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저자를 보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고, 쓸데없는 일에 인생을 바친 사람’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야공주의 흔적을 찾기 위한 저자의 답사는 무의미한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히미코 여왕=수로왕의 딸, 가야공주’ 라는 주장이 아직까지 받여들여지는건 아니나, 적어도 야츠시로를 비롯하여 갓파(가랏파), 레이후 신사, 에비야 고원, 선견왕자 이야기, 오레오레 데리이다 축제 등 저자가 가야와 연관이 있을거라고 생각한 그 모든 것들은 현재 가야계 도래인 집단에서 나온 것이라고 추정한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있고 관련 서적도 나오고 있다. 어쩌면 언젠가 저자가 주장한 가설이 타당하다고 받아들여지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고대사는 지금도 수 많은 미스테리에 쌓여있으니까!

서기 187년 일본 규슈 지역을 통치한 가야공주. 그녀의 부왕은 김 수로왕이고 어머니 허왕후는 인도에 본국을 둔 아유타국 공주였다. 어머니의 꽃가마 배가 혼례길에 오른 것은 서기 48년 여름, 두 달 가까운 항해 끝에 마침내 낙동강 어귀에 닻을 내리고 예식을 올림으로써 수로왕의 부인이 되었다.

이들 사이에는 10남 2녀의 자제가 잇엇으며 두 딸 가운데 한 명이 일본에서는 ‘히미코’라는 이름으로 건국신화 속 인물로 전해지고 있는 가야공주로, 서기 103년 거북선을 타고 큐슈로 건너가 가락의 또 다른 나라를 세웠다. 이 여성은 남동생 선견왕자와 함께 일본의 현 큐슈의 야쓰시로시 일대에 ‘야마이’국이라는 일본 최초의 고대왕국을 세운 여왕과 일치한다

일문(日文)으로 적은 문장은 한문을 풀이한 번역이 아니라, 한문의 위치를 그들이 창안한 법칙에 따라 바꾸면서 군데군데 가나를 박아서 읽은 일본식 한문읽기이다. 더 설명할 것 없이 어계가 다르고 구문법이 다른 한족의 글을 여지없이 일본어로 둔갑시켜 읽은 절묘한 기교를 그들 일본인은 긴 세월 끝에 만들어 낸 것이다. P085 (일본식 한문 읽기의 함정) - P85

깡마른 체구에 곧추세운 허리가 유난히 꼿꼿해 보이는 미노다씨는 내가 야쓰시로에 온 내력을 듣더니 작업하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며 자신이 쓴 《야쓰시로시의 역사》라는 책자 두권을 선물로 주었다. 국판 462쪽의 두꺼운 책으로 책장을 넘기니 삽화가 많이 들어 있어 무엇보다 반가웠다.

우선 눈길이 간 것은 ‘최초의 야쓰시로 성’이라는 설명이 붙은 그림이었다. 해발 376m의 핫초야마 북쪽 비탈의 작은 봉우리마다 옛 성터가 표시되어 있는데 묘견궁을 향해 8개의 성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삥 둘러 있었다. 그랬구나, 야쓰시로는 ‘여덟개의 성’ 이었구나! - P110 - P110

여왕의 궁터를 찾는 일은 또 하나의 가설로부터 출발했다. (중략) "아, 고미도상 말인가요? 묘켄님과 함께 온 신이지요." 말하자면 고미도상은 방위를 담당한 신으로서 그는 묘켄을 모셨다는 것이다. 현지에서는 ‘묘켄상’으로 불리는 일본 왕조의 첫 왕 비미호가 거북을 타고 뱀을 앞세워 상륙해서 70여 년간의 정착을 거쳐 신으로 받을리는데 이 묘켄상이 받드는 신, 즉 ‘레이후’님이라는 신을 모신 사당은 일본국 최초의 신사였다. - P128 - P128

‘언렴의 아들 신무(진무)가 즉위하여 다시 텐노로 칭호를 바꾸고 야마토주로 옮겨 다스렸다’ 이는 여왕 비미호 33세 손의 본격적인 일본 열도 개척에 관한 《신당서》의 증언이다. 즉 당시 왕인 진무가 즉위하면서 ‘텐노(천황)’이라 호칭을 바꾸고, 큐슈의 쓰쿠시를 더나 지금은 혼슈라 부르는 대화주로 왕도를 옮긴 사실을 밝히고 있다. 결국 진무는 일본의 역사가 최초로 받드는 천황이 됐다. 또한 그의 등장은 야마이의 시대가 끝이 나고 이른바 야마토 조정의 시작을 의미하며, 이로코 미모토의 칭호는 사라지고 텐노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분명 일본인의 역사다. 이에 한반도에서 태어나 삶의 뿌리를 좇아 해매던 나의 왜국 탐사도 이쯤에서 마감하는 것이 당연한 순리 인줄 안다. -P234 - P23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