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녹은 뒤 충남 아산 현충사, 이순신 장군의 사당에 여러 번 갔었다. 거기에, 장군의 큰 칼이 걸려 있었다. 차가운 칼이었다. 혼자서 하루 종일 장군의 칼을 들여다보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일 뿐이라고, 그 칼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영웅이 아닌 나는 쓸쓸해서 속으로 울었다. 이 가난한 글은 그 칼의 전언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으로 적을 맞으리
이 글은 오로지 소설로서 읽혀지기를 바란다. 이순신의 장계, 임금의 교서, 유시를 인용한 대목들은 대체로 이은상의 『이충무공전서』의 문장을 따랐다. 그러나 글쓴이가 지어낸 대목도 있다. 그 구분을 분명히 하지 못한다. 해전(海戰)의 사실은 대체로 『난중일기』에 따랐으나,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글쓴이가 지어낸 전투도 있다. 그러나 이순신 스타일의 전투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책의 부록으로 첨부한 <인물지>와 <연보>에서 소설과 사실의 차이가 드러나기를 바란다.
한산 통제영 모항으로 돌아오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의금부 도사는 선착장에서 나를 묶었다.
의금부 도사에 따르면, 삼도수군 통제사 이순신의 죄목은 조정을 능멸했고,
임금을 기만했으며, 조정의 기동출격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 P24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 낼 수 없었다.
병신년에 의병장 김덕령이 장살되었을 때 나는 내가 수긍할 수 없는 죽음의 방식을 분명히 알았다.
김덕령은 그렇게 죽었다. 천하가 임금의 잠재적인 적이었다.
곽재우는 거듭된 심문 끝에 겨우 혐의를 벗고 풀려났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의 교서를 받았을 때 나는 김덕령의 죽음과 곽재우의 삶을 생각했다.
나는 김덕령처럼 죽을 수도 없었고 곽재우처럼 살 수도 없었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 P66 ~ 67
이제 서울 백성들 중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을 터이다.
살아남은 백성들이 마땅이 상복을 입고 있어야 하거늘, 상복 입은자를 볼 수 없으니 괴이하다.
난리중에 강상이 무너지고 윤기가 더럽혀진 탓이로되, 내 이를 심히 부끄럽게 여긴다.
서울의 각 부는 엄히 단속하여라 - p193, 선조의 교서
정유년 가을에 나는 타격 방위를 설정할 수 없었다.
조정은 장님처럼 적의 먼 외곽을 더듬고 있었다.
강화 협상의 신기루 속에서 경상 해안 쪽의 점점 더 강력하게 집중하고 있었다.
명의 천자가 일본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밀통해서
내 함대가 아무 곳도 조준할 수 없고 내 칼이 아무것도 벨 수 없게 되는 환영에 나는 진저리를 쳤다 - P260
신하가 몸을 던져 임금을 섬겨야 하는 도리를 저버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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