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물처럼 소중하다. 없으면 대지는 메마르고 생명은 사멸한다. ‘지금’과 ‘여기’를 규정하는 존재가 역사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시간이 흐른다. 그 시간 속에 기억이 추억이 되고, 추억은 역사가 된다. 역세는 세상을 규정한다. 나는, 역사다.
1555년 5월 21일, 비변사가 명종에게 보고했다. "왜인 평장친이 가지고 온 총통이 지극히 정교하고 제조한 화약 또한 맹력합니다. 당상의 직을 제수함이 어떻겠습니까?" (중략) 다음달 사간원이 명종에게 "총통을 주조해야 하는데 철재가 없으므로 버려둔 큰 종으로 총통을 주조하게 해 달라"고 건의했다. 그때 남대문과 동대문 문루에는 만들어놓고 설치하지 않은 종이 뒹굴고 있었다. (중략) "이미 철재를 사들이도록 했으므로 윤허하지 않는다." 사간원이 "철재를 시장에서 사들이게 하니 원망과 한탄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해도 듣지 않고 비변사와 홍문관까지 철포 제작허가를 청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그리고 명종은 이렇게 답했다. "어진 장수가 있어 잘 조치한다면 적들이 멋대로 날뛰지는 못할 일이다." (중략) 이에 세 정승이 "조선이 가지고 있는 중화기 천자총통, 지자총통 또한 잡철로는 만들 수 없다"고 거들었다. 명종이 딱 부러지게 답했다. "오래된 물건은 신령스러우니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물건을 부수어서 쓰는 것은 옳지 못하다." 스스로 억지임을 알았는지, 명종은 "이 말은 삭제함이 옳겠다"고 사관에게 일렀다. 사관 또한 어이가 없었는지 ‘삭제함이 옳겠다’는 말까지 실록에 기록해버렸다. - P51
다른 나라 군주 명을 받아 공자와 주자가 일본을 공격해온다면 내가 먼저 나서서 철포를 들고 공자와 주자의 목을 쳐 깨뜨리리라 - P144
1550년 11월 흠경각 수리공사가 있었다. 물을 받는 그릇 하나가 문제였다. 관상감 책임자 이기가 공사를 마치고 명종에게 보고했다. "(이 그릇은) 옛날 성인들이 권계하던 기구이니 언제나 옆에 두고 물을 부으며 살피고 반성하는 것이 좋겠나이다." 명종은 "그리 하겠다"라고 답했다. 때는 7년 전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을 소수서원이라고 사액한 지 8개월 뒤였ㄷ. 물그릇에 빗물이 고이듯, 어느 틈에 실용을 목적으로 만든 기계가 ‘덕목 수행’용으로 변경이 된 것이다. - P83
"조선인은 전 세계에 나라가 12개 뿐이라고 생각한다. 옛 기록에 나라가 8만 4000개라고 적혀 있지만 태양이 한나절 동안 그렇게 많은 나라를 다 비출 수 없기 때문에 지어낸 얘기라고들 했다." - P125
"선왕(중국 요/순 임금)의 옳은 말씀이 아니면 노자, 석가, 제자백가가 모조로 이단이다." - P189
정부에 복귀한 지도자들은 영국에서 취한 산업과 미국에서 취한 언론과 스위스의 교육과 독일의 법률을 그대로 정책에 적용했다. 영국에서는 광업을 배웠다. 산업혁명 기초가 석탄과 철에 있음을 이들은 깨달았다. (중략) 그리고 이들이 찾아낸 서양 근대화의 힘은 교육이었다. 사절단이 정치 및 경제 분야 이외에 관심을 기울인 분야닌 교육 부문이었다. - P265
이홍장이 물었다. "왜 귀국은 서양옷을 입는가."
모리가 대답했다. "옛날 옷은 놀기에 좋았지만 열심히 일하는 데는 절대 맞지 않는다. 우리는 가난하고 싶지 않다. 부자기 되기 위해 옛것을 버리고 새 것을 취했다."
이홍장이 반격했다. "의복 제도는 조상에 대한 존중 표시다. 만세 후대에 이어야 한다."
모리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조상이 살아 있어도 똑같이 했을 것이다. 천 년 전 조상들은 중국 옷이 당시 일본 옷보다 우월해서 중국 옷을 택했다. 남의 나라 장점이 보이면 일본은 어떻게든 배워서 따라한다. 그게 일본의 미풍양속이다." - P287
개방과 교류, 다양성과 대중의 각성. 이 네 가지 단어에 임하는 지도자의 자세가 한 나라 백성을 고난으로 이끌었고 한 나라 백성을 부강한 나라로 이끌었다. 유럽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게 서기 1543년에 벌어진 세가지 사건과 21세기 대한민국을 연결하는 ‘징비’의 열쇠다. - P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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