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책에서 이리 말한다. ‘왜, 어째서, 무엇때문에, 관동대학살의 피해국인 한국정부는 이 일에 대해 언급이 없고 무관심한건가?’. 그래서 한반도에서 황국신민으로 태어났던 그는, 그렇게 일본으로 넘어가 살던 그는, 왜 한국 정부가 관동대지진/관동대학살에 무관심한 지 알고자 이 사건에 대해 연구했고, 수 많은 자료를 모았으며, 이렇게 책을 출간한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이 사건을 연구했던 것과 동일한 이유로, 나는 이 책을 읽었다.



작금의 한국사회를 보자.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른 만행은 정말 많았다. 하지만 일본인 성노예 문제, 강제징용 문제, 사할린 징용 등이 수면 위에 올라 온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군사정권, 독재정권, 친일정권이 일본의 만행을 숨겼고 감췄고 침묵했다. 역대 정권 내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어서, 이러한 일본의 만행을 언급할라치면 참 이상하게도 ‘빨갱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며 짓밟혔다. 정권이 바뀐 지금에서야 이러한 문제 중 일부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하지만 이렇게 수면 위로 올라온 문제 중에 ‘조선인 관동대학살’은 없다. 정말 이상할 정도로 우리는 이 문제에 무관심했다. 피해국인 우리가 무관심하니, 가해국 일본은 어떻겠나.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일본은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후 큰 재난이 있을 때마다, 그 공포와 두려움을 옆나라, 우리를 향한 공격심으로 바꾸었다. 애초에 일본은 그렇게 생각하는게 당연하게 생각되는 사회였다. 큰 재난이 없을 경우에는 꼭 북조선, 즉 북한을 헤드라인으로 다루었다. 무슨 일이 있든, 없든 그랬다. 일본 국민들은 그런 나라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게 정말 당연한 거였다.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도 일본 당국이 지닌 식민지전쟁 의식을 빼놓고서는 이야기 할 수 없다. 실제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권력의 중추에 있었던 관료와 군인은 1918 ~ 1920년 사이의 식민지 전쟁을 수행할 때, 제일 선에 있었던 자가 의외로 많다. 그 현장에서 조선인의 굳건한 항일의식에 공포감을 느꼈던 일본 관헌이 지진으로 권력기구가 마비되었을 때에 과연 무엇을 생각했을까. 일본에 적대 의식을 가진 조선인이 무엇을 할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권력의 와해를 틈타 혹시 그들이 폭동을 일으키거나 않을까 하는 예단으로 선제공격을 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계엄령 발동이었다. 최강의 권력으로 변한 계엄권력 아래에서 관민 일체의 대학살이 감행되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이런 추론을 보증해준다.

내지인과 조선인을 구분하기 어려우므로 말씨가 분명치 않은 자를 조선인이라 하고, 무리를 이룬 피난민을 보고서는 ‘불령선인’ 단체라고 속단했으며, 조선인 노동자가 고용주의 인솔하에 작업장으로 가는 것을 ‘조선인 무리의 습격’ 이라고 잘못 믿어리는 등의 사례가 많았다. 9월 2일 오후 3시경 자경단원이 고마고메 경찰서로 끌고가 폭탄과 독약을 소지한 조선인을 조사해본 겨로가, 폭탄이라고 한 것은 파인애플 깡통이었고 독약이라고 한 것은 사탕이었다. - P108

이처럼 불안에 떠는 일반 시민을 동원한 권력은 어떤 행동요령을 내렸을까? 앞서 살핀 것처럼 경시총감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요시찰인, 사회주의자, 조선인의 책동에 특히 주의하시오, 방화에 주의하시오" 등의 말을 했을 것은 분명하다. 일반 심니이 점점 더 암시에 사로 잡혀갈 때, 이런 종류의 예단이 실제로 원인 불명의 화재와 겹쳐 민중을 더욱 흥분시키면서 "방화다!", "불 지르는 것을 보았다!", "조선인이다!"라고 외치게 만들었다. - P113

지침으로 "일부 조선인과 사회주의자 가운데 불온을 꾀하는 자 있으니 저들에게 빈틈을 엿볼 기회를 주지 않도록 시민 여러분은 군대·경찰과 협력하여 충분히 경계토록 할 것이며, 우물에 독을 투입하는 부녀자도 있으니 우물물에 주의할 것" 등의 지령이 있었던 것은 뒤에서 살필 사이타마현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다. "그 당시 ‘조선이니 습격해온다’라는 전단지를 신문사 이름으로 게시했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 P126

일본 국회의원 인 육군소장 쓰노다 고레시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집 부근에서도 매우 소란스러워 문밖으로 나가보았더니 무장한 군대가 있었다. 그리고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적은 지금 하타가야 방면에 나타났다"라고 호령하고 있어 그 장교를 붙들고 "적이란 누구인가"라고 질문했더니 "조선인이다"라고 답했다. 내가 다시 "조선인이 어째서 적인가" 라고 묻자 "상관의 명령일 뿐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했다. - P181

지바가도로 나오자 1,000명 가까이 될 것으로 여겨지는 조선인이 4열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가메이도 경찰서에 일시 수용되어 있던 사람들입니다. 헌병과 군대가 얼마간 붙어 나라시노 방향으로 호송하는 중이었습니다. 물론 걸어서였지만요. 행렬에서 벗어나면 구타하는 등 포로처럼 다루었으며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헌병은 2명, 병사와 순사가 4,5명이 동행했습니다. 그 뒤를 사람들이 우르르 뒤쫓아가면서 ‘우리 원수를 내놔라’ 하며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헌병은) 군중들을 쫓아내고 조선인들을 목욕탕에 넣었지요. …(중략)… 군대와 수사는 뒷일은 알아서 하라는 듯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자, 이제 그 다음에는 베고, 찌르고, 때리고, 차고 … 총은 사용되지 않았지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 P278

장작불 위로 4,5명의 남자들이 조선인의 손과 발을 큰 대(大)자로 움직이지못하도록 잡고서 태웠습니다. 불에 구워버린 것이지요. 불에 타자 피부가 다갈색이 되었습니다. 태워지고 있던 조선인은 비명을 질러댓지만 이미 힘없는 비명이었습니다. 그렇게 살해된 조선인이 차례차례에 개울에 던져졌습니다. - P224

잡힌 조선인 24명을 13명 한 무리와 11명 한 무리로 하여 철사줄로 묶은 후 갈고리로 쳐죽여 바다에 던져넣어버렸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자가 있어서 다시 갈고리로 머리를 찍었는데, 너무 깊이 찍은 나머지 갈고리 몇 개는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또 그 외 3명의 조선인은 3호지에 있는 석탄 코크스 하치장에서 활활 타고 있는 석탄 코크스 불 속에 산채로 한꺼번에 던져넣어 태워 죽였다. - P225

협객이라 자칭하는 쓰키지의 노름꾼 친구가 자경단의 대장이 되어 본격적인 자경단이 생겼다. 해안가나 강가에 조선인이 올라올 테니 살펴보라 해서 토모씨를 따라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쓰키시마 고토바시 주변까지 조선인을 수색하러 가서 돌을 던지고는 만세 만세하며 죽이고 다녔다. 외진곳에는 조선인의 머리 없는 시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 P226

‘일본 제국주의의 민족차별과 전횡의 실상을 알게 되고, 일본 정신사의 한 흐름을 짚을 수 있게 된다면 더 엎는 다행이라 하겠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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