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The Power
나오미 앨더만 지음, 정지현 옮김 / 민음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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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왓슨이 추천한 도서 「파워(POWER)」. 내 기억속의 엠마 왓슨은 그저 어리고, 똘똘한 헤르미온느였다. 그 헤르미온느가 지금은 여성을 대변하는, 페미니즘의 한 가운데 서 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이상하게 비틀어진 페미니즘이 아니라, 곳곳에 깔려 있는 여성혐오를 없애는 것이다. 엠마 왓슨 역시 후자 쪽에 속한다. 그런 그녀가 추천한 도서라고 하기에, 조금은 솔깃했는데! 좋은 기회가 생겨 이 책을 선물로 받았다.



기존에 내가 읽었던 페미니즘 도서라고는 작가정신에서 출판한 「붕대감기」가 고작이다. 그래서 과연 이 책을 잘 흡수 할 수 있을런지 걱정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읽고 보니 그런 걱정은 저 멀리! 이 책은 광고 문구인 “새로운 물결을 일으킬 페미니스트 SF의 탄생!” 그 자체였다. 일상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던 그런 상황들이 주가 아니라, 정말 정 반대인 허구의 상황이 이 책의 주된 줄거리다. 아, 물론 책 초반부에는 세계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여성혐오에 대한 부분이 보이긴 한다.



책은 네 명의 인간을 앞세워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갑자기 집에 든 강도에 의해 엄마가 살해된 소녀 록시, 그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던 청년 툰데, 갑자기 파워(POWER)가 생긴 딸을 지켜야 하는 엄마 마고, 겉으로는 위탁가정에서 보호받는 것 같으나 실은 학대와 성폭력을 당하던 소녀 앨리. 이 네 사람의 이야기가 서로 맞물리며,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이야기가 진행된다.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제발, 제발 하지 마세요. 제발. 이게 뭐죠? 아직 어린애일 뿐이에요. 어린애일뿐이라고요.” 한 남자가 나지막이 웃음을 터트린다. “내 눈엔 어린애처럼 보이지 않던데.” 엄마가 새된 소리를 낸다. 고장 난 엔진의 금속음 같다. (중략) 엄마의 눈이 커진다. “도망쳐, 록시” P 19, 록시



처음에 툰데는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가 “저리 가세요.”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예사로운 상황이 아님을 깨닫는다. 남자는 그래도 웃으며 한 걸음 다가선다. “너처럼 예쁜 여자는 칭찬을 들어야 마땅해.” (중략) 툰데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영상을 찍으려 한다.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과 똑같은 상황이 여기에서 벌어질 것 같다. 그 사건을 소유하고 싶다 (중략) 남자가 말한다. “야, 피하지 말고, 좀 웃어줘봐” (중략) 툰데가 촬영하고 있을 때 소녀가 홱 돌아선다. 그녀가 팔을 내리치는 순간 휴대폰 화면이 잠깐 흔들린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깔끔하게 찍혔다. 그녀가 화난 척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계속 실실거리는 남자의 팔로 손을 가져가는 장면. (중략) 뒤쪽에서는 소녀가 남자에게 독을 먹였다면서 사람들의 도움을 요청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소녀가 때리면서 독을 주입했다고. P 30, 툰데



조스가 아무런 말도 없자 마고는 계속 이야기한다. “다른 여자애들이…… 세 명이었지? 걔네들이 시작했다는 거 엄마도 알아. 그 남학생은 네 근처에 있었으면 안됐고. 존 뮤어 병원에서 검사받았어. 건 그냥 남자애를 놀라게 한 것 뿐이야.” P 38, 마고



술 냄새가 풍긴다. 그가 분노에 차서 중얼거린다. “봤다. 공동묘지에서 남자애들과 있는 걸 다 봤어. 더러운 창녀 나쁜 계집”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후려갈기고 발로 찬다. 앨리는 몸을 웅크리지 않는다. 그만하라고 애원하지도 않는다. 그래봤자 더 오래가리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는 앨리의 다리를 잡아 벌리고 한 손은 벨트로 가져간다. 앨리가 정말로 창녀라는 점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이미 전에도 여러번 그랬으면서 P 48, 앨리



일단 파워가 발현된 딸을 둔 마고의 이야기는 잠시 제쳐두고, 나머지 세 사람인 ‘록시, 툰데, 앨리’의 이야기는 너무 사실적이라 충격이었다. 뉴스에서 흔히 보이는 그런 사건들이었다. 여성이 있는 집에 들어가서 강간하고 살해, 길거리 한 복판에서 여성을 성희롱하는 남자들과 그걸 무심히 지켜보는 대중, 여성을 성 상품화하여 몰래 동영상을 찍는 남자들, 딸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부모. 정말 인정하기는 싫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일어나고, 세계 곳곳에서도 일어나는 구역질 나는 그런 사건들 말이다. 



이 소설은 분명 허구다. 하지만 뉴스에서 보던 저런 사건들은 분명 사실이다. 이 소설에는 미국, 영국, 사우디 아라비아 등 몇 몇 나라들이 나온다. 상대적으로 미국과 영국에서는 여성혐오가 심하지는 않으나,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여성은 사람이 아니다. 남자에게 종속된 노예이며 물건이다. 분명 허구인 소설인데, 허구같지 않다.



이 소설 속에서는 소녀들에게 갑자기 묘한 파워(POWER)가 생겨난다. 이런 파워가 신기한 소녀들은 비밀리에 조금씩 조금씩 들어내곤 했는데, 위와 같은 여성을 상대로 한 여러 극악한 사건들이 점차 수면위로 올라오면서, 여성들은 들고 일어났다. ‘소녀들의 날’이다. 이 파워란 것이 처음엔 소녀들에게서 먼저 발현되었는데, 소녀들이 성인 여성에게 파워를 각성케 하여 점차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여자라면 전부 파워를 갖게 된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오로지 여성에게만 이 파워가 발현되었다. 



책 속 이야기가 아닌 현실로 돌아와보면, 그 어떤 나라든 아무리 여성에 대한 혐오가 있다고 하더라도 나라별로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도 분명한 여성혐오가 있다. 물론 지금 세상에는 여성혐오만 있는게 아니라, 남성혐오도 있고, 노인혐오도 있고. 그냥 ‘XX혐오’ 라는 게 사회 고질병 마냥 전반적으로 확대된 상황이지만 말이다. 



다시 여성혐오로 돌아가보면, 적어도 우리나라는 그 바탕에 분명 과거, 그 이전부터 내려오던 남존여비 사상이 한몫한 건 확실하다. 조선시대에 작성 된 묘비명이든 족보든 책이든 뭔가를 펼쳐보자. 그 글에는 남성의 이름 세자가 정확하게 적혀있지만, 여성의 이름은 없다. 간혹 누구누구의 처 강씨, 최씨, 이씨 등이라거나 누구누구의 딸 이씨, 김씨, 박씨 이런 식으로만 쓰여있을 뿐이다. 여성은 본인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물론 지금은 다르다. 대신 다른 쪽에서 차별이 생긱기 시작했다. 흔히 말하는 직장에서 여성에게만 있는 유리천장이 그것이다(일부 고귀하다고 하는 태생 제외^^..). 실제로 많은 회사에는 동 직급으로 입사해도 남/녀 사원의 직급체계가 조금 다르기도 하고 말이다. 바로 옆 남직원이 곧 자녀가 생긴다고 하면 주변에서는 축하를 한다. 여직원이 자녀가 생긴다고 하면 다들 축하는 하면서도 업무에 지장이 생길까, 나에게 일이 넘어오지 않을까 걱정한다. 심지어는 그 여직원이 육아휴직을 쓸까봐 걱정하고, 차라리 새로운 사람을 뽑을 수 있도록 퇴사를 하기를 은근히 강요하기도 한다. 정말 씁쓸한 말이지만, 이는 실제로 내가 회사생활을 하면서 내 두 눈으로 목도한 상황이다.



어떤 사람이든 자녀가 태어나는 건 그저 똑같이 축하받아야 할 상황인데, 그 성별에 따라 대우가 바뀐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다들 엄마가 있고, 아내가 있고, 누나가 있고, 여동생이 있는 사람들일텐데 말이다. 내 딸이, 내 누나가 회사에서 저런 대우를 받았다고 고백하면 다들 눈에 불을 키고 ‘요즘 세상에 뭐 그딴 회사가 다 있어!’라고 하는 사람들이, 정작 자기가 몸담고 있는 회사에서는, 그딴 회사의 사람들이 되는거다.



뿐만 아니다. 사내 성희롱도 엄청난 문제다. 지금 세상은 바뀌었다고, 어떤 사람이 그러냐고들 하지만 아직 곪아 터진 곳이 많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버젓이 같은 사무실에 있던 것도 보았다. 가해자를 더 권력이 있는 부서로 배치하는 것도 보았다. 이러한 상황들은 여성혐오를 떠나서,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너무나 당연하다 생각하는 남존여비 사상에 대한 폐해인 것이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사실은, 아주 조금씩이나마 세상이 좋은 쪽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랄까?



예전에도 「붕대감기」 리뷰를 하며 이야기 했지만,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란 다른 게 아니다. 바로 휴머니즘이다. 그저 내가 싫으면 남도 싫다는 사실을 알고, 서로 배려하는 것 말이다.



정말 뜬금없긴 하지만 ... 정말 만약에 현실에서 여성들이 이런 POWER를 가진다면? 이 책 속에서 나온 혼돈이 정말 눈 앞에서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속에 나온 여러 나라에서는 여성이 억압된 정도에 따라 그 나라가 변했다. 아니, 권력 주도층이 남성에서 여성으로만 변했을 뿐 사회는 달라지지 않았다. 미국은 변함없이 여성이 주도하는 군사강국이었다. 군사들도 POWER를 쓰는 여성이며, 클럽이든 어디든 약한 남성을 희롱하는 것도 여성이다. 사우디는 여성이 다스리는 신생 여성민주주의국가가 되었다. 과거 사우디가 여성을 노예로, 물건으로 대했듯 신생 사우디에서는 남성을 노예로, 물건으로 대했다. 성범죄 가해자와 피해자의 성별이 달라졌을 뿐 성범죄는 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건 그저 권력 주도층 단 하나였다. 



굳이 책 속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꽤 가까운 과거만 봐도 알 수 있다. 몇 년 전 한국에선 여성 대통령이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나라를 파탄으로 이끌었고, 끝내 국민 손에 끌어내려졌다. 무엇보다 그녀가 싼 똥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이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남성이 권력자가 되든, 여성이 권력자가 되든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 쯤되면 드는 생각은 여성혐오든 남성혐오든 노인혐오든 권력을 쥔 자들이, 권력이 없는 자들을 선동하기 위해 불씨를 지피는 게 아닐까 싶다. 항상 보면 이런 ‘XX혐오’는 권력을 지닌 계층에서는 일어나지 않고, 그저 우리 같은 일개 힘 없는 시민들 사이에서 일어나니까. 그냥 서로 서로 ‘내가 싫은 건, 남도 싫다’라는 생각만 하고 살아도, 저런 식으로 ‘XX혐오’아래 선동당하는 일도 없고, 서로 온라인에서 미친듯이 싸울 일도 없을텐데 말이다.



어라,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는거 보면, 이 책.... 어쩌면 페미니즘 도서가 아닐지도?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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