전전하던 나에게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문을 열어줬달까? (또래친구들 죄다 해리포터 읽을 때, 나 혼자 퇴마록..)



정말 아쉬운 점 하나는, 그때는 너무 어려서 당시 고가(..)의 책을 살만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 머리가 조금 크고 나서야 퇴마록 국내판, 세계판을 샀더니 왠걸, 이후에는 절판되서 사지도 못하고. 정말 그때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언제였나, 회사에서 항상 똑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퇴마록이 애장판으로 발간됬다는 소식이 솔솔 들려왔고. 퇴마록을 처음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른, 이미 재정상태 넉넉한 나는야 직★장★인★. 애장판 발간되자마자 전 권 구매! 하 정말 오백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느낌적인 느낌. 내 취향을 송두리 째 바꾼 『퇴마록』은, 평생 함께할 소중한 동료랄까. 



뭐지, 이 삼천포로 빠진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은? 뭐 여튼, 퇴마록으로 인해, 어린날 내 취향은 ‘옛것’에 빠졌고, 그게 갈고 닦여 어느새 ‘역사’라는 범주안에 안착. 그렇게 지금의 독서취향이............크흡. 여튼 퇴마록 만세!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새삼 깨닫기도 했다. 고전문학 전집을 뒤적이다가 『춘향전』 원본을 발견하여 무심코 펼쳐보았는데, 손에 신기라도 있었는지 하필이면 펼친 곳이 ‘도련님 춘향 옷을 벗기려 할 제 넘놀면서 어룬다’ ‘흐르릉 흐르릉 아응 어루는 듯’.


워후, 국교과서에 ‘절개’ 및 ‘탐관오리 징벌’ 중심으로 후반부 일부만 발췌되어 실린 『춘향전』은 그 진가의 십분의 일도 담지 못한 것이었다! p 046



저자처럼 나 역시도 ‘어려서 읽은 고전과, 다커서 읽은 고전은 다르다’ 라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힐 때가 있었는데 말이다. 이거 참 뭐래햐아하나?



역시나 퇴마록을 접한 이후의 어린시절, 만화로 읽는 「구운몽」, 「박씨전」, 「사씨남정기」, 「인형왕후전」, 「장희빈」 이런 고전을 참 많이 읽었는데, 하나같이 권선징악같은 교훈적인 내용이었다(구운몽 제외ㅋㅋ). 심지어 중/고등학교 때 국어(문학) 교과서에서 다시 접한 고전들은, 와 당대 역사적 사건과 점목해서 알려주는게 아닌가. 박씨전는 병자호란, 사씨남정기는 인현왕후과 장희빈 이야기. 뭐 이런식으로. 정말 그때만해도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나라는 나쁜놈, 인현왕후를 괴롭힌 장희빈은 나쁜년이라고 배웠는데. 



다 커서 다시 읽은 고전은, 나에게 그 의미가 너무 달라졌다. 일단... 야해(!!!!). 뭐 성인용이니 그럴수 있다치고. 두번째는 어린이용 고전이 말하는, 학교 교과서에서 말하는 권선징악적 내용도 다시한번 비틀어봐야한다는 점이랄까?



예컨데 지금의 난 박씨전을 보면 이런 생각을 한다.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나라가 물론 나쁘긴 하지만 과연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인조에게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병자호란 이후에 청으로 끌려갔다가 겨우 돌아온 수많은 여성들을 ‘환향녀’로 몰아세운 조선의 선비들이나, 그에 대해 눈 감은 인조는 죄가 없다고 할수 있는가? 청나라를 이기기 위해 내실을 다져야 하는데, 그 내실을 다지기 위해 청나라의 문물을 가지고 온 소현세자를, 그리고 강빈을 인조는 어떻게 했는가?.... 를 비롯해서 수많은 물음표들이 떠다닌다.



사씨남정기나 인형왕후전, 장희빈을 보면 또 이런 생각이 든다. 결국 이 모든건 승자의 기록이 아닌가? 인현왕후를 등에업은 사람들은 서인이며, 이 서인이 나중에 노론으로 갈라지고, 이렇든 저렇든 결국 조선이 망할때까지 계속 권력을 쥔 자들이 아닌가? 인현왕후나 장희빈을 오가며 저울질 한건, 당시 왕이었던 숙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환국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부수적인 일이지 않나? 왜 모든 화살은 장희빈이 맞아야하나? 결국 장희빈이 폐서인되지않고, 희빈으로써 그 생을 다했다는 건, 큰 죄가 없었다는 건데 말이다.



이런 우리나라 고전 뿐만 아니다. 서양 명작인 세익스피어 희극/비극도 그렇고 어렸을 때 읽은 책은, 커서 다시 한번 읽어봐야한다. 그럼 그 때와는 다른, 한층 다른 시각으로 고전을 씹고 뜯고 맛볼 수 있으니까! 



그에 비하면 요즘의 소설들은 ‘이야기의 힘’ 자체보다는 다른 요소들에만 힘을 기울이는 것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때로는 작가가 독자를 이야기로 끌어들이려 하기보다 한사코 밀어내려 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생경한 관념어와 뚝뚝 끊어지는 구조, 현란하기만 하고 피로감이 이는 미문 집착, 작가내면 독백의 과잉, 모호한 결말, 그리고 말미에는 평론가의 격찬. ‘일기는 일기장에 쓰세요……’ 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작품들이 있다. p 118



우와, 최근 몇년간 읽은 소설 중에 정말 별로였던 책들이 있었는데! 문유석판사님 마음 is 내마음!! 소설을 읽으면 정작 알맹이는 없고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문장을 꾸미기에만 급급한 그런 소설들. 이해가 안되는 독백, 거기다 정말 이게 결말이야? 싶은 소설들. 솔직히 말하면 그런 소설, 아니 소설이라고도 말하기 싫은 그런 ‘글’들이 책으로 출간된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심지어 그런 글들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비단 소설만의 문제가 아니다. 간혹 저자나 출판사 확인을 하지 않은 채, 책 제목에만 이끌려 읽는 역사서도 있는데. 저런 문제는 이런 역사서에서도 종종 나온다. 아니, 역사서라고 부르기엔 너무 쓰레기 같은, 종이를 만들게 해준 나무에게 미안한 ‘것’들이랄까. 



단순하다면 단순한 이유들로 하루키의 책을 즐겁게 읽어왔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묘한 찝찝함이 남아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루키의 작품 세계를 낱낱이 분석하며 이건 무엇무엇의 상징이고, 여기서 여기로 들어가는 것은 무얼 의미하고 등등을 남나 빼고 다들 알고 있는 것처럼 으스대며 설명하는 책들이 계속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도 세계 곳곳에서. ‘정말 남나 빼고 다들 잘 이해하고 있는 거였어?’ 하는 불안함이랄까. p 144



정말 작품 분석, 작품 해설도 나에겐 정말 이해 못하는 것중 하나다. 진짜 흥미롭게 소설 한권을 다 읽고 나서, 유명 평론가들의 이야기나 그런걸 찾아 읽으면. 오히려 머리속에 물음표 투성이. 난 몰랐는데 이 단락은 이런의미고, 저 단락은 이걸 상징한단다. 정말 상상치도 못한 반전? 이건 뭐랄까, 고등학교 문학시간에, 옛 고전을 펼쳐놓고 밑줄 쫙 그으며 이건 이런 의미를 담고 있고, 저건 저런 의미를 담고 있으며 블라블라블라 @#$^&^%~(^*(~~.


완전 이런느낌이. 나만 책을 아무생각 없이 읽는건가 싶기도 하고.



그랬는데..! 예전에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님이 그랬다.


우리나라는 답을 찾게 한다. 

문학이라는 건 자기만의 답을 찾기 위해 보는 것이지, 

작가가 숨겨놓은 주제를 찾는 보물찾기가 아니다.

작가는 그런 것 숨겨 놓지도 않는다. 

'찾아봐라' 하고 주제를 숨겨놓고 독자와 게임하지 않는다.

독자가 다양한 감정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다양한 감수성을 개발하는데 문학 작품이 쓰여야 하는데

답 맞히는 쪽으로 가면 안 된다

-김영하



덕분에 내가 책을 잘못 읽는 건 아니구나, 싶었다. 문득 들었던 생각이, 우리가 말하는 고전을 쓴 사람들이, 본인들이 쓴 고전에 대해 현대인들이 해석하는 모습을 보면서, 천편일률적으로 고전을 배우는 학생들을 보면서 무슨생각을 할까 싶다.





아, 이 책을 읽은 뒤 내가 느낀 결론은 단 하나. 


“독서는 정답이 없구나! 읽고 싶은데로 읽으면 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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